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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849화 (849/1,214)
  • 849화. 지각

    대당 관부 사해당 대전 밖의 광장. 새로 지어진, 폭이 백여 장 남짓에 높이가 3척에 이르는 높은 대에는 대전을 등지고 가로로 일고여덟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이 의자들 앞에는 좌우로 여섯 개의 의자가 마주 보고 있었는데, 왼쪽에 다섯 개가 있는 반면 오른쪽에는 하나만 놓여 있었다.

    높은 대 아래로는 관중석처럼 수많은 의자가 즐비했다.

    모든 의자는 아직 비어 있었지만, 광장 주위로는 이미 검은 갑주를 입고 수면갑(獸面甲)으로 얼굴을 가린 호위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이들은 평범한 병사가 아니라 국사 원천강이 직접 길러낸 흠천감의 우영위(羽靈衛)로, 하나하나 대승기의 수사였고 특히 진법에 능통했다.

    이들의 갑옷도 특수한 과정을 거친 것으로, 각 갑옷마다 새겨진 부문을 이어붙이면 금강경문(金剛經文)이 된다.

    갑옷 한 벌의 단단함은 품급이 높은 법보에 필적했고, 유영익이 법진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면 살아 있는 진도(陣圖)가 되어 적을 가둘 수도 있고, 엄청난 위력으로 공격을 할 수도 있다.

    새벽 북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오자 광장 밖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와 연무대(演武臺) 아래 의자에 앉았다.

    이윽고 연무대 아래는 사람으로 가득 찼다.

    그중에는 인간족뿐만 아니라 선족과 마족, 요족도 있었다. 종족에 따른 구분 없이 모든 종족이 뒤섞여 앉았다.

    이들의 옷도 각양각색이라 각기 다른 종문에서 왔음을 알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의 유일한 공통점은 모두 표정이 굳어 있다는 것이었다.

    삼계 곳곳의 118개 종문에서 온 자들로, 중등 종문도 있었고 어떤 곳은 아직 경력이 미천한 하등 종문도 있었다. 어쨌든 참가자들은 모두 문내의 실권 장로나 장문인이었다. 이는 이들이 이번 대회를 중요시해서라기보다는 상위 종문이나 그 일대를 다스리는 대형 종문에서 그들에게 사람을 보내 참가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자리에 앉고도 반 각 정도 지났다.

    둥!

    다시 한번 북소리가 울려 퍼지자 둔광이 각기 다른 곳에서 연무대 위로 날아왔고, 이내 그 주인공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 아래 앉은 사람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누구도 존경의 뜻을 표하지는 않았다.

    가장 먼저 연무대에 나타난 두 사람은 대당 관부의 정교금과 국사 원천강이었고, 뒤를 이어 한 사람이 하늘에서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황금 갑옷과 검은색 수염, 손에 든 보탑. 이 거대한 남자는 바로 탁탑천왕 이정이었다.

    이어서 깜짝 놀랄 만한 존재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보타산의 청련선자, 화생사의 공도선사, 여아촌의 손 파파, 오장관의 도청진인, 천기성의 소부자였다.

    하나같이 거대 종문을 대표하는 존재이자 삼계 최절정의 존재들이었다.

    정교금과 거물급 수사들이 서로 인사를 나눈 뒤, 기다리고 있던 시녀들의 안내를 받아 가로로 놓인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한데 연무대 아래 사람들은 막 자리에 앉으려다가 또 몇 개의 둔광이 날아오자 다시 몸을 곧게 펴야 했다.

    이번에 날아온 자들은 중후한 기운은 말할 것도 없었고 놀랄 만큼 강력한 요마의 기운을 내뿜었다.

    이 압도적인 기운에 인간족과 선족 종문 사람들은 전부 하나같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속으로만 불만을 토할 뿐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반대로 요족과 마족은 참지 못하고 환호성을 질러 현장의 정적을 깨트렸다.

    한동안 회장은 소란스러웠다.

    연무대 위에 나타난 사람들 중 가운데에는 푸른 가죽 갑옷을 입고 위로 깃털이 달린 외피를 입은 사람이 서 있었다. 조금 흐트러진 검푸른 장발이 각진 얼굴을 조금 가린 이 거대한 사람이 바로 사타령의 대동주 청모사왕이었다.

    그의 옆에는 하얀 치마를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서 있었다. 머리는 위로 틀어 올렸고, 얼굴은 얇은 천으로 가리고 있었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얼음처럼 차가워 보는 순간 선녀가 앞에 있음을 깨닫고 자기도 모르게 연모의 감정이 생길 것만 같았다.

    그녀가 바로 반사동의 진정한 동주(洞主) 빙빙선자(氷氷仙子)였다.

