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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848화 (848/1,214)
  • 848화. 대표

    복도를 지나자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면서 멀지 않은 곳에 수증기가 자욱한 연못이 나타났다. 연못 가득한 연꽃이 푸른 기운을 물씬 풍겼다.

    심협은 연못에 우뚝 솟은 바위를 유심히 살피다가 눈을 반짝였다. 어렴풋이 어두운 빛깔의 금속이 바위 사이를 지나갔는데, 반짝거리는 비늘로 보아 물구렁이 같았다.

    심협이 멈춰 서 있는 것을 본 천기성 제자는 그가 천기를 깨트리는 것에도 개의치 않고 말했다.

    “선배님, 의아하실 것 없습니다. 저희 천기성의 언술 꼭두각시이자 천기회관을 지키는 사수(四獸) 중 하나인 현무입니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으니 비밀이라 할 수도 없지요.”

    “오, 그럼 입구에 있던 법진도 사수 중 하나입니까?”

    심협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주작 법진입니다. 지하에는 주작 언수가 지키고 있지요. 다만 회관이 공격당할 때만 모습을 드러냅니다.”

    제자의 설명을 들은 심협은 천기회관의 방어 수단에 감탄했다.

    “이런 장치들을 방문객에게 알려줘도 괜찮은 겁니까?”

    “네, 괜찮습니다. 사실 이건 성주님의 뜻입니다. 게다가 설령 이곳의 장치에 대해 안다 해도 감히 뚫고 들어올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오히려 널리 알리는 것이 분수도 모르는 자들의 마음을 꺾을 수 있지요.”

    제자가 자신 있게 웃으며 말했다.

    “그뿐이 아니겠지요. 이리 걷다 보면 어느 방문객이 천기성의 언술에 굴복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천기회관의 충실한 손님이 될 수밖에요.”

    “하하! 물론 그렇기도 합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객청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아는 얼굴이 있었는데, 바로 복 장로였다.

    복 장로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심협을 맞았다.

    두 사람이 인사말을 나눈 뒤 자리에 앉자 단아하고 아름다운 시녀가 들어와 차를 따라줬다. 시녀는 진짜 사람이 아닌 꼭두각시였는데, 그 표정과 몸짓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진짜 사람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복 장로님, 오랜만이군요. 언 도우는 어떻습니까? 이번에 장안성에 왔습니까?”

    “무사는 이미 회복했지만, 이번에 장안성에는 오지 않았소. 성주님께서 그에게 성주의 자격을 주셨기에 남아서 천기성의 업무를 총괄하고 있지요.”

    “그렇군요. 성주님 같은 스승이 있다니, 언 도우가 정말 부럽습니다.”

    심협이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때였다.

    “누가 내 얘기를 하고 있나?”

    갑자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고, 심협과 복 장로는 동시에 일어났다.

    “성주님.”

    “선배님을 뵙습니다.”

    천기성의 성주 소부자가 들어서자 복 장로와 심협이 동시에 예를 올렸다.

    “우리 사이에 무슨 예의인가? 하하! 어서 앉게.”

    다시 자리에 앉자 소부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지난 방촌산 사건 때 자네도 거기 있었다더군.”

    “그렇습니다. 그 일 때문에…… 갔다가 우연히 마주쳤습니다.”

    심협은 절반만 말하고 절반은 숨겼으나, 소부자는 금세 알아듣고 웃었다.

    “옥침을 고치는 일은 복 장로도 알고 있으니 괜찮네. 사실 복 장로가 재료를 모으는 일을 책임지고 있지. 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네.”

    그 말에 심협은 복 장로에게 가볍게 사과하고는 다시 말했다.

    “산하사직도를 빌리기 위해 갔다가 예상치 못하게 함께하게 됐습니다. 다만, 실력이 미천하여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지요.”

    “심 소우는 겸손이 지나치군. 내 듣기로는 큰 활약을 했다던데?”

    “과찬이십니다. 진원대선과 탁탑천왕이 제때 도착한 덕에 요족들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나저나, 산하사직도는 어떻게 됐나?”

    “구했습니다.”

    소부자가 머뭇거리며 묻자 심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 대답에 소부자는 오히려 당황했다. 심협이 정말로 산하사직도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모양이었다.

    “보리선조가 정말로 산하사직도를 빌려준 겐나?”

    소부자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렇습니다.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결국 빌려주셨습니다. 보여드릴까요?”

