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855화 (855/1,214)
  • 855화. 놓쳐서는 안 될 기회

    심협이 여러 개의 궁벽을 지날 때마다 곳곳에서 격렬한 전투의 흔적과 수많은 우영위와 마수의 시체가 보였다.

    흠천감에 가까워질수록 양측의 시체는 점점 더 많아졌다. 사마들이 중점적으로 노린 곳이 흠천감이라는 증거였다.

    궁벽을 넘어가니 전방에 매우 넓은 하얀색 광장이 나타났다.

    광장의 동서남북 사위마다 돌과 청동으로 만든 의기(儀器)가 있었다. 의기는 천체의 운동을 관측하는 측정 기구로, 그중 심협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돌로 만든 해시계와 청동으로 만든 지동의(地動儀)뿐이었다. 다른 것들은 대충 짐작만 할 수 있었는데, 대부분 천상(天象)을 관찰할 때 사용하는 혼의(渾儀)나 혼상(渾象) 같은 의기였다.

    이 의기들이 있는 땅에는 거대한 주천성도(周天星圖)가 새겨져 있었다.

    땅에는 마찬가지로 엄청난 수의 사마와 우영위의 시체가 있었다. 이 광장에서 매우 격렬한 싸움이 있었던 듯했다.

    그 외에도 비슷한 도포를 입은 수많은 수사의 시신이 있었다. 그들의 옷소매마다 별무늬가 수놓아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흠천감 제자들의 복장인 듯했다.

    그들의 시체는 예외 없이 소중한 천상의기 앞에 쓰러져 있었다. 이 의기를 보호하다 전사한 것이다. 그 덕분인지 크게 훼손된 의기는 없었다.

    쾅!

    심협은 광장 한쪽에서 굉음이 들려오는 곳을 돌아봤다.

    대전 뒤에서 빛줄기가 하늘 깊은 곳까지 뻗어서 사상천시대진과 연결되어 있었다.

    대당 관부 쪽을 돌아보자 도요요의 본체인 거대한 나무가 높이 솟은 채 지금도 머리 위의 거대한 대진을 막아내고 있었다.

    심협은 시선을 거두고는 대전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 * *

    대전 뒤쪽, 비교적 작은 광장. 땅 위로 솟은 제단이 있었고, 그 옆에 누군가가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보라색 도포를 입고 손에는 원형의 진반(陣盤)을 든 원천강이었다.

    그는 두 눈을 꼭 감고 있었고, 몸 아래 원형의 빛에 완전히 뒤덮인 채였다. 한 손에는 부문으로 빼곡한 백옥 진반을 들고 다른 손은 두 손가락으로 진반 가운데를 가리키고 있었다.

    몸의 순수한 법력이 화려한 빛으로 변하여 원형의 진반으로 끊임없이 흘러 들어가는 중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 또 다른 누군가가 회백색 도포를 입은 채 한 손에는 복숭아나무 검을 들고 다른 손에는 팔각형 청동 거울을 든 채 온몸이 새까만 사마와 싸우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원천강과 똑같았으며, 하얀 허광의 몸은 신광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사마의 상반신은 인간족과 다름이 없었지만, 하반신은 기다란 뱀의 꼬리였다. 이 꼬리를 이용해 땅 위를 이리저리 움직였는데, 그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사마는 양손에 특이하게 생긴 검은색과 옥색의 쌍검을 들고 있었는데, 가늘고 긴 검은 두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그 위로 검은 전류가 파지직 하고 흘렀다.

    이 사마는 얼굴이 무척 준수했는데,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시종일관 사악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 기운은 매우 강력하여 태을경에 가까웠다.

    두 사람 곁에는 수십 구의 시체가 어지럽게 쓰러져 있었는데, 모두 양측의 정예였다.

    “원천강, 지금이라도 사상천시대진을 포기하는 게 어때? 이런 화신으로는 나와 붙어봐야 이길 수도 없으니 법력만 소비하는 것 아닌가? 법력이 모두 사라지면 넌 내 검에 쓰러질 거다. 이런 속물들을 위해 그럴 필요가 있나?”

    사마가 웃으며 꼬드겼지만, 진반을 든 원천강의 본체나 보경과 복숭아나무 목검을 들고 있는 화신이나 모두 대답 없이 각자 할 일을 했다.

