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0화. 어린 제자
도향이 뿜어낸 붉은 안개는 곤봉의 허상에 모두 부서졌고, 남은 대여섯 개의 곤봉 허상은 곧장 그녀에게로 향했다.
펑! 퍼펑!
몇 번의 굉음과 함께 도향은 저 멀리 날아갔다.
심협은 곧장 손을 휘둘러 탁자 위의 벼루와 붓, 부채를 휘감아 소요경으로 끌어들였다. 허나 바로 붉은 빛에 휩싸여 사라진 접는 부채와 달리 푸른 벼루와 청옥 붓에서는 갑자기 푸른 빛이 뿜어져 나와서 버텨냈다.
현황일기곤에 두들겨 맞고 훌훌 날아가던 도향은 재빨리 몸을 가누었다. 만리권운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빛으로 충격을 막아냈음에도 그녀의 입가에는 피가 흘렀다.
그녀는 호흡을 가다듬고는 입에서 푸른색 부적을 꺼냈다. 매우 복잡한 꽃그림이 그려진 부적이었다.
도향은 이 부적을 잠시 내려다보더니 이내 이를 악물고 단숨에 바스러뜨렸다.
부적에서 빛이 폭발하더니 그 빛 안에서 푸른색 법진이 나타나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이어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와 다락 전체를 푸른빛으로 물들였다.
탁자 위의 푸른색 벼루와 청옥 붓이 갑자기 강렬하게 흔들리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가 푸른색 법진 안에 나타났다.
“청천연(靑天硯)! 묵혼필(墨魂筆)! 상대 각주님의 본명법보를 마침내 손에 넣었구나!”
도향이 두 보물을 잡고는 기뻐하더니 심협에게 다시 빼앗길까 두려웠던 듯 곧장 밖으로 날아갔다.
“청천연과 묵혼필? 저 법보는 방금각의 것이었나? 그래서 얻을 수 없었구나.”
심협은 도향이 멀어져가는 것을 보면서도 쫓아가지 않았다. 저 두 개의 보물이 비범하긴 하나 이미 주인이 있으니 강제로 빼앗을 마음도, 방금각을 적으로 돌리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가 결인하자 붉은 정광이 주위를 휩쓸었고, 거대한 다락이 순식간에 텅 비어버렸다. 책꽂이, 탁자 벽에 걸린 그림 등이 전부 소요경 안으로 들어갔다.
이어서 심협의 몸이 초록색으로 빛나더니 천장을 뚫고 2층에 나타났다.
배치는 아래층과 거의 똑같았다. 다만 이곳의 탁자는 보물이 놓여 있지 않았고, 단 한 권의 서적만 놓여 있을 뿐이었는데, 영력 파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서적에는 부적 도안이 잔뜩 그려져 있었다.
“부서(符書)?”
심협은 다시 소요경을 발동하여 2층의 물건을 전부 챙겼고, 밖으로 나왔다.
마당에는 방금각의 세 사람을 비롯해 여섯 명이 모두 모여 있었다.
“심협, 왜 혼자냐? 만수진인은 어디 있는 게냐?”
염열이 주위를 둘러보며 따지듯 물었다.
“나도 모른다. 아마 다른 곳으로 보내졌겠지.”
심협은 그들을 상대하지 않고 곁눈질로 힐끗 보고는 옆의 다락으로 향했다.
이곳에도 역시 푸른색 광막 금제가 대문을 막았으나, 심협은 현황일기곤에서 금빛을 뿜어내 내리쳤다.
한데 그때, 붉은 빛이 그의 등을 노리며 날아왔다.
땅!
맑은 금속음에 이어 허공에서 금빛이 반짝였다. 현황일기곤이 일격에 그 붉은 빛을 깨트린 것이었다.
“나 하나쯤은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 이건가? 허나 명심해라. 다시 싸울 생각이라면 이번에는 나도 전력을 다할 터. 당신들 중 최소한 하나는 죽게 될 것이다.”
심협은 차가운 눈빛으로 방금 공격해온 염열을 노려봤다.
염열도 물러설 뜻이 없는지 이글거리는 눈으로 심협을 마주 노려봤다.
“염 도우, 충동적으로 움직이지 마시오.”
전삼칠은 심협의 무시무시한 한빙 신통이 떠올라 서둘러 염열 옆으로 다가서며 전음으로 말했다.
“전 도우는 저 심가 놈이 무서운 게요? 우리가 힘을 합치면 저 진선 초기 애송이 하나 못 잡겠습니까? 만수진인도 없으니 먼저 협공해 저자를 제거합시다! 적을 하나라도 줄여야 하지 않겠소?”
염열이 전삼칠을 바라보며 전음으로 말했다.
