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897화 (897/1,214)
  • 897화. 천기첨(天機簽)

    청호는 신혼의 힘을 만든 연꽃이 끊임없이 사라지는 걸 보고는 온몸에서 물결 같은 파동을 일으켰다. 그러자 파동과 함께 바닥에 있던 검은 물이 용솟음치더니 다시 대량의 연꽃잎이 끊임없이 피어올라 막망 장로를 향해 날아갔다.

    이 광경을 본 천기성 사람들의 표정이 굳어갔다.

    “막망 장로님이 못 버틸 것 같은데…….”

    언무사가 걱정하며 말하자 옆에 있던 심협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모르오. 내 보기에 청호는 힘이 다 빠진 상태라 회광반조(回光返照)인지도 모르오. 막망 장로께서 조금만 더 버티면 이길 수 있을 것이오.”

    심협의 말에 언무사는 반신반의하며 청호의 신혼을 바라봤다.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파동이 불안정한 것을 보자 정말로 더는 못 버틸 것 같았다.

    잠시 후, 막망 장로의 신혼이 마지막 장애물을 뚫었다.

    그녀가 입고 있던 갑옷은 이미 검은 모래가 되어 몸에서 벗겨졌고, 들고 있던 장창의 소용돌이도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검게 물든 창끝이 곧장 청호의 신혼을 향해 돌진했다.

    청호의 신혼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패배를 인정하려는 듯 양손을 번쩍 들었다.

    그 모습을 본 막망 장로는 일순 머뭇거리더니 돌진하던 기세를 줄이고 속도도 줄였다.

    하지만 그때, 청호의 본체가 들고 있던 연꽃에서 갑자기 푸른 씨앗이 날아올라 그녀의 미간에 들어갔고, 빛이 번쩍였다. 뒤이어 수구 광막에 있던 신혼 소인의 몸이 갑자기 짙은 초록색 빛에 휩싸이더니 신혼의 힘이 보충되면서 파동이 크게 일었다.

    청호 신혼은 교활한 미소를 짓더니 손을 들어 앞으로 확 밀었다. 그러자 거대한 연꽃잎이 곧장 하늘로 치솟아 강하게 막망 장로의 신혼을 두들겼다.

    본래 소모가 극심한 데다 중독된 상황이니 막망 장로가 이런 충격을 어떻게 버텨내겠는가. 창은 부러졌고, 그녀의 신혼은 그대로 날아가 수구 광막 벽에 강하게 부딪혔다.

    펑!

    터지는 듯한 또렷한 소리와 함께 빛의 고치에 싸여 있던 막망 장로 본체가 흔들렸다. 강한 충격을 받은 것이다.

    “반칙이다!”

    만벽 장로가 노발대발했다.

    “우리가 무슨 반칙을 했다는 거지?”

    거청천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저 연꽃 법기에 신혼의 힘을 보충하는 단약을 숨겨 놨구나!”

    복 장로도 소리쳤다.

    “그게 단약이라고? 너희는 이마로 단약을 복용하더냐?”

    여마마가 비꼬았다.

    “저건 청호가 직접 뽑아낸 신혼의 힘이다. 평소에는 연방에 놨다가 필요할 때 사용하지. 자기 신혼의 힘을 이용한 것도 반칙이라고 할 수 있는가?”

    거청천이 그들을 흘깃 쳐다보며 말했다.

    무명 장로가 자리에서 일어나 굳은 표정으로 외쳤다.

    “우리가 졌소.”

    그의 말이 들려옴과 동시에 다른 장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첫 번째 대결에서 이렇게 지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무명 장로가 패배를 인정했음에도 거청천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통혼 법진의 청호도 멈추지 않고 수십 개의 커다란 푸른색 연꽃을 마치 강력한 주먹처럼 연달아 휘둘러 막망 장로의 신혼을 두들겼다. 그녀의 신혼은 끊임없이 수구 광막 벽에 부딪혀 내려오지도 못했다.

    “당장 멈추게 해라!”

    무명 장로가 분노를 터뜨리자 거청천은 그제야 천천히 일어났다. 하지만 그의 동작은 현저히 느렸다.

    그때, 누군가가 갑자기 막망 장로 뒤에 나타났다. 그는 심협으로, 깜짝 놀란 다른 사람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손을 막망 장로의 등에 댔다.

    다음 순간, 막망 장로의 몸을 감싸던 빛의 고치가 심협마저 감쌌다.

    이와 동시에 중앙의 수구 광막이 갑자기 몇 번 흔들리더니 순식간에 커졌다.

