소설리스트

대몽주-900화 (900/1,214)
  • 900화. 다사다난

    “거 도우, 잠깐! 뭔가 잊은 거 없소?”

    복 장로가 불러 세우자 거청천은 그를 돌아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제 가져간 막망 장로의 장로 영패를 돌려주셔야 하지 않소?”

    “청호가 갖고 있다.”

    여마마가 말했다.

    “청호는 아직 정양 중이다. 영패는…… 내일 너희가 이기면 내 묵옥천기령까지 함께 주겠다. 물론 그런 번거로운 일이야 일어나지 않겠지만.”

    거청천은 말을 마치고는 복 장로가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수하들을 이끌고 돌아갔다.

    그들이 돌아가고 나자 공방의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졌고, 그들은 일제히 만벽 장로의 공을 치하했다.

    “내가 무슨 공을 세웠다고 그러시오? 이번 일은 심 도우와 그 연로 덕이오.”

    만벽 장로가 모든 공을 심협에게 돌렸다.

    “과찬이십니다. 장로님께서 신들린 듯한 정련 기술로 승리를 거머쥔 것이죠. 연로는 그저 조금의 도움…….”

    거기까지 말한 심협이 우뚝 말을 끊었다. 그의 식해에서 화령자의 항의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내가 아니었으면 저자가 그렇게 빨리, 순조롭게 언갑을 만들었을 것 같으냐? 응? 정말 그리 생각하는 게야?”

    연기에 관한 일이라면 화령자가 얼마나 속이 좁아질 수 있는지 알기에, 심협은 어색한 얼굴로 말을 바꿨다.

    “흠! 물론 이 연로의 도움이 적지는 않았겠지요. 허나 제아무리 뛰어난 연로라도 만벽 장로님이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면 소용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심협은 헛기침하더니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심 도우……. 이 연로, 상당히 좋아 보이던데…….”

    만벽 장로가 갑자기 다가오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허, 제 연로를 노릴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심협이 웃으면서도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내가 어찌 그러겠는가? 그저…… 저 연로가 나와 인연이 꽤 깊어 보여서 말인데…….”

    만벽 장로가 환하게 웃으며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심협은 소요경을 휘둘러 명화연로를 바로 집어넣었다.

    “휴우…… 이러면 내가 섭섭하지. 나는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저 나중에 고급 언갑을 만들 때 한 번만 빌려달라는 뜻이었네.”

    만벽 장로는 그의 행동에 탄식했다.

    “그건 그때 얘기하시죠.”

    심협이 웃으며 말했다.

    “너무 철벽을 치니 섭섭하군그래.”

    그렇게 말하면서도 만벽 장로는 어쩔 수 없이 손사래 칠 수밖에 없었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환하게 웃었다. 모두가 졌다고 생각하던 중에 역전해 동률이 됐으니 이제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오늘 졌다면 세 번째 대결은 열리지도 못할뻔 했다.

    “거청천 무리는 아무래도 작정하고 온 것 같소. 방금 후산의 행동도 절대로 우연이 아니오. 내일 대결도 아마 쉽지 않을 것 같군.”

    “괜찮네. 내일 대결은 내가 직접 나설 것이니 조금만 조심하면 절대 질 일은 없을 거네.”

    복 장로의 걱정에 무명 장로가 나서며 말했다.

    “두 번의 대결을 봤을 때 저들은 규칙대로 움직이지 않을 터이니 반드시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심협이 걱정스러운 듯이 말했다.

    “물론이오. 오늘 밤은 폐관하며 만일을 대비해 언갑을 좀 더 보완해야겠군.”

    “그럼 저들이 삼류 같은 수작을 부리지 못하게 내가 지켜주겠네.”

    “괜찮네. 이곳은 우리 천기성이 아닌가. 그쪽 상황은 쭉 지켜보고 있으니 허튼짓은 못 할 걸세. 만약 저들이 작정하고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면 내일 천기삼관의 승부에 응하지 않으면 그만이네.”

    무명 장로는 이 점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고, 한편으로는 무명 장로의 실력에 대한 믿음도 있었기에 더는 권하지 않았다.

    “자, 오늘 다들 애썼네. 이제 돌아가서 푹 쉬시게나. 특히 자네는 법력 소모가 컸을 테니 잘 정양하고…….”

    무명 장로가 마지막으로 만벽 장로의 팔을 가볍게 치며 말했다.

