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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815화 (815/1,214)
  • 815화. 구슬을 빌리다

    그렇게 반나절이 지나고서야 마침내 오홍이 나타났다.

    “심형! 최근에 너무 바빠서 이제야 겨우 시간이 났소. 미안하오.”

    오홍은 날아서 들어왔는데,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옷도 헝클어져 있었다. 아무래도 일을 마치고 옷 정리도 못 하고 온 것 같았다.

    “아니오. 내가 때를 잘못 맞춰 오형을 방해한 모양입니다.”

    심협이 웃으며 말했다.

    “무슨 그런 섭섭한 말을! 오장관에서의 도움에 내 아직 제대로 보답도 못 하지 않았소. 그리 말하면 내가 더 부끄럽소. 엇! 한데 심형 진선기로 돌파하셨구려! 축하하오! 와하하하!”

    오홍은 뒤늦게 심협의 경지를 감지하고는 놀라며 말했다.

    “최근에 운 좋게 돌파했습니다. 오형의 경지도 크게 정진하셨구려. 금방 진선 중기로 돌파하겠습니다.”

    심협은 신식이 더 강해졌기에 오홍의 경지 변화를 진즉 눈치챘다.

    “역시 심형의 안목은 날카롭소.”

    오홍이 씩 웃으며 답했다.

    “저번에 오장관에서 말한 동해 용궁 선배님의 병을 고쳐야 한다던 문제는 어떻습니까?”

    “그냥 그렇게 됐소.”

    오홍은 한숨을 쉬며 답했다. 원하던 효과는 얻지 못한 듯했다.

    심협은 또다시 궁금해졌다.

    ‘동해 용왕은 도대체 어떤 상태이기에 인삼과로도 완벽하게 치유하지 못한 거지?’

    하지만 그는 오홍을 곤란하게 하지 않으려 굳이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난 터라 한참이나 대화를 나눈 후에야 심협이 본론을 꺼냈다.

    “오형, 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방문한 것은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입니다.”

    “심형은 내게 큰 은혜를 베풀지 않았소? 무슨 부탁인지 어서 말해보시오”

    오홍은 심협의 신중한 표정에 손을 내저었다.

    새우 병사 대장과 시녀들은 허리 숙여 인사하고는 밖으로 물러갔다.

    “내게 아주 중요한 법보가 망가져서 고쳐줄 사람을 찾아다녔소. 일전에 오장관을 찾은 것도 그 일 때문이었지. 한데…….”

    심협은 최근에 겪은 일들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물론 말하기 힘든 부분은 생략했다.

    오홍은 심협이 오장관에 갔던 목적을 처음 알았지만, 말을 끊지 않고 들었다.

    “……하여, 소부자 성주께서 그 법보를 고치려면 동해 용궁의 보물의 필요하다 하셨소.”

    “그 보물이 무엇이오?”

    오홍은 동해의 황자라 용궁을 지켜야 했고, 밖을 돌아다닐 기회가 매우 적었다. 그렇기에 심협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듣고는 감탄하며 물었다.

    “심혈구이주입니다.”

    심협의 말을 들은 오홍의 표정은 조금씩 어두워졌다.

    “오형, 오해하지 마시오. 그저 잠깐만 빌려 쓰려는 것뿐입니다. 내 보물을 복구하려면 심혈구이주의 힘 일부가 필요하다기에 들이는 부탁입니다. 이건 약소하지만 제가 드리는 감사의 뜻입니다.”

    심협이 소매를 휘두르자 옆의 탁자에 푸른빛이 반짝였고 일고여덟 개의 옥합이 나타났는데, 모두 봉인 부적이 붙어 있었다.

    그가 결인하자 뚜껑에 붙어 있던 부적들이 떨어졌고, 저절로 열려서 안의 보물이 드러났다.

    오홍은 저번 백과선회에서 본 심협의 재산이 보잘것없었기에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가 옥합 안의 물건을 보고는 표정이 굳어졌다.

    “불사목, 삭혼초(爍魂草), 경뇌석(驚雷石)…….”

    옥합 안의 물건들은 하나같이 지보로, 이전에 오홍이 오장관 백과선회에서 심협에게 준 염룡용각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오히려 몇 개는 염룡용각보다도 더 가치 있는 것들이었다.

    오홍은 놀란 눈으로 심협을 돌아봤다. 전의 백과선회 때 심협은 변변찮은 물건이 없었기에 보물을 교환하기 위해 그에게서 염룡용각을 빌려갔는데 그사이 이렇게 많은 보물을 얻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오홍은 금세 침착함을 되찾았으나,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이를 본 심협은 내심 침울해졌다.

    “혹시 부족한 겁니까? 그럼 더 있습니다.”

    그는 보물을 더 꺼내려고 했다.

