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5화. 타협
“시끄럽고, 지금 바로 오형 쪽으로 보낼 거니까 다른 수작 부리지 말고 얌전히 있어.”
심협은 조룡의 혼과 더 대화하기도 귀찮아 호통을 쳤다.
“윽! 아, 알겠소.”
조룡의 혼은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드디어 이 교활한 인간과 안녕이군. 후훗.’
곧이어 황금용은 갑자기 몸이 가벼워졌다. 부주산이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곧바로 신념으로 만들어진 부문이 내려오더니 그의 몸을 휘감았다.
조룡의 혼은 내심 원망이 들었지만, 심협이 눈치챌까 두려워 서둘러서 그 생각을 떨쳐냈다.
‘그래, 그 산에 비하면 이정도 쯤이야…….’
애써 자신을 위로하고 있을 때, 신념의 파동이 그를 감쌌다. 뒤이어 하얀 빛과 함께 황금용은 심협의 식해 공간에서 사라졌다.
다음 순간, 조룡의 혼은 또 다른 식해 공간에 나타났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쭉 폈다. 그리고 자신에게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오홍의 신혼 소인을 맞이했다.
“네가 바로……?”
조룡의 혼이 후학에게 한차례 훈계를 하려는 순간, 등에서 갑자기 형용하기 힘든 기운이 느껴졌고, 미처 피할 틈도 없이 그대로 바닥에 짓눌렸다.
서둘러 고개만 돌려 뒤를 보니 번득이는 산의 허상이 자신의 등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 윤곽은 분명 지긋지긋한 부주산이었다. 비록 심협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조룡의 혼은 심협의 홍련업화에 9할이 연화된 상태였기에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다.
“선조님,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이해해주시고, 부디 가만히 계셔주십시오.”
오홍의 신혼 소인이 공손한 말투로 말했다.
“망할 인간족! 내가 언젠가…….”
오홍은 원망과 저주를 퍼붓는 조룡을 무시한 채 식해에서 천천히 물러났다.
* * *
심협이 부주진신법을 오홍에게 전수하는 동안 청질이 용궁의 주둔군을 이끌고 보물창고로 왔지만, 오중의 명에 따라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대기했다.
보물창고 안. 오홍은 조룡 혼의 봉인이 사라진 심혈구이주를 심협에게 건넸다.
“심형, 부왕께서 이 구슬을 빌려주기로 약조하신 이후 또다시 이토록 큰 도움을 받았으니 감사의 뜻으로 드리겠소. 돌려주시지 않아도 좋소.”
“아니오, 난 그저 잠시 빌리기만 하면 되오. 나중에…….”
“이건 내 성의이자 은혜를 갚는 의미요. 내게 얼마나 많은 빚을 남길 생각이시오?”
오홍은 웃으며 손사래를 쳤고, 심협은 그의 단호한 표정에 더는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 그러나 옥침을 복구한 뒤에는 바로 구슬을 돌려주기로 결심했다.
‘한데 조룡의 혼이 없는 심혈구이주로도 옥침을 복구할 수 있을까?’
다행이라면 아까 조룡의 혼을 제압할 때 용혼(龍魂)의 힘을 연화했을 뿐만 아니라 조룡의 힘 일부를 떼어내 흡수하지 않고 봉인해 놓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정말 필요하다면 다시 꺼내서 시도해보면 될 터였다.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세 사람이 보물창고에서 나왔다. 오중은 만성공주가 버리고 간 용왕령으로 다시 보물창고를 봉인했다.
“청질, 즉시 명령을 전달해라. 지금부터 용궁을 봉쇄하고 동해의 경계를 강화한다. 용왕의 명 없이는 누구도 함부로 동해에 들어오지 못한다. 이를 어길 시 고하(高下)를 막론하고 바로 처형할 것이다!”
오홍이 청질에게 말했다.
“그게…….”
아직 용왕 오광의 죽음을 알지 못한 청질은 머뭇거렸다.
“가지 않고 무엇 하는가?”
오중이 용왕령을 내밀며 호통을 쳤다.
“존명!”
청질은 용왕령 앞에 즉각 부복했다.
“명심하라. 각지를 다스리는 수령들은 경계를 강화하고 관문을 단단히 지켜 요마의 침입을 막아야 할 것이다!”
“예!”
청질은 우렁차게 답하고 바로 물러갔다.
이날 이후, 동해 전체는 봉쇄 상태로 들어갔다. 각 부의 수족(水族)은 영문을 몰라 한동안 술렁거렸다.
