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3화. 궁지
경하 용왕은 손이 뜨거워지면서 더는 보검을 쥐고 있을 수 없게 되자 서둘러 주문을 크게 외더니 몸에서 검은 빛을 뿜어내며 간신히 버텨냈다.
하지만 눈앞에서 붉은 빛이 반짝이더니 순양대검이 빠르게 날아와 그의 몸을 베려 했다.
그 순간!
땅!
맑은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옆에 있던 정교금이 날아와 앞을 막아서더니 일격을 막아낸 것이다.
심협의 순양검은 64도의 금제가 생기면서 상품 법보 극치에 이르렀고, 또 주작 기령까지 있으니 그 위력에 정교금과 경하 용왕은 동시에 뒤로 날아가 바닥에 떨어졌고, 먼지와 연기가 사방에서 일어났다.
심협은 두 사람이 그저 튕겨나간 것일 뿐, 큰 부상은 입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그의 목표는 경하 용왕이 아니었다.
그가 소매를 휘두르자 여섯 개의 붉은 비검이 번개처럼 날아가 마독에 걸린 몇몇 요마들을 베거나 관통했다. 개중에는 단전이 깨지면서 신혼이 도망치려는 놈들도 있었다.
허나 천살시왕이 나타나더니 입을 쩍 벌렸고, 등에서 제법 크고 둥근 황옥 허상인 회신주를 소환했다. 기이한 흡입력이 뒤덮자 이 요마들의 신혼은 아무런 저항도 못 하고 단숨에 빨려 들어갔다.
심협은 이 요마들의 시체가 언젠가 쓸모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거두려 했는데, 갑자기 그 시신이 폭발하면서 흑홍색 마기로 변했다. 썩은 듯한 악취를 풍기는 마기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심협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서둘러 피하고는 여섯 자루의 순양검을 발동하여 다른 요마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등에서 금빛이 번쩍이며 나타난 두 개의 커다란 날개를 한 번 펄럭인 순간, 천살시왕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가 요마 무리 근처에서 나타났다. 그러더니 양손으로 두 마리의 요마를 힘껏 움켜쥐었다. 두 마리 요마는 폭발했고, 신혼은 역시 천살시왕에게 흡수되었다.
천살시왕은 일전에 회신주에 모아두었던 몇 개의 진선기 신혼으로 간신히 수련을 성취했다. 그러나 태을기의 거대한 법력에 비해 회신주에 담긴 신혼의 힘은 약한 상태라 태을기의 실력을 전부 발휘하지 못했다.
한데 방금 진선기 요마의 신혼을 흡수하면서 회신주 안에 신혼의 힘이 충만해지자 천살시왕의 법력 또한 한층 강해졌다. 흥분한 듯 기이한 웃음을 지으며 천살시왕은 노란 그림자로 변하여 다른 요마들을 덮치기 시작했다.
“태을기!”
호랑이 머리 요마와 코끼리 머리 요마는 천살시왕의 끝을 알 수 없는 기운을 감지하고는 경악하더니 다른 요마들을 내버려둔 채 멀리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그들 앞에 노란 그림자가 번쩍이더니 천살시왕이 귀신처럼 나타나 양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거대한 노란색 손이 두 요마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두 요마의 경지는 다른 요마들보다 월등히 높아 온독에도 걸리지 않았고 전력도 상실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에 화홍(火紅)의 창과 상아쌍도를 휘둘러 노란색 손에 저항했다.
그러나 천살시왕은 이들과 천양지차(天壤之差)의 강자였으니 그가 시전한 천시진경의 절초(絶招)인 천시신장(天尸神掌)을 어찌 막아내겠는가.
쾅! 쾅!
두 번의 굉음이 울리더니 두 요마의 법보는 폭발했고, 몸도 노란색 손에 붙잡혀 단숨에 으스러졌다.
입을 쩍 벌려 두 개의 강력한 신혼을 흡수한 천살시왕의 기운은 순식간에 더 강력해졌다. 뒤이어 몸을 돌린 그는 나머지 요마들을 향해 돌진했다.
앞선 두 마리보다 한참 실력이 부족한 다른 요마들은 심협의 여섯 자루 순양검까지 동시에 공격을 해오자 몇 호흡 만에 전멸했고, 대기에는 흑홍색 마기가 가득했다.
심협은 내심 기뻤지만, 연이은 싸움으로 법력이 거의 다 소진된 터라 안색은 다소 창백했다. 그는 서둘러 만년옥수를 흡수하여 비어버린 단전을 채웠다.
“이상하군. 순양검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경하 용왕에게 부상을 입힐 정도는 아닌데 어째서 요마들이 도륙당하도록 내버려둔 거지?”