    “심형, 그게 아니오. 오해요. 이 물건들은 하나같이 지보가 맞소. 만약 다른 보물이었다면 빌려주는 게 아니라 교환했을지도 모르오. 허나 심혈구이주는 다른 보물과 달리 동해 용궁의 명맥과 관련이 깊소. 하여 그 보물은 부친께서 직접 관리하시오. 나 역시 한 번 보는 게 힘든 지경이니…….”

    오홍이 심협을 제지하며 말했다.

    “심혈구이주가 그렇게나 중요한 물건입니까? 잠깐 빌려서 법보를 복구하면 바로 돌려드리겠습니다. 혹시 안심이 안 되면 사람을 붙여서 감시해도 좋습니다.”

    “심혈구이주는 동해 용궁의 역대 전승 보물이오. 이 보물이 어떤 신통을 가졌는지 나도 잘 몰랐소. 그 비밀은 오직 부왕께서만 알고 계셨지. 그러다가 과거 마겁이 일어났을 때, 나 역시 심혈구이주의 위능을 직접 목격했소.”

    “그게 무엇인지 말해주실 수 있습니까?”

    “이제 동해 용궁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으니 숨길 것도 없지. 마겁 중에 동해 용궁은 마족의 공격을 받았고, 둘째 형님 오중(敖仲)이 적에게 중상을 입어 진룡 혈통이 상대의 비법에 절반이나 뽑혔소. 본래 살아남기 어려웠는데 부왕께서 심혈구이주를 사용하니 하룻밤 만에 살아났을 뿐만 아니라 체내의 진룡 혈통도 완전히 보충되었소.”

    “심혈구이주는 진룡의 혈통을 보충할 수 있는 게로군요!”

    심협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현재 그는 수련 경지든 견문이든 이전과 확연히 달라서 진룡이나 봉황 등 천혜의 신수들에 관해 많이 알고 있었는데, 신수라고 할 수 있는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혈통의 힘이다.

    신수의 혈통은 매우 신비로워 이 종족들에게 수련의 천부적 자질과 각종 신비한 능력을 주는데, 이는 평범한 요족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심협도 이전에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몇몇 신수의 진짜 피를 마셔본 적이 있기에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장단점이 있는 법. 신수의 혈통은 그 힘이 수사의 본명원기보다 훨씬 중요하지만, 그들의 혈맥의 힘은 수사의 본명원기처럼 수련을 통해 강해질 수 없다. 혈통의 강약은 태생에 달려 있어 태어나면서부터 평생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다. 또한 혈통의 힘은 일단 소모되면 수사의 본명원기처럼 천재지보를 이용하여 회복할 수 없고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한데 심혈구이주로 진룡 혈통을 회복했다 하니 믿기 어려울 만도 했다.

    심협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심혈구이주에 어떤 다른 능력이 있건 진룡 혈통을 회복할 수 있다는 이점만으로도 용족이 목숨처럼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다. 자신 같은 외부인이 빌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어쨌든 동해 용왕님께 물어봐 주시겠습니까? 심혈구이주를 빌릴 수만 있다면 어떤 조건이든 좋습니다.”

    “물론 말씀은 올려보겠소. 부왕께서 지금 큰일을 치르고 계셔서 용궁은 거의 봉쇄되어 있으니 잠시 머물며 기다려주시오. 모든 일이 끝난 뒤에 내가 부왕께 말씀드려보겠소. 큰일을 넘긴 후라면 그래도 가능성이 조금은 커지겠지.”

    심협도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폐를 끼치겠습니다.”

    오홍은 기뻐하며 심협을 용궁 깊은 곳의 산장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누각도 있었고, 작은 다리 아래로 물이 흘러서 마치 육지의 수선 문파와 같았다.

    “이곳은 동해의 별원으로, 용궁이 외부 손님을 접대하는 곳이오. 심형은 여기서 며칠만 쉬고 계시오. 뭐 필요한 게 있으면 하인들에게 말하면 되오.”

    오홍은 심협과 산장으로 들어갔고, 독립된 동부를 배정해줬다.

    심협은 딱히 까다로운 성격이 아니라 그저 깨끗하기만 하면 만족하기에, 이 별원은 그에게 딱 맞았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다른 동부 안에서 검은색 영광이 비치더니 천둥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다른 손님들도 계신 겁니까?”

    “그렇다오. 다른 곳에서 온 도우들도 이곳에 머물고 있소. 모두 경지가 높은 수사들이니 원한다면 그들과 교류해도 좋을 것이오.”

    심협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홍은 아직 할 일이 많았기에 곧 떠났다.

    심협은 습관적으로 동부 안을 살폈고, 곳곳에 자신의 몇 가지 진법 금제를 설치한 뒤에야 마음을 놓았다.