심협은 자신의 거처인 동부로 돌아왔다. 그러나 부상을 치료하기도 전에 두 눈을 감고 이번 동해 용궁의 대전을 정리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만성공주와 삼해 용왕의 행동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특히 만성공주의 목적이 심혈구이주가 아니라 핏빛 뼈피리였다는 점이 이상했다.
“그 핏빛 뼈피리의 위력은 실로 강력했다. 구유나 서원봉보다도 더, 한데 그 기운은 분명 익숙했다. 어디서 본 것 같…… 맞아! 흑연 미굴에서 본 그 핏빛 뼈지팡이!”
번쩍 뜬 심협의 눈이 날카롭게 번득였다.
“뼈피리의 재질이나 기운이 그 핏빛 뼈지팡이와 매우 비슷했어! 두 기물 사이에 어떤 관계라도 있는 것인가?”
심협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알아낼 방법은 없었다. 오홍과 오중에게 물어봐도 두 사람 역시 그 뼈피리의 내력을 알지 못했다.
심협은 이내 생각을 떨쳐내고는 다시 만성공주의 동기에 집중했다.
이전에 운몽택에서도 이 여인은 뭔가 이상했다. 한데 지금 보니 더욱 그랬다. 마족과 깊은 연관이 있음은 분명하나 그 꿍꿍이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됐다, 더 생각해도 의미가 없어. 언젠가 그 여자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더 조심하는 수밖에…….”
심협은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내고는 두 눈을 감고 치료에 집중했다.
이번 용궁 전투는 격렬했지만, 상처가 그리 심각하지 않아서 반나절 정양만으로도 온전히 회복됐다.
심협은 눈을 뜨며 탁한 숨을 길게 토했다. 허나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그의 가장 큰 걱정은 바로 단전 안에 있는 검은색 씨앗이었다. 단전과 관련되어 있으니 더없이 중요한 일이었다.
그는 화령자에게 물어볼까 했으나 그 생각을 접고 우선 황정경을 운공했다.
몸에서 갑자기 찬란한 금빛이 번득였고, 단전 안에서 중후하기 그지없는 법력이 검은색 씨앗을 감싸 꺼내려 했다.
그러나 그 씨앗의 뿌리는 이미 단전과 전신 경맥에 연결된 후라 조금만 힘을 줘도 단전과 경맥에서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심협은 몇 번이나 시도한 후에도 아무런 성과가 없자 그만뒀다. 씨앗을 감싼 법력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냥 힘으로는 안 되겠군.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어.”
심협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후 치우무결에서 본 마족의 비술 이화접목(移花接木)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이 술법은 대개박술과 비슷하여 상처를 전이하는 능력이 있다. 수련이 높은 경지에 도달한 자가 마력까지 충분하면 바로 급소의 치명상도 덜 중요한 곳, 이를테면 허벅지 같은 곳으로 옮겨 죽음을 피할 수 있다.
‘어쩌면 이 비술로 검은색 씨앗을 단전에서 다른 곳으로 옮길 수 있을지도 몰라!’
심협은 바로 행동에 옮겼다. 이화접목 비술의 내용을 복기한 후, 마기를 운공하여 수련했다.
지금 그의 경지에서는 이 비법의 기본을 익히는 데는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이어서 다시 반나절을 연습한 후, 그는 본격적으로 시도해보기로 했다.
심협이 주문을 읊조리자 오른손에서 검은 기운이 물 흐르듯 일렁였다.
촤아악!
물결 같은 소리가 울리더니 그의 단전에서도 검은 빛이 일렁였고, 오른손의 검은 기운과 호응하기 시작했다.
“이화접목!”
심협은 조용히 뇌까리며 오른손으로 단전을 문질렀다. 그러자 단전 안의 검은 씨앗 주위에 검은 기운이 빠르게 흐르면서 또다시 촤아악 하는 소리가 났다.
검은 씨앗이 살짝 떨렸지만 금세 다시 평온해졌다. 술법이 실패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화가 나기는커녕 내심 기뻤다. 방금 시도에서 단전과 경맥에서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 비술이 효과가 있는 것 같군!’
심협은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고는 이화접목의 구결을 다시 읊조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실패였고, 세 번째 시도 역시 실패였다.
이후로도 다섯 번을 더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 술법에 갈수록 익숙해졌고, 성공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이화접목!”
그는 원기가 회복되자마자 다시 시도했다. 아홉 번째 시도였다.
