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7화. 동해 절역(絶域)
“흑 도우, 마침 우리도 구체적인 논의를 시작하려던 참이오. 이제 도우까지 왔으니 함께 상의합시다. 한데 이 도우는 누구시오?”
주인인 푸른색 비단옷의 중년 남자가 일어나더니 심협을 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복공(福公) 도우, 여러분들, 소개하겠소. 여기는 심협, 심 도우요. 내 절친한 벗이지. 복공 도우가 지심화련을 채취한다는 말을 듣고 함께하기 위해 왔소.”
흑곰 요괴는 그들에게 공수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심협이라 합니다.”
안에 있는 다섯 명은 모두 진선기 존재였기에 심협은 포권하며 말했다.
“흑 도우, 지심화련을 캐는 건 보통 일이 아니오. 그 위험천만한 일에 어찌 진선 초기의 인간족 애송이를 데리고 온 것이오?”
복공이 말하기도 전에 푸른 옷의 늙은 거북이가 심협을 흘끗 노려보더니 불만 가득한 말투로 쏘아붙였다. 그곳의 모두는 약해도 진선 중기였고, 푸른 옷을 입은 늙은 거북이와 복공이라는 자는 진선 후기에 도달해 있었다.
심협 역시 이 요족의 목소리에서 경멸의 뜻을 알아챘으나, 마음에 두지 않고 담담하게 웃으며 시선을 뗐다. 지금 그의 경지에 수많은 법보까지 더하면 어지간한 태을 존재와도 맞서 싸울 수 있으니 진선 후기의 요족이 자신을 어떻게 보든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가 겁을 먹은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하하! 귀 도우의 말이 옳습니다! 흑곰 요괴, 겨우 진선 초기의 인간족 수사나 데리고 오다니, 이 무슨 창피란 일인가? 설마 그놈하고 무슨 관계라도 되는 건가? 혹시 내연녀가 몰래 낳은 사생아인가? 그래서 뭔가 좀 던져주고 싶었나?”
거북이 옆의 검은 옷의 남자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심협은 본래 이 요족들과 다투고 싶지 않았으나 이 도를 지나친 말에는 살기가 스쳐 지나갔다.
“용아(龍牙), 그 입 닥치지 못하겠나! 네 스승의 얼굴을 봐서 체면을 살려준 것임을 알게!”
흑곰 요괴가 어두운 표정으로 화를 냈다.
“이놈이!”
흑의의 남자는 모욕을 당하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거북이를 돌아봤다.
그러나 푸른 옷의 거북이는 도움을 요청하는 듯한 눈빛을 못 본 척,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려버렸다.
흑의의 남자는 이에 더 화가 났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허허, 도우들께서는 화를 거두시죠. 모두가 이렇게 모인 것은 지심화련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큰일을 앞두고 우리끼리 싸우면 이 무슨 망신이오?”
복공이 웃으며 그들을 자제시켰다.
주인이 그렇게 말하자 흑곰 요괴도 더는 추궁하지 않고 그저 흑의의 사내를 보며 차갑게 웃은 뒤 심협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감히 흑곰에게 맞서지도, 다시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던 흑의의 남자도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얼른 자리에 앉았다.
“심 도우는 처음 오셨으니 제가 도우들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복공이 심협에게 그곳에 모인 사람들을 소개해줬다.
백의 공자의 이름은 화소(花昭)로, 복공의 벗이었다. 푸른 옷의 거북이는 귀천세(龜千歲), 동해 용궁의 대관사였다. 흑의의 남자는 용아라는 이름의 동해 산수 요족, 푸른 옷의 여자는 그의 사매인 청청(靑靑)이었다.
심협은 다른 사람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예를 표했지만, 유독 용아를 소개할 때만은 못 들은 것처럼 무시했다. 그 모습에 복공은 쓴웃음을 지었고 흑곰 요괴는 통쾌했는지 호탕하게 웃었다.
용아는 두 사람의 비아냥에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노려봤다.
“흑 도우께서 데리고 온 분이니 심 도우의 실력은 믿어 의심치 않겠습니다. 허나 지심화련 채취는 매우 위험한 일이니 손해가 있더라도 스스로 부담해야 합니다. 심 도우는 잘 생각해보십시오.”
“알겠습니다.”
심협은 고개를 끄덕였다.
