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6화. 십절한빙진(十絶寒氷陣)
오광이 계속해서 말했다.
“내 내상은 마겁이 사라지기 전, 사해 용궁이 마족의 공격을 받았을 때 생겼다네. 격전 와중에 마족의 화속성 공법을 수련한 고수에게 중상을 입어 화독이 몸에 침투하더니 혈맥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네. 그간 줄곧 정양하였지만, 그 거머리 같은 화독은 결국 없애지 못했지. 최근에 이르러서는 나날이 경지가 퇴보하고 몸 상태도 갈수록…….”
말을 하던 오광은 말을 끝맺지 않고 침통해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제가 백부님의 화독을 치료하도록 도와드리면 되는 겁니까?”
심협은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그렇다네. 화독이 이미 혈맥에 침투했으니 평범한 수단으로는 완전히 제거할 수 없지만, 다행히 우리 동해 용궁에 예부터 한빙법진(寒氷法陣)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 법진 덕분에 지금까지 버텨낼 수 있었다네. 안 그랬으면 진즉 화독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부왕, 어찌 그런 말씀을…… 반드시 치료할 수 있을 겁니다.”
옆에 있던 오홍은 눈시울을 적시며 말했다.
“한빙법진은 상고 때부터 전해 내려와 조금 망가졌지만, 수년간의 연구한 끝에 8할 정도를 복구했네. 법진을 완전히 발동하여 내 정혈을 끌어내면 법진의 극한 빙력으로 화독을 제거할 수 있을 게야. 그리 되면 내상도 완전히 치료되겠지.”
오광은 오홍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말했다.
“그럼 제가 무엇을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사실 심협은 축융분지에서의 자신의 활약이 용왕의 주의를 끌었으니 이렇게 초청할 것이라 예상했다.
“이 법진은 한빙술에 능통한 수사 여럿이 힘을 합쳐 발동해야 하네. 이미 네 명은 찾았지만 충만한 한빙의 기운으로 법진의 주요자리를 맡아줄 사람이 부족한 상황이지. 난 심 소우가 적격이라고 생각하네.”
심협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동해 용왕을 바라보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물론 소우에게 큰 위험은 없을 걸세. 오히려 큰 이익이 있을 게야. 이 한빙법진은 절교(截敎)의 십절진(十絶陣)을 개량한 것으로 매우 현묘하지. 대진의 발동을 깨닫는다면 한(寒)속성 신통 수련에 큰 도움이 된다네. 내 직접 수년간 법진을 발동해봐서 알지. 물론 소우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말해보게.”
심협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본래 오형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백부님의 부탁을 거절할 수도 없고 더욱이 어떤 요구도 감히 제안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데 사실 저도 매우 중요한 일이 있어 동해 용궁을 방문한 터라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겠군요. 어쩌면 오홍 형이 백부님께 말씀을 드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심협은 오홍을 슬쩍 바라봤다.
“부왕, 심 도우는 사실 심혈구이주를 빌리고자 용궁에 왔습니다. 최근 부왕께서 한빙법진 준비에 몰두하는 것 같아 마무리된 뒤에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심혈구이주! 그것은 우리 동해 용궁의 진궁의 보물인데…… 소우는 그게 왜 필요한 건가?”
오광은 심혈구이주를 빌리고 싶다는 말에 살짝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심협은 심혈구이주를 빌리려는 목적을 자세히 설명했다.
“……심혈구이주 안의 영력을 빌리는 것뿐이지 다른 해는 없을 것임을 약속드립니다. 만약 다른 착오라고 생긴다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보상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힘주어 덧붙였다.
오광은 심협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대전 옆으로 조용히 걸어갔다. 일의 이해(利害)를 따지는 중이리라.
심협과 오홍도 자리에서 일어나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
한참 뒤, 오광이 돌아섰다.
“좋아, 빌리는 것뿐이라면 문제될 것 없겠지. 심혈구이주가 소모되는 것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네. 동해 용궁이 아무리 가난해져도 다시는 이 일을 거론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지.”
“감사합니다, 백부님. 저도 전력을 다해 백부님의 치료를 돕겠습니다.”
심협은 크게 기뻐하며 포권했고, 이를 본 오홍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법진이 완성되려면 아직 며칠 남았으니, 홍아, 네가 심 소우를 편하게 모시거라.”
“알겠습니다.”
오홍이 기운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며칠이 지났다.
