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6화. 멸국의 환난
심협 일행도 마침내 이곳에 도착했다.
그들은 향양진에서 쉬면서 호불귀의 술병에 술을 가득 채웠고, 향양진을 떠나 조양곡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마을을 나가려던 그들은 대당 관부 군인들에게 제지당했다.
그들을 이끄는 수군수사(隨軍修士)는 대승 초기에 불과해 심협과 호불귀의 경지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지만, 미소에게서 어렴풋이 호족의 기운이 느껴지자 바로 군대를 이끌고 와 포위했다.
“건방진 호족, 감히 마을에 잠입하다니! 정보를 캐내려는 첩자렷다?”
수군수사가 호통을 쳤다.
이 말에 미소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따지려 했는데, 심협이 먼저 나섰다.
“도우께서 오해하셨습니다. 저희는 방금 장안에서 왔습니다. 청구로 가서 호족의 화를 조사하기 위해 가는 길입니다.”
“흥! 내 눈에는 방금 장안성을 공격하고는 도망치려는 것 같은데? 여봐라, 이놈들을 잡아라.”
그 수사가 외치자 포위하고 있던 군인들이 압박해왔다.
이를 본 심협은 어쩔 수 없이 허리춤에서 영패를 꺼내 그 수사에게 보여줬다.
수사는 심협이 꺼낸 대당 관부의 영패를 보고는 잘못이 없음을 확인한 뒤에야 바로 허리를 숙이며 포권했다.
“저는 명령을 따른 것뿐이니 부디 대인께서 양해해 주십시오.”
“그대는 잘못한 것이 없으니 괜찮소.”
심협은 웃으며 영패를 돌려받았다.
수군수사는 그가 정말로 추궁할 뜻이 없어 보이자 속으로 안도했다.
“한데 지금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어째서 분위기가 이렇게 급박해졌소? 며칠 전 우리가 장안을 떠날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대인께서 아직 모르셨군요. 호족의 이번 소동이 상당하여 각 종족이 공동으로 청구국에 해명을 요구했습니다. 대당 관부에서도 며칠 전부터 저희에게 향양군에 주둔하며 조양곡의 움직임을 세심히 지켜보라 명을 내렸지요.”
수군수사는 황급히 설명하고는 잠시 후 걱정스러운 말투로 덧붙였다.
“아무래도 전화(戰火)가 타오를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들은 미소는 표정이 굳었고, 이를 본 심협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들은 규율대로 등록을 마친 뒤 향양진을 나와서 조양곡으로 향했다.
* * *
향양군 밖에는 멀리 떨어진 골짜기 안까지 쭉 이어진 평평한 길이 있었다.
“추 파파 말로는 이 길은 대당 관부에서 지어준 거라고 했어요. 청구국과 대당은 관계가 항상 좋았는데…… 왜 이렇게 됐을까요?”
미소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지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무 걱정 말거라. 우리가 가서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낼 수도 있고, 어쩌면 오해를 풀 수도 있지 않느냐.”
“분명히 오해가 있을 거예요. 오해를 풀고 배후의 흉수만 밝혀내면 우리 청구국의 혐의도 모두 사라지겠죠?”
미소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걱정스런 표정만은 펴지지 않았다.
이를 본 심협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는 호불귀는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그저 이따금 술을 마시며 먼 곳의 산수(山水)를 바라볼 뿐이었다.
세 사람의 복잡한 심경과 달리 조양곡의 풍경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말이 골짜기지, 지형은 험난하지 않았다. 그저 양쪽의 절벽이 매우 높아서 마치 골짜기처럼 보일 뿐이었다.
이 산골짜기 끝에는 높게 솟은 산이 있었고, 바로 청구산(靑丘山)이었다.
골짜기에는 작은 관목(灌木)과 높게 솟은 교목(喬木)이 교차하여 분포해 있었고, 일정 거리마다 흐르는 강물이 보였으며, 가끔은 세차게 흐르는 강이나 맑은 샘물이 지하로 스며들기도 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인적이 조금씩 줄어드는 반면 새소리와 짐승 발소리는 더 많고 더 커졌다.
어린 여우 미소는 심협 옆에서 걸으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또 천천히 내뱉었다.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떠올랐고 표정은 한층 더 밝아져 있었다.
이 어린아이가 며칠 동안 그래도 침착해 보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속으로는 전전긍긍했다는 사실에 심협은 마음이 아팠다.
“미소, 여기서부터 청구국까지는 얼마나 남았지?”
호불귀가 갑자기 물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요. 우리 청구족은 인구가 많아서 최근 몇 년 동안 땅을 계속 넓혔답니다. 앞의 산간 평지를 지나면 이제 마을이 보일 거예요.”
