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4화. 오홍
“자신 있으면 해보던가.”
심협의 말이 끝나는 순간, 거대한 산이 천둥과 함께 하늘에서 내려왔다. 웅장한 힘이 불구름을 단숨에 제거하더니 강력하게 황금용의 몸에 떨어졌다.
황금용은 바로 바닥에 처박혔고, 벗어나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부주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심협은 그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그는 앞서 급격히 정진하면서 생각과 의식 또한 매우 예리해졌다. 조룡의 혼과 겨우 몇 마디 나누었을 뿐이지만, 이 예리해진 감각은 조룡의 혼이 이렇게 웅장한 기상을 내세우는 건 그저 위세로 억압하고 두려움을 심어 반항할 마음을 꺾으려는 것임을 알아챘다.
조룡의 혼이 어찌 알겠는가? 심협은 진짜로 치우를 대면하고 심지어 직접 천책과 산하사직도로 그를 제압했던 적이 있는 존재다. 심협은 마음이 꺾이기는커녕 상대의 허장성세를 단번에 간파했다.
게다가 그의 부주진신법은 놀라울 정도로 정진된 상태였다. 만약 식해 밖에서 신혼에 공격을 받았다면 부주진신법의 위력이 아무리 강해도 막아내는 데 급급했을 것이다. 허나 조룡의 힘은 굳이 심협의 식해 공간으로 쳐들어왔다. 이는 심협의 영역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것과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눈앞에 있는 조룡은 상고 시대부터 존재한 대능이다. 그런 존재를 상대하려면 단 한 번의 기회를 잡아야 했다. 그래서 계속 밀리는 척하며 조룡의 혼이 몸을 삼키고 나서야 움직인 것이다. 지금 보니 조룡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종이호랑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남은 힘이 얼마 없었다.
부주산은 형태와 신혼을 겸비하고 있어서 그 위압감은 더욱 강력했다.
조룡의 혼이 제압당하자 심협의 법력 봉인이 대폭 풀렸다.
그가 양손을 결인하자 산 아래에서 연꽃 모양의 붉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홍련업화는 아래 깔린 황금용을 제압하며 그의 신혼의 기운을 태워버렸다.
“호, 홍련업화!”
황금용은 깜짝 놀랐지만, 부주산에 제압당한 터라 움직일 수 없었고, 그저 온몸이 불타며 빠르게 줄어가는 걸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조룡의 혼은 세월 앞에서 허약해졌음에도 용족의 선조인 만큼 신혼이 놀라우리만큼 강력했다. 덕분에 홍련업화에 연화되고 남은 1할의 정수로도 신혼의 힘은 절반 이상 정진됐고, 거대한 부주산은 더욱 견고해졌다.
이 기나긴 작업이 끝나고 나자 황금용의 힘은 이제 거의 소진되었다.
“그만, 제발 그만…….”
황금용이 다급하게 애원했다.
“내가 네 말을 들어줘야 할 이유가 있나?”
심협의 신혼 소인은 어느새 황금용의 배에서 나와 앞에 서 있었다.
이번 변화를 겪으면서 본래 거대한 산 같던 황금용의 몸은 네 발 달린 뱀처럼 작아졌고, 흐려진 두 눈으로 간절히 바라보는 모습은 무력하고 불쌍해 보였다.
하지만 심협의 눈에는 일말의 동정도 없었다.
“귀하의 강력한 신통에 내가 졌다. 다만, 지금 멈추지 않으면 오홍의 신혼도 함께 사라질 것이다.”
조룡의 혼이 힘겹게 말했다.
이 말에는 심협조차 망설이고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조룡의 몸을 태우던 홍련업화가 멈췄다. 다만 부주산은 여전히 조룡의 몸을 압박했다.
“휴우…….”
조룡의 혼이 마침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오홍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네 신혼을 흡수하는 동시에 내 남은 혈맥의 힘으로 그와 융합을 시도했다. 비록 네 신혼을 흡수하는 것은 실패했지만, 그와의 융합은 순조로워서 우리의 혈맥은 거의 연결되어 분리할 수 없게 됐지. 만약 이대로 날 죽이면 그의 몸 또한 나와 함께 사라질 것이다.”
“네 신혼을 없애면 오홍에게 해가 간다 이건가? 고작 그 정도로 나를 협박할 생각이었나?”
심협은 차갑게 웃었다.
