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880화 (880/1,214)
  • 880화. 천기성

    심협의 심장이 뚫리려는 순간, 앞에서 갑자기 파동이 일어나더니 금색 날개를 펼친 노란색 간시(干尸)가 나타나 막아섰다.

    챙!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고, 노란색 간시의 가슴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소효 장로의 초록빛 칼날은 간시의 가슴을 관통하지 못하고 막혀 버렸다.

    그의 정신이 돌아오기도 전에 간시는 차갑게 번득이는 노란 두 손으로 잔영을 남기며 소효를 잡으려 했다.

    소효는 깜짝 놀라 몸에서 빛을 뿜어내며 단숨에 물러났다.

    심협과 천살시왕도 그를 쫓지 않았다.

    소효는 매우 난감한 표정이었다. 방금 피함으로써 자신의 패배를 인정한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대는 천기성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이리 강한 언갑을 가진 것이오?”

    소효가 물었다. 그도 당연히 천살시왕의 강력함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심협은 대답 대신 그저 시왕으로 몸 앞을 보호하게 했고, 한 손에는 현황일기곤을, 다른 손에는 순양검을 불러들여 옆을 보호했다.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소효의 공격에 대비한 것이다.

    “심 도우, 그대가 이겼습니다.”

    청구 국주가 선언했다.

    그제야 심협은 그녀와 눈을 마주친 후 모든 법보를 거두었다.

    이 무렵, 소효는 땅으로 내려와 섰는데, 대장로의 눈총을 받고는 난감함에 어쩔 줄을 몰랐다.

    “소효 장로, 환술을 써서 반칙을 했으니 이는 이초를 공격한 셈입니다. 멈추라던 내 말을 왜 듣지 않은 거죠?”

    국주가 질책했다.

    “국주님, 기세가 너무 강하다 보니 차마 중간에 멈출 수 없었습니다.”

    소효는 태연하게 설명했다.

    청구 국주도 그를 정말로 어떻게 할 수는 없었기에 그저 차갑게 노려보고는 말을 이었다.

    “소효 장로의 일격을 받아냈으니 심 도우의 승리입니다. 모든 죄를 면할 터. 누구도 더는 책망하지 마세요.”

    “잘했어요, 심 오라버니. 정말 대단했어요. 태을기 수사인 소효 장로도 오라버니를 쓰러트리지 못했네요.”

    소효 장로가 노려봤지만, 미소는 혀를 내밀었다.

    “자, 밤새 고생들 했으니 어서 돌아가서 쉬도록 하세요. 심 도우도 오늘 밤은 푹 쉬세요. 내일 궁에서 잔치를 열 것이니 참석하고요.”

    청구 국주가 모든 상황이 끝났음을 선포했다.

    “국주님의 호의에 감사합니다. 다만, 후배는 지금 바로 떠날까 합니다.”

    심협이 꺼낸 의외의 말에 일순 장내가 조용해졌다.

    “그래도…….”

    청구 국주는 말리고 싶었지만, 방금 불미스런 일이 생겼으니 더는 만류할 수 없었다.

    “제게 정말 중요한 일이라 더는 미룰 수가 없습니다.”

    심협은 그렇게 말한 뒤 호불귀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만류할 기회마저 주지 않은 것이다.

    “호형, 이제 어떻게 할 계획이오?”

    “어쨌든 나는 호족이고, 또 오랜만에 호족의 나라에 왔으니 며칠 더 머물까 하오. 급한 일이 있다니, 심형은 먼저 가보시오.”

    호불귀가 잠시 생각한 끝에 말했다.

    다소 의외라 여긴 심협이 이유를 물으려는데, 호불귀의 전음이 들려왔다.

    “심형, 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청구와 나는 인연이 있으니 더 머물러도 괜찮을 거요. 그리고 기회가 되면 청구 호족이 장안의 화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알아보고 싶소.”

    “그렇다면 더는 권하지 않겠소. 부디 몸조심하시오.”

    심협도 전음으로 대답했다.

    미소는 크게 아쉬워하며 더 붙잡고 싶어 했지만, 심협이 확고해 보이자 더는 그럴 수 없었다.

    심협은 모두에게 인사한 뒤 청구국을 떠났고, 금세 조양곡을 빠져나왔다.

    지금은 삼계의 모든 종족과 문파가 겉으로는 화합하나 안으로는 암투를 벌이고 있으니 그들의 전송진을 빌려서 천기성으로 가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었기에 그는 날아서 가기로 했다.

