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8화. 시치미를 떼다
그때, 하얀 빛이 멀리서 날아오더니 금세 도착했다.
빛이 서서히 사라지자 방금각 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 분의 안색을 보니 만수진인을 또다시 놓친 모양이오?”
유홍이 미묘한 표정으로 말했는데, 꽤나 고소해하는 것 같았다.
“그렇소. 만수진인은 벌써 암부로 들어갔고, 지금쯤이면 안의 보물을 싹 다 챙겼을 거요. 세 분도 헛수고 말고 돌아가시오.”
귀등상인이 차갑게 웃으며 대꾸했다.
이에 유홍이 싸늘한 표정으로 되받아치려는 순간이었다.
“그만! 무의미한 말싸움은 여기까지. 염열 도우, 이곳에 정말 암부가 있는 겁니까? 만수진인은 이미 들어갔고요?”
도향이 염열을 바라봤다.
“그렇소. 내가 직접 봤소. 그자가 설마 암부를 찾아낼 줄이야. 내가 너무 얕잡아본 모양이오.”
염열이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도향은 앞의 산벽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결인을 했다. 그러자 만리권운의 끝이 마치 거대한 푸른색 채찍처럼 산벽을 강하게 때렸다.
콰쾅!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산벽에서 튀어나온 하얀 빛이 가볍게 만리권운의 일격을 막아냈다.
“입구가 정말 여기인가 보군요. 금제도 평범해 보이지 않소. 한데 염 도우는 분명 동화산선 제자의 후예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럼 금제에 관한 단서가 있을 거 같은데요.”
“이곳의 금제는 동화산선의 비전인 옥허단정대진(玉虛丹鼎大陣)일 거요. 부수기는 쉽지 않으나 다행히 선조께서 단정대진의 진도를 남기셨지. 우리 여섯 명이 힘을 합치면 금방 부술 수 있을 겁니다.”
“좋아요. 그럼 바로 시작하죠.”
도향이 환하게 웃으며 답했으나 염열은 머뭇거렸다.
“염열 도우, 만수진인이 이미 암부로 들어갔습니다. 더 머뭇거리면 보물은 모두 그의 차지가 될 겁니다.”
도향의 말에 염열은 몸이 움찔하더니 전삼칠, 귀등상인과 눈빛을 교환했고, 이어서 진도를 꺼냈다.
* * *
눈앞이 끝없는 하얀 빛에 뒤덮였다가 잠시 후에 원래대로 돌아왔을 때는 넓은 대전 안이었고, 옆에는 만수진인이 서 있었다.
대전은 폭이 8장 정도였고, 하나같이 영롱한 백옥으로 지어져 있었으며, 곳곳에 아름다운 꽃무늬와 조각이 새겨져 있어서 범상치 않아 보였다.
“함축된 영기와 따듯한 빛깔. 설마 저게 다 난양백옥(暖陽白玉)인가?”
만수진인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심협도 주위 대전을 둘러보다가 깊은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넓고 큰 옥으로 만든 탁자가 있었는데, 그 위에 몇 척 크기의 사각형 비단 천이 덮여 있었다. 아랫부분이 조금 튀어나온 것이 어떤 물건을 덮고 있는 것 같았다.
만수진인도 대전 깊은 곳의 탁자를 발견하고는 눈을 반짝이며 곧장 다가갔다.
이를 본 심협은 말리려다가 그만두고, 신식으로 대전 안의 상황을 살폈다. 아무런 이상이 없었고, 심협은 그제야 탁자 앞으로 향했다.
만수진인은 푸른 빛으로 비단 천을 감싸 옆으로 던져놓고는 그 아래의 물건을 살폈다.
은근한 법력 파동이 뿜어져 나오고 있는 2척 크기의 옥합 두 개가 있었다. 그 안에서는 보광이 새어 나오고 있어서 딱 봐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역시 보물이 있군!”
만수진인이 기뻐하며 손을 뒤집었다.
푸른 빛이 뒤덮자 두 개의 옥합에서 갑자기 두 줄기 하얀 빛이 솟구쳐 나와 만수진인을 제지했다.
“금제!”
만수진인이 가볍게 외치고는 손에서 푸른 빛을 더 강하게 뿜어냈다. 빛은 거대한 푸른 손바닥으로 변하더니 두 줄기 하얀 빛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수많은 수뇌가 손에서 흘러나와 옥합 주위의 하얀 빛을 감싸고 몰아내기 시작하면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만수진인이 힘으로 금제를 부수려는 동안 심협은 굳이 나서지 않고 옆에서 조용히 지켜봤다.
옥합 주위의 하얀 빛은 평범한 금제라 만수진인의 힘으로도 문제가 없었다.