“그의 생사를 신경 쓰지 않았다면 위험을 무릅쓰고 내게 다가오지 않았겠지.”
“용족과의 정을 생각해서 얌전히 보내주려 했거늘, 네가 원치 않으니 하는 수 없구나. 그럼 내 식해 안에서 영원히 부주산에 깔려 있거라. 그 치욕과 압박감을 얼마나 견디는지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겠군.”
심협의 냉담한 목소리에 조룡의 혼은 할 말을 잃었다.
심혈구이주에서 그토록 오랜 세월을 봉인돼 있었으니 끝없는 고독에 시달리는 것은 익숙하다. 그러나 인간족 식해에서 부주산에 깔려 하루하루를 지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차라기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그대는 우리 용족과 사이가 좋으니 용족 공법의 현묘함을 잘 알고 있겠구려. 사실, 사해 용궁이 수련한 공법은 별것 아니오. 내게는 어느 용족 후손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용족의 상고 수련 비법이 있지. 날 풀어준다면 그 상고 공법을 전부 전수해주겠소.”
조룡의 혼은 마침내 누그러져 간절하게 말했다.
“용족의 수련 공법이 인간족인 내게 무슨 쓸모가 있다고?”
심협이 비웃었다.
“그, 그럼 내가 상고 비경 동부를 알고 있으니 거기서 보물을 찾게 도와주겠소.”
조룡은 다급하게 덧붙였다.
“네가 아는 상고 비경 동부라면 그 오랜 세월 앞에 이미 무너지거나 사람들에게 털렸겠지.”
심협은 지체 없이 대꾸했다. 게다가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옥침을 최대한 빨리 복구하는 일이지 다른 보물을 찾을 겨를은 없었다.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이 없자 조룡의 혼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외쳤다.
“나를 놔줄 생각이 없다면 같이 죽는 수밖에!”
말을 마친 그는 온몸에서 눈부신 금빛을 뿜어냈고, 강력한 혼력의 파동이 끊임없이 팽창했다. 자폭하려는 것이리라.
“흥! 이제는 자폭하기에도 늦었다!”
그 순간, 부주산이 번득이더니 열 배는 강한 압박감을 뿜어냈고, 조룡의 혼의 모든 힘은 완전히 무너졌다. 그는 다시 산 아래에 짓눌렸다.
“후대의 파도가 선대의 파도를 뒤엎은 꼴인가. 날 그냥 죽여라!”
조룡의 혼은 절망했고, 의기소침해졌다.
“그럴 것까지야. 한 가지만 약속하면 살려줄 수도 있는데…….”
“그게 사실인가?”
조룡의 혼은 그 말을 듣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오늘날 삼계는 혼란이 시작되고 있다. 사해 용궁도 예외는 아니야.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여도 이미 분열이 시작됐지. 그대는 용족의 선조이니 용족이 사분오열되기를 바라지는 않겠지? 당신이 앞으로 오홍을 잘 도와 동해 용족을 다시 일으키겠다고 약속하면 놔줄 수도 있어. 아니면 여기에 천년만년 갇혀 있던가.”
“……그게 끝인가?”
조룡의 혼은 한참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불쑥 물었다.
“그래.”
조룡의 혼은 의아한 눈으로 한참을 바라보다가 다시 물었다.
“그저 이 아이를 도와서 동해 용족을 다시 일으켜라? 그대를 위해서는 무얼 해야 하는가?”
“필요 없어. 가장 필요했던 심혈구이주는 이미 얻었으니까.”
조룡의 혼은 여전히 믿지 못하겠는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내가 부주산을 제어하고 있긴 하지만 네 신혼의 힘은 여전히 사라지고 있어. 생각할 시간이 많지 않을 게다.”
“좋다. 다만…… 내 잔혼은 이미 소모가 큰 터라 심혈구이주에서 나오면 바람 앞의 등불과 같지. 한데 날 어떻게 보존한다는 건가?”
“심혈구이주로 돌아가면 깊은 잠에 빠질 테니, 차라리 내가 널 오홍의 식해에 봉인해두마. 앞으로 그의 힘을 빌려서 천천히 회복하면 되겠지. 후에 널 놔줄지 말지는 그가 결정할 거야.”
“……좋다.”
조룡의 혼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전에 먼저 비술을 해제해서 오홍과의 연결을 끊어. 그가 깨어나면 상황은 내가 설명할게.”
