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813화 (813/1,214)
  • 813화. 초심

    방촌산의 위험이 끝난 것처럼 보이자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누군가 비틀거리며 천천히 하늘에서 내려왔다. 옆에는 검은색 개 한 마리가 따라오고 있었다. 바로 이랑신 양전이었다.

    그의 가슴과 배에 선명하게 보이는 관통상(貫通傷)은 손오공의 부상보다 작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치료도 하지 않은 상태라 옷이 피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보리선조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포권했다.

    “이번 방촌산의 난은 능파성의 책임입니다. 이 양전, 보리선조께서 어떤 처벌을 내리셔도 달게 받겠습니다.”

    성궁 장로 등도 이를 보고는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탁탑 천왕과 진원대선은 그대가 데리고 온 지원군이오?”

    “이 천왕은 제가 천궁으로 가서 요청했지만, 오장관은 갈 겨를이 없었습니다.”

    양전이 사실대로 말하자 보리선조는 의아해했다.

    “난 심 소우의 연락을 받고 온 것이오. 다만 길이 너무 멀어서 서둘러 왔음에도 한참 늦고야 말았소.”

    진원대선의 설명에 모두가 놀라서 심협을 바라봤다. 진선 초기에 불과한 수사가 어떻게 진원대선 같은 지선(地仙)의 선조에게 지원을 요청한단 말인가?

    “그랬군.”

    보리선조는 고개를 끄덕였고, 진원대선도 더는 설명하지 않았다.

    “양전, 노부가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소.”

    “말씀하십시오.”

    “만약 산하사직도가 능파성에 있고 우리 방촌산이 다른 종문과 연합하여 그대들을 공격한다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소?”

    보리선조의 말에 양전은 한참을 침묵했다. 만약 오늘 같은 형세였다면 능파성은 이미 멸문했을 것이다.

    “후배, 선조님의 뜻을 이해했습니다. 다만, 제가 산문에 온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저 방촌산이 삼계 모든 종족을 제자로 받아들여 삼계의 균형을 깨트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럼 넌 삼계 종족이 서로 벽을 세우고 각자 갈 길을 가면서 서로가 매일 싸우고 견제하는 게 진짜 평화라고 생각하는 게냐? 눈이 세 개나 달려서 다른 사람보다 더 멀리 볼 줄 알았더니 완전 눈뜬장님이었군!”

    손오공이 가감 없이 비꼬았다.

    “저는 방촌산이 인, 선, 마 모든 종족을 제자로 받아들이고 산하사직도를 가지고 있는 게 삼계 평화에 해롭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양전이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양전, 그대가 틀렸소. 삼계의 적은 다른 종족이 아닌 치우와 그의 추종자요. 오늘 일을 모두 지켜보지 않았소? 오진 장로는 어떠했소? 내 제자 오공은? 여기 심 소우는? 또 여기 마족 친구인 부 도우는 또 어떻고?”

    보리선조가 한숨을 쉬고는 반문하자 양전은 뭔가 답하려 했다. 한데 그의 옆에 있던 효천견이 먼저 멍 하고 짖었다.

    양전은 뭔가 깨달은 듯 잠시 멍해지더니 조용히 말했다.

    “제가…… 제 생각이…… 틀렸던 것 같습니다…….”

    한데 이번에는 이정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난 이랑진군이 그리 잘못했다 생각지 않소. 방촌산이 일찍이 천궁의 제안을 따라 산하사직도를 천궁에 맡겼으면 오늘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게요.”

    “뭐라고?”

    방촌산의 모두가 대노했다.

    “이정 이 미친 늙은이! 천궁은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다. 노손의 상처가 심하지만 않았어도 벌써 널 질질 끌고 천궁으로 쳐들어갔을 테니까!”

    “왜? 내 말이 틀렸나? 방촌산이 금기를 깬 게 아니라면 왜 다른 종문들이 도우러 오지 않은 거지?”

    이정은 전혀 위축되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이놈!”

    방촌산 제자들이 살기를 일으키자 보리선조가 손을 들어 모두를 제지하고는 웃었다.

    “이 천왕의 말은 산하사직도를 천궁에서 보관해야 한다는 거요?”

    “그렇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지만, 지금도 늦지 않았소.”

    이정은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그럼 이 천왕께 묻겠소. 마족은 이미 천궁에 투항하여 그대들 선족의 통제를 받고 있으니, 우리 방촌산의 이번 환란은 그대들 천궁의 뜻이오?”

    “우리가 방관했다는 것은 인정하오. 우린 그저 마족을 이용하여 방촌산을 억압하려 했을 뿐이오. 허나 저들이 감히 신마의 우물을 열려고 할 줄은 몰랐소.”

    “변명 없이 바로 인정하는 건 제법 대범하구나. 흐흐흐.”

    손오공이 음흉하게 웃었다.

    “변명하면 뭐가 달라지나?”

    “그래서 이번 일에 대해 천궁은 우리 방촌산에 할 말이 없다는 건가?”