    사실 사마의 말이 옳았다. 원천강이 사상천시대진을 포기하고 화신을 불러들인다면 곧장 사마를 죽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우선 사상천시대진은 천시(天時)의 중압감이 사라지는 것을 막고 있었다. 게다가 일단 발동했다하면 온전히 발동해야 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사마를 일으킨 악과(惡果)를 능가하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본래 대진이 성공하면 원천강은 천시의 공을 이용하여 사상의 힘으로 모든 사마를 죽이거나 제압하여 단번에 장안의 위험을 없애려 했다. 한데 도요요가 나타나더니 자신의 도행이 소모되는 것도 아끼지 않고 복숭아나무 본체로 사상천시대진이 내려오는 것을 막고 있었다.

    그 결과, 원천강도 경지를 이용하여 대항해야 했고, 양쪽은 기나긴 줄다리기에 들어가게 됐다. 누구도 도중에 멈출 수 없었고, 그저 상대의 힘이 소모되어 승리를 거머쥐길 바랬다.

    다만 도요요는 백성들의 피해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원천강은 백성들을 이대로 계속 내버려둘 수 없다는 차이가 있었다.

    “유광(幽狂), 도대체 누가 널 장안으로 불러들인 거지?”

    원천강의 화신이 물었다.

    “그 질문만 벌써 세 번째구나. 내가 대답하지 않을 걸 알면서 또 묻다니, 정말 집요해. 뭐, 사실 불러들일 필요도 없었다. 우리가 장안을 노린 것이 하루 이틀은 아니었지만, 성 아래 용맥이 탄탄하고 용의 기운이 충만하여 뚫고 나오기가 힘들었지. 허나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장안의 용맥은 이미 무너졌고 용의 기운은 사방으로 흘러나가 그 달콤한 기운에 이끌려 우리는 끝도 없이 몰려오고 있거든. 크하하하!”

    유광이라 불리는 사마가 비릿하게 웃었다.

    “그가 누구건, 너희를 부른 것은 그저 장기판의 말처럼 이용하기 위함일 뿐임을 정녕 모른단 말이냐?”

    “상관없다. 어찌 됐든 배불리 먹기만 할 수 있다면 어디를 가도 똑같지.”

    “후회하게 될 것이다.”

    원천강 본체가 갑자기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자마자 미간에서 빛이 뿜어져 나와 화신의 몸으로 들어갔다.

    다음 순간, 화신의 빛이 갑자기 밝아졌고, 몸의 기운도 한층 더 강해졌다.

    “기운을 화신에게 나누어주다니, 네 본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기대되는구나. 하하하!”

    이를 본 유광은 두려워하지 않고 말했다.

    원천강은 대답하지 않았으나 미간의 주름은 더욱 깊어졌다.

    유광의 비웃음에는 나름 근거가 있었다. 본래 사상천시대진은 원천강과 36명의 흠천감 수사가 함께 발동해야 하는데, 그가 흠천감에 도착했을 때는 유광이 이미 사마의 대군을 이끌고 이곳으로 쳐들어와 있었다. 흠천감 수사들은 본래 천상과 법진 설치에 뛰어나 개개인은 싸움에 서툴렀고, 얼마 후 거의 다 도륙당하고 말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원천강은 홀로 대진을 발동해야 했다. 그것만으로도 벅찬데 화신을 만들어 유광을 상대해야 했고, 지금은 법력을 화신에게 더 나누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본체가 받는 중압감이 한층 더 강해졌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대안탑과 대당 관부 쪽의 변고를 그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누군가 도우러 올 거라면 진즉 왔을 것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이렇게 도요요와 유광, 양측과 소모전이나 벌인다면 필패였다.

    자신이 패하는 것은 그렇다 쳐도, 그렇게 된다면 장안성은 끝이다.

    원천강의 화신이 두 눈을 날카롭게 번득였다. 수중의 보경이 떨리면서 은빛으로 빛났고,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와 유광을 향해 곧장 휘몰아쳤다.

    유광은 보경의 공격에 이미 익숙해졌기에 여유 있게 피했다.

    하지만 그 하얀 빛은 가까이 다가온 순간 두 번 폭증하더니 범위가 더 넓어져 그의 몸을 뒤덮어왔다.

    유광이 속으로 아차 한 순간, 몸이 그 자리에 갑자기 굳어버렸다.

    뒤이어 원천강의 화신이 순식간에 그의 뒤에 나타났고, 복숭아나무 목검에 부문이 떠올라 뱀처럼 검을 휘감았다. 그러자 목검은 금속의 광택을 발하며 날카로운 기세를 발산했다.

    “죽어라!”

    원천강의 화신이 짧게 외치며 장검으로 곧장 유광의 머리를 찔렀다.