    “아닐세. 그 보물은 일단 한번 꺼내면 기운이 새어나가는 걸 막지 못하니 흠천감(欽天監)에 발각될지도 모르네. 지금 장안성에는 온갖 존재들이 모여 있으니 함부로 꺼내지 않는 게 좋아.”

    “알겠습니다.”

    소부자가 서둘러 말리자 심협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토록 빨리 산하사직도를 받아낼 줄은 몰랐군. 그럼 이제 심혈구이주만 구하면…….”

    “심혈구이주도 구했습니다. 다만…….”

    “그래, 심혈구이주를 구하기는 쉽지 않을…… 뭣! 심혈구이주를 구했다고?”

    소부자가 체통도 잊고 벌떡 일어나며 소리 높여 물었다.

    “네.”

    소부자는 선 채로 한참이나 심협을 내려다보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이렇게 빨리 그 진귀한 보물들을 모두 얻다니,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건가?”

    “그게…… 조금 복잡한 사정이 있습니다.”

    심협은 용궁에서 겪은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용족에 그런 변화가 있었다니, 사해가 평온하기는 글렀군.”

    “선배님, 심혈구이주를 얻기는 했지만, 그 안에 들어 있던 용혼이 사라졌습니다. 그래도 괜찮을까요?”

    “괜찮고말고. 거기 용족 선조의 잔혼이 남아 있었다는 것은 나도 전혀 몰랐다네. 아홉 마리 이룡의 기혈이 필요했던 것이니, 그 물건이 부서지지만 않았다면 괜찮네.”

    “다행입니다. 그럼 수리는 언제쯤 시작할 수 있을까요?”

    심협의 물음에 소부자의 안색이 조금 굳더니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옆에 있는 복 장로가 미안한 기색을 띠며 대신 대답했다.

    “심 도우, 그게…… 정말 미안하게 됐소. 도우가 고생하며 두 가지 보물을 얻었지만, 우리가 필요한 재료를 아직 다 모으지 못했소.”

    “아닙니다. 제가 너무 성급했습니다. 송구합니다.”

    심협이 서둘러 사과했다.

    “사실 재료를 모두 모았다 해도 장안성에서는 옥침을 고칠 수 없다네. 천기성으로 돌아가 법진을 복원하고 귀원성인의 힘을 빌려야만 고칠 수 있지.”

    “그렇군요.”

    “장안성의 일이 끝나면 나와 함께 천기성으로 돌아가세. 그때면 재료가 준비될 테니 옥침을 고칠 수 있을 걸세.”

    “알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배님.”

    심협은 깊게 포권했다.

    “아닐세. 그나저나 연화대회 준비는 잘했나?”

    소부자가 웃으며 손을 내젓더니 물었다.

    “준비요? 무슨 준비 말씀이십니까? 이번 대회가 저와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응? 모르고 있었나?”

    소부자가 의외였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번 연화대회에 방촌산은 아무도 파견하지 않기로 했다네. 그래서 자네가 대신 반사동과 사타령에 대해 진술하기로 되어 있는데…….”

    “정말입니까?”

    소부자의 이어지는 말에 심협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무래도 아직 못 들은 모양이군. 대회까지는 이제 사흘밖에 남지 않았으니 지금 와서 번복해도 늦었네. 사타령 등의 처분은 이미 결정됐지만, 자네가 나서서 진술하지 않으면 당시의 상황이 그대로 전달되지 않겠지. 그리 되면 저들의 악행도 밝혀낼 수 없을 거고, 요마 종문들이 다른 수를 쓸지도 모르네.”

    “알겠습니다. 제가 대신 출석하지요.”

    심협은 한참을 고민하더니 말했다.

    “그럼 마족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며칠 동안만이라도 여기 천기회관에서 지내게.”

    “장안성에서 저들이 그렇게까지 하겠습니까?”

    “지금 저들 대부분은 방촌산 대신 자네가 진술한다는 것을 모르네. 허나 이 소식이 알려진다면 당연히 무슨 짓을 벌일 수도 있지.”

    소부자는 진중한 눈으로 심협을 바라보았다.

    “장안성에서 제가 저들의 기습에 당한다면 저들의 광기가 극에 달했다는 것이니 그리 되면 천궁과 대당 관부도 마족의 민낯을 인정하게 되겠지요.”

    심협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 말은 직접 미끼가 되어 지금의 이 평화로운 국면을 깨겠다는 건가?”

    소부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거짓된 평화는 하루라도 빨리 깨는 게 좋을 겁니다.”

