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866화 (866/1,214)
  • 866화. 단서와 추측

    검은색 비석이 사라지니 제단을 뒤덮고 있던 검은 광막도 몇 번 깜빡이더니 바로 희미해졌고, 몇 호흡 뒤에는 완전히 사라졌다.

    이를 본 심협은 10여 명 남짓한 장안 백성들의 혼백 앞으로 다가갔다.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배불뚝이에 상인 같은 차림의 혼백이 달달 떨면서 말했다.

    “긴장하지 마십시오. 저는 심협입니다. 대당 관부의 선사(仙師)지요. 여러분을 해치지 않습니다. 그저 묻고 싶은 것이 있어 이렇게 왔습니다. 모든 일을 마치면 여러분을 윤회환생에 들 수 있게 도와드리겠습니다.”

    심협은 부드럽게 말하며 몰래 천기권의 술법을 시전해 신혼을 달랬다.

    보이지 않은 파동에 10여 명의 혼백은 상쾌한 바람을 느꼈고, 한결 진정됐다.

    “심 선사님이셨군요. 궁금한 게 있으면 무엇이든 물어보십시오.”

    상인 혼백은 선사라는 말에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분은 어제 장안성 소란에 희생된 분들이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저희는 모두 장안성 백성들인데 어제 요마들에게…….”

    상인 혼백이 비참하게 웃으며 말했다.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며 제대로 찾았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그럼 어제 소란 중이나 혹은 소란이 일어나기 전에 뭔가 이상한 것을 목격하지는 않았습니까?”

    “이상한 것이라 하면……?”

    혼백들은 서로를 바라보고 두리번거렸다.

    “다른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저는 지금 대당 관부와 원 국사님을 도와 이번 화근의 원인을 찾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라도 어떤 자들이 이런 짓을 벌였는지 알아야 하지요. 그러니 어떤 일이든 좋습니다. 조금이라도 예사롭지 않은 것을 봤다면 무엇이든 말씀해 주십시오.”

    ‘복수’라는 말에 혼백들은 조금 술렁였지만, 예상과 달리 누구도 흥분하지 않았다.

    “심 선사님, 저희가 알고 있는 것을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만 복수는 괜찮으니…… 살아남은 저희 가족을 돌봐주실 수 있겠습니까?”

    허리가 구부러진 노인이 말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모두 안심하셔도 됩니다. 조정과 대당 관부에서 이미 사람을 보내 가족을 달래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꺼이 여러분의 요구를 들어드리겠습니다. 조정의 보상과 별개로 그들을 돌보겠습니다.”

    심협은 머뭇거리지 않고 답했다.

    “감사합니다, 심 선사님. 저는 영정방(永定坊) 철모(鐵帽) 골목에 살았던 왕(王) 씨라고 합니다. 가난하긴 해도 나름 평안하게 살아왔는데, 어젯밤 금광하(金光河)에서 낚시하고 있던 중에 검은 옷을 입은 그놈들을 발견했습죠. 뭔가를 아무도 모르게 하고 있기에 호기심에 가까이 가봤다가 그만…… 한 놈이 손을 이렇게 휙! 저는 그렇게 죽었습니다.”

    노인이 탄식하며 말했다.

    “검은 옷? 그 외에 다른 특징이 있었습니까?”

    심협은 첫 번째부터 중요한 단서를 발견한 것 같아 서둘러 물었다.

    “그게…… 제대로 볼 틈도 없이 죽어 버려서…….”

    노인이 고개를 젓자 심협은 실망했으나, 내색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돌아봤다.

    “선사님, 전 왕대규(王大奎)라 합니다. 장안성 기진방(祈眞坊)의 패거리죠. 어제 대회 중 여우 요물에게 죽었고, 저는 검은 옷을 입은 놈들은 못 봤습니다.”

    다른 거한의 남자가 말했다.

    “선사님, 전 려용(勵勇)이고…….”

    나머지 혼백들도 각자가 봤던 상황을 말했는데, 아직 정신이 없어서인지 이야기에는 두서가 없었고, 도움이 되는 정보도 없었다.

    “심 선사님, 전 마선하(馬先河)라고 합니다. 제가 대회 전에 어떤 요상한 것을 봤는데…… 아마 그 요마들과 관련이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이야기를 하기 전에…… 제게 작은 부탁이 있는데, 혹시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한 상인이 다른 사람들이 다 말하기를 기다렸다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네,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심협은 진즉 이 상인 혼백이 뭔가 알고 있을 거라 예상했기에 흥정하는 태도도 개의치 않았다.

