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823화 (823/1,214)
  • 823화. 무뢰한 거북

    “심 도우, 잘 왔소. 어서 함께 적염수를 해치우고 지심화련을 공평하게 나눕시다!”

    귀천세가 소리쳤다.

    심협은 검은 바위 옆의 지심화련 다섯 그루를 보고는 눈을 반짝이더니 고개를 끄덕인 뒤 손을 휘둘렀다.

    순양검이 붉은 검광으로 변하여 뿜어져 나가면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순간, 순양검은 청청과 싸우고 있던 적염수의 앞에 나타났다.

    심협은 저 세 사람과 동료이긴 하나 사실 우애라고 할 것도 없었다. 심지어 용아는 계속해서 시비를 걸어온 존재였으니 심협은 저들을 위해 굳이 순양검의 위력을 전부 발휘할 필요도, 주작기령을 사용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이전보다 몇 배나 강해진 순양검의 날카로운 검기는 곧장 적염수의 몸을 꿰뚫었고, 그대로 불꽃을 체내로 침투시켜 화령의 힘을 혼란에 빠뜨렸다.

    크게 놀란 적염수는 청청을 내버려두고 입에서 거대한 불꽃을 뿜어내 순양검을 공격하는 동시에 몸에서 뿜어져 나온 커다란 불꽃을 오른손에 모았다.

    “백수열염장(百獸烈焰掌)!”

    적염수의 오른손에서 갑자기 뿜어져 나온 광포한 기운과 포효는 마치 백여 마리의 적염수가 떼로 달려와 모든 것을 압박하는 것만 같았다.

    콰쾅!

    순양검과 적염수의 오른손이 충돌하면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적염수는 오른손이 단숨에 부서졌고, 거대한 몸은 튕겨나갔다. 순양검 또한 뒤로 밀려났다.

    청청은 이 광경에 크게 기뻐하며 입에서 푸른 거울 법보를 꺼내 바로 수결했다. 그러자 거울 안에서 갑자기 거대한 푸른 빛기둥이 뿜어져 나와 적염수의 뒷다리를 휘감았다.

    빛기둥에 담긴 음한(陰寒)한 수(水)의 기운은 진창해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화령의 힘과는 상극이었다.

    치익!

    달궈진 쇳덩이에 물을 끼얹는 듯한 소리와 함께 적염수의 뒷다리가 사라졌다. 기운 또한 크게 줄어들어 몸을 가누지 못했다.

    심협은 청청을 힐끗 보고는 순양검을 향해 결인했다. 아홉 개의 초승달 같은 검신(劍身)이 쏟아져 나와 적염수를 둘러싸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홍련업화를 두른 검망은 적염수의 몸을 몇 조각으로 베어버렸고, 적염수의 신혼도 홍련업화의 검망에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조각난 몸은 불꽃이 되어 사라졌다.

    주작의 알을 흡수한 뒤로 순양검은 홍련업화와 더욱 합이 잘 맞았다. 홍련업화는 막힘없이 검기에 녹아들어 서로 상승효과를 일으켰다.

    용아와 귀천세는 자기 앞의 적염수와 싸우느라 심협과 청청을 신경 쓰지 못했으나, 그쪽의 적염수가 죽은 것을 감지하고는 일순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청청이 들고 있는 푸른 거울을 본 요족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거울은 쉽게 사용할 수 없을 뿐이지 청청의 본명법보라 매우 강력했다. 거기에 심협의 도움까지 있었으니 적염수를 순식간에 죽이는 것도 당연했다.

    남은 두 마리 적염수는 동료가 죽자 분노해 원기를 아끼지 않고 강렬하게 반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용아와 귀천세는 더욱 밀려났고, 점점 위험해졌다.

    “저는 용 사형을 도울 테니 심 도우는 귀 장로님을 도와주세요!”

    청청은 짧게 외치며 용아를 향해 다가가 거울로 음한의 빛을 뿜어냈다.

    심협이 검결을 맺자 붉은 빛과 함께 순양검이 떨리기 시작했다. 순양검은 붉은 검광으로 변해 남은 적염수를 향해 날아갔고, 심협은 느긋하게 다가갔다.

    두 마리의 적염수는 매우 사납고 용맹해 보였지만, 사실은 예기가 많이 꺾인 상태였다. 지금의 필사적인 반항은 최후의 발악이었다.

    용아는 청청의 도움으로 역공을 시작했다. 적염수는 분노했지만, 이내 도망치려 했다.

    “어딜 가려고!”

    용아의 손에서 송곳니 모양의 검은 비검이 유성처럼 날아가자 환영 같은 검의 허상이 나타났다.

    도망치던 적염수는 갑자기 눈앞이 어지러워지면서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몸을 가누지 못했다.

