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7화. 심상치 않은 기류
“그게…… 한 병만 팔 수 없겠소? 딱 한 병이면 되는데…….”
심협이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휴, 한 명 더 왔네……. 안 팔아요! 안 팔아! 여기 있는 두 단지는 우리 단골손님이 예약한 거라고요! 안 판다고 했으면 절대 안 팔아요.”
소녀는 짜증을 내며 손을 휘휘 젓고는 가게 문을 완전히 닫으려 했다.
“아, 안 돼!”
여우 가죽옷 남자가 황급히 손을 내밀어 붙잡으려 하자 소녀가 다시 매섭게 노려봤다.
남자는 머쓱해하며 손을 거두었다.
이를 보고 돌아서려던 심협은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술 단지 두 개를 예약한 손님이 육화명이라는 사람이오?”
“어? 어떻게 아셨어요?”
소녀는 동작을 멈추고는 놀라며 말했다.
심협은 그제야 웃을 수 있었다.
이전에 육화명이 자신은 매년 이곳에 와서 술 단지 두 개를 샀는데, 벌써 햇수로 7, 8년이 되었으니 그야말로 단골 중의 단골이었다. 그래서 혹시나 싶어 물은 것이었는데, 이리 됐으니 참으로 다행이었다.
“휴우, 다행이오. 육형이 올해는 일이 바빠서 오지 못하게 됐는데 기간을 놓칠까 나보고 대신 사다 달라고 한 게요.”
“오, 그래요? 그런데……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어요?”
소녀는 심협을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의심스러운 듯 물었다.
“아, 그게…… 증명할 만한 건 안 줬는데…….”
심협은 갑자기 난감해지자 머리를 긁적였다.
“어디서 우리 손님 이름을 듣고 와서 날 속이려는 거 아니에요?”
소녀가 눈살을 찌푸리며 허리를 곧게 폈다.
심협은 잠시 생각하더니 바로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가 손을 휘두르자 손에 물기가 피어올랐고, 소녀 앞에 물의 장벽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빛이 번득이더니 육화명의 모습이 그 위에 생생하게 나타났다.
“소저, 보시오. 이거면 내가 육형을 안다고 믿어주시겠소?”
소녀가 물의 장벽에 나타난 그림을 보고는 눈이 반짝였다. 정말로 이 남자가 육화명을 알고 있음을 믿게 된 것은 물론이고, 심협의 술법에 감탄한 것이다.
“진짜 육 오라버니를 알고 있군요! 그럼 이 술은 가져가셔도 돼요. 그런데…… 아직 술값은 내지 않았어요.”
“아, 알겠소. 내가 내겠소.”
심협이 웃으며 말했다.
소녀는 은자를 받자마자 마지막 남은 도과주 두 단지를 가져와 심협에게 내밀었다.
한데 막 술을 받으려는 순간, 옆에서 갑자기 손이 튀어나오더니 심협을 향해 포권했다.
“도우, 도과주 단지 하나만 양보해주실 수 없습니까?”
바로 그 의젓해 보이는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물은 것이다.
“미안하지만, 저도 부탁을 받은 것이라 어려울 것 같습니다.”
심협은 더 이상 엮이기 싫어 얼른 대답했다.
“그럼 한 병, 딱 한 병이면 됩니다.”
여우 가죽옷 남자는 손가락 하나를 세운 채 애처롭게 말했다. 준수한 외모에 초롱초롱한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침을 꼴깍 삼키는 것을 보니 뱃속에서 벌써 술귀신이 꼬이기 시작한 듯했다.
심협은 사실 진즉 이 남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는 인간이 아닌 요족이었다.
적뢰산 옥호 일족과의 관계 덕분에 심협은 요족에 대한 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더욱이 이자도 요기를 전혀 드러내지 않은 데다, 소녀에게 미혹 수단을 동원했다면 간단하게 술을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내심 상대를 좋게 보게 됐다.
한데 그런 상대가 이토록 간절해 보이니 측은지심이 들었고, 심협은 소녀에게 육화명의 술 단지에서 과일주 한 병을 주라고 전했다.
여우 가죽옷 남자는 곧장 화색이 돌더니 심협에게 예를 올리려 했다.
“아, 이러실 것 없습니다.”
심협은 당황해 급히 그를 부축했다.
“정말 감사하오! 도우의 성함이 어떻게 됩니까? 내년에는 술 단지 하나로 갚겠습니다. 하하!”
여우 가죽옷 남자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심협이라 합니다. 이 술은 벗의 부탁을 받은 것일 뿐, 저는 술을 그렇게 즐기지 않으니 괜찮습니다.”