    그녀 뒤에는 여우 가죽옷을 입은 청년이 서 있었는데, 허리춤에는 청옥 술병이 달려 있었고, 나른한 표정에는 심판을 받을 각오가 전혀 없어 보였다.

    심협이 있었다면 그를 바로 알아봤을 것이다. 그는 바로 얼마 전에 술을 나누고 동행했던 호불귀였다.

    그들 옆에는 키가 1장에 가까운 거구의 대머리 사내가 있었다. 요마의 면갑(面甲)을 썼고, 상반신 왼쪽에는 짐승의 가죽을 걸쳤으며, 훤히 드러난 오른쪽 가슴팍은 강철 같은 근육이 선명했다. 온몸에서 중후한 마기를 뿜어내는 이자가 바로 마왕채의 당대 채주 괴마왕(魁魔王)이었다.

    그들 옆에 선 마지막 사람은 요족도 마족도 아닌 선족이었다. 빛나는 은갑을 입은 채 어떤 기운도 뿜어내지 않고 있었지만, 여전히 날카로워 보이는 그는 능파성의 성주 양전이었다.

    이미 자리에 앉아 있던 정교금은 양전에게만 고개를 끄덕여 인사한 뒤, 나머지는 쳐다도 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아무런 표정이 없었고, 누구에게도 인사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현장의 소동은 점점 뚜렷해졌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술렁였다.

    이들은 앞서 온 사람들처럼 대전을 등진 의자가 아니라 연무대 왼쪽의 의자에 앉았다.

    모두가 자리를 잡고도 대회는 바로 시작되지 않았다.

    원천강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의아한 눈빛으로 옆에 선 정교금을 바라봤다.

    정교금도 어찌 된 일인지 몰라 머리를 긁적이며 주위를 둘러보고는 마지막에 연무대 한쪽에 서 있는 제자 육화명을 돌아봤다.

    육화명은 옆에 선 고화령과 귓속말을 주고받다가 스승의 눈길을 받자 어리둥절했다.

    “분명히 대회 시간을 알려줬는데, 심형은 대체 뭐 하고 있담? 아침에 부르러 올 필요 없다더니…….”

    아무리 찾아도 심협이 보이지 않자 육화명이 투덜거렸다.

    “무서워서 안 오는 게 아닐까요?”

    고화령이 물었다.

    “그 친구가? 그럴 리가. 그가 무언가를 무서워하는 걸 본 적이 없소. 전에 방촌산에서 그렇게 많은 요마들 앞에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거늘, 분명 수행하느라 시간을 잊은 걸 거요. 이 수행 벌레 같으니라고.”

    육화명은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그때, 그의 뒤에서 호족 소녀가 광장을 향해 달려왔다.

    이 소녀는 광장에 도착하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깜짝 놀라서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버렸다.

    “미소 소저.”

    심협도 걸음을 멈추고는 돌아서 그녀를 부르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이에 조금 용기를 얻은 미소도 서둘러 다가왔다.

    우영위가 두 사람을 제지했다.

    “들여보내라.”

    멀지 않은 곳에서 정교금이 근엄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심협과 미소에게 향했다.

    “저, 저, 저…… 어디서 또 호족 소저를 주워왔구만! 뭘 하다 온 건지…….”

    육화명이 중얼거렸다.

    연무대 위, 청련선자는 심협과 어린 호족 소녀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들의 시선에 긴장한 미소는 겁에 질린 눈으로 광장을 훑어봤고, 마침내 연무대 아래에 앉아 있는 호족 어른들을 발견하고서야 웃음을 찾았다.

    하지만 두 호족 장로들은 그녀를 발견하고는 당황했고, 이내 안색이 어두워져 서둘러 그녀에게 손짓을 했다.

    “심 오라버니, 저…… 저는 먼저 가볼게요.”

    미소가 인사를 남기고는 서둘러 가문 어른들에게 달려갔다.

    근처에 다가가 미처 앉기도 전에 백발 노파가 그녀를 노려보며 작은 소리로 호통 쳤다.

    “누가 오라고 했느냐?”

    “추(秋) 파파, 아침에 왜 안 깨우고 그냥 가셨어요?”

    미소는 주눅 들기는커녕 애교를 부렸다.

    “어허, 장안으로 오는 것도 허락지 않았거늘 몰래 일족을 뛰쳐나와 놓고는……. 네가 올 자리가 아니다. 어서 썩 돌아가지 못해?”

    추 파파는 강경한 태도로 꾸짖었다.

    미소는 그제야 노파가 진심으로 화가 난 것임을 알아챘다.

    “어휴, 어찌 그리 말을 안 듣는 게야?”

