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2화. 인과(因果)
이정이 손을 휘두르자 들고 있던 영롱보탑에서 금빛이 번득이더니 수백 배로 커져서 거대한 보탑이 되었다.
“자, 안으로…….”
그는 금시대붕 등을 바라보며 말했다.
금시대붕과 화십낭은 별다른 저항 없이 묵묵히 금탑 안으로 들어갔다.
이정이 손을 들어 올리자 영롱보탑은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가 그의 손에 들어왔다.
“정 도우, 정말 우리가 돕지 않아도 되겠소?”
이정이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감사하오. 다만 지금 당장은 우리가 제압할 수 있으니 괜찮소.”
정교금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만약 장안성의 일조차 해결하지 못해 외부인의 도움을 받는다면 대당 관부의 체면이 어떻게 되겠는가?
땅에서 금빛이 일어나더니 정교금은 무지개가 되어 날아갔다. 광장에 남은 자들은 서로 쳐다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줄곧 상황을 주시하던 심협은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굉음과 사마의 포효가 끊이지 않고 점점 늘어나는 반면 백성들의 비명은 많이 줄어든 것을 알아챘다. 대신 여기저기서 명령을 내리는 소리와 격렬하게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까지 듣고 나서야 그는 마음이 조금 진정됐다. 대당 관부의 장안성 통제가 확실히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다만 머릿속은 여전히 의문투성이였다.
‘사마들이 왜 장안성에 나타난 걸까? 그리고 다른 때도 아니고 하필 연화대회 때라니……. 혹시 충돌을 격화시키기 위해서? 연화대회가 실패로 돌아간다면 지금의 표면적인 평화가 깨질까?’
그렇다면 자신의 목표와 일치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생각할수록 미궁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그때, 이정이 온몸에서 웅장한 기세를 뿜어내며 그를 향해 다가왔다.
심협은 크게 개의치 않고 여전히 팔짱을 낀 채 생각을 정리했다.
“심 도우.”
이정은 바로 앞까지 다가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에 고개를 돌린 심협은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미래 꿈속 세계에서 영롱보탑과 천책을 자신에게 맡긴 대능인 상대에게 제법 호감과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번 방촌산 사건 이후로 그 감정이 크게 바뀌었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이정은 불만 가득한 목소리에 눈빛이 변했다.
“날 향한 원망이 상당해 보이오.”
이정의 말에 심협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원망해도 상관없고 날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소. 다만, 삼계 안정에 관한 일이라면 난 무엇이든 할 것이오.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든…….”
“요마의 힘을 빌려서 방촌산을 공격하고 하마터면 신마의 우물까지 다시 열리려 했던 것도 삼계의 안정을 위한 것이었습니까?”
심협은 참지 못하고 반문했다.
“삼계의 안정이 어디서 오는 것 같소? 힘의 균형? 아니오, 서로 제어하고 경계하는 것이오. 어디든 독단이 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오. 그리고…… 요마를 종용하여 방촌산을 공격한 것이 정녕 우리 천궁의 뜻이라고 생각하오?”
“일리도 없고 말도 안 되는 일을 애써 설명하고 설득하실 필요 없습니다.”
심협은 냉소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정은 다시 무슨 말인가를 하려 했는데, 갑자기 표정이 굳더니 연무장 중앙에 생겨난 거대한 구덩이를 향해 손을 내리쳤다.
금빛 손바닥이 허공에 생겨나더니 손날이 도끼처럼 구덩이 안으로 떨어졌다.
심협도 뭔가를 눈치채고는 서둘러 그곳을 돌아봤다.
구덩이에서 분홍색 빛이 팽창하더니 폭발했고, 금빛 손은 그 분홍 빛에 순식간에 부서져 허공으로 사라졌다.
곧이어 거대하고 두꺼운, 검푸른 넝쿨이 땅속에서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튀어나왔고, 동시에 수많은 나무뿌리도 단단한 석판을 가볍게 뚫으며 튀어나왔다.
발밑이 크게 흔들리더니 땅이 다시 파도처럼 일렁였다.
이 흔들림은 오래가지 않았으나, 바닥에 균열이 생기더니 폭음과 함께 광장 전체가 무너져 버렸다.
광장에 있던 각 종문의 장로들은 일제히 날아올랐다.
광장 전체가 거대한 구덩이로 변했고, 어둡고 깊은 심연의 끝에서 수많은 나무뿌리가 꿈틀거리며 분홍색 안개가 위로 올라왔다. 동시에 거대한 그림자가 아래에서 천천히 올라왔다.
심협의 눈에서 금빛이 번득이며 분홍색 안개를 뚫고 지나가 천천히 올라오는 그림자를 바라봤다. 그것은 꽃이 활짝 핀 매우 거대한 분홍색 복숭아나무였다.
쾅!
