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812화 (812/1,214)
  • 812화. 뜻을 밝히다

    “그렇다면 더는 할 말이 없군.”

    금시대붕은 싸늘한 표정으로 그렇게 내뱉고는 곧장 하늘로 올라갔다. 그가 등의 두 날개를 활짝 펼쳐 태양을 가리자 두 개의 거대한 그림자에서 강력한 압박감이 갑자기 위로 솟아올랐다.

    심협의 눈에는 허공이 일그러지는 게 생생하게 보였다. 마치 하늘이 짓눌리는 것만 같았다. 웅장한 힘이 가슴을 억눌러오자 숨이 막혔고, 머리가 웅웅 울리면서 몸이 절로 굽혀졌다. 금시대붕의 강력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간신히 고개를 들어 허공에 뜬 그를 바라보는 심협의 눈에 담긴 것은 분노가 아니라 회한이었다. 현실 세계로 돌아온 후 수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이전보다 더욱 성실하게 수련한 것은 모두 최대한 빨리 경지를 올리기 위함이었다. 한데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는 것이 있는 듯했다.

    마치 거대한 산에 짓눌린 것처럼 무릎이 꺾였고, 더는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아니! 절대로 이렇게 쓰러질 수는 없어!”

    심협의 두 눈이 붉게 빛났고, 강렬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그는 있는 힘껏 현양화마 비술을 운공했다. 더는 음양의 균형을 신경 쓰지도 않았다. 완전히 마화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버렸다.

    비늘이 순식간에 온몸에 퍼져 나갔고, 마화된 좌측 몸에 살기가 충만해지면서 웅장한 힘이 체내에서 솟구치기 시작했다. 뿔은 더욱 자라서 길이가 3촌까지 늘어났고, 미간의 붉은 반점은 점점 짙어졌으며, 피부 역시 조금씩 갈라졌다.

    “오, 오라버니!”

    이를 본 섭채주가 깜짝 놀라 심협을 불렀다.

    그녀를 바라본 심협의 눈에서는 여전히 감정이 느껴졌고, 이성이 뚜렷했다. 하지만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는 점점 더 순수해져갔다.

    그는 섭채주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먹을 움켜쥐고 하늘을 향해 강하게 휘둘렀다.

    쾅!

    폭음과 함께 거대하기 그지없는 검은색 주먹이 어두운 마염을 뿜어내며 하늘로 솟구쳤다.

    주먹은 백 장 높이까지 올라간 뒤, 마치 보이지 않는 산에 막힌 것처럼 속도가 점점 줄어들었고, 힘이 모두 소진되자 폭발했다.

    꽈꽝!

    주먹을 뒤덮고 있던 검은 마염이 떨어지며 비처럼 대지를 적셨다.

    천막이 강하게 흔들리면서 3할 정도 밀려나자 모두를 압박하던 압박감이 조금 가벼워졌다.

    금시대붕은 움찔했고, 심협을 의아한 표정으로 내려다봤다.

    “이렇게 순수한 치우의 마기라니, 저 인간족은 대체……?”

    잠시 생각하던 그는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고, 허공에서 발을 내디뎠다. 그러자 심협에 의해 한결 가벼워진 압박감이 다시 거세졌고, 더욱 대항하기 힘든 기세가 더해졌다.

    보리선조가 속으로 한숨을 쉬고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의 몸에서 찬란한 빛이 번쩍이더니 거대한 손이 만들어졌다. 열 개의 손가락이 마치 커다란 나무처럼 솟구쳐 아래의 사람들을 보호했다.

    한편, 심협은 현양화마 비술을 더는 버티지 못하고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압박감이 가벼워지자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보리선조를 본 순간, 그들의 안색은 다시 창백해졌다. 그의 몸에서 기운이 급속도로 줄어드는 것이 보였다. 좀 전까지의 당당함은 속임수였던 것이다.

    “선조님!”

    제자들이 다가오려 하자 보리선조가 손을 저었다.

    “각명과 각안이 사용한 마독은 정말 독하구나. 노부가 이렇게 쓸모없으면 안 되는데…….”

    “스승님, 스승님의 은혜로 수선의 길에 올랐고 이제 부처가 되었으니 더는 후회가 없습니다. 하늘에서 왔으니 오늘 하늘로 돌아가렵니다. 제가 모두를 위해 살길을 열겠습니다.”

    손오공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이런 어리석은 제자를 봤나. 끝까지 스승을 걱정시키는구나. 네가 희생을 말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내가 아직 살아 있는데 어찌 순서가 너에게 넘어가겠느냐?”

    보리선조도 웃으며 말했다.