미소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호불귀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을 바라봤다.
세 사람이 금방 산간 평지를 지나자 저 멀리 작은 마을이 보였다.
인간족 마을과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 다만, 호족의 집은 원형의 반지하식 건물이었고, 주위는 둥근 나무로 벽을 세웠으며, 지붕에는 나무판자와 건초를 깔아두었다. 또한, 서로 다른 방향으로 두세 개의 문이 있었다.
마을을 본 미소가 반가워하며 막 날아가려 하는데 심협이 손을 내밀어 막았다.
“잠깐! 뭔가 이상하다.”
지금은 황혼이 지는 때라 집마다 밥을 지을 시간인데 마을은 너무도 조용했고, 밥 짓는 연기도 피어오르지 않았다.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것처럼.
심협은 바로 신식을 펼쳐 살폈는데, 아니나 다를까 마을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떻게 된 걸까요?”
미소가 의아해한 듯, 다시 굳은 얼굴로 물었다.
“가서 살펴보자꾸나.”
심협이 짧게 말하고는 앞서 걸었다. 그 뒤로는 미소가 따랐고, 호불귀는 자연스럽게 뒤를 보호하며 따라왔다.
세 사람이 한 바퀴 살펴보았으나 마을은 질서정연했고, 가옥이 파괴된 흔적도, 싸움이 일어난 흔적도 없었다.
“아무래도 공격을 받은 게 아니라 스스로 떠난 모양이오.”
호불귀가 마을 밖으로 이어진 수레바퀴 흔적을 가리키며 말했다.
“청구국에서 위기를 감지하고는 미리 사람들을 대피시킨 모양이구려.”
심협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더 늦어서는 안 되오. 서둘러 청구국으로 가서 어떻게 된 일지 알아봐야 하오. 만약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면 대당과 청구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거요.”
호불귀의 말에 세 사람은 바로 속도를 높여서 청구국으로 향했다.
* * *
이튿날 새벽녘. 세 사람은 아침 햇살을 받으며 조양곡 가장 깊은 곳에 도착했다. 골짜기 전체에서 가장 협소한 이곳은 좌우로 펼쳐진 높고 매끄러운 산벽이 아침 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휘황찬란했다.
황금빛 아래로 길게 이어진 성이 양쪽 산벽이 겹쳐지는 골짜기에 세워져 있었고, 눈부신 햇살을 받는 그 성에서는 매우 독특한 기운이 느껴졌다.
심협 등은 성 밖에 서서 조용히 눈앞의 이 광경을 바라봤다.
미소는 이미 지겹도록 봐왔기에 집에 돌아왔다는 기쁨뿐인 듯했다.
심협 또한 조양곡의 유래 때문인지 감개무량했으나, 호불귀만은 어째서인지 복잡한 표정에 약간 흥분한 기색이었다.
이곳에 도착하자 세 사람은 앞서 느꼈던 의문이 모두 해소되었다. 성 밖의 평탄하지 못하고 들쑥날쑥한 땅에는 크고 작은 평대(平臺)와 크기가 각기 다른 수백 개의 천막이 설치되어 있었다. 앞서 오는 길에 만났던, 텅 빈 마을의 사람들이 모두 여기 모여 있었던 것이다.
“가요. 성으로 들어가요.”
미소가 심협과 호불귀의 옷깃을 잡고 성으로 날아갔다.
한데 그들이 성문에 도착하기도 전에 바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침이 되어 막 천막을 나온 호족들이 낯선 인간족을 보고는 깜짝 놀란 것이다.
세 사람은 그들을 내버려둔 채 곧장 성문 입구로 향했다.
성 밖을 지키던 호족 수사들이 금방 몰려오더니 세 사람을 에워쌌다.
“누가 감히 청구국에 침범한 것이냐?”
늘씬한 몸에 외모가 청아한 선두의 수사가 물었다. 그에게서는 진선기 초기의 강력한 기운이 느껴졌다.
“유려(有黎) 할머니, 왜 성문을 지키고 계신 거예요?”
미소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모든 신경을 심협에게 집중하고 있던 그 수사는 깜짝 놀라 미소를 돌아봤다.
“미소구나! 어서 이 할미에게 오렴. 다친 곳은 없니?”
유려는 미소와 나이 차이가 얼마 되지 않아 보였는데, 서로가 할머니, 손녀라고 부르며 상봉하는 듯한 장면을 펼치자 매우 어색했다.
“허험! 유려 장로님, 저는 장안성에서 온 심협이라 합니다.”
심협이 가볍게 헛기침을 하고는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그러자 유려의 표정이 다시 차가워졌다.
