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814화 (814/1,214)
  • 814화. 그림에서 나오다

    진원대선은 보리선조의 상처를 돌봐준 뒤, 요마들이 다시 돌아올 것에 대비해 방촌산을 도와 잠시 간단한 호산법진을 설치했다.

    천하를 관통하는 명문 대종은 이번 일로 원기가 많이 상했다. 그보다 걱정스러운 것은 이번 소란으로 가뜩이나 느슨해져 있던 항마 연맹이 이름만 존재할 뿐 실제로는 금방 무너질 위기임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심협은 지금의 상황을 깊이 생각해봤다. 현세는 변화라는 껍데기를 벗기면 실제 상황은 꿈속보다도 심각했다. 적어도 꿈속 세상에서는 같은 목표가 있었기에 모두가 진심으로 함께 힘을 합쳐 적을 무찌르는 사이였다. 그러나 현재는 맹우가 서로 배신하고 적이 되어갈 조짐을 보였다. 마족 또한 겉으로는 선족에 항복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걱정스러웠다.

    * * *

    눈 깜짝할 사이 며칠이 지났다.

    방촌산 정상. 부서지지 않은 대전에 보리선조와 진원대선, 손오공 그리고 심협이 마주 보고 앉았다.

    며칠 동안의 치료로 모두 부상은 많이 회복됐고, 보리선조도 깨어났다.

    “진원 도우를 통해 심 소우가 삼계를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해왔는지 알게 됐네. 노부가 부끄러울 따름이군. 이전에 심 소우를 의심한 점을 사과하네.”

    보리선조는 상처가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았지만, 위엄이 넘쳤고 또한 여유가 넘쳤다.

    “선배님, 과찬이십니다.”

    심협은 겸연쩍어하며 답했다.

    “내 본래 심 소우의 기이한 경험을 5할만 믿었는데, 이제 9할은 믿을 수 있겠소. 만약 우리가 도울 일이 있다면 전력을 다해 돕겠소. 그것이 어쩌면 삼계를 돕는 길이 아닐까 하오.”

    진원자는 보리선조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 말에 보리선조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심협에게 말했다.

    “산하사직도를…… 주겠네.”

    “정말입니까?”

    “단, 자네가 그것을 받을 수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하겠네.”

    심협이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하자 진원자가 설명했다.

    “산하사직도는 항고의 지보이자 삼산오악일월성진(三山五岳日月星辰)의 정수를 연화하여 만든 보물이오. 그대가 그것을 소유하려면 산하사직도의 도의를 받아야 하오.”

    심협의 의아함은 오히려 커졌다.

    꿈속에서도 그는 산하사직도를 발동한 적이 있는데, 그때는 크게 영감의 반응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허나 다시 생각해보니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그때 그들이 소지했던 산하사직도는 이미 부서져서 다시 수리한 보물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시험합니까?”

    “간단하오. 그대가 산하사직도로 들어가 본능에 의지하여 장애물을 넘고 그림을 벗어나 현실로 돌아오면 되오.”

    “알겠습니다. 그럼 저를 그림 속으로 들여보내 주십시오.”

    “허허! 지금 이곳이 그림 속이라고는 생각지 않소?”

    진원대선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반문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보리선조와 진원대선 그리고 손오공의 몸에서 색상이 빠르게 사라지더니 이내 흙으로 만든 인형으로 바뀌었고, 곧이어 깨져서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이를 본 심협은 자기도 모르게 실소가 터졌다. 자신은 어느새 그림 속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그는 걸음을 옮겨 대전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림 밖, 보리선조는 진원대선을 바라보며 짐짓 불쾌한 척 말했다.

    “진원 도우, 이러면 부정행위를 돕는 거요!”

    “하하……. 확실히 사심이 들어가긴 했소. 허나 심 소우는 시간이 귀하니 지체할 수 없었소.”

    진원대선이 멋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

    원래대로면 심협은 시험의 내용도, 심지어 자신이 미궁에 빠진 사실도 몰라야 했다. 이는 시험 내용을 모르는 채 시험장에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얼마나 어려울 것인가.

    하지만 보리선조도 진심으로 진원대선에게 따지는 것이 아니었기에 피식 웃으며 심협이 시험을 통과하는 데 얼마나 걸릴지 내기를 했다.