    옆에 선 다른 백발노인도 참지 못하고 꾸짖으며 고개를 저었다.

    “화 공공(華公公), 어떻게 공공까지…….”

    미소는 갑자기 서러운 듯 울먹였다.

    “울지 말고 당장 청구로 돌아가거라!”

    추 파파의 호통에 미소는 움찔했다. 평소에 자신에게 친절하고 상냥하던 추 파가가 이렇게 자신을 혼낼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큰 목소리로 인해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만들 하게.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야.”

    화 공공은 추 파파의 손등을 토닥여 만류했다.

    추 파파는 복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더니 말없이 눈을 감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눈시울이 붉어진 미소는 두 어른 옆에 앉아 고개를 떨구었다.

    잠깐의 소동이 지나가자 사람들은 또 다른 광경에 깜짝 놀랐다. 푸른 도포를 입은 청년이 곧장 연무대 위로 올라간 것이다.

    “저 청년은 누군데……?”

    사방에서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심협은 정교금과 원천강, 청련선자 등에게 예를 갖춰 포권한 후 하나 남은 좌석에 태연하게 앉았다. 청모사왕이나 양전 등은 돌아보지도 않았다.

    맞은편의 호불귀와 눈이 마주친 순간, 두 사람은 잠시 멍해 있다가 서로 고개를 끄덕여서 인사를 나눴다.

    한편, 사람들의 의문은 더욱 커져만 갔다. 누구도 심협을 제지하지 않았으니 그의 신분이 특별하다는 것쯤이야 알 수 있었지만, 그럴수록 그 정체가 더욱 궁금해진 것이다.

    “모두 정숙해주십시오. 여기 심 도우는 오늘 방촌산을 대표하여 사타령, 마왕채, 반사동 그리고 능파성과의 대질(對質)을 진행할 것입니다. 그가 보리선조의 대변인이라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정교금의 해명에 대 위의 사람들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던 반면, 아래 사람들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모두가 심협의 신분을 보리선조의 후계자이거나 가장 아끼는 관문의 제자일 것이라 추측했다.

    “여러분, 이번 연화대회는 삼계의 화목과 각 종족의 평화를 논하기 위해 열렸습니다. 다만, 그전에…… 얼마 전, 삼계를 놀라게 하고 평화를 어지럽히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이미 알고 계시듯 방촌산이 습격을 받은 것입니다.”

    정교금이 목을 가다듬고 말을 꺼내자 모두가 다시 조용해졌다.

    “이 일에 대해 삼계 전체에 소문이 무성하고 왜곡되어 퍼지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여, 오늘 이 자리에서 이 사건의 경위를 다시 정리하고 처음부터 낱낱이 파헤쳐 여러분께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좋습니다.”

    대 아래, 방촌산의 은혜를 입은 종문이 바로 호응했다.

    “부디 방촌산을 위해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밝혀 주십시오.”

    많은 사람이 호응했지만, 요족과 마족 사람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야기를 시작하자면…….”

    곧이어 정교금이 방촌산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한데 심협은 이야기를 들을수록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이번 사대 종문을 필두로 수많은 중, 소급 종문이 연합하여 멸문하려 했던 행동이 각종 오해로 인해 일어난 잘못된 사건으로 변해간 것이다.

    이 사건에서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사타령과 반사동이고 마왕채와 능파성은 그다음이라 했다. 한데 요족과 마족이 연합하여 신마의 우물 봉인을 열려고 했던 일은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양손으로 의자 팔걸이를 움켜쥔 심협의 손등에 핏줄이 솟아올랐다. 더는 듣고만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일어나 반박하려던 그의 식해에서 갑자기 국사 원천강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심 도우, 화내지 말게. 이번 일은 방촌산과 협의했고, 그들도 동의한 일이네.”

    원천강의 말투는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동의했다고요? 선조님의 정신이 어떻게 되지 않은 이상 그럴 리가 있습니까?”

    심협은 전혀 믿지 않았다. 심지어 방촌산이 이번 회의에 참여하지 않은 데에도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심하게. 당사자인 종문에 가해질 제재는 변하지 않을 걸세. 다만, 신마의 우물을 열려고 했던 책임은 물을 수가 없네. 그랬다가는 종족 간의 갈등이 더 격화될 테니까. 그것만큼은 모두가 막고 싶어 하고 있다네.”

    원천강의 이어지는 전음에 심협은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이 일, 정말 보리선조님께서 동의하신 겁니까?”

    “왜? 내 말에 믿음이 안 가나?”

    원천강은 웃으며 말했다.

    이쯤 되고 보니 심협도 더는 따지지 않고 묵인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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