“심 도우였군요. 전 호불귀(狐不歸)라 합니다. 이미 눈치챘겠지만 전 요족이고, 청구(靑丘) 일족입니다.”
호불귀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는 사이, 소녀가 술 한 병과 단지를 들고 와 두 사람에게 건넸다.
술병을 받은 호불귀는 바로 한 모금 마시고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으나, 이내 상쾌한 향기가 퍼지자 참지 못하고 입맛을 다셨다.
심협은 육화명의 술을 저물 반지에 넣고는 웃으며 그 모습을 바라봤다.
“심형도 장안으로 돌아가시오? 마침 길이 같으니 같이 갑시다.”
인사를 나누던 중 심협이 장안성으로 가는 길임을 밝혔는데, 이를 기억한 호불귀가 제안했다. 심협도 흔쾌히 동의했다.
호불귀가 소매에서 두 장의 종이로 접은 백마를 꺼내더니 몇 마디 주문을 읊고 휙 던지자 바로 커다란 두 마리 말로 변했다. 두 사람은 이 말을 타고 관도(官道)를 따라 장안성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대화를 나눠보니 호불귀는 사실 장안성에 머문 지 며칠 됐는데, 우연히 도과주의 명성을 듣고는 서둘러 임도진으로 향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금세 가까워졌지만, 서로 알게 된 시간이 짧았기에 깊은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다. 그저 서로 흥미가 있는 술법이나 부적에 관해 이야기할 뿐이었다. 암묵적으로 서로의 신상이나 종문에 관해서는 묻지 않았다.
장안성 입구에 도착하자 호불귀는 종이로 접은 두 마리의 백마를 다시 거두고는 걸어서 성으로 들어갔다.
심협이 성문에 막 들어서자 거센 망치질 소리가 들려왔다. 양쪽 성벽 밑에서는 웃통을 벗은 역사들이 거대한 망치를 휘두르며 강철을 땅에 박고 있었다.
역사들 뒤에는 몇 명의 조정 관복을 입은 사람이 서 있었는데 관복 양식을 보니 호부(戶部)도 있었고 공부(工部)도 있었다. 성벽을 보수하는 것이리라.
심협은 잠깐 구경하다가 이내 다시 걸었다.
내성에 가까워지자 두 사람은 헤어질 때가 되었다. 호불귀는 성 동쪽의 종명아원(鐘鳴雅苑)이라는 객잔에 묵는 중이었다. 그곳은 선가의 객잔이 아니라 평범한 객잔이었다.
호불귀는 그 객잔이 직접 담근 술이 맛있어서 그곳에 묵는다고 했다.
심협은 대당 관부로 향했다. 그곳에 정교금이 그를 위해 배정해준 작은 별원이 있기 때문이었다.
헤어질 때 두 사람은 서로 묵는 곳을 확인해 다시 만나기로 했다.
대당 관부에 도착한 심협은 이곳의 분위기가 사뭇 다름을 느꼈다. 경계 병력은 이전보다 두 배로 늘었고, 입구에서는 신분 검사가 더욱 엄격해졌다. 심협도 진즉 대당 관부와 안면을 트지 않았다면 들어가기가 번거로웠을 터였다.
안면이 있는 호위 통솔자에게 물었더니 이게 전부 ‘연화대회’가 열리기 때문이라 했다.
“이번 연화대회는 저번의 삼계무도회와는 또 사뭇 다르답니다. 듣기로는 평화를 논하는 자리지만, 사실은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른다더군요. 사실 요마 쪽에서 처벌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고 들고 일어날까봐 모두 걱정이 큽니다.”
“그래도 장안성이고 인간족의 중심지인데 그들이 소란을 피울까요?”
심협은 그렇게 상대를 안심시켰다. 한데 의문이 들었다. 회의를 개최하기 전에 서로 말을 맞춘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장안성이라서 더 큰 피해를 보지 않을까 싶어서 하는 걱정입니다. 요마, 두 종족이 작정하고 떼로 몰려오면 과거 경하용왕 때처럼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겠습니까? 요마는 도의를 따지는 족속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게 걱정이면 차라리 장안성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모이면 되지 않소? 설마 마족과 요족의 종문들이 거절한 게요?”
“그렇습니다! 그들도 어리숙하지 않으니 생사가 걸린 상황에 모든 걸 선족과 인간족의 처리에 맡길 리가 없지요. 제 생각에는 표면상으로는 그렇게 하겠다고 해놓고 적당히 얼버무리며 넘어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 이번 대회는 논의는 하되 양쪽이 서로를 꺼리고 떠보는 자리겠군요.”