굉음과 함께 분홍색 복숭아나무가 마침내 땅 위로 올라왔을 때, 꼬불꼬불한 뿌리는 이미 광장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사람들은 영문도 몰랐기에 누구도 감히 땅으로 내려가지 못했다.
나무는 수십 장 두께에 높이는 백 장을 훌쩍 넘었으며 거대한 수관(樹冠)은 대당 관부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거대했다. 나무에 가득 핀 복숭아 꽃잎은 바람에 휘날려 장안성 구석구석까지 날아갔다.
“도요요(桃妖妖)…….”
이정이 눈살을 찌푸리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옆에 있던 심협은 그 이름이 어딘가 친숙했지만, 곧장 떠오르지는 않았다.
“도요요, 넌 삼계의 분쟁에 끼어들지 않기로 하지 않았나? 한데 지금 이게 무슨 짓이냐?”
이때, 또 한 번의 외침이 들려왔다.
심협이 돌아보니 질책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청련선자였다. 그녀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호호호! 청련, 정말 미안하게 됐어. 내가 큰 은혜를 입는 바람에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도울 수밖에 없었어.”
은방울 같은 웃음이 분홍색 복숭아나무에서 들려왔다.
곧이어 분홍색 치마를 입은 소녀가 나무 아래에서 떠올랐다.
아직 앳돼 보이는 둥근 뺨에 우물처럼 깊은 두 눈동자, 얼굴 가득 걸린 달콤한 미소와 양 갈래로 땋은 머리카락. 소녀는 해맑은 표정으로 청련선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심협의 두 눈이 커졌다. 재빨리 돌아보니 호불귀 역시 무척 놀란 표정으로 허리춤의 술을 한 모금 마시려다가 우뚝 멈췄다.
눈앞에 있는 소녀는 비록 복장이 바뀌었고 허리에 두르고 있던 앞치마도 풀었지만, 분명 도화오에서 만난, 술을 파는 소녀였기 때문이다.
소녀도 심협과 호불귀를 알아봤는지 눈이 동그래지더니 빙그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은 그때 술을 팔던 당돌한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그때, 또다시 이변이 일어났다!
“크오오오!”
장안성에서 갑자기 용의 포효가 울려 퍼지더니 동쪽에서 푸른 빛이 하늘 높이 치솟았고, 청룡의 허상이 떠올라 허공에 머물자 사방에서 구름이 몰려왔다.
서쪽에서 호응하듯이 호랑이의 포효가 들려왔고, 한 마리 백호의 허상이 하늘을 달리면서 바람이 갑자기 휘몰아쳤다. 곧이어 남쪽에서 주작의 허상이, 북쪽에서는 현무의 허상이 하늘에 나타났다.
하늘에 커다란 솥이 거꾸로 뒤집힌 듯 빼곡한 부문이 떠오르더니 창룡칠숙(蒼龍七宿), 백호칠숙(白虎七宿) 등의 별자리가 나타나 찬란하게 빛을 발했다.
때는 대낮이라 백성들은 이를 보지 못했고, 그저 하늘이 갑자기 짓눌러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압박감을 느꼈을 뿐이다.
하지만 모든 수사는 마음을 흔드는 강력한 기백과 영압을 생생하게 느꼈다.
“사상천시대진(四象天時大陣)!”
“역시 엄청난 기백이야!”
누군가의 외침을 들은 심협은 원천강이 흠천감으로 돌아가 바로 호성대진을 발동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하늘의 대진이 끊임없이 압박하며 내려오자 그곳에 있던 인간족 수사들은 그럭저럭 괜찮아졌다. 그저 대적하기 어려운 힘이 내려오고 있다는 느낌만 들었을 뿐이다.
반면 요족과 마족의 수사들은 이미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들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 사상천시대진이 노리는 대상이 바로 자신들임을…….
사실 이 말은 정확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 대진이 노리는 것은 성을 휩쓸고 있는 사마들이라 마족과 요족이 받는 영향은 미묘했기 때문이다.
인간족 수사들이 분발하고 있을 때, 도요요라는 맨발의 소녀가 은방울 같은 소리로 웃더니 양손을 치켜 들었다. 그러자 몸에서 갑자기 눈부신 붉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백 장 높이의 거대한 복숭아나무에서 갑자기 희미한 분홍 빛이 피어오르더니 거대한 나무가 다시 커져서 그대로 위에서 내려오는 대진과 충돌했다.
수관이 대진에 닿는 순간, 끝에서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불꽃은 순식간에 나무 끝 곳곳으로 번져서 분홍색 나뭇잎들은 불꽃에 끊임없이 녹아서 사라졌다.
더 놀라운 것은 나뭇잎들이 불꽃에 끊임없이 사라지면서도 끊임없이 다시 자라났다. 타오르는 불꽃은 화려해 보였지만 수관 겉만 타고 있을 뿐 나무를 태우지는 못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사상천시대진은 더 내려오지 못했다.