심협은 대전의 다른 곳을 돌아다니며 살펴봤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거울 요괴를 소환하여 바깥의 염열 등을 막아냈지만, 지금쯤이면 방금각 사람들도 밖에 도착해 있을 테니 최대한 빨리 찾아야 했다.
대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살피던 심협은 눈이 커지더니 바닥에서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만수진인이 아까 버렸던 사각형의 비단 천이었다.
이 물건은 회백색에 재질은 매우 거칠어 평범한 농가에서 짠 투박한 천 같았다. 그 위에 아무렇게나 수놓은 꽃무늬는 아름답지도, 우아하지도 않았다.
이 비단 천에서는 어떤 법력 흔적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옥합 두 개의 영력 파동을 전부 뒤덮을 정도였으니 평범한 법기는 아닐 터였다.
하지만 그가 신식으로 살펴봤을 때, 그 안에서 신식을 운공하기가 조금 힘들다는 것 외에는 다른 이상한 점은 없었다.
“어, 그 비단 천 뭔가 이상한데? 나 좀 보여줘.”
화령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
“너도 그렇게 생각해?”
심협은 이 물건을 자세히 살펴볼 겨를이 없었기에 비단 천을 명화연노 안으로 넣었다.
화령자는 명화연노에서 나오더니 비단 천을 신중한 표정으로 살피면서도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이게 뭔지 알겠어?”
심협이 잠시 후 전음으로 물었다.
화령자는 비단 천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대답 없이 손을 들어 허공을 움켜잡았다.
보라색 불꽃이 허공에 나타나더니 비단 천을 감싸고 태우기 시작했다. 이 불꽃은 바로 명화연노 안에 담긴 자심지화(紫心地火)였다.
사각형의 비단 천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는데, 마치 자심지화가 천 안의 수많은 불순물을 끊임없이 연화하는 것 같았다. 이에 따라 본래 회백색이었던 비단 천의 색이 점점 순백으로 변해갔다.
이 광경을 본 심협은 깜짝 놀랐지만, 이내 시선을 거두고 대전의 다른 곳을 둘러보다가 어딘가로 푸른 빛을 쐈다. 푸른 빛이 사라지자 그 안에 있던 어린 물고기는 자유를 찾았고, 바로 대전 깊은 곳에 있는 벽을 향해 날아갔다.
심협은 신식으로 그 벽을 살펴봤다. 벽에서는 미약한 법력 파동이 느껴졌다. 만약 그의 신식이 강하지 않았다면, 저 어린 물고기가 그 벽을 향해 달려가지 않았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사실 그가 벽해요어를 풀어준 것도 그 감지 능력을 이용해 다른 단서를 찾기 위함이긴 했지만, 이렇게 쉽게 찾을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심협은 벽해요어를 막지 않았다. 한데 기이하게도 그 물고기는 벽에 부딪히자 바로 사라져버렸다.
심협은 흠칫 놀라더니 곧장 그 벽 앞으로 다가갔다. 다만 경거망동하지 않고 유명귀안을 운공해 눈에서 두 줄기 푸른 빛을 뿜어냈다.
벽이 천천히 투명하게 변하면서 그 안에서 푸른색 영문이 나타났다. 바다처럼 깊고 심오한 그림은 마치 벽 안에 진짜 바다가 숨겨져 있는 것 같아서 실로 장관이었다.
“이건……?”
심협이 깜짝 놀라 자세히 살려보려는 그때,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부서졌다!”
만수진인의 기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협이 돌아보니 만수진인이 옥함 주위의 하얀 빛을 부수고 두 개의 옥합을 들고 있었다.
“심 도우, 약속대로 절반씩 나눕시다. 이 옥합은 도우 것이오.”
만수진인은 망설임없이 옥합 하나를 던졌다.
심협은 사양하지 않고 옥합을 받고 바로 열어봤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깃털 부채였다. 묵옥(墨玉)으로 만든 손잡이가 달린 부채는 일곱 개의 깃털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외형도 색깔도 기운도 모두 달랐다. 일곱 종류의 다른 영금(靈禽) 깃털로 만들어진 것이다.
부채에서 느껴지는 화염의 기운은 위력이 상당해 보였다.
“이건……?”
심협의 눈이 살짝 커졌다.
“오화칠금선(五火七禽扇)! 아니, 오화칠금선은 상고 중보이니 위력이 겨우 이 정도일 리가 없는데……. 아무래도 모조품 같군. 어렵게 태초봉황(太初鳳凰), 천청란(天靑鸞), 금시대붕(金翅大鵬), 오광공작(五光孔雀), 창우백학(蒼羽白鶴), 청령홍곡(靑靈鴻鵠), 귀역효조(鬼蜮梟鳥), 일곱 종류의 영금 깃털을 모았지만, 아쉽게도, 공중화(空中火), 석중화(石中火), 목중화(木中火), 삼매화(三昧火), 인간화(人間火), 등 다섯 종류의 상고 진화가 없어서 위력이 크게 떨어진 게지.”
