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9화. 연로를 바꾸다
후산의 연로에서 갑자기 눈부신 금빛이 번쩍이더니 날카로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심협이 황급히 돌아보니 연로 뚜껑은 이미 열려 있었고, 모양을 갖춘 언갑 단추가 갑자기 튀어나오더니 누구의 제어도 받지 않고 일고여덟 개의 날카로운 금빛을 쏘아보냈다.
그중에 한 가닥의 금빛이 곧장 만벽 장로 쪽으로 날아갔다.
만벽 장로는 용액 응고에 전심전력을 쏟던 중이라 이 변고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막 알아챘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금빛이 순식간에 그의 연로로 날아오더니 날카로운 힘이 뚫고 들어갔다.
펑!
연로에서 불빛이 튀더니 폭발했다. 이제 막 모양을 갖춘 둥근 방패도 그 날카로운 힘을 버티지 못하고 폭발했고, 수많은 불꽃이 되어 사라졌다.
주위의 모두가 손을 휘둘러 불꽃을 막아냈고, 얼굴에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이게 무슨 짓이냐?”
만벽 장로가 노발대발하며 소리쳤다.
후산은 마치 고의가 아니라는 것처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해명했다.
“언갑이 나올 때 영력이 밖으로 새어나간 것뿐이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심협도 알고는 있었다. 언갑과 법보는 정련에 성공한 뒤, 가끔 이처럼 힘이 제어를 잃고 밖으로 흘러나가기도 한다. 특히 품급이 높은 신병은 천지의 공명을 불러와 광범위한 천지 이상(異象)을 일으키는 일도 있었다.
만벽 장로는 두 눈이 충혈되었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했다.
“상황을 보니 더는 지켜볼 필요도 없겠군. 너희가 졌다.”
“너희가 만벽 장로의 정련을 방해했으니 규칙 위반이다. 이건 너희의 패배다!”
거청천의 말에 복 장로가 받아쳤다.
“흥! 너희도 후산이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무슨 억지를 부리는 거지? 내가 봤을 때 이건 천의(天意)다. 만약 만벽 장로가 일찍 정련을 마쳤다면 그가 후산에게 영향을 줬을지도 모를 일이지.”
“졌으면 남자답게 인정할 일이지 질척대기는……. 천기성 체면 다 구기는군.”
여마마가 비웃었다.
“이놈!”
복 장로는 말문이 막혔고, 만벽 장로도 얼굴이 시뻘게졌다. 눈에는 부끄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한데 모두가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시간도 남았거늘, 어찌하여 승패를 단정하는 게요?”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돌아보니 그곳에는 심협이 서 있었다.
“소용없는 일이다. 한 시진 밖에 남지 않았어. 난…… 해낼 수 없다.”
만벽 장로는 이미 절반이 넘게 타버린 향을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다들 들었지? 본인이 안 된다고 하잖아.”
후산이 안도하고는 씩 웃었다.
“시간이 남은 이상 아직 기회는 있다. 그러니 다시 해볼까 하는데……. 왜? 자신 없나?”
심협이 뚱한 얼굴로 거청천 등에게 물었다.
후산은 뭔가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 심협의 모습에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동의하지 않는다면 이번 대결은 무효로군. 고의든 아니든 결과적으로 만벽 장로님을 방해한 것은 너희 쪽이니 이 또한 형평성에 어긋나지 않는가?”
후산이 머뭇거리다가 거청천을 바라봤는데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다시 해봐라!”
후산이 콧방귀를 뀌며 외쳤다.
그는 만벽 장로의 기운 빠진 모습을 보고는 절대로 정해진 시간 안에 제대로 된 언갑을 만들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만벽 장로는 심협을 바라보며 속으로 탄식했다.
‘선배인 나보다 어린 후배의 심지가 이렇게 굳건하다니…….’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영재를 수습하여 새로운 연로로 다시 정련을 시작하려 했다.
한데 그때, 심협이 그를 만류하더니 후산과 거청천을 돌아봤다.
“너희가 먼저 연로를 바꿨으니 우리도 좀 바꿔볼까 하는데, 불만 없겠지?”