    보리선조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번 방촌산의 손실은 선족의 각 문파끼리 상의해 마땅한 보상 방안을 내놓을 것이오.”

    “보상? 방촌산의 제자가 수없이 죽었는데 이는 어떻게 보상할 거지?”

    오진 장로가 소리쳤다.

    “그럼 어떻게 해주길 원하는 거지? 죽은 자들을 살려달라는 건가?”

    “이놈!”

    오진 장로가 달려들려는데 이정이 계속해서 말했다.

    “당신들이 믿든 안 믿든 우리 천궁은 마족에게 어떤 지시도 하지 않았어. 그저 참견하지 않겠다는 의사만 보였지. 그러니 이번 일로 우리에게 따진다 해도 천궁은 전혀 두려울 것이 없다.”

    “그대의 말이 사실이란 걸 믿소. 우리 방촌산이 몇 년간 행한 일에 삼계의 모두가 불만일 수도 있을 게요. 허나 방촌산의 근간인 종족의 구분 없이 제자로 받는다는 신념을 바꾸라고 할 거면 차라리 지금 우리 방촌산을 멸망시키는 게 나을 것이오.”

    보리선조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패기가 가득했다.

    방촌산 제자와 장수촌 사람들은 그의 말에 하나같이 당당한 표정으로 허리를 곧게 세웠다.

    심협도 속으로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그리 나온다면 누구도 말릴 수는 없을 거요. 허나 산하사직도는 넘겨서 선족의 문파가 공동으로 관리하는 게 좋을 것이오.”

    “안 될 건 없소만……. 그렇다면 천궁의 천책과 교환하는 건 어떻소?”

    이정은 그 말에 고개만 저을 뿐, 화를 내지 않고 답했다.

    “그렇다면 더는 할 말이 없군. 반사동, 마왕채 그리고 사타령의 추궁은 나중에 천궁이 주관할 것이니 오장관에서 참관해주셨으면 하오.”

    “물론이오.”

    이정은 보리선조와 진원대선에게 작별을 고하고는 먼저 떠났다.

    양전은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했고, 마땅한 보상을 약속하고는 남은 장로와 제자들을 이끌고 능파성으로 돌아갔다.

    보리비경 안에는 방촌산 제자들과 진원자 그리고 육화명 등만 남게 됐다.

    보리선조는 모두를 등진 채 보리비경 깊은 곳을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보리 도우, 너무 상심하지 마시오. 낡은 것이 무너져야 새로운 것이 세워지는 법. 방촌산의 이념은 이번 일로 삼계 곳곳에 전해질 테니 그대의 숙원에 큰 도움이 될 것이오.”

    진원대선이 위로하듯 말했다.

    “내 능력이 부족하여 홀로 삼계의 분쟁을 막으려 했다가 방촌산의 수많은 제자가 죽었소. 이 죄를 감당할 여력도 없는데 무슨 낯으로 숙원을 입에 담겠소?”

    보리선조가 비통한 얼굴로 돌아섰다.

    “조사님, 안심하십시오. 사타령과 반사동, 마왕채…… 이 원한은 잊지 않고 훗날 반드시 갚겠습니다!”

    오진 장로가 원한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고,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분개하며 복수를 맹세했다.

    이를 본 심협은 눈살을 찌푸렸다.

    방촌산 제자들은 아무래도 보리선조가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삼계 모든 종족을 제자로 받아들이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방촌산과 사타령, 마왕채 등의 싸움으로 보리선조의 숙원을 달성하기란 더욱 어려워졌다.

    이념이 아무리 좋아도 사람들 마음속의 분노와 원한은 이길 수 없는 법. 방촌산이 이렇게 큰 피해를 입고 수많은 사형제가 적의 손에 죽었으니 방촌산 제자들은 보리선조의 숙원을 이해했다 해도 복수 없이 지나치지는 못할 것이다.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제자들에게 한마디 하려던 보리선조가 갑자기 몸을 떨더니 얼굴이 까맣게 물들며 쓰러졌다. 체내의 마독이 폭주한 것이다.

    “조사님!”

    손오공이 자신의 부상도 잊고 보리선조를 부축하려 했다.

    그러나 진원자가 한발 앞서 보리선조 뒤에 나타나 그를 받았다.

    보리선조는 두 눈을 감은 채 몸을 떨고 있었다. 이미 혼절한 상태였다.

    “이렇게 강한 마독이라니, 치우의 혈독인가. 그래서 보리 도우가 이렇게 당한 것이로군.”

    진원자는 안색이 변하여 금색 조롱박에서 금색 단약을 꺼내 보리선조에게 먹였다.

    “형님, 조사님은 어떻소?”

    손오공이 급하게 물었다.

    다른 방촌산 제자들과 심협 등도 다가왔다.

    심협은 임랑환 안의 만독혼원주를 만지작거리며 이것으로 보리조사의 독을 제거할까 하는 생각도 했으나,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 구슬은 내력이 올바르지 않은 데다 여아촌의 지보이니 사람들 앞에 드러내면 후환이 클 것이다.

