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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877화 (877/1,214)
  • 877화. 가신(家臣)

    미소는 심협의 우려를 모르는 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두 사람과 함께 성을 가로질러 산골짜기 깊은 곳, 지형이 가장 높은 곳으로 향했다.

    청구국의 성은 그리 크지 않아서 왕궁도 작은 구역만을 차지하고 있었고, 대장로 등 일족의 주요 인물들은 대부분 그 근처에 살고 있었다.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미소는 매우 기뻤는지 가는 내내 팔짝팔짝 뛰었지만, 막상 정말로 문 앞에 도착하니 긴장감에 주춤거렸다.

    “왜? 할머니께 혼날까 봐 들어가기가 겁나니?”

    호불귀가 놀리며 말했다.

    “네, 겁나요. 할머니는 평소에는 잘해주시는데, 이번에 말도 없이 청구를 떠났다가 큰일에 휩쓸릴 뻔했으니 아마 화가 많이 나셨을 거예요.”

    미소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괜찮아. 우리가 있잖아. 외부인 앞에서 화내시지는 못할 거야.”

    “그렇겠죠?”

    미소는 그의 일리 있는 말에 다소 안심하고는 심호흡으로 마음을 진정시킨 뒤 앞장서서 들어가려고 했다.

    한데 그녀가 문을 열기도 전에 허리가 굽은 노인이 나왔고, 미소를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돌아오셨군요.”

    “칠백(柒伯)!”

    “아이고, 이렇게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만약 좀만 늦었으면 대장로님께서 직접 장안성으로 쳐들어가셨을 겁니다.”

    칠백이라 불린 노인이 환하게 웃으며 말하더니 뒤에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의아한 눈길로 미소를 돌아보았다.

    “여기 두 사람은 심 오라버니와 호 오라버니라고 해. 여기까지 날 데려다주셨어. 심 오라버니, 호 오라버니, 여기는 칠백이에요. 어렸을 때부터 저를 돌봐주셨어요.”

    심협과 호불귀가 예를 올리자 칠백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머뭇거렸다가 답례했다.

    “칠백, 할머니는? 서재에 계셔?”

    미소는 답을 듣기도 전에 마당으로 들어갔다.

    “대장로님은 집에 안 계십니다. 아침 일찍부터 국주님의 부름을 받고 궁으로 가셨습니다. 아마 오후에나 돌아오실 겁니다.”

    “집에 안 계신다고?”

    “그럼 바로 궁으로 갈까?”

    “그래요.”

    심협의 말에 미소가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답했다.

    이 말에 칠백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미심쩍은 얼굴로 심협을 돌아봤다.

    ‘이자가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아씨께서 이렇게 고분고분하신 거지?’

    칠백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아씨, 대장로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시죠. 외부인을 데리고 함부로 궁으로 들어가는 건 옳지 않습니다.”

    “괜찮아, 괜찮아.”

    미소는 개의치 않으며 말했고, 심협과 호불귀도 거리낌없이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세 사람은 왕궁 밖에 도착했다.

    청구국 왕궁은 말이 궁이지 사실 산을 끼고 지은 커다란 성루였다.

    성문 밖에서 세 사람은 또다시 제지당했는데, 이번에는 미소의 신분으로도 어림없었다.

    “대당 장안에서 청구국 국주님을 뵙기 위해 왔습니다.”

    심협은 대당 관부 영패를 꺼내 보이며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대당 관부 사람이라고?”

    갑주를 입은 중년 호위가 심협의 영패를 보고는 눈빛이 바뀌었다.

    “포위해라!”

    그의 외침에 주위의 모든 호위가 바로 무기를 꺼내더니 세 사람을 포위했다.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 우리는 국주님을 뵈러 왔다고요! 그리고 나는 청구 호족이란 말이에요!”

    당황한 미소가 황급히 외치며 법력을 방출하자 뾰족한 귀와 여우 꼬리가 나타났다.

    “흥! 대당 관부 놈들과 함께 오다니, 배신자냐?”

    “뭐라고요? 우리 할머니가 바로…….”

    화가 난 미소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려 하는데, 심협이 선수를 쳤다.

    “아무래도 저희를 못 믿으시는 모양이군요. 순순히 묶이겠습니다. 다만, 포박당한 채로 국주님을 뵙게 해주십시오.”