심협이 기다림에 지쳐갈 때쯤, 오홍이 마침내 법진이 준비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심협은 오홍의 안내로 용궁 깊은 곳의 어느 은밀한 궁전으로 향했다. 궁전의 비밀 통로를 따라 돌계단을 내려가자 동해 땅속의 해저 동굴이 나타났다.
동굴 사방에서 빙한의 기운이 몰려오자 심협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가늘게 떨었다.
동굴 안은 여러 갈림길로 이루어진 바닷속 미궁 같았다. 오홍의 안내가 없었다면 길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일각 정도 걷자 마침내 동굴 바닥의 얼음굴에 도착했는데, 어찌나 넓은지 용궁 절반 정도에 달했다.
얼음굴 주위에는 마름모꼴의 뾰족한 얼음 기둥이 땅과 벽 곳곳에 솟아 있었다. 이 기둥들은 푸른 빛을 띠었고, 은은한 광택과 서늘한 한기를 풍겼다.
수많은 빛이 비치자 얼음굴은 어둡기는커녕 찬란하고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심협은 오홍을 따라 동굴 깊은 곳으로 들어섰다. 저 앞에 커다란 수정 얼음 대(臺)가 보였다.
대의 형태는 불규칙하여 가운데는 움푹 파여 있고 주위는 높이 솟아서 오목한 형태였다. 높게 솟은 곳에는 다섯 개의 원대(圓臺)가 세워져 있었는데 아무래도 다섯 개의 진추 자리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이미 여러 사람이 대기 중이었다. 그가 오기를 기다린 듯했다.
“심 소우, 내가 소개하겠네. 이자는…….”
오광이 먼저 다가와 차례로 소개했다.
심협과 그들은 소개를 따라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한 명은 덩치가 컸고, 표정은 엄숙했으며, 각진 얼굴은 마치 도끼로 자른 것만 같았다. 눈동자는 길고 가늘어서 천성적으로 사람을 깔보는 기세였다. 바로 서해 용왕 오윤(敖閏)이었다.
옆에는 보라색 옷을 입은 사람이 서 있었는데, 오윤과 닮았지만 보라색 수염과 네모난 넓은 귀, 환하게 웃는 모습이 매우 온화해 보였다. 남해 용왕 오흠(敖欽)이었다.
또 다른 남자는 앞선 두 사람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으나 약간 야위었고, 백발에 귀밑머리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표정은 차가웠고, 심협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바로 북해 용왕 오순(敖順)이었다.
마지막 한 사람은 푸른색의 긴치마를 입은 미모의 여인이었는데, 이름은 오우(敖雨)였다. 신분을 밝히지 않았지만, 아마 용족 사람이리라.
그 외에 한 사람이 그들 뒤에 서 있었는데, 낯선 사람이 아니었다. 두 번째 용태자인 오중이었다.
간략하게 서로를 소개한 동해 용왕 오광은 상어 가죽 그림을 꺼내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펼쳤다.
자세히 살펴본 심협은 이 그림이 앞에 있는 백옥의 얼음 대와 똑같이 생겼음을 알 수 있었다. 단, 대 위에는 보이지 않는 부문이 더 그려져 있었다.
이 외에도 빼곡한 진곡인 원점(圓點)이 사방에 어지럽게 퍼져 있었다.
“이것이 바로 동해 용궁에 상고 때부터 전해오는 십절한빙진(十絶寒氷陣)이다. 오랫동안 사용한 적이 없었으나, 우연히 이 대진을 열 수 있는 그림을 발견했고, 이 법진을 어떻게 발동하는지 알게 됐지.”
오광이 모두에게 말했다.
“형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해주시오. 전력을 다해 돕겠습니다.”
오흠이 나서서 말하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광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각자에게 어디에 서야 하는지 또 어떤 주문을 읊어야 하는지, 어떻게 술법을 끝내는지를 설명했다.
끝까지 설명을 들었을 때, 잠시 침묵이 흘렀다.
“형님, 가장 중요한 자리를 인간족 소우에게 맡겨도 괜찮겠습니까?”
서해 용왕이 불쑥 물었다.
“심 소우, 개의치 마시오. 넷째는 소우의 경지가 약하여 사고라고 일어날까 봐 걱정되어 그러는 것이오.”
남해 용왕 오흠이 심협의 기분을 풀어주려는 듯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중요한 일에 외부인이 끼면 조심할 수밖에 없지요. 저 대신 이 자리에 앉기를 원하시는 분이 있다면 바꾸셔도 좋습니다.”
