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868화 (868/1,214)
  • 868화. 길을 막은 소녀

    서시를 나와 거처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꽃처럼 아름다운 노란 옷의 소녀가 느닷없이 심협의 앞을 가로막았다.

    “심 선배님이시죠? 저희 아가씨께서 선배님을 뵙기를 원하십니다. 부디 체면을 세워주십시오.”

    노란 옷의 소녀가 예를 올리며 말했다.

    응혼기에 불과한 소녀가 심협 앞에서 말이나 행동이 거침없는 것으로 미루어 평범한 산수는 아닌 게 분명했다.

    “날 알고 있다고? 그 아가씨라는 분은 뉘시오?”

    심협이 소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희 아가씨는 도(塗)씨이시며, 심 선배님과 한 번 만난 인연이 있습니다. 만년 화린목 거래에 관해 선배님과 대화를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노란 옷의 소녀가 가까이 다가오며 말했다.

    심협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소녀를 살펴봤다.

    그는 위세를 뿜어내지 않았지만 눈빛에 담긴 압박감만으로도 노란 옷의 소녀는 안색이 창백해지고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안내하시오.”

    그는 시선을 거두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체면을 세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노란 옷의 소녀는 긴장이 풀리자 금방 안색을 되찾고는 사뿐사뿐 걸어서 안내했고, 두 사람은 금방 조용한 3층 찻집에 도착했다.

    재난 이후로 손님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황의의 소녀는 심협을 곧장 2층의 어느 아담한 방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묘한 분위기의 여인이 앉아 있었다. 하얀 옷을 입은 소녀의 가느다란 눈썹과 초롱초롱한 눈, 분홍빛 입술은 마치 그림 같았다.

    “심 도우, 또 만났군요.”

    심협이 들어오자 절세의 미소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긋 웃었다.

    황의의 소녀는 방문을 닫고 문 앞을 지켰다.

    백의의 소녀는 일전에 느닷없이 그의 길을 막고 서서 장사를 운운했던 도설이었다. 노란 옷의 소녀가 도씨 성의 아가씨라고 했을 때부터 어느 정도 그 정체를 예상했던 심협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도 소저께서 저와 만년 화린목을 두고 거래하고 싶다고요?”

    심협은 도설 맞은편에 앉으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소녀 심 도우께서 만년 화린목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마침 제게 몇 조각이 있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심 도우를 모셨습니다. 부디 양해해 주십시오.”

    도설은 심협의 직설적인 태도에 내심 놀랐지만, 바로 평정을 되찾고는 웃으며 말했다.

    “그 소식은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장사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빠른 정보입니다. 소녀, 비록 장안성은 처음이지만 몇 곳의 정보통이 있습니다.”

    도설은 씩 웃으며 심협의 예리한 질문을 가볍게 피했다.

    “만년 화린목이 필요하긴 합니다. 도 소저께서는 얼마나 갖고 계십니까?”

    도설의 목적이 뭐든 만년 화린목은 필요한 물건이었기에 포기할 수 없었다.

    도설이 말없이 탁자 위로 소매를 휘두르자 붉은 빛이 만연한 다섯 개의 영목이 나타났다. 모두 만년 화린목이었다.

    강력한 순양의 기운이 순식간에 방 안을 가득 채우자 심협은 일순 숨이 턱 막혔다. 이 정도 만년 화린목이면 순양검 열 자루를 만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하나같이 좋은 만년 화린목이군요. 모두 사겠습니다. 선옥 몇 개면 되겠습니까? 아니면 따로 원하시는 물건이 있는 겁니까?”

    심협은 바로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사실 심 도우의 물건 하나와 교환하고 싶습니다.”

    “그게 뭡니까? 편하게 말씀하시죠.”

    도설이 고운 손을 가볍게 휘두르자 허공에 하얀 광막이 나타났다. 거기에는 하얀 빛을 뿜어내는 백옥이 있었다.

    심협은 깜짝 놀랐다. 이 백옥은 그가 복공의 저물 법기에서 얻은 하얀색 여우의 허상이 비치는 그 옥석이었던 것이다.

    ‘이 물건이 내게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그가 이 보물을 얻었다는 건 화령자 외에는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심협이 예측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였다. 도설은 복공과 아는 사이였다는 것. 복공이 자신의 손에 죽었음을 알고 이 물건의 행방을 예측해 교환을 제안했다는 것.