    “괜찮네. 보리 도우는 경지가 심오한 데다 옥청화마단(玉淸化魔丹)을 먹였으니 마독이 아무리 강해도 생명에는 지장 없을 걸세.”

    진원자의 말에 손오공과 다른 방촌산 제자들은 안도했고, 심협도 임랑환에서 손을 뺐다.

    “조사님을 안전한 곳으로 모셔야겠습니다. 다 함께 밖으로 나가시죠.”

    오진 장로의 말에 진원자는 고개를 끄덕였고, 보리선조를 데리고 나가려 했다.

    콰쾅!

    그 순간, 구덩이 안에서 갑자기 지진 같은 격렬한 진동이 일어나더니 반경 수십 리 곳곳의 땅에 균열이 생기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거대하기 그지없는 힘이 땅속에서 쏟아져 나와 모든 것을 삼키면서 땅이 무너져 내렸다.

    안색이 변한 심협은 바로 하늘로 날아오르려 했다. 그러나 땅속의 힘은 너무도 강력했고 빨랐다. 게다가 심협은 부상으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기에 그 힘에 사로잡혀 날지 못했다. 이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진원자는 안색이 급변하더니 소매를 휘둘렀다. 소매는 순식간에 하늘을 가릴 정도로 커져서 빨아들이는 힘으로부터 모두를 감싼 뒤 하늘로 날아올랐다.

    땅이 굉음을 내더니 무서운 흡입력이 천천히 땅 깊은 곳으로 사라지면서 사방은 다시 고요해졌다.

    진원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소매를 휘둘렀다. 사람들은 허공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안색이 변했다.

    본래 있던 구덩이는 사라졌고, 대신 반경 수십 리의 검은 심연이 나타났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었고, 신식으로도 그 끝을 살펴볼 수 없어 마치 지옥으로 이어지는 통로 같았다. 게다가 심연 가장자리는 곧게 뻗었고 또 미끄러워 보여서 마치 비검이 베어낸 것 같은 모습이었다.

    심협은 꿈속 세계에서 봤던 방촌산이 떠올랐다. 그곳에서 본 검은색 심연이 눈앞의 것과 매우 흡사했다. 다만 눈앞의 심연과 달리 꿈속 세계의 그곳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범위했다는 점만 달랐다.

    ‘싸움은 이미 끝났고 진원대선께서도 여기 계시니 적이 공격해왔을 리는 만무하다. 한데 왜 갑자기 여기에 이런 심연이 생긴 것인가? 방금 쏟아져 나왔던 그 흡입력은 구덩이 깊은 곳에 있던 신마의 우물과 관련이 있는 걸까?’

    심협은 머릿속에서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데, 생각할수록 그럴듯했다.

    방금 땅속에서 쏟아져 나온 힘은 음침하고 교활한 것이 마치 마기 같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왜 갑자기 이런 심연이 생겨난 거야?”

    방촌산 제자들이 수군거렸다.

    “당황할 것 없다. 보리비경은 오늘 너무 여러 번 충격을 받아서 비경의 근간이 버티지 못하고 이런 심연이 생겨난 것이다. 다행히 심연은 더 퍼질 것 같지 않으니 조사님께서 깨어나시면 처리하실 것이다. 우선 여기를 벗어난다.”

    진원자가 돌아보자 오진 장로가 앞으로 나와서 설명했고, 그제야 방촌산 제자들은 안도했다.

    그러나 심협은 진원자와 오진 장로가 눈빛을 교환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추측을 더욱 확신하게 됐다. 다만 두 사람이 이 일을 숨기고 싶은 듯하니 굳이 나서서 묻지는 않았다.

    곧이어 사람들은 그곳을 떠났고, 금방 보리비경 밖으로 나와 방촌산 종문 안으로 돌아왔다.

    종문의 상황은 심협이 보리비경으로 들어가기 전보다 더 참혹했다. 간신히 살아남은 방촌산 제자는 절반도 되지 않았고, 모두 망연자실해 있다가 오진 장로 등이 나오자 서둘러 다가왔다.

    “방촌산 제자들은 들어라! 적은 이미 물러갔고 본문의 화도 이미 지나갔다. 조사님도 무사하시다. 지금부터 폐관하고 상처를 치료할 것이니 모두 안심하라!”

    오진 장로의 목소리는 저 멀리까지 퍼져 나가 방촌산 전체에 울려 퍼졌다.

    방촌산 제자들은 적들이 물러간 후로도 불안에 떨고 있었는데, 오진 장로의 목소리를 듣자 그제야 안도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계 장로와 오진 장로는 제자들을 안심시키고는 사람을 시켜 진원대선와 심협, 육화명 등 외부의 도우들에게 휴식할 장소를 제공했다.

    다른 방촌산 제자들은 잠시 정양한 뒤 엉망이 된 산문 곳곳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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