    “추아탈명(錐牙奪命)!”

    용아가 잠꼬대처럼 조용히 읊조렸다.

    푹! 푹!

    두 자루의 송곳니 비검은 적염수의 목덜미에 나타나 교차하며 찌르고 베었고, 주위에서 날아다니던 환상 같은 검의 허상은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적염수는 송곳 비검이 자신을 어떻게 공격했는지 전혀 알아채지 못해 내심 당황했지만,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자신은 화령지체이니 수속성 신통이나 법보가 아니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환상 같은 검의 허상이 더는 방해하지 않자 적염수는 오감이 다시 돌아왔고, 몸에서 타오른 불꽃과 함께 화령으로 변해 송곳니 비검의 포위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기이한 힘이 송곳니 비검에서 체내로 파고들어 신혼을 흔들자 마치 끝없는 꿈에 빠진 것처럼 다시 눈앞에 환상이 펼쳐졌고, 화령으로의 변화도 멈췄다.

    용아의 입에서 검은 빛이 뿜어져 나와 흑룡(黑龍)의 머리로 변하더니 적염수의 몸을 뚫고 나왔고, 흑룡은 적염수의 신혼을 물고 꿀꺽 삼켰다.

    이어 적염수의 눈에서 영광이 어두워졌고,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폭발했다.

    ‘저 신통은 뭐지? 신혼을 흡수하다니, 신기하군.’

    상황을 지켜보던 심협이 눈을 반짝였다.

    귀천세도 심협의 도움으로 국면을 안정시켰으나, 자신보다 용아가 먼저 적염수를 처리한 것에 자존심이 상한 듯 표정이 굳더니 팔각형의 금과(金瓜)를 꺼냈다. 금과에서 긴 강물처럼 푸른 빛이 감돌자 물이 흐르는 소리가 났다.

    귀천세는 평소의 늙고 굼뜬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그야말로 용맹무쌍하게 팔각의 금과를 열 번도 넘게 휘둘러 마지막 적염수를 날려버렸다.

    금과의 푸른 빛은 민첩한 뱀처럼 재빠르게 날아가 적염수의 몸을 밧줄처럼 꽁꽁 묶었다.

    “한빙주(寒氷呪)!”

    귀천세가 입을 벌려 푸른 한광(寒光)을 뿜어냈다.

    콰직!

    끔찍한 소리와 함께 적염수는 작은 산만 한 비취색 얼음 안에 얼어붙었고, 얼음이 부서지면서 그 안에 있던 적염수도 몸이 사분오열되어 단숨에 죽어 버렸다.

    심협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득였다. 비취색의 얼음에 담겨 있던 얼음 독이 적염수를 얼어붙게 한 뒤 바로 신혼으로 침투하여 몇 호흡 사이에 신혼을 갉아먹어 죽였음을 알아챈 것이다.

    “흥! 고작 저급 적염수 세 마리 주제에 내 앞을 막아? 죽어도 싸다!”

    귀천세는 적염수의 시체에 침을 뱉더니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그는 한빙주를 수년 동안 수련했지만 자질의 한계 때문에 대성에는 못 미쳤다. 그런데 방금 위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인지 어렴풋이 돌파할 징조를 보였고, 이에 신이 나 평소보다 행동이 더 과장됐다.

    “귀 장로님의 한빙주 앞에서 적염수 따위는 날벌레나 마찬가지죠. 이 다섯 그루의 지심화련은 전부 장로님이 챙기십시오.”

    용아가 달려오더니 다섯 개의 지심화련을 캐서 내밀었다.

    귀천세가 씩 웃으며 소매를 휘두르자 푸른 빛이 지심화련을 감쌌다.

    이를 본 심협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지심화련을 공평하게 나누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공평? 네가 지금 이 늙은이의 것을 빼앗겠다는 소리냐?”

    귀천세는 차갑게 비웃더니 지심화련을 오른손에 낀 반지 안으로 넣었다.

    용아도 차갑게 웃으며 심협을 노려봤다.

    오직 청청만이 눈살을 찌푸렸으나, 용아가 눈빛으로 그녀를 제지했다.

    “그 말은 기어코 혼자 차지하겠다는 말입니까?”

    심협은 세 요족의 반응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럼 어쩔 테냐? 애송아, 네가 보타산의 흑곰 요괴와 함께 왔다고 뭐라도 되는 줄 착각하나 본데, 노부에게는 넌 아무것도 아니다! 하하하!”