    정말로 반항할 뜻이 없어 보이자 중년 호위는 반신반의하며 특수 제작된 푸른 덩굴로 세 사람의 양손을 묶은 뒤 성으로 압송했다.

    세 개의 정원을 지나 세 사람은 입구가 둥근 대전 밖에 멈췄다.

    중년 호위는 다른 호위들에게 세 사람을 잘 지키라 명한 뒤 홀로 대전으로 향했다.

    잠시 후, 그는 얼굴이 새파래진 채 달려오더니 심협 등을 풀어주려 했다.

    “손대지 말아요! 이대로 가죠. 편하고 좋네요!”

    미소는 손을 휙 빼서 포박을 풀지 못하게 하더니 그대로 심협 등과 함께 대전으로 들어갔다.

    대전에 들어서니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전 중정(中庭)에 넓은 통로가 있었고, 양쪽으로 반원 모양의 연못이 두 개 있었다. 그곳에는 두 개의 샘구멍이 있었고, 물꽃이 유유히 흘러 다녔으며, 짙은 영기로 자욱했다.

    통로를 지나자 앞마당이 나왔고, 그 뒤편 약간 높은 곳에 황금색 왕좌가 놓여 있었다.

    왕좌에는 설백의 옷을 입은 젊은 여인이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새하얀 긴 머리를 자연스럽게 풀어헤쳤고, 독특한 수정 왕관을 쓰고 있었다. 절세의 미모에 온화한 분위기는 한 번 보면 쉬이 잊히지 않을 정도였다.

    왕좌 앞에는 몇 명이 서 있었다. 가장 앞에는 금발에 검은 도포를 입은 여자였다. 두 개의 커다란 여우 귀가 금발 위로 솟아 있었고, 손에는 은색 지팡이를 쥐고 있었다. 훌륭한 자태였지만, 눈빛은 차갑고 위엄이 넘쳤다.

    어째서인지 심협의 눈에는 왕좌에 있는 여자보다 금발의 여자에게서 더 왕의 위엄이 느껴졌다.

    “국주님을 뵙습니다.”

    심협 등이 왕좌를 향해 예를 올렸다.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왕좌의 여인은 손을 내밀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워서 마치 노래 선율 같았다.

    그녀는 미소의 손에 묶인 덩굴을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더니 중년 호위를 바라봤다.

    “국주님, 그녀가 풀지 말라고 하여…….”

    중년 호위가 바로 무릎 꿇었다.

    “국주님, 제가…….”

    미소가 막 일러바치려고 하는 순간, 매서운 눈초리가 그녀를 향해 날아왔다.

    “무례하다!”

    금발 여인이 나지막하게 호통 치며 손을 휘두르자 미소의 손을 묶은 덩굴이 떨어졌다.

    “할머니!”

    미소가 조용히 투덜거렸다.

    검은 도포 여인의 신분이 심상치 않다 생각했더니, 그녀가 바로 소문의 유소모주였던 것이다.

    유소모주는 미소를 힐끗 보고는 심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대들은 어떤 용무로 여기까지 행차한 것인가?”

    “후배 심협, 단지 미소를 안전하게 데려다주고자 왔습니다. 다만, 이곳에 오고 나니 국주님께 어째서 장안을 공격하셨는지 물어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대가 대당 관부의 대표인가요?”

    청구국 국주의 물음에 심협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누가 대표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이번 사건의 배후가 누군지 알아내는 것이었다.

    “대당 관부의 대표가 아니면 국주님의 설명을 들을 자격이 없는 겁니까?”

    “어린 자가 무례하구나.”

    심협의 질문에 유소모주가 눈을 가늘게 뜨고 차갑게 말했다.

    “심 도우가 오해하셨군요. 설명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겁니다. 우리 청구국도 이게 지금 어찌 된 일인지 모르니까요.”

    청구국 국주가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그녀의 말에 심협은 표정이 조금 풀어졌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도 이 사건에는 다른 배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지금 양국의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으니 부디 청구국에서 서둘러 진상을 밝혀내 대당에 해명하여 더 나쁜 결과가 나오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그 말은, 그대는 우리 청구국이 무고하다는 걸 믿는다는 겁니까?”