    청구산에서 멀어진 그는 신식으로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는 일곱 자루의 순양검을 꺼내 앞뒤로 연결해 10여 장 길이의 검광을 만들었다.

    순양검 검결의 비술 중 하나로, 여러 개의 비검을 합침으로써 어검의 속도를 배로 높일 수 있었다.

    “가자!”

    심협이 검결을 맺자 기다란 검광에서 커다란 소리가 울리더니 순식간에 하늘 끝자락으로 사라졌다.

    심협의 몸은 검광에 의탁했고, 시전자와 검이 하나가 되어 날기 시작하자 주위의 모든 것이 무서운 속도로 밀려났다. 진시천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속도였다. 진시천리는 빠른 대신 법력 소모가 너무 컸다. 그러니 이제 강력한 적을 만났을 때 탈출할 수단이 하나 더 생긴 셈이 됐다.

    심협은 비검으로 길을 재촉했고,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무은사해 부근에 도착했다.

    현재 흑연 미굴의 화가 이미 사라졌기에 그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무은사해로 들어가 천기성이 있던 곳으로 날아갔다. 반나절 만에 녹주(綠洲: 오아시스)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곳에 도착한 심협은 경악했다.

    녹주는 그대로였지만, 거대했던 천기성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었다.

    “천기성이……? 어떻게 된 일이지?”

    그는 신식으로 주위를 살폈고, 심지어 유명귀안까지 시전했지만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소부자에게서 받은 흑옥반을 꺼내 연락해봐도 대답은 없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그토록 큰 성이 옮겨갔을 리는 없고…… 설마 천기성에 무슨 변고가 생겼나? 하지만 그런 소문은 없었는데…….”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주위를 날아다니며 점점 넓은 범위를 수색했지만, 역시나 아무것도 없었다.

    “어쩔 수 없군. 더 찾아봐야 시간 낭비다. 무은사해와 남해는 멀지 않으니 우선 보타산으로 가자. 채주도 만나고 화련단 상황도 확인해보는 거야.”

    문득 지난번 방촌산에서 너무 정신이 없어서 대화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보낸 섭채주가 떠올라 심협은 그리움이 커졌다.

    생각을 정리한 그가 막 남해 쪽으로 가려던 순간이었다. 저 멀리서 낯익은 둔광 몇 개가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신식으로 살펴본 심협은 크게 기뻐하며 어검을 타고 그들 앞으로 날아갔다.

    “누구냐!”

    선두의 둔광이 제자리에 멈춰 서며 경계의 목소리로 외쳤고, 빛이 사라지고 드러난 얼굴은 차가운 청년, 언무사였다.

    “언형, 나요.”

    심협도 검광을 없애고는 모습을 드러냈다.

    “심형!”

    심협을 보자 언무사도 크게 반가워했다.

    그의 뒤에 있던 둔광에서도 천기성 제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심협이 알고 있는 임감과 주명도 있었다.

    일행은 모두 먼지투성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래도 먼 길을 갔다 온 듯했다.

    “심 도우, 천기성에는 왜 또 온 것이오?”

    임감이 심협을 보더니 의외라는 듯이 거침없이 말했다.

    “임 사제, 무례를 범하지 말게!”

    언무사가 황급히 호통쳤다.

    “괜찮소. 임감 도우의 말도 일리가 있지. 성주님께 부탁드릴 일이 있기도 하고, 지난번에 부탁해둔 일도 있어서 들렀소.”

    심협은 개의치 않고 웃으며 말했다.

    “보물 제련 말이오? 성주님께서 며칠 전에 천기성으로 돌아오셔서 말씀해주셨소. 안 그래도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빨리 왔구려.”

    언무사가 웃으며 말했다.

    “성주님께서 재료를 모두 모으셨답니까?”

    “그렇소. 모든 준비가 끝난 모양이오.”

    “잘됐구려!”

    심협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나저나 천기성은 정말 신출귀몰하오. 천기성이 있던 녹주에 갔는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니 말이오. 그래서 사해를 돌아다니며 찾다가 포기하고 돌아가려던 참이 아니겠소?”

    심협이 쓰게 웃었다.

    “아, 심형에게 알려주지 않았구려. 천기성은 일정 기간마다 공간나이대진(空間挪移大陣)을 발동해 성 전체의 장소를 옮긴다오. 본파에서 삼계 각 종문에 전송진을 설치한 이유이기도 하지.”

    언무사가 이마를 탁 치며 말했다.

