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846화 (846/1,214)
  • 846화. 연화대회(衍和大會)

    새로운 용왕이 처음 내리는 어명에 이어 두 번째 어명이 내려졌다.

    “모든 동해 수족은 10년간 삼해에 복수하지 않는다.”

    이번 어명에는 많은 용족들이 흠칫 놀랐다.

    “네?”

    “복수를 하지 않다니, 이 무슨……?”

    “어째서……?”

    대전은 발칵 뒤집혔고,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단, 오늘부터 동해 용궁은 정식으로 군사를 늘린다. 신분과 종족을 막론하고 능력 있는 자를 궁으로 불러들여라. 또한, 해역 안의 모든 종문은 종문에 종속된 모든 자의 정보를 정리해 제출하라. 앞으로 동해 용궁의 통행증을 가진 자만이 동해를 출입할 수 있다. 이를 함부로 어길 시 즉각 처결한다.”

    오홍은 사람들의 의문에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세 번째 어명을 내렸다.

    이에 대전의 모든 사람은 어리둥절했지만, 금세 이해할 수 있었다. 새로운 용왕은 복수를 포기한 것이 아니다. 지금의 세력으로는 복수가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복수할 힘을 모으는 것이다.

    한편, 멀리서 오홍을 보던 심협은 일순 어리둥절했다. 이 새로운 용왕은 자신이 지금껏 알던 구태자와는 조금 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짧은 시간에 그런 엄청난 일들을 겪었으니 어느 누가 변하지 않겠는가?

    이번 용궁의 회의는 무려 세 시진이 지나서야 끝났다. 오홍은 수많은 대대적인 혁신 정책을 반포했다. 심지어 용궁의 무고(武庫)까지 개방하여 수족의 더 많은 비서를 각 수족이 수련하게 했다. 모든 것은 최대한 빨리 힘을 키워 삼해에 복수하기 위함이었다.

    모두가 돌아간 뒤, 대전에는 심협과 오홍만 남았다.

    오홍은 단상 가장 아래 계단에 쪼그려 앉아 어깨를 두드렸다.

    심협은 말없이 다가가 그 옆에 앉았다.

    “심형, 정말 바로 떠날 것이오?”

    오홍은 심협이 아니라 앞을 물끄러미 보며 물었다.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처리해야 할 큰일이 수두룩해서요.”

    심협은 고개를 젓고는 웃으며 말했다.

    “삼해에 복수하려면 심형의 도움이 절실하오.”

    오홍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권했다.

    “이미 잘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있어봐야 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조급해하지 마시고 계획대로 10년 뒤를 기약한다면 복수는 성공할 것입니다.”

    심협이 직언했다.

    “그래도 심형이 있어야 든든한데…….”

    오홍이 웃으며 말하고는 심협을 바라봤다.

    심협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어서 말했다.

    “지금은 중요한 일이 있어 가봐야 하지만, 제 도움이 꼭 필요할 때는 언제든 불러주시면 반드시 와서 돕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더는 강요하지 못하겠소.”

    오홍도 더는 권하지 못하고 씁쓸한 듯 웃었다.

    * * *

    며칠 뒤, 동해 용궁 외곽.

    심협은 며칠 더 머물면서 정양한 후 용궁을 떠나 천기성으로 향했다.

    오홍이 배웅했고, 그의 옆에는 청질을 비롯한 심복들이 함께했다.

    “심형, 긴 말은 하지 않겠소. 이 용문령(龍門令)을 받아주시오. 동해에 드나들기 더 수월할 거요.”

    오홍이 건넨 검은 옥패를 심협은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

    그가 떠나려는데, 멀리서 둔광이 빠르게 날아오더니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손에 술주전자를 든 청년이 어검을 타고 심협 등에게 다가온 것이다.

    청질 등 동해 수족 수령들은 갑자기 나타난 적에 일제히 병기를 들어서 막아서려 했다.

    “괜찮습니다. 제 지인입니다.”

    심협이 서둘러 말렸다.

    그 청년이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심형!”

    “육형!”

    심협도 웃으며 대답했다. 청년은 다름 아닌 육화명이었던 것이다.

    육화명은 바닥에 내려서더니 환하게 웃었다.

    “아직 떠나지 않아서 다행이군. 천기성까지 갈 뻔했지 뭔가.”