    “심 소우는 자질이 좋은 편은 아니나 심성이 굳건하니 이레 안에 나올 것이오.”

    진원대선이 먼저 말했다.

    “이레 이내라……. 진원 도우는 산하사직도를 너무 우습게 보는 것 아니오? 내 생각에는 적어도 보름은 걸릴 게요.”

    보리선조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쨌든 그가 반드시 빠져나올 거라고 생각들 하시는 모양입니다?”

    손오공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심 소우는 우리가 보는 것보다 더 많은 경험을 했다네. 게다가 그는 심성이 강인하니 이미 태을 수사보다 약하지 않지.”

    “그래서 걱정이오. 심성이 강인한 것은 좋은 일이나, 겪어야 할 방해가 많을수록 쉽게 첩첩산중의 산하사직도에 갇히기 쉽지 않소?”

    “그건 좀 곤란한데…….”

    보리선조의 말에 진원자도 걱정에 빠졌다.

    두 사람이 걱정에 빠져 있을 때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조님, 이러면 통과한 겁니까?”

    보리선조와 진원자가 퍼뜩 놀라 고개를 돌려 보니 심협이 손에 족자 하나를 든 채 서 있었다. 바로 산하사직도였다.

    “어…… 어떻게……?”

    보리선조는 말문이 막혔고, 진원대선도 그 자리에서 멍해졌다.

    “아, 대전에서 나와 바로 장안성으로 향했는데, 성에 들어갈 때 주작문 위에서…….”

    심협은 방금 그림 속에서 겪은 일들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어쨌든, 오악이 제가 기억하는 것과 좀 다르긴 했지만, 정확한 방향을 찾았지요. 그랬더니 빛나는 입구가 나왔고, 나와보니 여기였습니다.”

    심협의 간단한 설명을 들은 두 명의 대능의 표정은 기묘한 수준이었다.

    사실 꿈속에서 심협은 산하사직도와 알 수 없는 인연으로 이어졌고, 현실에서도 둘 사이에는 자연스럽게 친근감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이를 알 리가 없었다.

    “오공아, 얼마나 걸렸느냐?”

    보리선조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일각도 안 걸렸는데요.”

    손오공이 볼을 긁적이며 놀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말도 안 돼! 말도…….”

    보리선조와 진원대선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를 본 심협은 의아한 표정으로 손오공을 바라봤다.

    “두 분이 아까 자네를 두고 내기…….”

    “오공은 가서 종문의 복구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좀 보고 오너라.”

    보리선조가 즉시 말을 끊었다.

    손오공은 그들이 더 귀찮게 할까 봐 퍼뜩 나갔다.

    심협이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보리선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산하사직도는 더없이 중요한 물건이니 요마들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주의하고 또 주의하게.”

    “걱정 마십시오. 제가 죽기 전까지는 누구도 가져가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오공의 부상이 나으면 함께 가는 게 어떤가?”

    보리선조는 그래도 안심이 안 되는 듯 물었다.

    “선조님, 그러실 것 없습니다. 대성은 잘 정양하게 하십시오. 제게 이 보물이 있다는 소문이 새어나가지만 않으면 큰 위험은 없을 겁니다. 설마 하니 누가 제게 이런 보물이 있다고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심협이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심 소우는 나이가 많지 않은데도 행동이 매우 신중하니 안심해도 될 게요.”

    진원대선이 그렇게 말하고는 푸른색 옥결을 심협에게 건넸다. 이전에 육이미후가 나타났을 때 부숴서 진원대선에게 연락했던 것과 같은 옥결이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심협은 사양하지 않았다.

    “만약 이상이 생기면 옥결을 부수시오. 내가 제때 도착할 수 있을 게요.”

    “그렇다면 안심이오.”

    진원자의 말에 보리선조가 흐뭇하게 웃었다.

    방촌산 어느 곳의 절벽, 깊은 밤. 심협과 섭채주가 나란히 서 있었다.

    심협이 자연스레 손을 잡자 섭채주는 어깨를 살짝 떨더니 이내 힘을 빼고 심협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두 사람은 너무도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기에 한참을 말없이 마주 보았다.

    그들 뒤, 제법 멀리 떨어진 나무. 옆으로 뻗은 굵은 나뭇가지 위에 몇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이렇게 비교해보니 정말 차이가 크네. 형님, 심형님 좀 보시오. 형님은 뭐하고 있는 거요? 에휴…….”