화령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협도 이 부채를 보자마자 오화칠금선의 모조품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이전에 오화칠선금을 모방한 오화선(五火扇)을 가진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당시의 오화선은 아무렇게나 모은 영금의 깃털 몇 개를 기초로 만든, 너무도 엉망인 모조품이었다. 같은 모조품이라도 이쪽이 훨씬 뛰어났다.
비록 다섯 종류의 태고 진화가 없어도 이 부채의 위력은 상품 법보 정도였다.
“화령자, 그 비단 천이 뭔지는 알아냈어?”
그는 부채를 거두고는 전음으로 물었다.
“거의 다 됐다. 다만 이 물건에 불순물이 너무 많아서 연화하고 완벽하게 회복되려면 시간이 필요해. 너한테는 운 좋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구나!”
화령자는 그 비단 천을 언급하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도대체 뭔데?”
심협의 호기심이 자극됐다.
“지금은 말해줄 수 없지. 하지만 안심해라. 적당한 때가 되면 자연히 알게 될 테니까.”
화령자는 다소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일부러 시치미를 떼는 건지 아니면 지금은 말할 수 없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심협은 이제 화령자를 어느 정도 믿었기에 나무라지 않았다. 더욱이 어차피 자신이 비단 천을 가지고 있어봐야 연구할 시간이 없으니 화령자가 연구하는 게 더 편했다.
그 무렵, 만수진인도 자신의 옥합을 열었다. 그 안에는 겉이 둥글고 가운데 네모난 구멍이 있는 오래된 동전이 들어 있었다. 좌우로 날개가 달려 있고 천도(天道) 명문이 은근히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범상치 않아 보였다.
“낙보금전(落寶金錢)! 저건 진품 같은데? 심협, 당장 저걸 뺏어! 낙보금전은 같은 보물은 정말 얻기 힘들다고!”
화령자가 잠깐 놀라더니 곧장 제안했다.
심협도 어디선가 낙보금전에 관한 기록을 본 적이 있었다. 상고 봉신 대전 때 빛을 발했던 중보로, 모든 법보를 공격하여 떨어트릴 수 있다는 전설이 있다.
물론 그도 낙보금전이 탐났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죽이고 보물을 빼앗고 싶지는 않았다. 더욱이 보물을 반씩 나누기로 약조하지 않았던가.
“이 대전에는 또 다른 보물은 없어 보이는군요. 심 도우께서 아까 주위를 둘러보시던데, 뭔가 찾으셨습니까?”
만수진인이 낙보금전을 챙기고는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한데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전의 굳게 닫혔던 입구에서 갑자기 하얀 빛이 번쩍이더니 커다란 빛기둥이 쏟아져 나와 통로가 되었다.
깜짝 놀란 심협과 만수진인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방금각과 염열 무리가 빠르게 날아 들어왔다.
“심가, 네놈이었구나!”
염열이 심협을 보더니 표정이 돌변했고, 귀등상인과 전삼칠도 깜짝 놀랐다.
“흥! 네놈이 누구든 만수 놈과 결탁한 이상 죽어 마땅하다. 목숨을 내놓아라!”
염열이 놀란 뒤 바로 평정을 되찾고 양손을 빠르게 결인했다.
수많은 흑홍색 불꽃이 몸에서 쏟아져 나오더니 순식간에 불꽃의 바다로 변하여 심협과 만수진인을 덮쳐갔다.
심협이 막아내려 하는데, 옆에서 만수진인의 몸이 갑자기 푸르게 번득이더니 손 위로 짙은 푸른색의 커다란 깃발이 나타났다. 깃발에는 수많은 산과 강 등이 그려져 있어서 한눈에 봐도 수속성 보물임을 알 수 있었다.
“만수기(萬水旗)!”
도향이 깜짝 놀라 외쳤다.
이 깃발은 만수진인의 본명법보로, 남해 해약과 무은사해 일대의 진선기 수사라면 거의 다 알고 있었다.
“만수대진(萬水大陣)!”
만수진인이 수중의 푸른 깃발을 흔들자 파도가 넘실거리며 나타나더니 파도대진(波濤大陣)으로 변하여 흑홍색 불바다와 충돌했다.
꽈르릉!
붉은색과 푸른색의 빛이 격렬하게 충돌하자 섬뜩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흑홍색 불바다는 완전히 막혀서 더는 나아가지 못했다.
도향 등 다른 사람들도 맹렬하게 쏟아지는 푸른 바다에 막혀 일순 접근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