    “보리선조가 최후의 반격을 하려는 모양이군. 대선배님에 대한 예로, 우리의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선배님을 보내줍시다!”

    금시대붕이 소리치자 화십낭 등은 서로 마주 보더니 일제히 앞으로 달려왔다.

    육아상왕은 거대한 금색 창을 들었고, 화십낭은 입에서 설백의 장검을 다시 꺼냈다. 지영의 손에는 하나로 합쳐진 흑백의 골검이 들려 있었다. 심협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안타까움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일이 이 지경까지 왔으니 그에게서 화마의 비법을 얻어내기란 불가능할 터였다.

    “죽여라!”

    우르릉!

    천둥소리가 하늘 높은 곳에서 울려 퍼지자 비경 전체가 강하게 흔들렸다.

    그 순간, 비경에 있는 사람들과 금시대붕을 포함한 모든 요마들의 표정이 급변했다.

    금시대붕이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자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거대한 보라색 번개 기둥이 반투명한 광막에 떨어졌다.

    콰쾅!

    두 번째 뇌전에 백 장 길이의 거대한 균열이 생겼다.

    누군가 밖에서 공격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방촌산 사람들은 크게 기뻐했고, 금시대붕 등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다음 순간, 이전보다 더 밝은 보라색 빛이 반짝이더니 강하게 광막을 두들겼다.

    꽈르릉!

    광막 위의 아홉 마리 금룡 허상이 모두 한곳으로 모여들어 번개가 떨어지는 것을 막으려 했다.

    쾅!

    거대한 폭음이 울려 퍼지자 모두의 기혈이 뒤틀렸고, 고막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경지가 높지 않은 자들은 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광막에 균열이 생긴 곳에서는 아홉 마리의 금룡이 희미해졌지만, 아직 부서지지 않고 버텨냈다.

    하지만 뒤이어 번쩍이는 금빛에 모두가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사이, 보광이 감도는 9층 금탑이 나타나 광막을 거세게 두들겼다.

    뇌전으로 인해 이미 많은 힘을 소모한 금제 장막은 마침내 버티지 못하고 와르르 부서졌다.

    하늘 가득한 빛에서 아홉 마리 중 한 마리의 금룡이 사라졌고, 나머지 여덟 마리는 금빛으로 변하여 금시대붕의 소매로 들어갔다.

    금색 보탑도 떨어질수록 작아지더니 마침내 1척 크기의 영롱한 보탑으로 변하여 누군가의 손으로 돌아갔다.

    금색 갑주를 입고 머리에는 금빛 날개가 달린 보관을 쓴 그자의 가슴에는 검은색 기다란 수염이 늘어져 있었다. 찌푸린 미간은 위엄이 넘쳐 보였고, 오른손에는 금탑을, 왼손에는 오래되어 보이는 검은색 채찍을 들고 있었다.

    심협은 한눈에 그를 알아봤다. 바로 탁탑천왕 이정이었다.

    이정의 뒤를 이어 낯익은 존재가 하늘에서 내려와 그의 옆에 섰다. 바로 오장관의 관주 진원대선이었다.

    두 사람을 본 순간, 심협은 안도하며 긴장이 풀렸고, 그제야 마기를 사용한 부작용으로 인한 통증이 몰려왔다. 그가 비틀거리자 옆에 있던 섭채주가 얼른 부축했다.

    진원자는 아래쪽을 쭉 훑었는데, 구덩이 주위에 말라버린 피들을 보고는 그동안 이곳에서 얼마나 끔찍한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했다.

    “금시대붕, 네가 감히!”

    그는 참지 못하고 호통을 쳤다.

    “진원대선, 그게 무슨 뜻입니까?”

    금시대붕은 이해하지 못한 척 되물었다.

    반면 이정은 잡담 따위 나누고 싶지 않다는 듯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천궁이 너희들의 방촌산 공격을 묵인한 것은 너희가 능파성과 함께 산하사직도를 가져오겠다고 해서였을 뿐, 너희에게 멸문시킬 권한도, 신마의 우물을 열 권한도 주지 않았다.”

    “천왕와 천궁의 지령이 너무 모호했습니다. 법으로 금지한 것도 아닌데 어찌 모든 죄를 우리에게 뒤집어 씌우는 겁니까?”

    화십낭이 말했다.

    “감언이설로 넘기려 하지 마라. 신마의 우물을 봉인한 것은 삼계의 합의였고, 애초에 너희와 함께 맺은 맹약이었다. 너희의 이런 행동은 맹약을 파기한 것이니 전쟁의 발단을 다시 열겠다는 뜻이냐?”