“복 도우, 저번부터 위험한 지역에서 많은 양의 지심화련을 발견했다고만 했지, 정확히 어디인지는 아직 말을 안 하셨소. 이제 슬슬 말해줄 때가 되지 않았소?”
귀천세가 은근히 떠보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복공에게로 향했다.
“지금까지 비밀로 한 것은 정보가 새어나가는 걸 막기 위함이자 제대로 준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모두가 모였고 준비도 충분하니 더는 숨길 이유가 없지요. 지심화련이 있는 곳은 바로 축융분지(祝融盆地) 안입니다.”
“뭐라고? 축융분지?”
흑곰 요괴를 포함한 귀천세 등이 듣자마자 안색이 변했다.
심협은 축융분지가 어디인지 몰랐지만, 이들의 반응으로 미루어 예사롭지 않은 곳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축융분지라니, 그곳은 동해의 절역이 아닙니까! 용암과 화산이 널리 분포되어 있고 더할 나위 없이 뜨거워 신도 태울 수 있을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안에는 또 적지 않은 불꽃 맹수가 도사리고 있어 그곳에 갔던 수사들 중 살아 돌아온 자는 극소수입니다. 제 스승님께서도 과거 그곳에 가셨다가 결국 못 돌아오셨지요. 한데 우리에게 그곳으로 가자니, 이는 죽으라는 소리 아닙니까?”
용아는 용서할 수 없는 거짓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화를 냈다.
“지심화련이 어떤 보물입니까? 평범한 곳에서는 절대 탄생하지 않습니다. 요행으로 자란다 해도 어찌 우리 차례까지 오겠습니까? 대량의 지심화련이 모여 있는 곳이라 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셨어야죠.”
어두워진 표정의 복공이 거침없이 반박하자 용아는 더는 할 말이 없었지만, 눈빛에는 여전히 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복 도우의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축융분지는 너무 위험하니 지금의 준비 상태로 들어간다면 분명 개죽음을 당할 겁니다. 복 도우, 며칠만 여유를 주면 더 준비해오겠습니다.”
줄곧 아무 말도 없던 청청이 갑자기 끼어들었는데, 그 목소리가 물처럼 부드러워서 듣고 있으면 그녀에게 빠져들 것만 같았다.
“그건 안 됩니다. 여러분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이 일은 너무 중대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이미 지심화련의 비밀을 알아버렸으니 절대 떠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서로 오해할 만한 다른 움직임은 멈춰 주십시오.”
복공은 단번에 거절하고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모두를 둘러봤다.
이들은 갑자기 모든 것을 간파당한 느낌이 들었다.
“복 도우, 그게 무슨 뜻이오? 우리더러 준비도 하지 말고 떠나지도 말라니, 설마 이대로 축융분지로 가라는 말이오?”
귀천세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귀 도우, 서두르지 마십시오. 사실, 축융분지로 갈 준비는 불을 피할 보물과 법력을 보충해주는 단약이면 충분한데, 그건 제가 미리 준비해놨습니다.”
복공이 그렇게 말하며 소매를 휘둘렀다.
탁자에는 다섯 개의 하얀 구슬이 나타났는데, 안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느껴질 정도로 짙은 한기가 퍼져 나와 거실의 기온이 갑자기 내려갔다.
“이 다섯 개의 한교주(寒蛟珠)는 북해 한교(寒蛟)의 한낭(寒囊)으로 만든 것으로, 불을 피하고 열기를 막아주는 신통이 있습니다. 모두가 이 구슬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축융분지 안을 돌아다니는 데 아무 문제없을 겁니다.”
복공은 심협 등에게 말했다. 화소의 평온했던 반응으로 미루어 그는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을 터였다. 이는 두 사람의 관계가 남다르다는 의미였다.
“한교주라니! 허허, 복 도우는 역시 거부시군요. 이런 보물을 다섯 개나 선뜻 내놓다니 말입니다!”
냉큼 하얀 구슬을 집어 든 귀천세의 눈에서는 탐욕이 흘러나왔다.
다른 사람들 역시 비슷한 반응이었다.
심협은 두 손가락으로 한교주를 집는 순간, 손가락이 얼면서 통증이 느껴졌다. 한기가 온몸에 빠르게 퍼져 나가는 느낌에 온몸이 떨려왔다. 이에 심협은 기뻐하며 구슬을 챙겼다.