    그는 천성이 교활하여 신용이나 약속 따위는 마음에 두지 않았고, 애초에 지킬 생각도 없었다. 게다가 이전에 해시에서는 흑곰 요괴의 눈치를 보느라 어쩔 수 없었지만, 지금은 심협 혼자 있으니 눈치 볼 이유가 있겠는가. 귀천세, 이 대관사(大官事)에게는 심협 같은 인간족 수사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던 것이다.

    “귀하는 동해 용궁의 높은 요족이면서 어째 언행은 무뢰한 같군요. 신분이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심협이 만났던 동해 용궁 사람들은 모두 기품이 넘쳤다. 귀천세 같은 이런 자는 처음이었기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뭐라? 지금 내게 무뢰한이라 했느냐!”

    귀천세의 표정은 더없이 차가워졌고, 두 눈에서는 살기가 흘렀다.

    그는 동해에서 나름 큰 거북 일족 출신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부모는 일족에서 지위가 낮은 데다 일찍 세상을 떠났다. 더욱이 그는 어릴 때부터 성격이 괴팍하여 일족의 높은 분께 잘못을 저질러 쫓겨나면서 가장 하층인 산요(算妖) 무리와 함께 지냈다.

    살아남기 위해 그는 안 해본 것이 없었다. 그래서 얻은 별호가 ‘무뢰한 거북’이다. 훗날 경지가 오르고 아첨을 떨어 간신히 동해 용궁으로 들어가면서 신분을 바꿀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 지우고 싶은 젊은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무뢰한’이라는 말은 마치 역린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런 연유를 알지 못하는 심협은 귀천세가 갑자기 살의를 드러내자 내심 당황했지만,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애초에 그는 귀천세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도 있음을 예상하였다. 아니, 오히려 은근 이렇게 나와주기를 바랐다. 이를 빌미로 지심화련을 전부 빼앗으면 되니 말이다.

    “당신이 먼저 약속을 어긴 것이니 내게 자비를 바라지 마시오.”

    심협이 입을 벌리자 귀천세의 오른팔을 노리고 붉은 빛이 날아들었다.

    둘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기에 비검은 거의 순식간에 코앞까지 다가왔다.

    귀천세는 심협이 이렇게 대범하게 나올 줄 몰랐던 데다 비검의 속도가 번개처럼 빨라 미처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때, 두 개의 검은 빛이 옆에서 날아와 순양검을 막았다. 용아의 송곳니 비검이었다.

    “건방진 인간족! 귀 도우를 향한 공격은 동해 용궁을 공격하는 것과 같다! 오늘 내가 귀 도우를 대신하여 정의를 바로잡겠다!”

    용아는 두 자루의 송곳니 비검을 날리며 입에서는 또다시 흑룡의 머리를 뿜어내 심협을 집어삼키려 했다. 사실 그는 진즉부터 심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데 지금 심협이 먼저 귀천세를 공격했으니 구실이 생긴 셈이었다. 일단 죽이고 아무 죄나 뒤집어씌우면 그만일 터였다.

    용아는 심협을 진선 초기의 인간족 애송이라 여겨 완전히 무시했다. 그러나 좀 전에 심협의 도움으로 적염수를 죽였던 청청은 심협의 강력함을 잘 알았기에 말리려 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건방진 놈, 목숨을 내놓아라!”

    귀천세도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팔각금과를 휘둘러 순양검을 내리쳤다. 일격으로 순양검을 박살내버릴 생각인 듯했다.

    그 순간, 순양검에서 붉은 빛이 강하게 번득이더니 주작진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작진령이 거대한 날개를 휘두르자 연이은 폭발음과 함께 두 개의 송곳니 비검과 팔각금과가 튕겨나갔다.

    이어서 비검은 붉은 무지개가 되어 연꽃잎 같은 불꽃을 뿜어내며 순식간에 용아 앞까지 날아가 흑룡의 머리를 베었다.

    치익!

    순식간에 흑룡의 머리가 사라졌다.

    “크아악!”

    용아는 비명을 내질렀고,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마치 중상을 입은 듯했다.

    “이럴 수가! 내 묵영용수(墨影龍首)는 이미 대성을 이루었는데 어떻게……?”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흑룡의 머리는 허실(虛實)이 합쳐진 것으로, 적의 몸을 공격하거나 신혼을 공격한다. 그렇기에 어떤 실체나 신혼 공격도 두렵지 않았다. 이 신통을 깨우친 이후로 자신보다 높은 경지의 정글 상대로도 낭패를 본 적이 없건만, 오늘 이렇게 당한 것이다!

    심협은 냉소했다. 그는 흑룡의 머리가 신혼을 공격하는 것임을 진즉 알아챘기에 처음부터 홍련업화를 발동했다. 용아의 신통이 아무리 정교하고 신묘해도 신혼의 힘을 가지고 있는 이상 홍련업화에는 속수무책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