그리고 그들이 동의하기도 전에 손을 휘둘러서 명화연로를 꺼냈다.
그곳에 모인 자들 모두 언술의 고수였기에 연로의 품급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 명화연로의 비상함을 단번에 알아볼 수밖에 없었고, 모든 사람이 놀란 얼굴이었다.
“이 녀석, 이렇게 좋은 연로를 갖고 있으면서 왜 미리 안 꺼낸 거냐?”
만벽 장로는 눈이 반짝였고, 갑자기 자신감이 생겨났다.
이를 본 거청천 등은 표정이 좋지 않았지만,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었다. 이미 자신들이 먼저 ‘손에 익지 않은 연로가 불리하다’는 이유로 연로를 바꾸지 않았던가.
“이 연로라면 한 시진 안에 가능하겠어!”
만벽 장로가 명화연로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감탄했다.
“그놈 진짜 말 많네. 빨리 시작하라고. 노부가 도와줄 건데 당연히 문제없지.”
심협의 식해에서 화령자의 투덜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만벽 장로님, 시간이 촉박하니 서두르시죠.”
“아아, 그래. 서둘러야지.”
만벽 장로는 감동을 억누르고는 두 번째 정련을 시작했다.
연로에 불을 피우는 순간, 그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난 명화연로의 품질에 입이 귀에 걸렸다.
거청천 등도 당연히 이를 알아봤으니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특히 거청천은 어두운 표정으로 명화연로를 노려봤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명화연로 하나만으로도 온 정신을 끌 만했기에 만벽 장로는 다른 것은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전력으로 정련에 몰두했다. 그리고 불과 반 시진 만에 능소지동과 광망석의 교합정련을 마쳤다. 그 빠르기가 만벽 장로 자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은연중에 명화연로 안의 어떤 의지가 자신을 돕고 있음을 알아챘다. 어떤 기령 같은 존재임은 알 수 있었지만, 그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이번 정련으로 만들어진 영재 용액은 다시 화수석을 폭발시켜 불순물을 제거할 필요도 없었다. 그 자체의 순도가 이미 빈틈이 전혀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만벽 장로가 명화연로의 온도를 낮춰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연로의 온도는 스스로 낮춰졌다. 이제 그는 용액을 둥근 방패 모양으로 만드는 데 전력을 다했다.
얼마 뒤, 영재 용액은 형태를 갖췄고, 붉은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제 가장 중요한 순간이 다가왔다. 언문을 새겨야 하는 것이다.
만벽 장로가 심호흡을 하고는 한 손으로 허공에 무언가를 그리자 그의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법력이 연로 안에 있는 조각칼을 제어해 방패에 새기기 시작했다.
“삼산첩장문(三山疊嶂紋)! 이 방패의 재질과 아주 잘 어울리지. 훌륭한 선택이다. 이 언문을 선택한 그의 안목은 칭찬해줄 만해. 최고의 조합이다.”
심협은 그 말을 통해 이번 대결은 큰 문제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내심 안도했다.
잠시 후, 명화연로가 살짝 떨려오더니 갑자기 노란 빛줄기가 허공으로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허공에 세 개의 산의 허상이 나타났다.
“이…… 이상 감응! 이거 보기 흔한 게 아닌데…….”
복 장로가 감탄했다.
비록 작은 범위의 이상 감응이니 천지 감응이라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후산이 만든 단추가 뿜어낸 예리한 기운과 비교하면 그 차이는 엄청났다.
“거 도우, 이 기상만 봐도 승부가 난 것 같은데…… 더 하시겠소?”
무명 장로가 활짝 웃으며 묻자 거청천이 어두운 표정으로 후산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책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해야지! 당연히 해야지!”
후산이 여전히 포기하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만벽 장로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가득했고,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좋다. 와라! 하하하!”
두 사람은 정련대에서 멀어진 뒤 각자 자세를 취했다.
“각자 언갑에 법력을 주입하되 다른 술법을 사용해서는 안 되오. 오직 힘으로 승부를 겨뤄야 하오.”
