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894화 (894/1,214)
  • 894화. 이상한 방문객

    “여기는 대화하기 편하지 않으니 내 동부로 가자꾸나.”

    심협은 자리릍 털고 일어서서 손을 내밀었고, 섭채주는 그 손을 잡았다.

    방촌산에서 헤어진 이후의 일로 둘은 할 이야기가 많았다.

    섭채주는 보타산으로 돌아가서 수련에 매진한 반면, 심협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기에 듣는 섭채주는 연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창궁비경이요? 처음 들어봐요. 그래도 동화산선은 스승님께 들어본 적이 있어요. 부적과 진법, 연기에 정통하고 경지도 매우 깊고 심오하여 천 년 전에 명성을 떨쳤다죠? 그런데 그게 다 창궁비경에서 얻은 거였군요?”

    심협은 그녀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창궁비경 안에는 보물이 많으니 쉽게 포기할 수는 없겠죠. 보타산에도 공간 법진과 신통이 조금 있으니까, 이번에 돌아가면 잘 준비해서 그 비경에 들어갈 수 있는지 알아볼게요.”

    섭채주는 심협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창궁비경의 보물을 아까워하는 줄 알고 말했다.

    “창궁비경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인연이 닿으면 언젠가 가게 되겠지. 요즘 누이의 수련은 어때?”

    심협은 손을 내젓고는 섭채주의 두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섭채주는 저번 방촌산 사건 때 이미 진선기로 돌파했는데, 지금 보아하니 그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섭채주의 자질과 보타산의 자원을 생각해보면 뭔가 이상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진선기로 돌파한 이후로 경지가 계속 정체되고 있어요. 아무래도…… 체내의 무언가 제 정진을 막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 내가 좀 볼게.”

    심협은 섭채주의 손바닥을 잡고 법력을 실어 살폈지만, 별다른 문제를 찾지 못했다.

    그는 또 몇 가지 방법을 연달아 시험해봤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이에 그는 눈살을 찌푸린 채 꿈속 세계의 수련 경험을 떠올려봤다.

    “경지가 정체되는 건 수선계에서 흔한 일이에요. 아마 그동안 계속 폐관수련만 했으니 경험이 부족한 탓이겠죠. 오라버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서두를 일이 아니니 천천히 원인을 찾아보자꾸나. 천기성에는 얼마나 머물 예정이지?”

    “법보가 완성되려면 열흘은 걸릴 거예요.”

    심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충분히 살펴볼 수 있을 터였다.

    이후 한참 대화를 나눈 후, 섭채주는 돌아가려 했다.

    심협은 더 머물게 하여 수련 경지가 정체된 원인을 알아내려 했지만, 섭채주는 아까의 일로 창피했는지 기어코 돌아갔다.

    “심협, 네게 저런 아름다운 약혼녀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허허, 복도 많지.”

    섭채주가 가자마자 화령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령자, 아까 채주의 경지가 정체됐다는 거 들었지? 알아낸 것 좀 있어?”

    심협은 화령자가 계속 엿듣고 있을 줄 알고 있었기에 개의치 않고 물었다.

    “네 약혼녀도 상당하더라. 겉보기에는 인간족 소녀 같은데 몸에 다른 현기(玄機)가 있어서 나도 자세히 볼 수는 없었어. 그녀의 경지가 정체된 건 아마 그것과 연관이 있을 거야.”

    화령자는 엄숙해진 말투로 말했다.

    “채주가 인간족이 아니라는 거야?”

    심협은 깜짝 놀라 물었다.

    “말했잖아. 자세히 볼 수 없었다고. 다음에 다시 오면 술법으로 자세히 살펴볼게.”

    심협은 어쩌면 원인을 알아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섭채주에 관한 일은 실마리가 잡혔으니 그는 두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동화 암부의 누각 2층에서 가져온 부서(符書)를 꺼냈다. 동화산선이 부적에도 능통했다는 섭채주의 말을 듣고 이 책이 떠오른 것이다.

    ‘쓸 만한 것들이 있을지도 몰라.’

    부서에 기록된 부적의 수는 엄청나서 거의 수백에 이르렀고, 등급이 낮은 것부터 높은 것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었다.

    심협은 부적술에 관심이 많았기에 등급이 낮은 것도 놓치지 않고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면서 안목을 넓혀갔다. 더욱이 등급이 높은 것을 볼 때는 완전히 빠져들고 말았다.

    “성상부(聖象符), 미신부(迷神符), 환형부(幻形符)! 엄청난 부적들뿐이잖아!”

