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878화 (878/1,214)
  • 878화. 금제를 건드리다

    심협과 호불귀 일행은 청구국 국주와 유소모주에게 인사한 뒤 먼저 황궁을 나섰다.

    “보니까 청구 호족은 인간족과 선족에게 불만이 꽤 있어 보이던데……?”

    “그게…… 음, 어떻게 말해야 하지? 우리 청구 호족은 상고 이래 줄곧 인간족과 굳건한 동맹이었어요. 그렇죠?”

    미소는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몰라서 생각하다가 반문했다.

    “그랬지.”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인간족이 조금씩 동맹을 무시하더니 우리를 단순히 요족으로 분류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청구 호족은 조양곡 안에서만 살아야 한다고 그러질 않나, 저희를 제한하고 경계하면서 우리 일족이 다른 곳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어요.”

    미소의 표정이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이 말을 들은 심협도 가슴이 뜨끔했다. 그 역시 무의식적으로 ‘청구 호족은 청구 지역에서 살아야 한다’고 여겨왔기 때문이다.

    한 명만 이렇게 생각한다면 모를까, 인간족 전체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대당은 국경을 조양곡 밖까지 확장해놓고는 우리 종족은 아무리 번성해도 조양곡을 벗어나지 못하게 했죠. 한번 나가기라도 하면 바로 대당 국경을 침범했다고 간주했어요. 상황이 이러니 일족의 장로님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청년들도 대당과 인간족 그리고 선족에 불만을 품기 시작했죠.”

    “인간족과 요족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이 말을 들은 호불귀는 혼자서 중얼거렸고, 심협은 할 말을 잃었다.

    “그래도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에요. 적어도 국주님과 일부 장로님들은 어렵게 얻은 평화가 더 소중하다고 생각해서 인간족과 전쟁을 원하지 않아요.”

    미소가 웃으며 말했다.

    이 부분은 사실 심협도 알 수 있었다. 이것도 청구족이 일종의 타협을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세 사람은 금세 유소모주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미소야, 추 파파 등이 너희 가신이었던 게 사실이야?”

    “네, 부모님은 제가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쭉 추 파파께서 절 돌봐 주셨어요.”

    추 파파 이야기가 나오자 미소는 기분이 가라앉았다.

    “이왕 온 김에 그들의 거처를 보여줄 수 있을까?”

    “거처요? 음, 좋아요. 할머니는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으니까 가 봐도 될 거예요.”

    미소의 안내를 받은 심협과 호불귀는 저택의 어느 뜰에 도착했다.

    그곳은 크지 않았지만, 매우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살림도 간단해 한참을 찾아봐도 아무런 단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애초에 큰 기대는 없었기에 심협은 실망하지 않았다.

    저녁 무렵, 미소의 극진한 대접에 두 사람은 낮에 겪은 불쾌함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보름달이 높이 올라가자 미소는 심협 등에게 유월담을 보러 가자고 졸라댔다. 심협과 호불귀는 거절하지 못하고 어린 소녀에게 끌려 나갔다.

    청구국에 달빛이 비치자 곳곳에서 돌로 만든 건물이 희미한 빛이 발했다. 성안에는 등불만 밝혀져 있을 뿐 행인이 드물어 한없이 조용했다.

    심협은 걸을수록 마음이 한결 느긋해졌다.

    세 사람은 미소가 할머니로부터 받은 영패로 성문을 나섰고, 한참을 걸어 침엽수림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높고 촘촘한 침엽수림으로 들어갔고, 숲을 빠져나오기 전에 저 앞의 반짝이는 빛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침엽수림을 빠져나오는 순간, 시야가 확 트이면서 하얀 조약돌이 깔린 얕은 호수가 보였다.

    그 뒤로는 달빛이 비치는 초승달 같은 넓은 호수가 눈에 들어왔다.

    거꾸로 비친 둥근 달의 그림자는 마치 쪼개고 으스러진 것처럼 수많은 빛으로 변하여 호수 전체로 퍼졌다.

    미풍이 불자 촘촘한 물결이 출렁였고, 물결에 깔린 달빛도 함께 흔들렸다. 천천히 퍼진 빛은 호수 맞은편의 산벽에 부딪쳤다.

    달빛의 물결이 칼로 자른 것처럼 평평하고 매끄러운 산벽에 비치자 마치 또 다른 호수처럼 하늘의 둥근 달과 물속의 달빛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었다.

    심협은 그 산벽에 새겨진 세 글자를 보았다. 이 호수의 이름인 유월담(幽月潭)이었다.

    “이 정도로 크면 담(潭)이 아니라 호(湖)라고 불러도 되지 않아? 왜 유월담이라고 하는 거야?”

    “원래는 청구산과 멀리서도 통한다고 하여 청구호(靑丘湖)라고 불렸어요. 그런데 어느 인간족 검객이 우리 일족에 손님으로 왔다가 이름을 바꿨죠.”