    “왜요?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심협이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그건 아닐세. 일전에 방촌산 일에 관한 결과가 나왔거든. 각 대종문에 사람을 보내 이번에 열리는 처분 회의에 초청하기로 했네. 마침 용궁을 초청해야 했는데 자네가 동해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내가 직접 온 거라네.”

    육화명은 술주전자를 허리춤에 걸고는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그렇군요.”

    심협이 고개를 끄덕였다.

    “날 용왕께 안내해주겠나? 용족은 이번에는 동해만 초청하기로 해서 용왕을 직접 뵙고 아뢰어야겠네.”

    육화명의 말에 주위에 있던 청질 등의 안색이 변했고, 자기들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 처분 회의에는 용궁은 참가하지 않겠습니다.”

    오홍은 안색하나 변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육화명은 이 말에 당황하여 오홍을 돌아봤다.

    “용왕께 여쭙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그는 말을 꺼내고는 심협이 자신을 향해 고개를 젓는 걸 보고는 말 못 할 사정이 있음을 눈치챘다.

    “그렇다면 하는 수 없겠군요. 동해에 혹시 어려움이 있다면 대당 관부는 언제든 돕겠습니다.”

    육화명은 비록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지만, 침착하게 대응했다.

    “감사합니다. 허나 용궁의 일은 용궁이 알아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오홍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그의 말에는 확고한 거부 의사가 담겨 있었다.

    육화명은 내심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더는 따지지 않고 심협을 돌아봤다. 이제 어떻게 할 계획이냐고 묻는 듯했다.

    “육형, 저도 바로 천기성으로 가야 해서 회의에 참석하긴 힘들 것 같습니다.”

    “천기성이라면 굳이 갈 것 없네. 이번 처분 회의에 천기성도 초청했으니까. 소부자 성주도 장안으로 와서 참가하기로 했네. 천기성에 가는 건 그를 만나기 위함이 아닌가?”

    육화명이 웃으며 말했다.

    “하긴, 이런 큰일에 어떻게 천기성이 빠지겠습니까? 그렇다면 같이 장안으로 가야겠군요.”

    심협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오홍과 정식으로 인사를 나눈 후, 육화명과 함께 떠나갔다.

    가는 길에 육화명은 용궁의 일에 대해 물었고, 심협은 꼭 필요한 일만 말했다.

    “음, 용궁에 그런 변고가 있었나? 대당 관부와 천궁에 알려야 할 것 같군.”

    “제가 봤을 때 오형은 아무래도 외부의 힘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힘을 길러 복수할 생각인 듯합니다.”

    “이번 용왕은 그런 힘든 일을 겪은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상상이 안 될 정도로 침착하더군.”

    “지금은 내부로 억누를수록 복수의 불꽃은 더 강렬하게 타오르겠죠. 사실 이번 일로 그의 심성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어 걱정입니다.”

    심협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건 그렇지…….”

    육화명도 부정하지 않았다.

    “지금은 누구도 돕지 못할 테니 스스로 처리하도록 맡기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이런 불길이 반드시 나쁘지만은 않을 겁니다. 지금처럼 삼계에 남모를 근심이 있을 때, 그가 최대한 빨리 힘을 키워 용궁의 일을 처리한다면 삼계에도 분명히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알겠네. 난 자네의 판단을 믿겠네.”

    육화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분 회의는 방촌산을 공격한 자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논의하는 겁니까?”

    “사실 처분 회의는 그저 호칭일 뿐이고, 실상은 천궁이 주도하고 대강 관부가 주관하는 대회라서 연화대회(衍和大會)라고 하네, 평화를 논의한다는 뜻이지만, 실상은 사타령, 마왕채 그리고 반사동 같은 세력을 어떻게 벌할지와 방촌산의 체면을 살려주는 대회라네. 동시에 다른 요마 종문들에게 헛된 수작을 부리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도 담겨 있지.”

    육화명이 신중한 말투로 말했다.

    “평화를 논의한다……? 천궁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심협이 다소 불쾌한 말투로 말했다. 그 요마 종문들이 그런 일을 벌인 것에 천궁의 암묵적인 동의가 없었다면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심협이 보기에 천궁은 입으로는 천하의 평화를 외치지만, 그들의 행동은 모두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육화명은 그의 말에 난처한 미소만 지을 뿐 말을 잇지 못했다. 정말로 따지기 시작하면 대당 관부도 적지 않은 책임을 져야 할 터였다.