    심협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부서에는 고급 부적이 30여 가지 있었는데, 이전에 만수진인이 사용했던 청심주부도 그중 하나였다. 그 외에도 효과가 특이한 부적들도 많아 지금의 그에게 큰 쓸모가 있어 보였다.

    마지막 장까지 넘긴 심협의 눈이 둥그레졌다. 마지막 장에는 다섯 종류의 더 복잡한 부적이 기록되어 있었다. 심지어 곤토인뇌부보다도 복잡했다.

    “선부(仙符)잖아!”

    심협의 눈이 거의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그는 줄곧 선부를 배우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기회가 없었는데, 드디어 그 기회가 생긴 것이다!

    “능파선부(凌波仙符), 신병호법부(神兵護法符), 영심도부(寧心道符), 구혼섭백부(勾魂攝魄符), 천주지멸부(天誅地滅符)!”

    다섯 선부의 효능은 모두 달랐다. 능파선부는 속도를 높여주고, 신병호법부는 방어에 뛰어나며, 영심도부는 심신을 안정시켜준다. 구혼섭백부는 심성을 어지럽히고, 천주지멸부는 적을 공격하는 부적이다.

    부서에 기록된 말에 의하면 다섯 선부의 위력은 매우 강력하지만, 그 구체적인 위력은 제작을 해봐야만 알 수 있다고 했다.

    다만, 다섯 선부에 필요한 재료는 매우 찾기 어려워서 지금은 그중 하나도 만들 수 없었다. 모아야 할 재료가 또 늘어났다.

    심협은 부서를 넣은 뒤 붉은 조롱박에서 화련단을 하나 꺼내 복용했다.

    부적과 법보가 아무리 좋아도 결국은 외물일 뿐, 중요한 것은 자신의 경지를 높이는 것이었다.

    단약이 뱃속에 들어가 녹으면서 매우 강력한 뜨거운 기운이 몸 곳곳을 누볐고,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심협은 서둘러 황정경을 운공하여 강력한 약효를 흡수했다. 정진이 느렸던 황정경도 화련단의 악효 덕에 비약적으로 정진하기 시작했다.

    화련단의 뜨거운 기운도 빠르게 흡수되면서 극심하던 고통이 바로 사라지더니 말로 할 수 없는 편안함이 느껴졌다.

    운공한 지 반나절 만에 화련단의 약효는 전부 흡수되었고, 황정경의 수련도 큰 정진을 이루었다.

    “단약 하나의 효과가 이 정도라니, 이 화련단을 전부 흡수하면 황정경도 진선 중기 혹은 후기로 정진하겠는데?”

    그는 속으로 기뻐하며 단약을 하나 더 먹고 계속해서 연화했다.

    * * *

    천기성 상공에 곧 폭우가 쏟아질 것처럼 짙은 먹구름이 몰려왔다.

    하지만 먹구름이 성의 상공을 한참 동안 뒤덮었어도 바람 소리도, 비가 떨어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심지어 습해지거나 침울해지는 기색도 없었다.

    천기성의 제자들이 기이하게 여기고 있을 때, 먹구름이 조금씩 걷히면서 거대한 궁전 보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궁전은 벽돌로 쌓았지만 성벽 곳곳의 구멍에서 돌아가는 수많은 톱니바퀴가 선명하게 보였다.

    성의 가장 높은 건물에 달린 거대한 풍차(風車)에서는 날개가 천천히 돌면서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나타난 기관성(機關城)에 모든 천기성 제자가 호기심을 가졌고, 적지 않은 사람은 벌써 그 기계 구조를 유심히 살펴보면서 붓과 종이를 꺼내 그리기 시작했다.

    이때, 성의 높은 벽에 갑자기 몇 명의 낯선 이들이 나타났다.

    가운데에는 몸집이 크고 균형 잡힌 몸에 마흔 전후쯤 된, 강직하고 엄숙해 보이는 자가 서 있었다. 새하얀 옷에는 원형 문장이 그려져 있었는데, 천기성 제자들의 복장에 그려진 것과 똑같았다.

    그의 좌측으로 두 명의 남자가 있었다. 하나는 이마가 튀어나왔고 콧날은 낮았으며 입은 조금 컸다. 우람한 몸에는 금속 갑주를 입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몸집이 작고 입은 튀어나왔다. 두 눈은 금테를 두른 것처럼 매우 독특해서 교활한 빛을 띠었다.