“저자가 무서운 게 아니라 이건 중대한 일이니 상의를 해보자는 것이오. 도향 선자,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전삼칠은 표정을 일그러뜨리더니 전음으로 반박했다.
두 사람의 전음은 모든 일행에게 전달되었다.
“소첩도 염 도우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화 암부에는 확실히 보물이 많이 있습니다. 저자는 신통이 범상치 않으니 강력한 보물을 손에 넣기라도 한다면 더욱 상대하기 어려워질 터. 차라리 먼저 제거하는 게 낫다고 봅니다.”
도향의 눈에서 차가운 빛이 흘렀고, 방금각의 유홍과 이표, 옆에 선 귀등상인도 동의를 표했다.
심협은 그들의 전음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무슨 얘기를 하는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심협 역시 저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자신의 뛰어난 신통들은 말할 것도 없고 번천인과 일곱 자루의 순양검 등이면 저자들을 상대하기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천살시왕만 해도 저들 대부분을 제거할 수 있으리라.
“모두가 동의했으니 나도 반대하지 않겠소. 그럼 이 전삼칠이 앞장설 테니 모두 뒤를 바짝 따라오시오. 반드시 일격에 죽이거나 아니면 중상을 입혀야 하오. 그러니 모두 절초를 시전하시오!”
전삼칠은 앞서 겁을 먹은 것처럼 말했기에 체면을 회복하려고 전음으로 당당하게 말하고는 공격하려 했다.
한데 그때였다.
“명을 재촉하는군. 날 원망하지 마라!”
심협이 싸늘하게 외치더니 눈을 차갑게 번득이며 손을 들어 올렸다. 손에서는 금빛이 번쩍였다.
하지만 그가 공격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변이 일어났다!
전삼칠 등 여섯 명의 빛이 뿜어져 나오는 순간, 두 개의 하얀 빛이 번개처럼 날아가 전삼칠과 도향의 무방비한 등을 공격한 것이다.
하얀색 비추(飛錐)의 공격에 전삼칠과 도향은 그대로 당했다. 전삼칠은 등이 쪼그라들었고 입에서는 피를 뿜어냈다.
도향은 허리춤의 만리권운이 하얀색 비추를 막았지만, 오른팔 전체가 잘려나가면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하하하! 내 구소용추(九霄龍錐)의 맛이 어떠냐?”
기습한 자는 일격을 날린 뒤 곧장 마당 다른 쪽으로 날아가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그는 바로 염열이었다.
“염열, 이게 무슨 짓이냐!”
방금각의 유홍과 이표가 분노로 눈이 뒤집힌 와중에도 서둘러 도향을 보호했다.
귀등상인도 표정이 돌변했지만, 전삼칠에게 다가가지 않고 재빨리 뒤로 물러나 모두에게서 멀어졌다.
심협 역시 이 광경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내분인가?’
그렇게 생각했지만, 일이 그렇게 간단해 보이지는 않았다. 현재 마당에는 이상한 분위기가 흘렀던 것이다.
심협도 함부로 움직이지 않고 경계하며 뒤로 물러났다.
“염열, 무슨 짓이냐?”
도향이 초록색 부적을 어깨에 붙이자 밝은 초록색 빛이 뿜어져 나왔고, 피가 멎었다.
전삼칠도 가슴에 무언가를 결인하자 등에서 정광이 빛나더니 움푹 파였던 곳이 순식간에 회복됐다. 그는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염열을 노려봤다.
“도향 선자, 전삼칠, 너희들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냐? 아니면 멍청한 척하는 것이냐? 과거 우리 스승이신 동화산선은 너희 방금각과 백검문 그리고 창혼, 그 늙은 도적놈의 손에 돌아가셨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복수한다고 해서 나를 탓할 수 있겠느냐?”
염열이 손을 들어 두 개의 하얀색 비추를 다시 소환하고는 차갑게 웃었다.
“뭐라! 네가 동화산선의 제자라고?”
도화는 깜짝 놀라 표정이 변했다. 이는 전삼칠도 마찬가지였다. 한데 두 사람 모두 염열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반면 유홍과 이표 그리고 멀리 떨어진 귀등상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럴 리가 없다! 동화산선의 육대 제자는 그때 흑린산의 전투에서 모두 죽었다. 살아남은 자가 있을 리가 없어!”
도향은 바로 평정을 되찾고 말했다.
“나와 만수 사제는 스승님이 마지막에 거둔 어린 제자였으니 외부인에게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도 그때 죽었겠지!”
염열이 차갑게 웃으며 소리쳤다.
염열의 말에 심협은 가슴이 철렁했다.
만수진인이 동화산선의 제자라니!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추격과 이전 교역회에서의 싸움까지, 전부 두 사람의 자작극이었고 자신은 저들에게 보기 좋게 이용당한 것이 아닌가.