    심협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하하! 자네는 정말 간이 크군. 자네 생각이 그렇다면 나도 더는 말리지 않겠네. 이곳은 대당 관부의 영역이니 저놈들도 함부로 소란을 피우지는 않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이리로 달려오게. 하긴, 태을 수사가 아닌 이상 누가 자네를 해칠 수 있겠는가?”

    “감사합니다, 선배님, 사실 그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하하!”

    심협도 웃으며 말을 받았다.

    둘은 잠시 대화를 나누었고, 심협은 이내 인사를 남기고 나왔다.

    돌아가는 길에 마족이 무슨 수작을 부릴지 보기위해 일부러 한적한 길로 걸었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관부 거처로 돌아와서 잠시 쉬고 있는데 육화명이 서둘러 건너왔다.

    심협은 호불귀에게 술을 한 병 나눠준 일을 이야기했으나 육화명은 개의치 않았다. 그저 서둘러 술 단지를 가지고 와 심협과 함께 마시기 시작했다.

    과일주가 뱃속에 들어가자 만족한 그는 빙긋 웃더니 그제야 심협이 방촌산을 대신해 진술해줄 것을 부탁했다.

    한데 심협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육화명은 허탈한 듯 혀를 찼다.

    “놀라지 않는 걸 보니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인데?”

    “방금 천기회관에 갔다가 들었습니다. 한데 어찌 오는 길에 알려주지 않고 지금 알려주는 겁니까?”

    “나를 탓하지 말게. 나도 오늘 스승님께 임무를 보고하다가 알게 된 일이니까. 그나저나, 방촌산도 너무하는군. 자네는 자신들 때문에 하마터면 목숨까지 잃을 뻔했는데 어찌 이런 번거로운 일까지 떠넘긴단 말인가?”

    육화명은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더니 불만스러운 듯 투덜거렸다.

    “이번에 방촌산은 피해가 막심하여 종문이 텅 빈 것과 다름없을 거요. 보낼 사람이 없겠지요. 그리고 마침 저는 모든 과정을 겪었으니 방촌산 대표로 나서기 적합하기도 하지않소?”

    심협이 에둘러 방촌산을 거들었다. 사실 산하사직도를 받았으니 이 정도 돕는 것은 의가 상하기는커녕 당연히 해줘야 할 일이지만, 육화명이야 전후 사정을 모르니 불만을 가질 만도 했다.

    “그래도 별일은 없을 걸세. 스승님께 듣기로는 마족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나 적잖은 종문이 사타령과 반사동의 행동에 불만을 품었다더군. 그러니 그들도 장안성에서 다른 수상한 짓은 못 할 게야. 게다가 그들에 대한 처분은 이미 결정되어 각 종문에 알려졌으니 지금 대회는 그저 경고의 의미일 뿐…….”

    심협은 그가 자신을 안심시키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내심 감동했고, 말없이 함께 술을 마셨다.

    * * *

    사흘이 훌쩍 지나 연화대회 당일이 됐다. 이번 연화대회는 삼계의 수많은 대종문이 참석하기에 회장을 대당 관부 안의 사해당(四海堂) 앞으로 정했다.

    심협은 지난 며칠간 수행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어느덧 대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는 서둘렀다.

    서둘러 복도를 지나 모퉁이를 돌던 그는 다른 생각에 정신이 없어 그만 누군가와 부딪히고 말았다.

    꽈당!

    가벼운 소리와 함께 바닥에 넘어진 사람은 귀가 뾰족하고 청순해 보이는 호족 소녀였다.

    “아야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소녀는 자신이 누구와 부딪쳤는지도 제대로 보지 않은 채 연신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아닙니다. 제가 사과할 일이죠.”

    심협의 말에 소녀가 겁에 질린 채 고개를 들었다. 아름다운 푸른 눈이 두어 번 깜짝거리더니 다시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한데 누구시기에 그리 급히 다니시는 겁니까?”

    심협이 웃으며 물었다.

    “장로님을 따라 연화대회에 왔다가 모르고 늦잠 자버려서…… 일어나보니 장로님과 일행이 보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혼자서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한데…… 대당 관부는 너무 넓어서…….”

    소녀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잘됐군요. 마침 저도 대회에 가는 길이니 함께 가시죠.”

    “정말요? 다행이다!”

    소녀는 벌떡 일어나 심협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시작할 시간이 다 됐으니 서두르시죠.”

    심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앞장섰고. 소녀도 황급히 따라갔다.

    “저…… 저는 미소(迷蘇)라고 해요. 그쪽은……?”

    소녀가 뒤를 따라오며 물었다.

    “심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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