“연결을 끊으면 그대가 바로 날 죽이지 않겠다고 내가 어떻게 믿지?”
“지금도 죽는 것보다 괴롭게 만들 수 있는데 내가 왜?”
심협의 덤덤한 목소리에 조룡의 혼은 자신이 내밀 수 있는 패가 없음을 다시 한번 자각했다.
“인간족이 지금 삼계의 주인인가? 설마…… 모든 인간족이 그대와 같은가?”
심협은 그 물음을 무시했다.
조룡의 혼에서 파동이 일어나더니 오홍의 미간 앞에 떠 있던 구슬이 바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잠시 후, 오홍이 낮게 신음하며 눈을 떴다.
멀리서 지켜보던 오중이 황급히 달려와 그를 부축했고, 조심스레 아우를 살폈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오홍이 자신의 아우인지 아닌지 알 방법이 없었다.
대답은 심협이 대신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오홍 맞습니다.”
심협은 가부좌를 풀고 일어섰다.
“괜찮은 거요?”
오중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입니다. 한데 오중 도우는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얼음굴의 오윤과 오순은요?”
“육정육갑대진으로 그들을 제압하고 있었는데 두 사람이 무슨 신통을 썼는지 갑자기 대진에서 빠져나와 도망쳤소. 나는 법력 소모가 너무 커서 쫓아가지 못했지. 그들을 추격한 용궁의 정예들이 말하길, 둘 다 이미 도망쳤다 하오.”
심협은 그 말에 안도하고는 손을 들었다.
옆의 땅에서 노란 빛이 반짝이더니 천살시왕이 튀어나왔다.
만성공주의 뿔피리는 신혼 공격이었으니 평범한 수사보다도 신혼의 힘이 훨씬 약한 천살시왕이 큰 피해를 입지 않도록 심협이 그를 땅속에 숨겨둔 것이었다.
심협은 천살시왕을 소요경 안에 넣어서 천천히 회복시켰다.
이를 본 오중은 표정이 조금 변했지만, 다른 말은 없었다.
심협은 오홍을 흔들어 깨운 후, 조룡과의 거래에 대해 설명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오중은 아연실색했다.
오홍도 갑작스러운 변고에 놀란 듯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그는 크게 성장했다.
그는 고개를 살짝 떨구고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내 심협을 돌아봤다.
“그게 최선인 듯하오.”
“좋습니다.”
“심 도우, 잠시만……. 나중에라도 혹시 그가 오홍의 몸을 다시 빼앗으려 들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소? 가능하다면 내가 대신하겠소.”
오중은 여전히 안심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방금은 그에게 다른 선택이 없었기에 조룡의 혼이 날뛰는 것을 무력하게 볼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 상황이 바뀌었으니 더 안전한 방법을 원했다.
“괜찮습니다. 조룡은 잔혼에 불과하고, 이번 일로 훨씬 약해졌습니다. 게다가 제게 제압할 비법이 있으니 그에게 삼킬 염려는 없습니다. 또한 제가 부주진신법을 오형에게 전수해줄 겁니다. 오형의 자질이라면 머지않아 스스로 조룡의 잔혼을 제어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심협의 말에 오중은 그제야 안심했다.
“심형, 이 큰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우리 사이에 뭘 그런 걸 따집니까? 자, 시간이 없으니 우선 부주진신법의 구결부터 전수해드리죠.”
말하면서 심협은 오홍 앞에 가부좌를 틀었다.
두 사람은 눈을 감고 신식으로 교류했다.
반 시진 뒤, 심협은 오홍이 입정(入定) 상태에서 깨어나는 것을 보며 웃었다.
“역시 훌륭하십니다. 수련이 순조롭게 되고 있으니 석 달 후에는 직접 조룡의 잔혼을 제압할 수 있을 겁니다.”
“다 심형 덕분이오.”
오홍이 진심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잔혼을 오형의 식해로 전송할 테니 준비하시오.”
심협의 말에 두 사람은 다시 긴장했다.
심협의 식해 공간. 거대한 산에 눌려 있는 황금용은 퍽 지친 표정이었다. 화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지금 심협이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해 마음속으로 욕이란 욕은 다 하는 중이었다.
“네 신념 파동이 다 느껴지는군. 여기는 내 식해 공간인 걸 잊지 말라고.”
“이놈, 날 네 식해에 가두려는 속셈인 거냐? 날 속이다니!”
조룡의 혼이 버럭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