    그동안 동분서주했는데 이제야 마침내 여유가 생겼고, 비로소 자신의 수련 상황을 정리해볼 수 있게 됐다.

    뇌겁 이후 그는 주로 무명공법과 황정경을 수련했는데, 덕분에 경지를 돌파하여 진선 단계에 이르렀다. 무명공법의 수련은 이미 끝에 도달하며 더 나아갈 곳이 없었고, 이제 계속해서 정진하려면 황정경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심협은 자질이 좋지 않았지만, 몇 년간 각종 영물을 복용하여 체질을 적잖이 개선했다. 여기에 꿈속 세계의 수련 경험까지 더해지자 황정경 정진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단, 아무래도 많은 단약이 필요했다.

    가지고 있던 단약은 진즉 떨어졌고, 황정경은 무명공법과 달리 일원진수도 소용이 없으니 단약이 시급했다.

    심협은 흑연미굴에서 수많은 천재지보를 얻었고, 방촌산에서 적지 않은 사타령과 마왕채의 진선 존재들을 죽이면서 재산이 크게 늘었기에 이제 남은 것은 어떤 단약을 선택할지 고심하는 일이었다.

    이번에 동해 용궁으로 온 것은 심혈구이주를 빌리기 위해서였지만, 자신에게 맞는 단약을 구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동해 용궁의 부유함은 천하가 모두 아는 사실이 아니던가.

    다만 동해 용궁에 뭔가 큰일이 있는 것 같으니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단약을 구하기에는 좋지 않았다. 이에 심협은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심협은 가볍게 숨을 내뱉고는 두 눈을 감은 채 정신을 가다듬어 황정경을 운공했다. 눈부신 금빛이 그의 몸을 뒤덮었다.

    마땅한 단약이 없었기에 가장 기본적인 방법대로 천지영기를 흡수하여 황정경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이는 천천히 황정경의 진선기 수련 과정을 자세히 알아보기 위함이었고, 또한 자신의 자질이 이전과 비교해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아보기 위함이기도 했다.

    사흘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심협이 눈을 뜨자 몸을 뒤덮었던 금빛도 금방 사라졌다.

    심협의 표정은 어두웠다. 사흘간의 고된 수련으로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의 자질과 황정경 수련의 어려움을 깨닫게 됐다. 설령 꿈속 세계의 수련 경험이 있다 해도 지난 사흘의 수련으로는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다. 막힘없던 꿈속 세계의 수련과는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아무래도 보조 단약과 영약 같은 영물이 필요하겠구나.”

    심협은 일어나서 동부 밖으로 나갔다.

    “심 선배님, 무슨 분부하실 일이라도 있습니까?”

    동부 문밖에는 푸른 갑옷을 입은 야차(夜叉)가 서 있었다. 그는 심협의 시중을 위해 오홍이 배치해둔 자로, 이름은 해야차(海夜叉)였다.

    “그간 오홍 도우에게서는 기별이 있었는가?”

    “구(九)전하께서는 궁의 일로 바쁘셔서 오시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급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알리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급한 일은 아니니 오 도우를 귀찮게 할 필요는 없네. 해 도우, 동해 용궁에는 외부인에게도 개방하는 시가(市街)나 상점이 있는가?”

    그는 며칠을 기다렸으니 슬슬 단약을 찾으러 나설 생각이었다.

    “물론입니다. 저희 동해 용궁에는 물자가 풍부하여 다른 도우들과 쉽게 교류할 수 있도록 해시(海市)를 열어두었습니다. 관심이 있으시면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해야차는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해시?”

    그 이름을 듣자 심협은 과거 건업성 부근에서 방문했던 귀시가 떠올랐다. 이어서 그때 함께였던 사우흔이 떠올라 마음이 아렸다.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해야차는 심협을 보고는 의아한 듯 물었다.

    “아, 아닐세. 그냥 귀에 익숙한 것 같아서……. 한번 가보고 싶군그래. 안내해주겠나?”

    “예!”

    해야차는 씩씩하게 대답하고는 앞장서서 날아갔다.

    하지만 이내 검은색 뇌광이 뿜어져 나오던 동부를 지나게 됐는데, 그곳 대문이 활짝 열리더니 튀어나오던 거대한 덩치와 부딪힐 뻔했다.

    “소인이 죽을죄를 지어 흑 선배님을 방해했습니다. 흑 선배님께서는 해시로 가십니까?”

    해야차가 서둘러 다가가 사과했다.

    거대한 덩치는 ‘응’ 하고 답하고는 바로 몸을 돌리고는 떠나려 했다.

    한데 그를 보는 순간 심협은 잠시 멍해졌다. 상대는 다름 아닌 보타산의 수산대신인 흑곰 요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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