심협은 법력이 회복되자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주위에 휘날리던 흑홍의 마기가 갑자기 솟구치더니 점점 커져서 하늘을 뒤덮는 마운(魔雲)으로 변하여 제단과 심협을 모두 뒤덮었다.
“열다섯 마리 요마를 죽여줘서 고맙구나. 저것들은 대혼원천마진(大混元天魔陣)을 위해 준비한 제물이었으니, 네가 본왕의 일을 덜어줬구나. 하하하!”
경하 용왕의 모습이 땅속에서 천천히 올라왔다.
그 말을 들은 심협은 표정이 굳더니 서둘러 일곱 자루의 순양검과 천살시왕을 다시 불러냈다. 한데 그가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하늘 가득했던 마운이 갑자기 내려와 단번에 그들을 집어삼켰다.
주위에서 광풍이 휘몰아치는 느낌과 함께 갑자기 사방이 칠흑처럼 어두워져 코앞의 손조차 보이지 않았다. 마치 끝없는 어둠에 빠져든 것 같았다.
마운대진의 목표는 심협이 아니었는지 그를 가둔 뒤 끝없는 마운은 제단의 진룡무극진을 향해 몰려갔다. 보아하니 완전히 집어삼킬 기세였다.
하지만 그 순간, 정양하던 원천강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뜨더니 몸에서 노란 빛을 뿜어냈다. 그것은 오래된 노란색 죽간이었는데, 그 위에는 아무런 글씨도 써 있지 않았다.
죽간이 촤르륵 펼쳐지면서 수백 배로 커져 제단을 완전히 뒤덮고는 대량의 실제 같은 노란 빛을 뿜어내 떨어지는 흑홍의 마운을 막았다.
“무자경(無字經)! 보물은 훌륭하나 이미 법력이 소진된 네가 그 위력을 발휘할 수나 있겠느냐? 이리 내놓거라!”
경하 용왕은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기뻐하면서 마운 안으로 몸을 숨겼다.
마운의 검은 기운이 솟구치면서 천둥소리가 울리더니 하늘을 가린 검은색 거대한 손이 내려와 무자경을 움켜잡았다. 그러자 경천동지할 굉음이 울려 퍼졌다.
무자경의 검은 빛은 순식간에 절반으로 약해졌고, 본래 제단 전체를 뒤덮었던 죽간도 많이 줄어들었다.
허공에 마운대진이 돌아가기 시작하더니 검은색 소용돌이로 변했다. 소용돌이에서 흘러나온 강력한 흡입력이 무자경을 휘감더니 끌어당겼다.
마운대진의 다른 쪽에서 또 하나의 거대한 검은색 손이 내려오더니 진룡무극진을 움켜잡았다.
쿠르릉!
대진에서 굉음이 울려 퍼지더니 금빛이 크게 흔들렸고, 그 안의 오조금룡도 한바탕 흔들렸다.
마운에 숨은 경하 용왕은 이미 본체로 변해 탐욕스러운 눈으로 진룡무극진 안의 오조금룡을 바라봤다.
그는 여러 번 도모하여 요마들로 장안성을 습격하고 심협을 지부 진영으로 끌어들여 백성의 혼백을 구하게 했다. 또한 지부에서 파룡정을 박았던 일을 심협에게 알린 것도 그가 꾸민 일이었다. 이 모든 것이 원천강으로 하여금 대당 용맥 진령을 소환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경하 용왕은 진룡의 몸이지만 오래전 육체가 참살당했고, 과거 심협의 참룡검에 중상을 입으면서 혼이 거의 사라질 뻔했다. 다행히 누군가의 도움으로 기사회생했고, 마족 신통을 익히면서 원래 경지로 돌아왔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욱 정진하여 이미 태을기에 도달했다.
그럼에도 그는 육신이 없었기에 마공을 통해 성취한다 해도 절대로 태을 경지를 넘어 천존 경지에 발을 들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고심 끝에 대당 용맥을 빼앗아 다시 진룡의 몸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크아아아!”
경하 용왕이 포효하자 주위에 마기가 도사리는 거대한 용의 발톱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 다시 진룡무극진을 잡았다.
마운 안의 소용돌이도 더욱 빠르게 돌며 무자경을 흡수하려 했다.
원천강의 두 눈이 커지더니 하얀 빛이 머리 위에서 솟아올랐다. 하얀색 고서에서 선음(仙音)이 흘러나오고 노을빛이 찬란하게 번졌다.
두 줄기의 굵고 커다란 하얀 빛이 고서에서 뿜어져 나오더니 둘로 나뉘어 진룡무극진과 무자경으로 각각 흘러 들어갔다.