“물론이지.”
만벽 장로가 자신만만하게 바로 대답했다.
후산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만벽 장로를 돌아보며 외쳤다.
“받아랏!”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기운이 갑자기 폭증했고, 눈에 보일 정도의 법력 파동이 몸에서 뿜어져 나와 수중의 단추에 주입되었다.
금색 단추에서 갑자기 금빛이 크게 일렁이더니 날카롭고 예리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공기 중에서 마름모꼴 정광이 굴절되어 비쳤다.
“불과 두 시진 만에 저 정도 언갑을 만들어내다니, 저자도 대단하긴 하군요.”
“만벽 장로님과 대결하려면 저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소?”
언무사의 칭찬에 심협이 웃으며 답했다.
그 무렵, 후산이 만벽 장로를 향해 맹렬하게 돌진했다.
수중의 단추에서 빛이 뭉쳐지더니 예리한 칼날 밖에 금빛 단추 허상이 떠올랐다. 중후한 법력으로 만들어진 예리한 빛이었다. 방패에 닿기도 전에 단추의 날카로움은 극에 달했다.
이를 본 만벽 장로도 법력을 방패에 주입하기 시작했다.
방패에 새겨진 삼산첩장문이 갑자기 번득였고, 방패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엄청난 크기의 황색 광막으로 변했다.
카캉!
단추의 날카로운 빛과 방패의 광막이 충돌하면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금빛 단추는 회전을 멈추지 않고 광막을 뚫으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방패의 광막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금빛 단추가 끊임없이 뚫어도 무너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다음 순간, 금빛이 갑자기 줄어들면서 다시 단추로 들어가더니 매우 강력한 폭발과 함께 단추 본체가 광막을 찔렀다.
캉!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진 뒤, 단추가 순식간에 광막을 뚫자 사방으로 빛이 터졌다.
곧이어 단추는 방패 본체에 닿았다. 그러나 그뿐, 더는 나아가지 못했다.
이제 누가 봐도 금색 단추가 한 수 아래라 방패를 뚫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후산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길 수 없다면 이거라도 뚫어버리겠다!”
후산이 험악한 표정으로 외쳤다.
“조심하십시오! 단추를 자폭시켜 두 언갑 모두 망가트릴 생각입니다.”
심협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의 외침이 끝나는 순간, 금색 단추의 언문에서 불꽃이 튀었고, 곧이어 거대한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퍼펑!
이미 경각심이 생긴 만벽 장로도 모든 대비를 했다.
그의 법력이 끊임없이 방패로 주입되면서 강력한 영압이 터져 나왔다. 방패의 언문도 강렬한 빛을 뿜어냈는데, 곧 터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방패는 폭발하지 않았고, 노란 광망을 뿜어냈다. 광망은 세 개의 이어진 산봉우리 허상으로 변하더니 곧이어 광막이 다시 되어 금색 단추의 폭발 파동을 온전히 막아냈다.
금색 단추는 가루가 되었다. 노란색 방패의 삼산첩장문도 부서졌지만, 방패 본체는 미세한 균열만 갔을 뿐 온전한 모습을 유지했다.
이렇게 되고 보면 후산이 패배를 인정하든 안 하든 그의 패배였다.
“……내가 졌소.”
후산이 풀 죽은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 말을 들은 언무사는 화색이 돌았고, 무명 장로와 복 장로의 얼굴에도 웃음이 만연했다.
“만벽, 잘했네.”
복 장로가 뛰쳐나와 그의 등을 토닥였다.
반면 거청천 등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소금연로면 승기를 확실히 잡을 줄 알았는데 결과적으로 패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자네, 연로를 팔 생각은 없나? 원한다면 내 전 재산이라도 주겠네.”
후산이 명화연로를 바라보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안 팔 거요.”
심협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후산은 명화연로가 매우 탐났다. 만약 지금 같은 상황이 아니었다면 무력을 써서라도 빼앗으려 들었을 것이다.
“가자!”
거청천이 한참이나 심협을 바라보다가 홱 돌아서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말없이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