    심협의 신혼 소인이 광막에 나타나더니 바로 손을 휘두르자 거대한 산이 갑자기 허공에 나타나 그대로 청호를 향해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광경에 깜짝 놀란 청호는 황급히 양손을 휘둘러 대량의 연꽃을 거대한 나무로 만들어 심협이 신혼의 힘으로 만든 부주산을 막으려 했다.

    허나 거대한 부주산의 거침없는 돌진을 나무 몇 그루가 어떻게 막아내겠는가?

    경지를 따지자면 심협은 그녀에게 미치지 못하지만 신혼의 힘은 전혀 뒤처지지 않았다. 게다가 소모가 극심한 상태이니 그녀는 심협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부주산의 돌진에 거대한 나무는 모두 부서졌고, 곧바로 그녀의 신혼은 산 아래에 깔렸다.

    강력한 신혼의 압박에 청호의 눈에는 진정한 공포가 떠올랐다.

    “건방진!”

    이를 본 거청천이 앞으로 나섰는데, 이미 움직인 무명 장로 등이 그의 앞을 당당하게 막아섰다.

    “이건 규칙 위반이 아닌가?”

    거청천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패배를 인정했는데 멈추지 않은 것은 너희다. 한데 누굴 탓하는 거냐?”

    복 장로가 차갑게 대꾸했다.

    그러자 여마마와 후산 등도 바로 몰려와 거청천 뒤에 섰고, 일촉즉발의 상황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네놈들…… 좋다. 패배를 인정했으니 그만하겠다. 청호를 놔줘라.”

    거청천의 복잡한 표정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더니 말했다.

    “심 도우, 이제 됐소.”

    무명이 신혼으로 전음을 보냈다.

    하지만 수구 광막 안의 심협은 공격을 거두지 않고 오히려 부주산에 짓눌린 청호 앞으로 다가가 쭈그리고 앉았다.

    그가 뭘 하려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으나, 심협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그와 눈을 마주친 청호는 겁먹은 와중에도 눈에 분노가 들어찼다.

    하지만 그녀의 분노가 커질수록 심협의 웃음은 더욱 짙어졌고, 부주산은 더 무거워졌다.

    한참의 대치 후, 어쩔 도리가 없자 청호는 여전히 분노가 가득한 얼굴로 갑자기 입을 벌리더니 숨을 들이마셨다.

    수구 광막 곳곳에서 갑자기 빛이 흐르더니 곧이어 검은색 연기가 곳곳에서 끊임없이 날아올라 그녀에게로 몰려왔다. 그중 막망 장로의 몸에서 나온 검은 연기가 가장 짙고 많았다.

    모든 연기가 청호에게 빨려 들어간 뒤에야 심협은 막망 장로 신혼으로 다가가 독이 모두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손을 휘둘러 부주산을 거두었다. 그리고 순진해 보이지만 실은 매우 악독한 소녀를 향해 손을 휘둘러 법진 밖으로 내보냈다.

    뒤이어 막망 장로의 신혼도 자신의 몸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안색은 매우 창백했다. 독은 사라졌지만 신혼의 소모가 매우 극심하다는 증거였다. 그녀는 심협을 향해 인사하고는 복 장로의 부축을 받아 떠나려 했다.

    그때, 가벼운 외침이 그들을 막아섰다.

    “잠깐! 막망 장로, 뭔가 잊은 것 같은데?”

    거청천의 말에 막망 장로는 눈빛이 흔들리더니 입술을 꽉 물며 손을 휘둘러서 자신의 장로 영패를 던지고는 복 장로와 함께 떠나갔다. 청호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거청천은 장로 영패를 확인하고는 소매에 넣었다.

    청호의 표정은 더없이 안 좋았는데, 특히 심협을 볼 때는 더 이상 순진무구한 모습이 아니라 원망으로 가득했다.

    “내일 대결은 연언(煉偃) 공방에서 진행되오.”

    무명 장로는 그들과 더는 말을 섞지 않고 거청천 등을 호숫가의 거처로 돌려보냈다.

    거청천 쪽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후산을 제외하면 다른 사람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심협의 갑작스러운 훼방에 본래 독으로 막망 장로에게 중상을 입히려던 계획이 무산된 것이었다. 그들은 묵묵히 마음속으로 심협을 기억했다.

    돌아가는 길에 언무사가 심협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사소한 노고였을 뿐이오. 저들의 도가 지나친 행동에 불쾌하기도 했고.”

    심협은 손사래 치며 개의치 말라고 했다.

    “저런 놈들이 활개 치는데 사부님께서는 여전히 폐관 중이시니…….”