“여기 또 몇 병의 회령단(回靈丹)이 있습니다. 해시의 진(珍) 대사께서 만드신 단약으로, 매우 빠르게 회복할 수 있지요. 이 정도면 7일 안에 지심화련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복공이 소매를 휘두르자 다섯 개의 하얀 옥병이 나타났다.
심협 등은 각자 옥병을 하나씩 챙기고는 신식으로 살폈다. 확실히 최상품 단약이었다.
“흠흠, 복 도우께서 이런 진귀한 물건들을 준비해주셨으니 안전에 대해서는 노부도 안심이오. 허나 출발하기 전에 확실하게 해두고 싶은 것이 있소. 지심화련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 하는 점이오.”
귀천세가 옥병을 챙기고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하하! 안 그래도 지금 막 그 이야기를 하려던 참입니다. 이번 축융분지에서 여러분이 채취해온 지심화련을 5대5로 나누고자 합니다. 대신 여러분의 화련을 화련단(火煉丹)으로 만드는 일은 제가 하지요. 선급 단약으로 태을 수사에게도 효과가 있을 정도이니 그 제련만 해도 만만치 않은 비용이 들 겁니다.”
복공이 씩 웃으며 말했다.
‘화련단!’
심협의 눈이 번득였다. 그는 꿈속 세계 어느 천병 잔혼의 기억에서 이 단약을 본 적이 있었다. 태상노군이 고안한 단방으로, 약효는 복공의 말대로였다. 게다가 이 단약 안에는 순수한 지화가 담겨 있어 연체에 효과가 뛰어나니 황정경에 안성맞춤이었다.
귀천세 등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는데, 몰래 전음으로 교류하는 게 분명했다.
“좋습니다. 그럼 복 도우의 말대로 하지요.”
한참 뒤, 귀천세가 고개를 끄덕였다.
흑곰 요괴도 심협과 상의한 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시간 끌 것 없이 바로 출발하시죠.”
복공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휘둘렀다.
푸른 빛이 그곳의 모든 사람, 심지어 심협 등을 안내한 소년까지 뒤덮었다. 푸른 빛 안에서 부문이 반짝이자 빠르게 법진이 만들어졌다.
눈앞이 갑자기 푸른 빛으로 뒤덮이고 빠르게 흘렀는데,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어느 낯선 바닷속이었다.
“최근 용궁은 경비가 삼엄하여 정상적인 절차를 따르자면 시간을 허비할 수밖에 없소. 하여 둔술로 바로 이동했는데, 괜찮으시겠지요?”
“물론입니다.”
귀천세가 모두를 대신해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럼 모두 제 벽해운주(碧海雲舟)로 가시죠. 이 영주는 물속에서도 이동에 제한이 없으니 시간을 절약해줄 겁니다.”
복공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푸른 영주 한 척을 꺼냈다.
이 영주는 온통 푸른색이었고, 겉에는 영문이 가득했다. 선체 양쪽에는 길이가 몇 장에 이르는 푸른 나무 날개가 뻗어 있었는데, 그 위에는 촘촘한 문로가 새겨져 있었다. 뜻밖에도 이는 언문이었다.
심협은 의외의 상황에 놀랐다. 그는 이 푸른 나무 날개를 알아봤다. 바로 천기권에 적혀 있는 대풍익(大風翼)으로, 영주의 둔속을 빠르게 해주는 일종의 언갑이었다. 제련하기가 매우 까다롭다고 알려져 있는데 뜻밖에도 복공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가 비주에 올라타자 복공이 가볍게 발로 툭 굴렀고, 이어 영광이 반짝이더니 푸른 빛이 되어 유성처럼 빠르게 날아갔다.
심협은 이 광경을 보며 다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물속에서는 저항이 커서 그가 아무리 전력을 다해도 속도를 내기가 쉽지 않은데, 지금 이 영주는 벽해운주 양쪽의 대풍익을 발동하지 않았는데도 놀라운 속도였다. 대풍익을 사용한다면 그 속도가 과연 어느 정도일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모두 말없이 각자 자리를 잡아 정양을 하거나 법보를 정리하며 곧 다가올 여정에 대비했다.
심협과 흑곰 요괴는 선미에 앉아 전음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주로 축융분지에 대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