“유려 할머니, 심협 오라버니와 호 오라버니가 절 여기까지 데려다줬어요. 장안성에 있을 때도 심 오라버니가 쭉 저를 지켜줬고요.”
미소가 이어서 그동안 심협과 호불귀에게서 받은 도움을 간략하게 설명하자 유려 장로는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지더니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한데 어째서인지 호불귀와 눈이 마주치자 미간을 찌푸폈다.
“할머니, 근데 무슨 잘못이라도 하셨어요? 그래서 벌로 성문을 지키고 있는 거예요?”
“그게 무슨 헛소리냐? 성 밖 일족의 안전을 책임지고 성을 지키는 거란다. 그나저나, 몰래 청구를 나갔으니 이제 네 할미에게 뭐라고 설명할 생각이냐?”
유려 장로가 딱하다는 듯 묻자 미소는 목을 움츠렸다. 아무래도 자신의 친할머니를 매우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그대들이 호족 마을에 온 건 미소를 바래다주기 위함이오?”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저희는 장안의 화를 누가 주도했는지 알아보러 왔습니다.”
“겨우 둘이서……?”
유려 장로는 여전히 그들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저희가 태을기 수사였다면 안심하고 저희를 들여보내 주셨겠습니까? 지금 상황이 매우 급박합니다. 서둘러 진상을 밝혀내지 못한다면 청구국은 멸국지화를 피하지 못할 겁니다.”
심협은 그녀의 불신을 개의치 않고 말했다.
“유려 할머니…….”
미소가 입을 삐죽 내밀어서 불만을 토했다.
“알겠다, 알겠어. 너는 우선 네 할머니를 만나고 오너라.”
유려 장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미소는 혀를 내밀고는 심협 등과 함께 들어가려 했다.
“가능하다면 청구국의 국주(國主)님도 만나 뵙고 싶습니다.”
“국주님은 무슨 일로……?”
“장안의 화를 직접 겪은 자로서는 후배 입장에서 청구국 국주님께 몇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대가 대당 관부의 대표인가?”
“저는 그저 저를 대표할 뿐입니다. 허나 장안의 화를 겪은 자로서 직접 청구국의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흥! 국주님께서 고작 진선기 수사에게 설명하실 필요가 있을까?”
“제게 설명하라는 게 아닙니다. 이번 장안의 화가 일어난 시기가 삼계의 모든 종파의 연화대회가 열리던 때였습니다. 하여 대당 관부뿐만 아니라 삼계 모든 종파의 불만을 사게 됐습니다. 만약 청구 호족에 화가 일어난다면 주도자는 대당 관부만이 아닐 텐데, 마땅히 해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 청구국을 협박하는 겐가?”
유려 장로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심협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그저 청구국이 다른 사람의 음모로 희생되지 않길 바랄 뿐입니다.”
그 말을 들은 유려 장로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미소야, 저들을 데리고 네 할머니께 가거라. 그녀가 허락하면 국주님을 만나 뵐 수 있을 거다.”
“네!”
미소는 짧게 답한 뒤 두 사람과 함께 성문으로 들어갔다.
멀어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던 유려 장로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성안으로 들어가 보니 전반적으로 인간족의 성처럼 친숙했는데, 가옥의 양식에서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 대부분이 원형 팔각(八角) 양식의 지붕이었고, 네모반듯한 딱딱함은 없었다. 다만 지형이 평탄하지 않은 까닭에 가옥들 사이에 높낮이의 차이가 있었지만, 오히려 그 모습이 운치 있었다.
“미소야, 네 할머니는 어떤 분이냐?”
심협의 물음에 안내하던 미소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청구 호족의 대장로세요.”
그녀의 대답에 머릿속에서 갑자기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혹시 유소모주(有蘇謀主)?”
그가 반사적으로 묻자 미소가 동그래진 눈으로 그를 돌아봤다.
“네, 우리 할머니를 아세요?”
심협은 고개를 끄덕였다. 청구국에 오기 전에 공부를 좀 했던 것이다.
청구 호족의 대장로인 유소모주는 태을 중기의 수사였고, 여러 번 부족을 이끌고 적대 세력의 음모에서 대항한 덕에 부족 내에서 국주 못지않게 신망이 두터웠다. 다만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그녀는 일찍이 신분을 감추고 천하를 돌아다니며 인간족 벗을 사귀었는데 함께 비경을 탐사하러 갔다가 배신을 당해 중상을 입은 적이 있었다.
훗날 다행히 죽지 않고 도망쳐 나온 그녀는 그 벗의 가문을 몰살시켰고, 이로 인해 인간족 수사들에게 쫓기는 몸이 되었다.
이러한 은원으로 인해 그녀는 인간족을 싫어했고, 선족과 마족에게도 깊은 적개심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