그때, 동해 용왕 오광이 나섰다.
“너희 모두 틀렸다. 심 소우는 비록 진선 초기 수사지만 수련한 공법이 절묘하며 중후한 법력은 진선 중기 이상이다. 게다가 빙한의 술법에 대한 조예는 너희보다도 월등하다. 축융분지 깊은 곳까지 자유롭게 드나들 정도지.”
그 말에 오윤 등은 깜짝 놀랐고, 심협을 보는 눈빛도 조금은 달라졌다.
“백부님 말씀대로라면 심 도우는 최근 축융분지에 갔었던 겁니까? 제가 들은 바로는 며칠 전 축융분지에서 불빛이 폭발하여 하늘 끝까지 닿았다는데, 심 도우도 이 일을 알고 있습니까?”
줄곧 조용하던 오우가 불쑥 물었다.
“며칠 전에 화속성 영재를 찾기 위해 갔었습니다. 분지 안에서 불빛이 폭발한 것도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그곳의 땅속 화산이 분화해 저도 부상을 입었지만, 한속성 신통 덕에 다행히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심협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답했다.
오우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심협의 말을 완전히 믿지는 않는 듯했다.
다른 사람들도 축융분지에 대한 일을 듣고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심협을 살폈다.
“모두 이견이 없다면 바로 시작하세.”
오광의 말에 오윤 등도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심협을 비롯한 다섯 명은 얼음 기둥으로 올라갔고, 오광은 가운데가 움푹 파인 얼음 대 중앙에 가부좌를 틀었다.
오홍과 오중은 서로 바라보더니 각자 얼음 대 양쪽에 서서 호법을 섰다.
심협은 가장 중요한 진추인 얼음 기둥 위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진도에 어지럽게 놓인 빼곡한 원점은 땅과 벽에서 튀어나온 얼음 결정들이었다.
그림에 따르면 이 얼음 결정 옥기둥은 999개였고, 안에는 지맥의 한빙 기운이 담겨 있었다. 바로 이 옥기둥들이 대진 한빙 기운의 원천인 셈이었다.
전에는 유심히 관찰하지 못했으나 이제 자세히 보니 한빙의 옥기둥에는 복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복원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심 소우, 시작하게.”
오광의 말에 심협은 고개를 끄덕였고, 심호흡을 한 뒤 바로 진창해 신통을 운공했다.
손에서 찬란한 푸른 빛이 떠오르더니 무수한 파도처럼 주위를 뒤덮으면서 퍼져 나갔다. 이 푸른 빛에는 극한(極寒)의 기운이 담겨 있어 하얀색 안개가 피어올랐고, 지나가는 곳마다 온도가 순식간에 급격히 떨어졌다.
빙한의 기운이 널리 퍼지자 발아래 진추 얼음 기둥에서 푸른 빛이 번득였고, 본래 선명하지 않았던 부문들이 얼음 기둥에서 떠올라 대진 정중앙을 향해 퍼져 나갔다.
뒤이어 남해 용왕 오흠이 은백색의 삼각형 깃발을 꺼내 법력을 주입하고 흔들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바람에 휘날리며 펄럭였고, 깃발에는 얼음이 맺혀 갔다.
그가 손을 휘두르자 한기가 담긴 얼음 결정이 퍼져 나갔고, 그의 발아래 얼음 기둥이 빛나기 시작했다.
서해 용왕 오윤이 백옥의 홀판(笏板)을 쥐고 치켜들자 홀판에서 차가운 기운이 흘러나와 아래의 얼음 기둥으로 퍼지더니 이윽고 푸른 빛으로 번득였다.
오우는 더욱 깔끔했다. 은백색 향렴(香奩)을 열자 한기가 담긴 은은한 향이 밀물처럼 퍼진 것이다.
북해 용왕 오순은 입에서 푸른 구슬을 뱉어냈다. 구슬은 몸 앞에 떠올랐고, 그가 법력을 주입하자 차가운 빛의 기운이 기둥처럼 뿜어져 나와 곧장 발아래 얼음 기둥으로 떨어졌다.
다섯 곳의 진추가 모두 빛나자 십절빙한대진이 발동했다.
실오라기 같은 빙한의 기운이 하얀 안개와 섞여 얼음 대의 중앙으로 모여들어 마치 선경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