    그때, 희미한 그림자가 멀리서 쏜살같이 날아와 팍 하는 소리를 내며 보경을 들고 있는 원천강 화신의 손에 꽂혔다. 그러자 손이 비틀리면서 유광의 몸을 비추던 하얀 빛이 사라졌다.

    몸이 자유로워진 유광은 장검이 찔러오는 순간 몸을 굽혀 간발의 차이로 피했고, 서둘러 거리를 벌리고는 자신을 구해준 은인을 보았다. 허나 상대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안색이 어두워졌다.

    “유동(幽童), 왜 네가……? 그 꼴은 또 뭐야?”

    3촌 길이에 한 마리 곤충처럼 생긴 아기가 허공에서 유광을 내려다보더니 마찬가지로 역겨운 음식을 먹은 것처럼 욕설을 퍼부었다.

    “퉤! 네놈이 여기 있다는 걸 알았으면 나도 안 왔다! 이번에는 끼어들지 않을 테니 저자를 죽이려면 빨리 죽여라.”

    원천강의 화신은 티격태격하는 두 적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점점 약해져 가고 있는 상황에서 어렵게 기회를 만들었건만 이렇게 날려버린 것이다.

    한데 그때, 누군가가 대전을 가로질러 날아왔다. 물론 심협이었다.

    그는 제단의 상황을 둘러보더니 곧장 원천강 옆으로 내려섰다.

    “국사님,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심협이 전음으로 묻자 원천강은 지금의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이거 어렵게 됐군요.”

    심협이 중얼거렸다.

    “관부 쪽 상황은 어떤가? 왜 자네 혼자 왔나?”

    심협은 대당 관부 쪽의 상황을 빠르게 설명한 후 덧붙였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나오지 못하고 있지만, 천기성 성주님께서 한 가지 방법을 알려주셨기에 국사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이 방법이면 어쩌면 장안을 위기에서 구해낼 수 있을 겁니다.”

    “그게 무슨 방법인가? 어서 말해보게.”

    “소부자 선배님께서 말씀하시길, 산하사직도를 펼쳐서 도요요의 본체를 그림 안에 넣으라 하셨습니다. 다만, 도요요는 태을의 경지인 만큼 저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니 국사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심협이 전음으로 말했다.

    “그렇다는 것은…… 산하사직도가 자네에게 있다는 건가?”

    원천강이 놀라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우선은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당장은 여기서 벗어날 수 없네. 사상천시대진이 무너지면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고, 장안성은 끝장날 게야. 한데 소부자는 그 방법을 알면서 왜 직접 자네를 도와주지 않은 겐가?”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산하사직도가 제게 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가는 제 목숨이 위험해질 테니까요. 또한, 당시 도요요의 결계가 발목을 잡았습니다. 만약 강제로 산하사직도를 사용했다면 그녀가 장안의 모든 지맥의 힘을 뽑아내 저항했을 테지요. 그리되면 득보다 실이 많았을 겁니다.”

    두 사람이 전음으로 대화하는 동안에도 유광과 유동은 싸우고 있었다.

    “쓸모없는 놈! 겨우 진선 수사 따위에게 이런 꼴이 되다니, 내가 다 창피하다!”

    유광이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허! 내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방금 죽어나갔을 놈이 주둥이만 살았구나!”

    유동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 순간, 유광이 흠칫하더니 옆으로 피했다. 그러자 붉은 비검이 그의 허리춤을 쏜살같이 지나가 그대로 유동에게 날아갔다.

    유동 또한 재빨리 피했다.

    “이, 이놈! 감히 기습을 해?”

    유광이 버럭버럭 화를 냈다.

    심협은 아쉬워하며 비검을 불러들였다. 원천강과 대화한 결과, 산하사직도를 발동하는 데 그의 도움을 받으려면 우선 유광을 죽여야 했다.

    한편, 원천강은 이 광경을 보고는 속으로 감탄했다. 자신과 중요한 대화를 나누던 심협이 그 상황에서도 이런 기습을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하! 저 인간족이 얼마나 간사한지 봤지?”

    유동이 고소하다는 듯 비웃었다. 절대로 자신이 약해서 실패한 게 아님을 알리려는 것 같았다.

    “형님, 지금은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오. 저놈들을 죽이는 게 먼저요. 태을 수와 진선 수사의 살은 먹는다면 배가 든든하지 않겠소?”

    유광이 냉정을 되찾고는 진중하게 말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싸워도 배부르게 먹고 나서 싸우자고.”

    유동은 형님 소리를 듣자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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