    “확실히 그 물건은 제게 있긴 합니다만, 도 소저는 어찌 아셨습니까?”

    심협은 경계심을 끌어올리면서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이 보물은 저희 도씨 가문의 중요한 보물인데 몇 년 전 불행히 잃어버렸습니다. 이 백옥은 저희 일족의 혈맥의 피와 공명하지요. 며칠 전 거리에서 심 도우를 만났을 때 도우께 이 옥석이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도설이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심협의 눈동자는 희미한 푸른 빛으로 번득였다. 진즉 유명귀안을 발동한 것으로, 도설의 표정 변화를 통해 거짓말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소녀에게 매우 중요한 물건이니 부디 심 도우께서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이 만년 화린목으로 부족하시다면 다른 보물로 보상해드리겠습니다.”

    도설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이며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만년 화린목이면 충분합니다.”

    심협은 웃으며 답하고는 하얀 백옥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놨다. 도설에게 세세한 질문을 한 것은 이 백옥의 내력을 알아내고 복공과 그의 휘하 세력이 복수하러 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을 뿐, 무언가를 더 뜯어낼 생각은 없었다. 이 옥석이 복공과 큰 관계가 없음을 알았으니 화린목을 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감사합니다.”

    도설은 감사 인사를 전한 후 옥석을 잡았다. 그러자 옥석에서 갑자기 하얀 빛이 떠오르더니 희미한 구미호 허상에서 특이한 파동이 뿜어져 나왔다.

    도설의 표정이 조금 변했고, 그녀의 몸에서도 하얀 빛이 뿜어져 나와 옥석의 하얀 빛과 구미호의 허상을 억눌렀다.

    뒤이어 그녀가 양손으로 차륜같은 결인을 하자 수많은 회백색 부문이 옥석 주위에 나타났고, 부문은 회백색 빛의 고리로 변하여 옥석 주위를 맴돌았다.

    회백색 빛의 고리가 빠르게 줄어들더니 옥석 안으로 들어가 흡수되었다.

    하얀 빛이 모두 사라지면서 옥석은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눈앞에 나타난 광경에 심협은 눈빛이 변했지만, 캐묻지는 않았다.

    이에 도설은 속으로 안도하고는 옥석을 챙겼다.

    “백옥을 양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그녀가 다시 감사 인사를 건넸다.

    “아닙니다. 이번 거래는 제게도 큰 득이었는데 어찌 보답이라 하십니까? 대신 부탁드릴 것이 있는데…… 구천금정이 급하게 필요합니다. 도 소저는 인맥이 넓으니 신경 좀 써주실 수 있겠습니까? 가격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심협도 다섯 개의 만년 화린목을 챙겨 넣으며 말했다.

    “구천금정이요? 워낙 희귀하긴 하지만 기꺼이 찾아볼게요.”

    도설은 처음에는 놀랐지만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심협은 깊이 공수하며 말했다.

    일을 마친 도설이 먼저 인사를 남긴 뒤 밖에서 대기하던 노란 옷의 소녀와 함께 떠났다.

    심협은 바로 가지 않고 천천히 차를 마셨다.

    “화령자, 방금 술법으로 도설의 정체 알 수 있겠어?”

    “그게 뭐 어렵다고……. 호족 계집아이지 않소. 심 도우가 못 알아보지 않았을 텐데?”

    화령자가 시큰둥하게 답했다.

    “호족이라는 당연히 알아봤지. 그 많은 호족의 갈래 중 어느 쪽이냐고.”

    “그건…… 흠흠! 본인은 호족에 대해 잘 알지 못할뿐더러 상고 호족은 지금까지 번성하면서 너무 많은 갈래가 있다 보니…… 또 방금 명화연노에 있느라 바깥 상황을 유심히 보지 못해서 나도 모르겠소.”

    화령자는 그냥 모른다고 말하기는 민망했는지 말이 길어졌고 연신 헛기침을 해댔다.

    심협은 화령자의 반응은 무시한 채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얼마 전 요마 소동 때 나타난 하얀 여우의 허상과 지금 갑자기 나타난 도설. 이들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 원 국사에게 그녀 이야기를 해야 할까?’