    백소운은 심협과 섭채주의 뒷모습을 보고는 자신의 형을 돌아보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허! 대장부가 세상에 태어났으면 큰 뜻을 품고 성실히 수련해야지, 어찌 세상 일을 가슴에 품고 여인을 생각할 틈이 있다더냐! 안 그렇습니까?”

    백소천은 화살을 돌리며 육화명을 툭 쳤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백소천이 돌아보니 육화명은 나무에 기대어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 시선은 먼 곳을 향해 있었다.

    “에휴, 남자가 여인이나 생각하고 말이야.”

    백소천은 끌끌 혀를 찼다.

    부동래는 반대쪽 끝에 앉아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편, 나무 아래에서는 무만아가 까치발을 들고 심협과 섭채주를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진짜 잘 어울리네.’

    * * *

    며칠 뒤, 육화명과 섭채주 등은 자신의 종문으로 돌아갔다. 부동래는 방촌산에 남아 정식으로 보리선조의 문하로 들어갔다.

    심협은 보름 정도 더 머물렀고, 부상을 완전히 회복한 후 체내의 순양의 기운과 마기가 다시 균형을 이루자 보리선조 등에게 인사하고 방촌산을 떠났다.

    또다시 보름 뒤, 심협은 동해에 도착했다.

    이전에 백소천과도 왔고, 꿈속에서도 가봤으니 이 길은 익숙했기에 금방 동해 용궁을 찾아낼 수 있었다.

    푸른빛이 바닷물을 가르며 나아갔고, 동해 용궁 밖에 심협의 모습이 나타났다.

    동해 용궁은 꿈속 세계보다 더 휘황찬란했으며 기상이 웅장했다. 다만, 그 주위에는 새우 병사와 게 장군의 대열이 쉴 새 없이 순찰하고 있었다.

    “뉘시기에 수정궁에 온 것이오?”

    심협이 내려오자마자 은색 갑옷을 입은 새우 병사들이 바로 다가왔고, 선두의 새우 병사가 물었다.

    “저는 심협이라 합니다. 오홍 전하의 벗이지요. 전하를 뵙고 싶어 찾아왔으니 대신 좀 연락을 넣어주시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바로 전하겠습니다.”

    선두의 새우 병사가 당황하여 급히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은빛으로 변하여 용궁 안으로 날아갔다.

    심협은 조용히 서 있었고, 남은 새우 병사들도 움직이지 않고 근처를 지켰다. 마치 심협을 감시하는 것 같았다.

    심협은 내심 의아했다.

    ‘마치 대적이 곧 쳐들어올 것 같은 경계태세로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그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한참을 기다렸다. 반 시진이 지났지만, 여전히 기별은 없었다.

    심협이 다시 요청을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며 일각 정도 더 기다리자 앞서 떠나간 새우 병사 대장이 돌아왔다.

    “선배님, 죄송합니다. 최근 용궁이 너무 바빠서 저도 한참을 기다리고서야 오홍 전하를 뵐 수 있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지금 중요한 일을 처리하고 있어서 분신으로도 맞이하러 올 수 없다 하시며 소인에게 선배님을 용궁의 객전(客殿)으로 모시라 했습니다.”

    새우 병사 대장이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소. 안내해주시오.”

    심협은 그를 난처하게 만들 생각이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새우 병사는 연거푸 사과하고는 심협을 안내해 수정궁으로 들어갔다.

    궁 안에는 병사들이 가득한 것이 경계가 삼엄했고, 어느 정도 들어가자 암호와 영패를 확인하기까지 했다.

    한참 뒤에야 화려한 궁전에 도착했는데, 매우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곳에서는 산호 모습을 한 몇 명의 시녀들이 시중을 들고 있었다.

    심협이 오자 시녀들은 동해 특산 영차와 영과를 내왔다.

    새우 병사 대장은 나가지 않고 옆에 섰다.

    “동해 용궁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이오?”

    심협은 긴장감과 경계심이 솟았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영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지나가듯 물었다.

    “요즘 궁 안의 경계가 엄하긴 하오나 무슨 일이 있는지 소장도 모릅니다.”

    새우 병사 대장은 그렇게 속삭였다. 정말로 모르는 건지 아니면 둘러내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심협도 더는 묻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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