심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겉으로 드러난 상황은 그렇지만, 속내는 어떤지 아무도 모르죠.”
호위 통솔자가 멋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
모처럼 선사(仙師)와 대화를 나누자 기꺼웠지만, 자신이 알 수 있는 내막에는 한계가 있었다.
심협은 인사를 남기고 떠나려다가 문득 든 생각이 있어 다시 물었다.
“아, 대종문 사람들은 장안 어디에서 묵고 있소?”
“그게…… 좀 복잡합니다. 대당 관부와 친한 쪽은 관부 안의 객원에 묵고 있고, 본래 장안성에 자기 회관(會館)이 있는 종문은 각자의 회관에 묵고 있습니다. 보타산처럼 화생사와 관계가 좋은 종문은 성 밖 화생사에 머물고 있지요.”
“그럼 천기성 사람들은 어디 있소?”
“아, 그들은 장안성에 적지 않은 상점을 갖고 있다 보니 듣기로는 성 동쪽의 천기회관에 묵고 있다 합니다. 듣기로는 그 언술의 대성인 소부자 성주도 모처럼 천기성을 나와 장안에 왔다지요?”
통솔자의 답변에 심협은 크게 기뻐하며 천기회관의 위치를 확인한 뒤 숙소로 향했다.
그는 본래 먼저 정교금을 만난 후에 천기회관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정교금이 국사 원천강과 무언가를 의논하는 중이라 돌아오려면 시간이 걸릴 터였다.
심협은 별원에서 휴식을 취한 뒤, 저녁 무렵 성 동쪽으로 향했다.
저녁 무렵의 장안성은 매우 떠들썩했고, 거리는 수많은 등불로 환했다. 저녁 바람이 불어와 주점의 깃발들이 펄럭였고, 음식과 술의 향기가 널리 퍼져 나갔다.
시가(市街)에는 더 많은 술집과 노점들이 즐비했고, 오호사해(五湖四海)를 건너온 온갖 음식 냄새와 연기가 곳곳에서 피어올랐다.
심협은 북적거리는 사람들 사이를 누비면서 온기를 느끼는 동안 마음이 안정되어갔다.
이번 연화대회는 이전과 달리 대종문들만 참여하기에 급이 높지 않은 종문과 장문인들은 참여할 자격이 없었고, 백성들은 대부분 그런 대회가 열린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니 이번 대회의 영향을 받을 일도 없을 터였다.
천기회관은 성 동쪽에 있었다. 본래도 크기가 작지 않은 정원이었는데, 몇 번의 확장 공사를 통해 천기회관 전체를 둘러싸게 됐다.
천기회관 입구에 도착한 심협의 눈에 수수한 검은색 문이 들어왔다.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고리가 달린 짐승 머리 장식과 81개의 황동색 못이 박혀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대답은 잠시 후, 문에 달려 있는 청동 짐승의 머리에서 들려왔다. 갑자기 사람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이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짐승의 입이 벌렸다 닫히자 고리가 딸랑 하고 울렸다.
“후배 심협이 소부자 선배님을 뵙기를 청합니다.”
심협의 말이 끝나자 또 침묵이 흘렀다.
한참 후, 두 개의 청동 짐승 머리가 동시에 입을 벌리고 고리가 아래로 내려가더니 검은색 문이 천천히 열렸다. 문은 얇아 보였지만, 무거운 마찰음이 났다.
대문 안쪽은 정원이 아닌 산책로였는데, 폭이 좁았고 양쪽으로는 높게 솟은 하얀색 담이 있었다. 담에는 주작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뜨거운 기운이 느껴지는 이 도문은 작은 수호 법진이었다.
심협은 옷을 정돈하고는 안으로 들어가 곧장 산책로 끝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천기성 복장을 한 청년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서로 인사를 마친 후, 청년이 말했다.
“심 선배님, 성주님은 지금 밀실에 계십니다. 장로님께서 모시러 갔으니, 수고스럽지만 객청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천기성 제자의 안내를 따라 심협은 회관 복도를 누볐다.
그렇게 잠시 걷다 보니 눈앞이 어지러워졌다. 종횡무진으로 교차하는 복도는 매우 복잡하여 미궁(迷宮)과 다름없었다. 만약 혼자 있었다면 분명 길을 잃었을 터였다.
또한, 복도 곳곳의 구석진 곳에는 법진과 장치가 숨겨져 있었는데, 심협이 발견한 것만 해도 일곱 군데 이상이었다. 위력은 모르겠지만 그 수만 보더라도 침입자 입장에서는 소름이 끼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