    그는 한참을 생각했지만 괜히 억울한 사람이 생길 수도 있기에 우선은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생각을 정리한 심협은 곧장 거처로 돌아갔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미소는 심협이 돌아오자 반갑게 맞으며 지부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연신 물어댔다.

    심협은 숨기지 않고 간략하게 설명해줬다.

    “지부가 그런 모습이었군요. 기회가 되면 꼭 가보고 싶네요.”

    미소는 초롱초롱한 커다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경지가 더 높아지면 그리 어렵지 않을 게다.”

    심협은 웃으며 답했다.

    어째서인지 그는 미소에게 호감이 갔다. 아마 과거 여동생의 어릴 때 모습이 겹쳐 보여서인 듯했다.

    여동생을 생각하자 심협은 가슴이 아려왔다. 그간 여러 일로 분주하여 집안과 춘추관을 오랫동안 살피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육화명에게 한동안 장안성에 머물겠다고 말해놓은 상태였기에 거울 요괴를 소환하여 자기 대신 살펴보게 할 생각이었다.

    미소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 뒤, 심협은 밀실로 들어와 통령지술로 거울 요괴를 소환했다.

    통령지동에서 푸른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거울 요괴가 나타났다.

    거울 요괴는 외모에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몸에서 푸른 빛이 요동쳤고, 요기 또한 이전보다 훨씬 충만해진 상태였다.

    “진선기로 돌파구나.”

    심협은 깜짝 놀라 물었다. 귀장 조비극은 온종일 그의 곁에 머물고 또 형흉신광을 각성하면서 수많은 음수를 흡수하고 자신의 기운을 보충했는데도 지금까지 진선기로 돌파하지 못했다. 그런데 거울 요괴는 그런 도움이 많지 않았는데도 벌써 돌파했으니 놀랄 만도 했다.

    “주인님께서 이전에 주신 법보로 동해의 어느 험지에서 수련한 덕에 상당한 수확이 있었습니다.”

    거울 요괴는 뿌듯함을 감추지 못했다.

    “네 잠재력이 내 예상을 뛰어넘는구나. 앞으로 더 노력하면 장래의 성취는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심협은 고개를 끄덕였을 뿐, 거울 요괴가 돌파하게 된 구체적인 과정은 묻지 않았다.

    “주인님, 이번에는 무슨 일로 부르셨나요?”

    거울 요괴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공손하게 물었다.

    “큰일은 아니다. 그저 나를 대신해 춘추관과 춘화현성 심 씨 가문에 다녀와주기 바란다. 네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있다면 해결해주고……. 가는 김에 춘추관의 진명 사형께 이것도 전해주거라.”

    심협이 저물 법기를 거울 요괴에게 건넸다. 여기에는 수련에 도움을 줄 자원 그리고 신식이 없어도 제어할 수 있는 출규기 언갑 두 구가 들어 있었다.

    춘추관은 그의 명성에 기인해 지금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언제, 어떤 덜떨어진 무리가 쳐들어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 두 구의 출규기 언갑이 있으면 무탈하리라.

    “알겠습니다.”

    거울 요괴는 저물 법기를 받아 들고는 몸에서 푸른 빛을 번득였다. 주위의 수증기가 모여들어 푸른 거울로 변했고, 그녀는 그 안으로 들어가 사라졌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장안성 밖 어느 작은 마을의 우물 안에서는 거울과 같은 수면 위로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바로 거울 요괴였다.

    다음 순간, 그녀의 모습은 또 사라졌다가 수십 리 밖의 어느 평온한 호수 위에 다시 나타났다.

    “이것은 무슨 둔술이지? 수둔지술(水遁之術)은 아닌 듯한데…….”

    심협은 거울 요괴의 모습이 사라지자 호기심이 생긴 듯 혼잣말을 했다.

    “이건 수경둔술(水鏡遁術)이라 하오. 특별한 수둔지법으로, 평범한 수둔보다 훨씬 빠르지. 그대가 소환한 영수도 만만치가 않구려.”

    화령자는 그렇게 설명하면서도 내심 심협의 심상치 않은 내력에 감탄했다.

    ‘종문 세력의 뒷받침 없이도 이토록 강력해진 데다가 귀장 외에도 진선기급 영총이 있다니……. 천성적으로 대운을 타고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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