“심 도우, 그대에게는 실로 미안하게 됐습니다. 다만, 그대에게는 절대로 악의가 없으니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만수진인의 목소리가 갑자기 머릿속에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바로 마당 주위에 있는 안개에서 흘러나왔다.
심협은 당황스러웠다. 만수진인은 주위 안개에 숨어 있었고, 심지어 전음을 보내는 데에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이는 그가 이 마당에 있는 중요 금제를 온전히 장악하여 환무(幻霧)의 힘을 막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눈앞의 국면은 마치 오리무중 같았지만, 사실은 모두가 만수진인과 염열 사형제에게 조종당하고 있었던 셈이다. 다만, 만수진인이 전음으로 상황을 설명해준 것으로 봐서는 실제로도 자신을 적으로 여기지는 않는 듯했다.
“만수 도우의 지략에 감탄했소.”
심협은 정신을 차리고 전음으로 대답했다.
“심 도우,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상황은 내가 설계한 게 아니오. 나도 교역회에서 벽해요어 알을 내놓을 때까지는 염 사형을 못 알아봤지요. 한데 교역회가 끝나고 나서 그에게서 모든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여기로 오기까지도 그의 지시대로 움직인 것이오. 그렇게 방금각의 세 명과 전삼칠을 속여서 암부로 끌어들였지. 허나 저와 염열 사형 모두 심 도우에게는 전혀 악의가 없으니 저들을 처리하고 나면 바로 보내드리겠소. 답례도 섭섭지 않게 하리다.”
만수진인이 미안한 마음이 가득 담긴 전음을 보내왔다.
“답례는 됐소. 그저 무사히 내보내주면 족하오. 나는 방금각이나 백검문과의 싸움에 휘말리고 싶지 않으니 말이오.”
“당연히 그래야지요!”
만수진인은 기쁜 듯 말했다.
“전부 네놈과 만수진인의 함정이었던 것이냐!”
전삼칠은 냉담한 목소리로 외쳤고, 도향은 말없이 코를 찌르는 특이한 향이 나는 핏빛 단약을 삼켰다. 그러자 그녀의 잘린 팔에서 혈광이 빠르게 감돌더니 순식간에 새로 난 살이 뒤엉켜 이전의 것과 차이가 없는 팔이 다시 자라났다.
“너희 방금각과 백검문이 그때 스승님을 죽였지만, 그가 평생 간직하던 것을 얻지 못하고 그저 동화선부에 관한 정보만을 듣고는 부리나케 달려왔구나. 허나 당시에는 우리 제자들이 불초하여 복수하지 못했다. 그러니 이렇게 계략을 써서라도 너희를 죽이겠다. 이 정도는 이자를 먼저 받는 셈 치자고! 하하하!”
염열이 도향의 팔을 힐끗 보고 음흉하게 웃더니 양손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하얀 빛이 번득였다. 뒤이어 마당 위의 허공에 하얀 진문이 떠오르더니 빠르게 커지면서 거대한 진법의 힘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그 아래 있는 사람들은 모두 몸이 무거워졌다.
“귀등상인 그리고 심 도우, 지금 우리는 염열과 만수진인의 간계에 빠졌습니다. 우리가 죽고 나면 두 도우도 무사할 리가 없습니다. 지금은 힘을 합쳐서 살아남아야 합니다. 저들에게 각개격파를 당하면 우리는 모두 죽을 겁니다!”
도향이 어두워진 얼굴로 갑자기 귀등상인과 심협에게 외쳤다.
이에 귀등상인은 안색이 돌변했고, 머리를 굴리는 듯하더니 염열에게 외쳤다.
“염열 도우, 난 그대들의 싸움에 끼어들 생각이 없으니 날 바로 내보내 줄 수 있겠소?”
염열은 못 들은 척하고 계속해서 주문을 외웠다.
“귀등 도우, 헛된 꿈은 버리세요. 그대도 이미 동화암부의 위치를 알았으니 염열이 살려줄 리 만무합니다!”
도향이 차갑게 웃으며 말하자 귀등상인의 안색이 다시 변했고, 그는 마침내 도향 등 옆으로 날아와 섰다.
심협도 도향의 마지막 말에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만수진인과는 약간의 친분이 생겼지만, 염열이 암부의 위치를 숨기고 싶다면 자신을 안전하게 내보내줄 리 없었다. 아무리 천살시왕이라는 태을의 조력자가 있다 해도 이 동화산선의 동부에 어떤 대단한 금제가 숨겨져 있을지 모르니 승리를 장담할 수 없으리라. 본래 눈앞에서 찌르는 창은 피해도 몰래 쏘는 화살은 막기 어려운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