    “저는 줄곧 선도를 흠모하였는데 선사님과 인연이 닿지 않아 기회가 없었습니다. 제가 봤던 상황을 말씀드리면 부디 제 아들을 제자로 삼아 선사가 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상인 혼백이 허리를 굽히며 심협에게 예를 올렸다.

    “저는 늘 혼자 다니는 버릇이 있어서 제자를 받을 생각이 없습니다.”

    심협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상인은 당황했다.

    “허나 제가 알고 지내는 수사들이 꽤 있으니 아드님의 자질만 나쁘지 않다면 다른 종파에 들어갈 수 있도록 힘써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상인 혼백은 실망한 기색이 싹 사라지고는 연신 감사를 올렸다.

    “자, 이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대회 전에 저는 적지 않은 무리의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용정방 부근 어느 구석진 곳에서 꽤나 많고 엄청나게 두꺼운 쇠못들을 땅에 박고 있었지요. 한데 그 쇠못을 땅에 박을 때 대량의 피가 흘러나왔습니다.”

    “두꺼운 쇠못? 피? 거기가 구체적으로 어디입니까?”

    심협이 정신이 번쩍 들더니 장안선 지도를 허상으로 만들었다.

    “여기입니다.”

    상인 혼백이 지도를 보며 감탄하더니 이내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이를 본 심협은 눈이 번쩍 뜨였다. 상인이 가리킨 곳은 바로 땅에 균열이 생긴 곳이었다.

    “정말 중요한 정보군요. 아드님이 선도에 들어설 수 있게 하겠다는 약속,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사님.”

    상인 혼백이 황급히 다시 한번 허리를 숙였다.

    어느 정도 정보를 얻은 심협이 혼백들을 데리고 나가려는데, 멀리서 구혼마면이 다가왔다. 그는 상처가 많았지만, 다행히 심각한 부상은 없었다.

    “마면 도우, 괜찮소?”

    “물론이오. 귀물들이 계속 쫓아오더니 갑자기 뿔뿔이 도망쳤소. 심 도우가 귀물들의 대장을 죽인 것이오?”

    구혼마면의 물음에 심협의 눈이 반짝였다. 밖의 귀물들이 도망친 것은 아마도 자신이 공귀적을 손에 넣어서일 것이다.

    공간을 뛰어넘어 저리 많은 귀물을 조종할 수 있다니, 공귀적의 위능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했다. 화령자가 장룡적으로 개량할 때 그 위능만큼은 남겨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이들이 장안성 백성들의 혼백이오? 왜 겨우 이것밖에 안 되지?”

    구혼마면은 심협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10여 명의 혼백을 보며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장안 백성들은 마면의 흉악한 외모에 깜짝 놀라 심협 뒤에 숨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이분은 지부의 음신 구혼마면입니다. 선도를 익히지 않았어도 이름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우두마면(牛頭馬面)의 전설은 평범한 백성들도 귀에 익을 정도로 자세히 알고 있었기에 혼백들은 안도했지만, 그럼에도 무의식적으로 다소 거리를 두었다.

    “내가 여기 도착했을 때 여기 무족의 대진이 있었고, 혼백들이 그 안에서 대진의 보호를 받고 있었소. 아마 다른 혼백들은 진선기 귀물들에게 죽은 듯하오.”

    “진선기의 귀물? 그자의 이름을 알고 있소? 외모는 보았소?”

    구혼마면이 황급히 물었다.

    심협이 고개를 끄덕였고, 옆의 허공에서 푸른 빛이 일렁이더니 무명 야귀의 모습으로 변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이자가 어떤 신통을 썼소?”

    구혼마면은 자세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 귀물은 상고 무술(巫術)을 사용했고, 법보도 대부분 무기(巫器)였소. 또한 머리 세 개 달린 구렁이 귀총을 기르고 있었고, 연꽃 신통을 사용했소.”

    그는 검은색 연꽃 신통이 범상치 않다고 여겼고, 또 무명 야귀가 시전한 무술과는 사뭇 달랐기에 연꽃 신통에 관해 자세히 설명했다.

    “그건 지장왕 보살의 육도윤회(六道輪回)요!”

    구혼마면은 검은 연꽃 신통에 대해 듣자 안색이 변했다.

    “지장왕 보살의 신통? 그럼 그자가 음조 지부의 문하란 말이오?”