두 보물이 안정을 되찾자 경하 용왕의 맹공에도 버틸 수 있었다.
“복마천서(伏魔天書)! 역시 대당의 국사답게 보물이 상당하구나. 허나 더 많은 보물을 꺼내도 오늘 넌 살아남지 못한다! 하하하!”
경하 용왕이 냉소하더니 입에서 본명마기(本名魔氣)를 뿜어내 머리 위의 대혼원천마진에 주입했다.
꾸르릉!
마진이 크게 울리더니 한 줄기 거대한 혈광이 뿜어져 나와 제단 위의 금색 보호를 뚫고 복마천서를 휘감았다.
혈광이 오염된 때문인지 본래 옥처럼 새하얗던 천서에서 핏빛 흔적이 나타나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복마천서는 바로 상서로운 기운을 뿜어내 이를 막아냈다.
“젠장!”
경하 용왕은 이를 갈고는 계속해서 본명신통을 시전하려 했다.
그때, 마운대진 안 어디선가 쾅쾅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더니 바깥까지 울려 퍼졌고, 그 범위는 점점 넓어졌다. 마치 절대적인 힘이 안에서 대진을 공격하는 것 같았다.
“번천인! 허나 심협은 그래봐야 진선 초기에 불과한데 어떻게 이리도 강한 힘을 발휘한단 말인가? 그놈의 태을기 연시가 발동하고 있는 모양이로군!”
경하 용왕은 분노로 안색이 변했다. 그러나 이내 침착함을 되찾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더니 어떤 결심을 했는지 입에서 무언가를 뱉어냈다. 풀로 엮은 소인(小人)이었다.
“원천강, 내 본래 이런 악독한 술법까지 쓰고 싶지는 않았으나 네가 자초한 일이니 날 원망치 말거라!”
경하 용왕은 작은 병을 꺼내더니 소인에게 뿌렸다. 병에서 떨어진 것은 아까 검은 빛에 가슴이 뚫리면서 뿜어져 나왔던 원천강의 피였다.
피가 흘러 들어가자 풀로 엮은 소인은 금방 핏빛으로 물들었다. 그러더니 소인에게서 갑자기 혈광이 번득였고, 원천강과 똑같은 모습으로 바뀌어갔다.
경하 용왕이 두 개의 백골로 만든 작은 활과 작은 금색 화살을 꺼내 이 소인을 향해 쐈다.
푹!
화살이 꽂힌 순간, 소인의 눈에서 피가 뿜어져 나와 경하 용왕의 몸에 튀었다.
그 순간, 아래 쪽의 제단에서 원천강의 비명이 울렸다. 그의 두 눈에서는 피가 흘러나왔고, 진룡무극진과 무자경을 휘감은 두 줄기 하얀 빛은 절반이나 사라졌다.
경하 용왕은 크게 기뻐하며 다시 연달아 네 개의 활을 쐈다. 화살은 각각 소인의 양팔과 양다리에 하나씩 꽂혔다.
이와 동시에 원천강의 팔다리 근육이 쩍 갈라지면서 뼈가 훤히 드러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복마천서에서 뿜어져 나오는 두 줄기의 하얀 빛은 여전히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오냐, 그렇게까지 버틴다면 죽여주마!”
경하 용왕이 눈을 흉흉하게 번득이더니 마지막 화살을 소인의 심장에 꽂았다. 그러자 피가 뿜어져 나왔다.
“크아악!”
원천강 역시 비명을 터뜨렸고, 심장에서 피를 뿜어내며 쓰러졌다. 몸의 하얀 빛도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자 무자경도 더는 버티지 못하고 마운 소용돌이에 휩쓸렸고, 복마천서도 혈광에 휘감기면서 사라졌다. 이윽고 두 보물은 경하 용왕 옆에 나타났다.
“무자경! 상고 인도선현(人道先賢)이 만든 첫 번째 죽간이자 인도기운(人道氣運)으로 만든 법보. 복마천서! 천정구천의 탕마조사(蕩魔祖師)가 만든 비보! 이 두 개의 보물이면 용맥 진룡으로 몸을 만들 때 큰 도움이 되겠구나! 크하하!”
경하 용왕이 크게 웃으며 두 보물을 챙긴 뒤 마운에서 내려와 진룡무극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한데 그때, 어두워졌던 진룡무극진에서 갑자기 빛이 크게 일더니 거대한 금빛이 뿜어져 나왔다. 전대미문의 강력한 힘은 곧장 경하 용왕을 날려버린 뒤 몇 번이고 곤두박질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