    언무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이번에는 저 청호란 여자가 계략으로 막망 장로를 방심하게 만든 탓일 뿐이오. 그런 계략이 아니었다면 결과는 완전히 달랐을 게요. 다른 장로님들은 더 이상 방심하시는 일이 없겠지요.”

    “그건 그렇소. 내일은 만벽 장로님이 나서시니 큰 문제는 없을 게요.”

    “단, 절대로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되오. 저들의 오늘 행태를 보면 성인군자는 절대 아닌 것 같으니 또 무슨 음흉한 수를 쓸지 알 수 없는 일이오.”

    “심형 말이 맞소. 혹시 모르니 오늘 밤은 만벽 장로님을 지켜야 할 것 같소.”

    “나도 같이 갑시다.”

    심협과 언무사는 잠시 의논한 뒤, 함께 연언 공방으로 향했다. 만벽 장로는 저택이 따로 있음에도 대부분의 시간을 여기서 보내며 언술 연구에 매달렸다.

    * * *

    저녁 무렵, 만벽 장로는 심협과 언무사가 찾아와 용건을 밝히자 버럭 화를 냈다. 그의 수염이 하늘로 치솟았다.

    “뭐라? 장로인 내게 너희 같은 후배의 보호를 받으라는 것이냐?”

    그는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화를 냈다.

    “만벽 장로님, 언무사 도우가 말실수를 했군요. 저희가 어떻게 장로님을 보호하겠습니까? 그저 장로님께 언갑 기술을 배우고 싶었을 뿐인데, 솔직하게 말씀드리기에는 부끄러워서 어설픈 이유를 댄 것입니다.”

    심협의 말을 듣고서야 만벽 장로는 분노를 거두고는 언무사를 빤히 바라봤다.

    “정말이냐?”

    “물론입니다.”

    언무사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녀석, 나한테 그런 예의를 차릴 게 뭐가 있다고…….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보면 될 것을 빙빙 돌려 말하기는……. 하하하!”

    만벽 장로는 언무사의 어깨를 두드리며 크게 웃었다.

    심협과 언무사는 옆에 머물며 만벽 장로가 계투에 대비하는 것을 지켜봤다.

    * * *

    다음 날, 양쪽은 연언 공방에 모였다. 막망 장로와 청호는 모두 정양하느라 보이지 않았다.

    “오늘 계투 대결에는 모순(矛盾) 충돌 대결로 승부를 가릴 것이오. 우리 쪽은 만벽 장로가 출전하오. 그쪽은 누가 하겠소?”

    “모순 충돌 대결이 뭐요?”

    무명 장로의 말에 심협은 어리둥절해 물었다.

    “이름 그대로 양쪽에서 한 명씩 출전하여 한쪽은 공격용 언갑을, 다른 쪽은 수비용 언갑을 만든 후 서로 공수 대결을 벌여 훼손된 정도로 승부를 내는 것이오.”

    언무사가 작은 소리로 설명했다.

    “우리 쪽은 내가 출전한다. 헤헤헤!”

    다른 사람이 통보하기도 전에 후산이 뛰쳐나왔다.

    이틀 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소변을 보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그의 거리낌 없는 행동에서 언술을 사용하는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은 외모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법. 당연히 누구도 그를 얕잡아보지 않았다.

    “만벽 장로, 우리 의논 좀 합시다. 나는 호신(護身) 언갑에 자신 있으니 그대가 공격용을 만들고 내가 방어용을 만드는 게 어떻소?”

    후산은 거대한 체구의 만벽 장로를 향해 경박하게 웃으며 말했다.

    “좋소.”

    만벽 장로는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바로 승낙했다. 어느 쪽이든 이길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이 반응에 호산은 퍽 의외라 생각했다. 그저 떠보기 위해 물어본 것뿐인데 만벽 장로가 이렇게 바로 승낙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허험! 방금은 농담이었소. 누가 뭘 만들지는 하늘의 뜻에 맡깁시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말을 바꿨다. 수비보다는 공격용을 원한다는 것이 빤히 보였다.

    “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 천기첨(天機簽)을 뽑아서 정합시다.”

    무명 장로는 바로 검은색 통을 꺼냈다. 안에는 두 개의 기다란 막대가 들어 있었다.

    “검은색을 뽑은 사람이 공격, 하얀색을 뽑은 사람이 수비요.”

    두 사람이 각자 막대기를 뽑아서 모두 앞에 보였다.

    만벽 장로가 하얀색을 뽑아서 수비용을 만들게 되었다.

    “헤헤, 오늘 운수가 좋은 것 같군. 만벽 장로, 그럼 사양하지 않겠소.”

    후산이 포권했지만, 만벽 장로는 두 눈을 감은 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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