    “그랬군요. 한데 왜 그러는 것이오? 천기성이 아무리 신통하다 해도 매번 성을 옮기려면 소모가 적지 않을 텐데…….”

    “그건 나도 모르겠소. 듣기로는 천기성이 생겨났을 때부터 쭉 그랬다는구려.”

    심협도 더는 묻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종문으로 돌아가는 길인데 함께 가는 게 어떻겠소?”

    “물론이오. 그리고 언형의 진선기 돌파를 감축드리오.”

    심협은 대번에 동의하고는 웃으며 언무사에게 축하를 건넸다.

    언무사의 몸에서 솟구치는 기운은 이미 진선기로 돌파한 것이 분명했고, 미간에서는 은은하게 정광이 비치는 것이 신혼의 힘도 비약적으로 증진한 듯했다.

    “심형에게 비교하면 내 정진은 아무것도 아니오.”

    언무사는 자신의 경지를 언급하자 갑자기 기분이 가라앉은 듯 쓴웃음을 지었다.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느낌마저 들었다.

    심협은 최근에 얻은 비전(祕典), 운사여전결, 부주진신법 등 다양한 신혼 비술을 수련했기에 감지 능력이 더욱 날카로워진 터였다.

    “언형, 최근 별일은 없었소?”

    심협이 본 언무사는 이상할 정도로 암울했다. 마치 모든 것이 무너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 뭔가 커다란 변고가 일어난 게 분명했다.

    “괜찮소. 일이 있어봐야 뭐 그리 대수겠소? 어서 갑시다.”

    언무사는 고개를 저으며 얼버무리더니 먼저 출발했다.

    이에 심협도 더는 묻지 않고 뒤를 따랐다.

    “모두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가는 길입니까?”

    심협이 몇 사람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다오. 귀언이 남긴 물건을 찾으라는데, 아무리 찾아도 단서 하나 없으니……. 괜히 시간만 낭비했소.”

    임감이 불평을 터뜨리자 언무사가 차갑게 노려봤다. 이에 실언을 깨달은 임감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심형이 남도 아니고 우리 사정을 잘 알고 있으니 숨길 게 뭐가 있겠소? 이전에 흑연 미굴에서 귀언을 죽였지만, 많은 것을 아직 찾지 못했소. 아마 무은사해 어딘가에 떨어진 듯하여 지금 샅샅이 수색하는 중이오.”

    언무사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심협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으나, 속으로는 무척 미안했다. 천기성이 찾는 물건은 아마도 천기권 후반부일 것인데, 지금 자신의 손에 있지 않은가.

    ‘이미 연구는 끝냈으니 나중에 기회를 봐서 돌려줘야겠군.’

    그들의 둔속은 범상치 않았기에 한 시진도 지나지 않아 다른 녹주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거대한 천기성이 우뚝 솟아 있었고, 이전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언 사형, 함께 오신 분은 누구십니까?”

    심협 등이 멈춰 서자 몇 사람이 천기성의 호성금제에서 날아왔다. 선두는 진선기 언사였다.

    “이분은 심협 도우다. 본문이 큰 은혜를 입었지. 성주님의 명을 받아 데리고 들어갈 것이니 막지 마라.”

    언무사의 말에 심협은 코를 긁적였다. 천기성의 경비가 이전보다 더 삼엄해진 것 같았다.

    “심 도우셨군요. 성주님의 명이 있었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진선기 언사가 심협에게 인사하고는 길을 열어줬다.

    그들은 호성금제를 지나 성안으로 들어갔다.

    천기성 안은 이전보다 더 떠들썩했고, 거리마다 오가는 인파가 훨씬 많았다.

    하성(下城) 서북쪽의 광장에는 커다란 무대가 세워져 있었는데, 어떤 행사가 열리는 듯했다.

    “엄청나군요. 천기성에서 무슨 연회라도 여는 것이오?”

    심협이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연회는 아니고, 본문이 최근에 새로운 언갑과 법보를 제련했소. 성의 규율대로 대중 앞에서 언갑과 법보의 위력을 선보이고 외부 수사들의 품평과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오. 그 일로 성안이 시끌벅적한 게요.”

    “그렇구려.”

    “심형, 요 이틀 동안 성주님은 또 폐관 중이시니 내가 가서 알리겠소. 하성에서 조금만 기다려주시오.”

    언무사가 미안한 듯 말했다.

    “알겠소.”

    심협도 서두르지 않았다.

    언무사는 심협에게 수행원을 붙여줬다. 이번 역시 주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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