    “알겠네.”

    만벽 장로가 고개를 끄덕였고, 각자 숙소로 돌아갔다.

    한데 공방에서 나온 언무사는 갑자기 생각이 났는지 바로 심협에게 물었다.

    “심형, 요 며칠 동안 왜 섭 소저를 안 만나는 게요? 쭉 함께 있지 않았소?”

    “채주는 며칠 전에 깨달음을 얻고 수련의 한계를 돌파할 기미가 보여 내가 나오는 날 폐관수련에 들어갔소. 당분간은 언제 나올지 알 수가 없소.”

    심협이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군요!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내게 말하시오.”

    “물론이오. 그럼 먼저 실례하겠소.”

    심협은 언무사에게 공수하고는 돌아갔다.

    * * *

    저녁 무렵이 되자 하늘에는 불타는 듯한 구름이 떠올랐다. 천기성에서 바라보는 그 광경은 마치 성 끝이 핏빛 불꽃으로 타오르는 것처럼 찬란해 수많은 제자의 발걸음을 붙들었다.

    이틀 동안 불청객과 대결을 펼치고 있다는 사실은 모든 제자가 알고 있었지만,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했기에 대부분은 점점 흥미를 잃어갔다. 처음에는 수많은 제자가 몰래 호숫가로 가서 먼발치에서라도 거청천을 비롯해 기관성을 살펴봤지만,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그들을 감시하는 천기성 제자를 제외하고는 발길을 끊었다.

    달이 뜰 무렵, 두 사람이 호숫가 근처에 나타났다.

    감시를 맡은 제자는 그들을 제지하려다가 두 사람이 심협과 섭채주임을 알고는 멈췄다. 그 두 사람은 천기성에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도록 이미 허락이 내려진 상태였던 것이다.

    심협이 오후에 거처에 돌아와보니 섭채주는 이미 나온 후였다.

    화령자가 이전에 섭채주를 살펴보고는 특별한 충관비술(衝關祕術)을 알려줬고, 그녀는 바로 폐관수련에 들어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비술은 아무런 효과를 보이지 않았고, 섭채주의 경지도 여전히 진보가 없었다.

    “며칠 사이에 그런 일이 일어났군요.”

    섭채주는 심협에게서 거청천과 관련된 일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천기성은 요즘 다사다난하구나. 내일이 마지막 대결인데 왠지 모르겠지만 불길해.”

    심협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제가 알기로는 무명 장로님은 장로님들 중 가장 고강한 분이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게다가 그분들 뒤에는 성주님이 있잖아요.”

    “그래, 네 말이 맞다.”

    심협도 조금은 마음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던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몇 걸음을 걸은 뒤, 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걸음을 멈췄고, 눈이 마주치자 환하게 웃었다.

    “왜 웃는 거야?”

    “오라버니는 왜 웃으셨어요?”

    “갑자기 처음 만났던 때가 생각나서…….”

    “그때 마적(馬賊) 때문에 놀랐었는데 오라버니가 또 행인처럼 분장해서 절 속여서 가는 내내 걱정했잖아요.”

    섭채주도 그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심협은 그 말에 더 환하게 웃더니 다시 물었다.

    “누이는 왜 웃었어?”

    “저는 뇌주 태수의 가신과 제 셋째 숙부가 심부(沈府)로 달려가 혼인을 강요했을 때가 떠올라서요. 오라버니는 그분들과 날카롭게 대립했었죠.”

    섭채주가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러고 보니 그때 내가 누이를 지켜줬어야 했는데 나중에는 오히려 내가 도움을 받았지. 어찌나 창피하던지…….”

    “그때나 지금이나 무슨 일이 생겨도 오라버니가 절 영원히 지켜줄 거라고 믿어요.”

    지금 섭채주는 한 여인으로서 설렘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이지.”

    심협은 그녀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가 이내 꽉 쥐었다.

    두 사람의 그림자는 더 가까워졌고, 달빛에 비친 그림자는 점점 길어졌다.

    호숫가에 거의 다 왔을 때, 심협이 먼 곳에 있는 기관성의 불빛을 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저쪽으로는 가지 않는 게 좋겠어.”

    “그래요.”

    한데 막 돌아가려던 순간, 심협은 갑자기 눈살을 찌푸리더니 땅을 내려다봤다.