    음조 지부의 창시자는 바로 지장왕 보살이고, 지부에 자리 잡은 그의 신통은 관음대사, 진원자, 보살선조 등 선조의 거물들과 비견될 정도였다.

    이 보살은 이전에는 명성이 별로였지만 음조 지부에 종파를 세우면서 이름이 삼계에 알려졌다.

    “그건 모르겠소. 다만 음조 지부의 신통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으니 어쩌면 다른 문파의 누군가 몰래 배운 것일 수도 있소.”

    “그럴 수도 있겠구려.”

    “심 도우, 무명귀성의 일은 너무 많은 것과 연관되어 있고 내가 여기에 온 것을 본 자들도 많소. 이 일의 경과와 무명 야귀의 일을 종규 대인께 보고해도 괜찮겠소?”

    구혼마면이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음, 종규 대인께는 알려도 괜찮을 것 같소.”

    구혼마면은 심협의 동의에 안심하고는 10여 명의 혼백을 향해 소매를 휘둘렀다. 그러자 검은 빛이 그들을 감싸더니 소매로 들어갔다.

    “이 혼백들은 내가 지부로 데려가 윤회전생에 들게 하겠소.”

    “그럼 부탁드리오.”

    일을 마친 심협과 구혼마면은 곧장 떠나려 했다.

    한데 심협이 갑자기 번개처럼 몸을 돌리더니 제단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궁전만 한 금색 주먹 허상이 허공에 나타나 제단으로 떨어졌다.

    콰르릉!

    금제의 보호가 없는 제단은 단숨에 부서져 돌이 사방으로 튀었다.

    “심 도우, 무슨 일이오?”

    구혼마면은 심협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며 조용히 물었다.

    “별거 아니오. 주먹이 좀 간질간질해서…….”

    심협은 웃으며 툭 내뱉고는 마면이 대답하기도 전에 앞으로 날아갔다.

    구혼마면은 멍하니 있다가 황급히 쫓아갔다.

    두 사람이 떠나간 지하 공간은 고요했고,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한참이 지났을 때, 본래 심협이 서 있던 곳에 검은 빛이 반짝이더니 세로로 긴 눈동자가 나타나더니 검은 연기가 되어 소리 없이 사라졌다.

    검은 눈이 사라지고 또 잠시 후, 무너진 제단 옆의 허공에 파동이 일더니 두 사람이 나타났다.

    한 명은 용포를 입었고 머리에 황금 관을 쓰고 있었는데, 용의 얼굴이었다. 만약 심협이 있었더라면 틀림없이 알아봤을 것이다. 다시 살아난 경하용왕이었으니까.

    다른 한 명은 몸이 회색 빛으로 덮여 있었는데, 이전에 명하(冥河) 근처에 나타났던 정체불명의 인물이었다.

    “천마안? 심협이 마족의 신통을 익혔다니, 이상하군. 어디서 익힌 거지?”

    경하용왕이 중얼거렸다.

    “심협이 장안 소란의 진상을 조사하고 다니는데 내버려둬도 되겠습니까?”

    “그게 무슨 대수라고……. 조사하게 놔둬도 된다. 오히려 네가 키우던 무명 야귀의 분혼이 소멸됐고 연신대진까지 저놈이 가져갔는데, 분을 참을 수 있겠나?”

    “무명 야귀는 버리는 말에 불과했고, 연신대진은 이미 연구를 마쳤으니 뭐가 아쉽겠습니까? 지금 제가 가장 관심 있는 것은 무족의 서혼대진(噬魂大陣)입니다. 듣기로는 신혼에 있는 모든 정신 낙인을 제거하고 연화하면 순수한 정신 본원이 되어 신혼의 힘을 강화하는 데 가장 탁월한 방법이라 합니다. 이걸 얻는다면 마지막 걸음에 큰 도움이 될 텐데, 아쉽게도 이미 사라졌다더군요.”

    “흥! 말은 듣기 좋군. 가슴이 찢어지지 않는다면 왜 이럴 때 허둥지둥 여기에 온 건가?”

    경하용왕이 비웃었다.

    “지금은 말다툼이나 할 때가 아닙니다. 제가 할 일은 모두 했으니 이제 당신이 무엇을 하든 저와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혹시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저를 원망하지 마십시오.”

    회색 빛의 인물은 차갑게 비웃더니 이내 사라졌다.

    경하용왕은 묵묵히 서 있다가 잠시 후 역시 소리 없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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