    강직해 보이는 남자 우측으로도 두 사람이 있었다. 회색 도포에 보라색 지팡이를 짚고 선 백발노파와 손에 초록색 연꽃을 든 둥근 얼굴의 소녀였다.

    그들의 출현에 천기성 제자들의 관심은 더욱 커졌다. 그들 뒤에 커다란 깃발이 꽂혀 있었는데, 바로 ‘천기성’이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허공에 몇 줄기의 유광이 날아가 그 기관성 앞에 멈췄다. 복 장로 등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기관성과 정체불명 존재들의 태도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복 장로 등은 서로 전음으로 주고받았고, 무명 장로가 나섰다.

    “귀하는 뉘시오? 어찌하여 천기성의 깃발을 달고 이렇게 무례하게 남의 영역에 쳐들어온 것이오?”

    무명 장로가 표현을 좀 다듬어 물었다.

    강직한 남자는 그들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난 거청천(車靑天)이다. 천기성의 계승자이니 당연히 천기성의 깃발을 단 것뿐이다.”

    “거청천?”

    들어본 적 없는 이름에 사람들은 당황했다.

    “거 도우는 어느 장로의 제자시오?”

    무명 장로는 그가 천기성을 떠난 어느 선배 장로의 제자라고 생각했다.

    “건방진 것! 우리 주인님은 천기성의 정통이시거늘, 어딜 함부로 장로의 제자라 하는 게냐? 누가 감히 그럴 자격이 있다는 게야?”

    거청천 옆의 백발노파가 벌컥 화를 내며 지팡이로 땅을 찍었다.

    그녀의 분노에 모두가 더욱 어리둥절했다.

    천기성의 정통? 천기성은 줄곧 이어져오고 순차대로 전승됐건만 정통은 뭐고 비정통은 뭐란 말인가.

    “아무래도 천기성이 내 성씨를 잊었나 보군.”

    거청천이 잠시 생각하더니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천기성 장로들이 여전히 의아해하는 도중, 늘 침착하지 못하던 복 장로가 마침내 그들의 얼토당토않은 모습에 짜증을 내며 욕설을 퍼부으려 했다.

    한데 옆에 있던 무명 장로는 무언가 생각났는지 그를 제지했다.

    “거 씨라면 설마 천기성 초대 성주 거원의 후손이오?”

    이 말에 막 발작하려던 복 장로는 물론이고 옆에서 이미 욕을 해대던 만벽 장로도 당황했다. 막망 장로는 놀란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천기성의 초대 조사 거원은 언술 초창기 세대 중 가장 뛰어난 인물로, 치우 마환의 전쟁 때도 혁혁한 공을 세운 바 있다. 다만 마환 때 입은 상처가 재발하면서 안타깝게 운명을 다했다.

    후대 성주를 정하기도 전에 닥친 너무 갑작스러운 죽음에 천기성에는 잠시 혼란이 왔었다.

    그의 외아들 거묵린(車墨麟)은 언술에 조예가 깊어 부친의 성주 자리를 이어받으려 했으나, 놀랍게도 그보다 언술이 뛰어난 한 제자가 수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아 성주 자리에 올랐으니, 바로 소부자의 스승, 수운자(須雲子) 진인(眞人)이었다.

    후에 성주의 자리를 놓고 싸움이 일어났지만, 실패한 거묵린은 식솔과 함께 천기성을 떠났고, 그때부터 종적을 감춰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이 일은 천기성의 숨기고 싶은 치부였기에 후대 제자들은 알지 못했다. 심지어 언무사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데 오늘 거묵린의 후손이 다시 천기성에 돌아온 것이다.

    “정말로 거원 조사님의 후손이시오?”

    무명 장로의 물음에 거청천은 말없이 청흑색 묵옥영패(墨玉令牌)를 던졌다.

    영패를 받은 무명 장로가 바로 다른 장로와 함께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묵옥영패에는 상고 전자(篆字)로 ‘천기’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고, 뒤에는 뇌운(雷雲)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다소 거칠어 보였지만, 무명 장로 등은 가슴이 철렁했다.

    “이럴 수가! 진짜 성주님의 것과 똑같은 묵옥천기령(黙玉天機令)입니다!”

    “아무래도 조사님의 계승자가 확실한 것 같소. 다만 저들의 태도로 보아 단순히 친분을 맺고자 온 것 같지는 않소.”

    무명 장로가 전음으로 말했다.

    “성주님이 폐관 중이시니 조심스럽게 대응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막망 장로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