    숲속이라 낙엽이 가득했고, 진흙은 부드럽고 습기가 차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어 보였다.

    “왜 그러세요?”

    섭채주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땅속에 누군가 둔행하고 있어.”

    심협의 말을 들은 섭채주는 서둘러 신식을 펼쳤는데, 정말로 명확한 법력 파동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무명 장로님께 가는 것 같군. 내가 따라갈 테니까 누이는 복 장로님께 알려줘.”

    심협은 섭채주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바로 둔지부를 꺼내 몸에 붙이고는 땅속으로 휙 들어가 그 기운을 쫓기 시작했다.

    땅속으로 들어간 심협은 앞쪽에 기운이 하나만이 아님을 알았다. 그 모든 기운은 무명 장로의 저택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심협은 곧장 전력을 다해 쫓아가기 시작했다.

    한편, 무명 장로는 저택 밀실에서 붉은 갑옷을 입은 거대한 무사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 높이는 족히 1장에 이르렀고, 허리에는 두 자루의 붉은 쌍도를 차고 있는 것이 매우 위풍당당했다.

    “공격 언문은 더 강하게 하면 위능이 강해지지만 속도가 느려지지. 열양(烈陽)의 방어는 약하지 않으니까 큰 문제는 없겠고…….”

    무명 장로는 언갑 무사의 팔에 있는 언문을 바꾸면서 중얼거렸다.

    “거 혼잣말하는 버릇은 언제 고칠 건가? 평상시에는 말도 많이 없으면서 왜 언갑을 만들 때만 그렇게 쫑알쫑알 대는지…….”

    복 장로가 참지 못하고 불만을 터트렸다. 그는 몹시 무료한 얼굴로 멀지 않은 곳에 앉아서 술병을 가볍게 흔들어댔다.

    “내 혼잣말을 들어달라고 한 적이 없는데 왜 와서 난리인가?”

    무명 장로는 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말했다.

    “허!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사람 마음도 몰라주고……. 지금 내가 선심 써서 자네를 지켜 주고 있는 거 아닌가. 감사하다고는 못할망정……”

    복 장로의 투덜거림에 무명 장로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 오늘 심협이 꺼낸 연로 있지 않은가. 품질이 보통이 아니었지?”

    한참의 침묵이 흐른 뒤 복 장로가 참지 못하고 다시 말했다.

    “그걸 내가 어찌 알겠나? 그렇게 궁금하면 만벽에게 물어보면 되지 않나?”

    “이미 물어봤지. 근데 만벽 그놈이 말을 안 해. 그저 연로를 어떻게 해볼 생각이라면 접으라고만 하던데…….”

    “남의 충고만 잘 들어도 밥 굶는 일은 없다네.”

    무명 장로는 그를 더 상대하기 싫은 기색이었다.

    “아니, 누가 보면 내가 강제로 빼앗으려는 줄 알겠네. 다 마땅한 대가를 주고 교환할까 생각 중인 거지. 자네들은 날 어떻게 보는 건가?”

    “알겠으니까 제발 입 좀 다물고 조용히 언갑 좀 살펴보게 해주게. 내일 우리 천기성의 체면을 깎아먹어서야 안 될 일 아니겠나?”

    “알겠네. 아무 일도 없는데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까 죽을 맛이군. 가서 잠이나 자야지.”

    그렇게 투덜거린 복 장로가 술병을 들고 나가려던 참이었다.

    우르릉!

    갑자기 밀실 전체가 강하게 흔들렸다.

    복 장로와 무명 장로 모두 화들짝 놀라 바닥을 내려다봤다.

    그 순간, 땅이 무너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리더니 그들 주위의 땅이 가지런히 갈라졌고, 검은색의 뾰족한 금속 비석이 위로 솟아 올라와 그들을 에워쌌다.

    “언술 고진(古陣)! 이런!”

    무명 장로가 한눈에 뾰족한 금속 비석의 오래된 언문을 알아봤다.

    “가세!”

    복 장로가 반사적으로 외쳤으나, 그들이 움직이기도 전에 여덟 개의 금속 비석에 새겨진 부문이 동시에 빛나기 시작했다.

    뒤이어 벼락같은 불꽃이 나타나더니 여덟 개의 비석에서 동시에 검은색 뇌전이 뿜어져 나와 서로 연결되어 뇌전의 감옥이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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