    “남의 영역에서 이름을 함부로 바꾸다니, 뭐 그런 사람이 다 있지?”

    심협이 실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추 파파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그 패기가 넘치는 인간족 검객이 이전에 대당 운주(雲州)에서 청구호와 매우 비슷한 호수를 봤는데 그 크기가 여기보다 열 배가 넘고 이름이 유월호였대요. 그래서 이곳의 경치가 훌륭하니 유월담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좋겠다고 말하고는 취기를 빌려 절벽에 이름까지 새겨버렸죠.”

    “그래서 저 글자에 검기의 흔적이 남아 있는 거구나.”

    심협이 혀를 차며 말했다.

    “휴우, 처음에는 일족 모두 화가 났지만 그자는 주머니가 두둑했고, 하얀 옷에 예사롭지 않은 그를 보고 수많은 소녀들이 마음이 동하여 그가 떠난 뒤로 유월담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청구호의 이름은 점점 잊혀졌어요.”

    미소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초승달과 같은 모양에 달빛이 비치니 하늘의 보름달보다 더 운치가 있군. 그자가 이름을 훌륭하게 바꿨어.”

    호불귀도 산벽의 세 글자를 보더니 감탄했다.

    호수에 비친 달빛을 보며 위태로운 평화를 누리고 있던 중, 심협의 표정이 갑자기 변했다.

    그가 옆을 돌아보니 호불귀의 얼굴에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이 기운은……? 장안성에 나타났던 여우의 허상의 기운과 똑같아!”

    호불귀가 중얼거렸다.

    “무슨 소리예요?”

    미소가 이해하지 못하고 물었다.

    “저쪽이군.”

    심협은 대답 대신 눈을 반짝이며 뒤쪽 먼 곳에 있는 산을 돌아봤고, 곧장 날아올라서 맹렬히 날아갔다.

    “심 오라버니, 그쪽은 가면 안 돼요!”

    미소가 깜짝 놀라 서둘러 말렸다.

    미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심협은 무지개로 변하여 멀리 있는 산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청구산 중턱에 도착한 그는 멀지 않은 곳에서 팔각형의 작은 제단을 보았다. 그 위에는 어두운 등불이 켜져 있었다.

    미소와 호불귀도 곧 도착했다.

    심협은 눈에서 기이한 광채를 내뿜으며 영목신통으로 무언가를 찾으려 했다.

    만류하려던 미소는 심협의 심각한 표정 앞에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떻소? 뭔가 찾았소?”

    한참 뒤에야 호불귀가 물었다.

    “아무것도 없소. 방금 그 기운이 출현한 것은 너무 짧은 순간이었으니…….”

    심협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래도 우리 두 사람 모두 감지한 것을 보면 잘못 느낀 건 아닐 게야.”

    “미소야, 너희…….”

    그제야 무언가를 물으려 미소를 돌아본 심협은 그녀가 잔득 긴장한 채 주위를 둘러보는 모습에 의아했다.

    “심 오라버니, 아무래도 우리…… 사고 친 거 같아요.”

    미소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위가 갑자기 밝아지더니 붉은 불꽃이 눈앞에서 연달아 피어오르면서 화룡이 주위를 맴돌았고, 그들은 순식간에 포위됐다.

    뒤이어 용의 포효가 울려 퍼지더니 불꽃의 거대한 존재가 천천히 떠올랐다.

    심협 등은 깜짝 놀라 그 존재를 돌아봤다. 10장 크기의 화염 거인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몸에는 불꽃의 갑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화염 장도가 걸려 있는 거인이었다. 얼굴은 희미했지만, 깊은 눈매에서는 통찰력이 엿보였다.

    “누가 감히 청구 호족의 성지에 들어온 것이냐?”

    화염 거인이 호통을 치자 천둥이 울리는 것 같았다.

    “큰일이에요. 저희가 호산금제(護山禁制)를 건드리는 바람에 대진이 발동했어요. 태을 수사도 이를 파훼할 수 없다고요. 우린 이제 죽었어요.”

    미소가 절망한 목소리로 울먹였다.

    “후배가 무지하여 함부로 들어왔습니다. 침범할 뜻은 없었으니 부디 양해해 주십시오.”

    심협이 공손하게 포권했으나, 화염 거인은 그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았는지 차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성지에 침범한 자, 죽어라!”

    마지막에 ‘죽어라’라는 말과 함께 거인이 허리춤의 장도를 뽑았다. 도의 날에서 불꽃이 피어오르더니 순식간에 길이가 8장에 이르는 거대한 대도로 변했다.

    이를 본 심협은 곧장 현황일기곤을 꺼내 들며 화염 거인을 노려보았다.

    “죽어라!”

    화염 거인은 포효와 함께 대도를 내리쳤다.