    심협은 대회에 대해 자세히 묻지 않았다. 사실 이미 모든 것이 정해졌을 터였다. 각 방면의 처리는 이미 적절하게 안배되어 미리 방촌산과 화해했을 것이고, 회의는 그저 선언하는 자리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그저 가서 보기만 하면 되리라.

    이후 심협과 육화명은 걷다가 쉬고 먹고 마시며 장안으로 돌아갔다. 심협에게는 모처럼 편안한 나날이었다.

    다만 장안에 가까워졌을 때, 육화명이 갑자기 관부의 밀령을 받아 일을 처리하러 가면서 심협은 홀로 길을 떠나게 됐다.

    장안선 백여 리 밖, 종남산(終南山) 근처는 복숭아꽃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따뜻한 3월이 되면 온 산에 복숭아꽃이 만발하여 온통 분홍색으로 분장한 숲에서는 꽃향기가 그득했으며, 곳곳을 나비가 날아다녔다.

    장안성에는 벼슬아치든 백성이든 이맘때가 되면 가족들과 함께 봄나들이를 나와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거나 술 몇 주전자를 사서 복숭아꽃 꽃잎으로 도화주(桃花酒)를 담근다. 이는 봄을 맞이하는 장안성의 관례가 되었다.

    그래서 복숭아꽃 숲 근처에는 양조업을 생계로 삼는 작은 마을이 생겨났다.

    그러나 지금은 한여름을 지나 입추(立秋)에 가까웠기에 도림진(桃林鎭)에는 나들이를 온 손님도 없었고, 수많은 주루와 객잔 모두 일찍 장사를 접었다.

    심협이 도림진에 도착했을 때, 문을 연 상점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가 이곳에 온 것은 물론 꽃구경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 육화명의 부탁으로 도화오(桃花塢)라는 술집을 찾기 위해서였다.

    이 술집은 다른 곳과 달리 복숭아꽃으로 술을 담글 뿐만 아니라 복숭아 열매를 이용한 과일주도 만드는데, 시큼함 속에서 달콤함이 감돌며 너무도 향기롭다고 한다.

    이 술은 도림진에서도 이곳이 유일했고, 양조 주기가 짧은 데다 다른 술보다 맛이 진하여 오래 보존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한번 시기를 놓치면 다음 해에나 다시 살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심협은 육화명의 부탁으로 계절의 끝에 두 단지의 술을 사러 온 것이었다.

    심협은 육화명의 설명에 따라 마을 제일 끝에서 모퉁이를 돌았다. 그 길 끝에 도화오의 간판이 보였다.

    이곳은 안에서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사서 가야 하는 곳이라 식탁이나 의자는 보이지 않았다. 가격도 나쁘지 않아 도화주 한 병은 한 냥, 술 단지 하나는 열 냥이고, 도과주(挑果酒) 한 병은 한 냥 반, 술 단지 하나는 열다섯 냥이었다.

    심협은 앞에 놓인 안내판에 커다랗게 적힌 ‘완판’이라는 두 글자에 헛걸음했구나 싶어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물어보기라도 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데 그가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가게 안에서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손님이 왜 이렇게 무례할까? 벌써 수십 번을 말했잖아요, 여기 있는 이 단지 두 개는 단골손님의 것이어서 절대 못 판다고요! 왜 말을 안 들어요?”

    “소저, 단골이 부탁한 단지 두 개는 서른 냥이지 않소? 내가 은자 열 냥을 줄테니 나한테 딱 한 병만 팔면 남는 장사지 않소?”

    가게 입구 앞, 새하얀 여우 가죽옷을 입은 의젓해 보이는 남자가 좀처럼 포기하지 않고 간청하고 있었다. 허리춤에 걸린, 영기가 감도는 비취 옥패는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물건이었다.

    조용히 다가가 여우 가죽옷 남자 옆에 서 보니 입구 너머로 생기 넘치는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열대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데, 양 갈래로 땋은 머리와 단정한 옷, 허리에 두른 앞치마와 앙 다문 입술이 딱 봐도 매우 야무져 보였다.

    “이보시오, 도과주가 아직 남았습니까?”

    심협이 불쑥 끼어들어 묻자 여자아이가 눈을 부라렸다.

    이를 본 심협은 움찔했다. 가뜩이나 화가 나 있는 상대에게 ‘완판’이라는 팻말을 보고도 물어봤으니 예상한 결과였다.

    “그게…… 한 병만 팔 수 없겠소? 딱 한 병이면 되는데…….”

    심협이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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