단전의 검은색 씨앗 주위로 검은 빛이 마치 급물살을 타는 강물처럼 흐르더니 씨앗이 조금씩 떨렸다. 그리고 이내 검은 빛 안으로 사라졌다.
다음 순간, 오른손 경맥에서 검은 빛이 번쩍이더니 어두운 기운에 감싸인 씨앗이 나타났다. 이 씨앗은 단전에 있었을 때처럼 오른손 경맥에 뿌리를 내렸다.
“후우…….”
심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검은 씨앗을 무사히 오른손으로 옮겼지만, 이는 미봉책일 뿐이었다. 어쨌든 단전에 있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언젠가 씨앗이 정말로 몸에 위해를 가한다면 오른손을 잘라내는 것으로 해결이 가능하지 않은가.
물론 팔다리를 자른다는 것은 큰일일 수도 있으나, 심협 같은 진선 존재에게는 별일 아니었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그는 한시름 놓고 다시 눈을 감았다.
* * *
사흘 뒤, 여러 갈래 수족의 수령들이 영문도 모른 채 용궁 수정대전으로 불려왔다.
수많은 용자(龍子)와 용손(龍孫)도 대전에 모이다 보니 넓디넓은 대전이 다소 붐볐다.
상복을 입은 오홍은 모든 용자들의 가장 앞에 서 있어다. 그의 표정은 매우 어두웠다.
심협은 용궁 사람이 아니었기에 참여할 권리가 없지만, 참관 자격은 주어졌다. 그는 홀로 구석에 앉아 지켜보았다.
“용궁의 수령들이여, 영문도 모른 채 모였으나 이미 짐작은 하셨을 터, 부왕께서는 삼해 용왕의 배신으로 이미 승하하셨습니다.”
오중이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용궁의 관리들과 다른 수족들뿐만 아니라 용자와 용손들의 안색도 변했다.
용궁은 정보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봉쇄하고 있다가 정세가 안정되고 나서야 모두를 불러모아 이 엄청난 소식을 공포한 것이다.
대전은 순간 소란스러워졌고,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조용! 소란들 피우지 마십시오. 집에는 하루라도 가장이 없으면 안 되고 나라에는 하루라도 군주가 없어서는 안 됩니다. 부왕께서는 이미 승하하셨으니 돌이킬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새로운 용궁의 주인이자 동해의 군주를 뽑아야 합니다.”
오중의 말이 이어졌다. 용궁에서도 신망이 두터운 그의 말에 대전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이 일은 의논할 것도 없습니다. 용왕께서 건재하실 때 구태자이신 오홍님께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말씀하신 바가 있으니, 길일을 택하여 구태자 전하의 즉위식을 거행해야 합니다.”
순해 야차 청질이 바로 모두 앞에서 외쳤다.
“옳습니다. 구태자 전하께서 즉위하신 뒤, 곧장 삼해로 가서 용왕님의 복수를 해야 합니다!”
어느 게 장군이 뒤를 이어 외쳤다.
“용왕의 생전 의향은 그러하셨을지 몰라도 유언을 내리지는 않으셨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태자 전하가 더 적합하다고 봅니다. 이태자 전하께서는 동해 수족 절반을 통솔하고 계시고 군사 방면으로도 통솔력이 뛰어나시니 이태자 전하께서 왕위를 이으시는 게 동해를 위한 길이라 생각합니다.”
어느 악어 머리의 수군 통솔자가 말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저도 이태자 전하께서 새로운 용왕에 더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오중이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앞으로 나와서 말했다.
“저는 아홉째 아우에게 용왕 자리를 넘기겠다는 부왕의 뜻을 따를 것입니다.”
그러더니 곧바로 오홍에게 절을 올렸다.
대전에 모인 모든 이들, 오중을 지지하는 자들이든 오홍을 지지하는 자들이든 모두 이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용왕 폐하를 뵙습니다.”
이어서 청질이 절을 올렸다.
“용왕 폐하를 뵙습니다.”
본래 오홍을 지지하던 수족의 수령들이 뒤이어 절을 올렸다. 그러자 오중을 지지하던 수령들도 하나둘 절을 올렸고, 용자와 용손들도 함께했다.
멀리서 지켜보던 심협 또한 조용히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이를 본 오홍은 심협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고는 바로 모두에게 말했다.
“모두들 일어나라. 큰 재난을 당했으니 부왕의 장례와 내 즉위식은 모두 단출하게 진행할 것이다. 외부에 알리지도, 외부 인사를 초대하지도 않는다.”
말을 마친 오홍은 용좌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