이와 동시에 수관 아래의 허공에서 사방으로 흩어진 대량의 분홍색 안개는 광장 가장자리에 두꺼운 안개 벽으로 변했고, 벽에서는 강렬한 공간 파동이 느껴졌다.
“도요요, 정말 이 횡포를 도울 생각이냐?”
청련선자가 화를 냈다.
“청련 동생, 내가 말했잖아. 그냥 인정을 갚기 위해서라니까. 그리고 난 그저 대진을 막고 너희 같은 대능들이 빠져나가는 걸 막기만 할 거야. 다른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당부해놨어. 그러니까 너희는 내 나무 아래에서 여유를 즐기라고. 시간이 되면 모두 무사히 나가게 해줄게. 호호호!”
도요요가 간드러지게 웃으며 말했다.
그제야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의 몸이 갑자기 나타난 이상한 소녀에게 갇혔음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심협은 처음부터 이를 눈치챘다. 하늘을 뒤덮은 수관과 대지를 뒤덮은 나무뿌리의 본체는 천지를 차단하는 금제였다. 주위를 둘러싼 분홍색 안개 장벽이 나타나는 순간, 금제가 완성되었다.
“도요요 선배, 지금까지 종남산 아래 살면서 복숭아나무 숲을 만든 것도 오늘을 위함이었습니까?”
심협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소녀는 그를 돌아보더니 무시하려다가 잠깐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아니, 나는 거기서 사는 게 너무 좋았어. 이번에는 정말 공교로웠을 뿐이야. 아무래도 더는 거기서 술을 팔지 못하겠지?”
“도요요, 너에게 이런 지시를 한 게 도대체 누구냐!”
청련선자가 물었다.
“그건…… 말할 수 없어. 그저 이번에 도와주고 나면 그와 다시 엮일 일은 없을 거야.”
“시주, 그대는 잔인한 사람도 아니고 살인을 좋아하지도 않음을 알고 있소. 한데 정말로 그 악인을 도와 장안의 백성들을 무참히 죽일 생각이오?”
“난 사람을 죽인 적 없어! 그저 약속대로 대진이 내려오는 걸 막고 당신들 대능이 나서지 못하게 막아줄 뿐이야.”
도요요는 멈칫하더니 진지하게 말했다.
“직접 죽이지 않았다 해도 살인을 돕고 방관했소. 그게 직접 죽인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이오?”
“세상은 본래 인과로 얽혀 있는 법. 당신들이 만약 여기서 연화대회 같은 걸 열지 않았다면 이 습격은 없었을지도 몰라. 그럼 저 장안 백성들은 너희가 죽인 게 되나?”
“말이 통하지 않으니 빈승도 더는 참지 않겠소. 그대 도요요의 몸이 불문의 금강에도 맞설 수 있는지 궁금하구려.”
말을 마친 그의 몸에서 무형의 기세가 갑자기 뿜어져 나오자 기다란 수염이 바람에 휘날렸고, 입고 있던 가사도 펄럭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빼곡하고 수많은 불문의 금강경문이 몸에 떠올랐다.
이와 함께 황종대려 소리가 허공에서 유유히 울려 퍼졌고, 범어(梵語)를 읊조리는 소리 또한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이에 사람들은 마치 지금 불문의 고찰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금강호법(金剛護法)!”
공도선사가 불송을 읊으며 한 걸음을 내딛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문을 건너는 것처럼 걸을 때마다 온몸이 순금색으로 변하며 팽창하여 십여 장에 이르는 금강호법이 되었다.
그가 허공을 움켜쥐자 손에 거대한 항마금강저(降魔金剛杵)가 나타났다.
눈부신 금빛이 나무 아래 있는 소녀를 향해 떨어졌다.
그러나 도요요는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법결을 맺었다. 그러자 뒤에 있던 나무의 뿌리에서 생겨난 눈부신 분홍 빛이 땅에 있는 나무줄기를 타고 올라와 거대한 빛이 되어 그녀 앞을 막았다.
그녀가 가녀린 손가락을 가볍게 휘두르자 분홍색 빛이 거대한 분홍색 나뭇잎으로 변하여 금빛 항마금강저를 맞았다.
콰쾅!
둔탁한 소리와 함께 분홍색 나뭇잎과 강하게 충돌한 금강저에서 금빛이 폭발했다. 뒤이어 분홍색 나뭇잎은 수많은 분홍색 빛으로 변해 순식간에 흩어졌고, 항마금강저는 충격에 뒤로 날아갔다.
도요요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는지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공도선사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더니 온몸에서 다시 금빛을 뿜어내며 금강저를 휘둘렀다.
도요요는 여전히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아까처럼 거대한 분홍색 복숭아 나뭇잎을 소환하여 앞을 막았다.
폭발에 이어 공도선사는 다시 뒤로 밀려난 반면, 도요요는 여전히 여유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