    “저는 그저 이번 사건에 의문점이 있으니 귀국(貴國)에서 정확히 조사해주셨으면 하는 겁니다.”

    “의문점은 무슨! 인간족이 우리 청구 호족에 불만을 품은 지 오래니 이걸 빌미로 우리를 치려는 속셈이겠지.”

    매부리코의 청구국 장로가 입을 삐죽거렸다.

    “정말로 그럴 생각이었다면 굳이 피해가 큰 장안을 미끼로 했겠습니까? 아니, 애초에 미끼를 던질 필요나 있었을까요?”

    인내심이 강한 심협이라도 연달아 이런 말을 들으니 조금씩 화나기 시작했고, 결국 차갑게 내뱉은 그의 말에 대전 전체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건방진 놈! 진선 초기 수사 따위가 감히 어디라고 그런 망언을 하는 것이냐?”

    매부리코 수사가 갑자기 화를 내며 말했다.

    “저런 무례한 놈을 봤나!”

    다른 호족 장로도 맞장구를 치면서 대전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모두 입 다무시오!”

    갑자기 호통이 울려 퍼졌다. 줄곧 온화하던 청구국 국주가 마침내 화를 낸 것이다.

    “이번 일의 진상이 어떻든 추 파파 등이 두 번째 습격에 직접 관련된 이상 우리가 내부조사를 해야 하는 건 사실입니다.”

    이 말에 대전은 마침내 조용해졌다.

    모든 장로의 시선이 대놓고 유소모주를 향했다. 추 파파 등은 지금까지 대장로의 가신이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조용히 있던 유소모주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국주님 말씀이 타당하십니다. 다만, 만일을 대비해 대당이 이를 빌미로 공격해올지 모르니 적극적으로 대비하는 게 옳다고 생각됩니다.”

    이 말에 심협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의 말은 설령 정말로 전쟁이 일어나도 전혀 두려울 게 없다는 듯이 들렸기 때문이다.

    “심 도우, 우리 청구는 대당과 적이 될 뜻이 전혀 없소. 이왕 그대도 이번 일에 의심되는 부분이 있다 하니 청구국에 남아서 함께 진상을 조사하여 양국의 결백을 밝혀내는 게 어떻겠소?”

    유소모주가 갑자기 물었다.

    그냥 듣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심협은 다른 의도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했다.

    “이번에 온 것은 미소를 안전하게 데려다주기 위함이었지 다른 일에는 관여할 생각이 없습니다. 이렇게 많은 것을 얘기한 것은 그저 청구와 대당이 정말로 원수가 되어 만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조사는 흥미가 없으니 저는 그만 돌아가겠습니다.”

    “심 도우, 그러지 말고…….”

    “심 도우가 원하지 않는다고 하니 대장로는 강요하지 마세요.”

    유소모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청구국 국주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국주의 말은 선한 의도에서 나온 것임을 심협은 알 수 있었다.

    국주가 이렇게 나오자 유소모주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국주님, 저는 미소를 무사히 데려다주었으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다른 걸 떠나서 심 도우가 미소를 안전하게 데려다줬으니 나에게는 큰 은혜요. 그러니 부디 며칠 동안 머물면서 그 은혜를 갚을 기회를 주시오.”

    “그래요, 심 오라버니. 며칠 더 있어요. 저희가 잘 대접해줄게요.”

    유소모주의 말에 미소도 황급히 덧붙였다.

    “장로님의 호의는 잘 받았습니다. 다만 정말로 중요한 일이 있어서 서둘러 천기성에 가야 합니다. 시간이 촉박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잠깐은 괜찮지 않소? 공적인 일은 공적인 일이고 사적인 은혜는 또 사적인 일 아니오? 미소를 안전하게 바래다준 것은 우리 일족의 큰 은혜이니 아무리 사양해도 부디 대접할 기회를 주시오.”

    “그래요, 심 오라버니. 오늘 밤은 우리 집에서 쉬고 가요. 밤에 제가 우리 일족의 자랑인 유월담(幽月潭)을 보여줄게요. 유월담은 금곡조양(金谷朝陽)만큼이나 유명하답니다.”

    심협도 더는 사양할 수 없게 되자 어쩔 수 없이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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