    뜨거운 열기가 담긴 강력한 압박감이 심협 등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심협은 황급히 미소를 옆으로 밀쳐내고는 양손으로 현황일기곤을 꽉 쥔 채 들어올려 막았다.

    챙!

    금속끼리 충돌하는 소리가 격렬하게 울려 퍼졌고, 심협은 두 팔이 심하게 흔들렸다. 위에서 전해지는 강력한 힘을 버티지 못한 그는 온몸이 떨려왔고, 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온 다음에야 그 힘을 버텨낼 수 있었다.

    하지만 곧바로 뜨거운 염화의 힘이 현황일기곤을 타고 번졌고, 순식간에 귀밑머리가 타들어갔다. 어찌나 뜨거운지, 그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챙! 챙! 챙!

    화렴 거인은 일격에 심협을 쓰러트리지 못하자 잠시도 멈추지 않고 힘차게 장도를 내리쳤다. 장도의 불꽃이 마치 폭우처럼 끊임없이 떨어졌다.

    불꽃이 이마에 떨어지자 화끈한 통증과 함께 머리가 뚫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크윽!”

    심협은 신음하며 황정경 공법을 운공하여 순식간에 기운을 폭발시켰다.

    이마에 핏줄이 솟구친 채, 심협은 이를 악물고는 화염 장도의 압박에서 조금씩 허리를 곧게 폈다. 그리고 붉은 빛이 그의 귓가를 스쳐 지나가더니 곧바로 날카로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거대한 불꽃 새가 장검에서 피어오르더니 예리한 위엄을 뿜어내며 화염 거인을 향해 날아갔다.

    화염 거인은 한 손을 떼고는 앞으로 쭉 내밀었다. 그러자 손에서 커다란 불꽃 방패가 나타났다.

    이어 거대한 불꽃 새와 불꽃 방패가 충돌했다.

    꽈르릉!

    굉음이 울려 퍼졌고, 불꽃 방패가 폭발하면서 수많은 불꽃으로 변하여 점점 사라졌다. 하지만 불꽃 새도 기세가 완전히 꺾여 무력하게 화염 거인의 가슴속으로 쏙 들어갔다.

    “말도 안 돼!”

    이 광경을 본 심협은 눈살이 찌푸려졌다. 순양검과의 연결이 끊어져 갑자기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순양검은 심협이 직접 온양하였기에 서로의 연결은 다른 법보보다 훨씬 긴밀했다. 이처럼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돌아와!”

    심협이 심신을 가다듬고 법력을 발동하여 순양비검을 소환하려 했으나,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화염 거인이 장도를 움켜쥔 손을 휘두르자 도의 날에서 불꽃이 톱니 모양처럼 피어올라 다시 한번 심협 등을 노리고 내려왔다. 허공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압박감에 공간마저 굳어버린 것 같았다.

    심협은 몸이 무거워져서 동작이 느려졌다.

    “심 오라버니, 호 오라버니! 어서 도망쳐요!”

    미소는 크게 외치고는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화룡으로 둘러싸인 불꽃도 마찬가지로 기세가 폭발하여 불꽃이 10여 장 높이로 솟구쳤고, 작열하는 불꽃 장벽이 그들을 에워쌌다.

    미소가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불꽃 장벽에 충돌하려는 순간, 멀지 않은 곳에 있던 호불귀가 그녀를 가까스로 잡았다.

    심협은 당연히 이곳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기에 현황일기곤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나 전혀 물러서지 않았고, 한 걸음 내딛더니 곤봉을 어깨에 걸친 채, 산을 메고 달을 쫓을 기세로 맹렬하게 뛰어올랐다.

    웅장한 기운이 몸에서 폭발하자 어깨의 현황일기곤에서 눈부신 금빛이 뿜어져 나왔고, 금빛이 점점 뭉쳐져 만들어진 거대한 곤봉의 허상이 화염의 장도와 충돌했다.

    꽈르릉!

    동시에 두 줄기의 붉은 검광이 심협의 소매에서 날아오르더니 서로 합쳐지면서 아까보다 더 강렬한 검기를 뿜어냈다. 하나가 된 검광은 순식간에 화염 거인의 가슴을 깊게 찔렀다.

    꽈르릉!

    굉음과 함께 강렬한 진동이 느껴졌다.

    제단이 있는 광장이 크게 흔들리더니 더할 나위 없는 강력한 폭발의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고, 곧장 주위에 있던 불꽃 장벽을 밀어냈다.

    법진 중앙에 있던 심협 등은 강렬한 중압감에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호불귀의 몸에 걸린 옥패에서 영롱한 초록색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공 모양 광막으로 변하여 그와 미소를 보호했고, 덕분에 둘에게는 큰 지장이 없었다.

    하지만 충격을 정면으로 받은 심협은 몸이 거의 바닥의 청흑색 석판에 박힐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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