    이정이 인상 쓰며 다시 호통을 쳤다.

    “전쟁의 발단? 이번 일은 확실히 좋은 핑계이긴 하지. 그래서 우리가 방촌산을 공격하는 걸 묵인한 건가? 전부 그것 때문이었나?”

    금시대붕이 냉소하며 반문했다.

    그러자 방촌산 사람들의 표정이 돌변했고, 의심쩍은 얼굴로 이정을 바라봤다.

    “너희 마족은 이미 선족에 항복했으니 내가 다시 전쟁의 발단을 일으킨다 한들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이정은 태연자약하게 물었다.

    이 말을 듣자 방촌산 사람들은 어쩌면 천궁이 저들을 종용하여 방촌산을 공격하게 했을지도 모르고, 심지어 저들을 겁박하여 산하사직도를 내놓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방촌산이 전멸하거나 요족이 다시 신마의 우물을 여는 것은 용납하지 않을 것임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정에 대한 방촌산 사람들의 심정은 좋지 않았다.

    “어떻게 하겠느냐? 계속 싸우겠다면 천궁이 어울려주마.”

    “오장관도 기꺼이 함께하겠소.”

    진원대선이 불진을 휘두르며 덧붙였다.

    금시대붕은 두 사람을 노려보며 한참을 가만히 있더니 날개를 거두고 모두가 보는 가운데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더는 싸우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좋다. 싸우지 않겠다면 이제 얌전히 처벌을 기다려라.”

    이정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처벌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천궁의 과실은 알아서 감당하겠지만 너희의 징벌에 관해서는 천궁이 사사로이 결정하지 않겠다. 훗날 삼계의 다른 종문들과 협의하여 결정한다. 그전에, 각자의 종문으로 돌아가 연락을 기다려라. 물론 원한다면 반항해도 좋다. 너희 종문 전체가 일어나 함께 반항한다면 다른 종문들에게 좋은 일이긴 하겠지.”

    그다지 엄숙하지 않은 말투였지만, 이정의 말에는 협박의 의미가 확실하게 담겨 있었다.

    “이 천왕! 더는 협박할 것 없다. 이번 일의 결과는 우리가 책임질 것이다. 허나 너희 인, 선 두 종족의 대종문들이 앞으로 방촌산을 어떻게 대할지 궁금하구나. 하하하!”

    금시대붕의 웃음에는 비아냥이 가득했다.

    그의 비웃음을 들은 사람들의 생각은 모두 조금씩 달랐다.

    그때, 그전까지 조용히 있던 누군가의 목소리가 비경 전체에 울려 퍼졌다.

    “이후의 일은 우리 인, 선 두 종족 내의 일이다. 어떻게 처리할지, 어떻게 화합할지는 너희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다. 허나 이번 일을 통해 삼계의 모든 종문이 많은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돌아보니, 그 주인공은 바로 심협이었다. 그의 두 눈은 금시대붕을 노려보고 있었다. 확고한 표정은 금시대붕의 도발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모습이었다.

    방촌산과 능파성 사람들도 그의 말을 듣고 나자 확실하게 깨달았다. 이번 전쟁으로 결과가 어떻게 되든 요마를 바라보는 시선은 달라질 것이다.

    금시대붕은 심협을 한참동안 응시하더니 몸을 돌렸다.

    “가자!”

    사타령과 마왕채 그리고 반사동의 남은 장로들, 제자들은 일제히 몸을 돌려 떠나갔다.

    “가겠다면 말리지는 않겠다. 허나 저자는 갈 수 없다!”

    심협이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오더니 누군가를 가리키며 외쳤다. 그가 가리킨 사람은 바로 다름 아닌 방촌산의 배신자, 각오였다.

    “대왕님, 안 됩니다! 저를 버리지 마십시오!”

    각오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금시대붕은 그를 흘끗 노려보더니 버려두고 떠나갔다.

    요마의 사람들이 모두 떠나는 걸 지켜본 각오는 겁에 질렸고, 둔광으로 변하여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그가 날아오른 순간, 소매가 그를 휘감더니 다시 원래 자리로 돌려놨다. 진원대선은 그를 심협 앞에 압송하여 그에게 처결을 맡긴다는 뜻을 보였다.

    각오에게 다가가던 심협의 머릿속에는 그에게 죽어간 이들의 모습이 떠올랐고, 가슴속에서는 분노가 일어났다.

    그가 손을 휘두르자 구유가 천천히 내려와 각오의 몸을 감쌌고, 바로 검은 마염이 일어났다.

    “안 돼!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제발 살려줘! 선조님, 스승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제발!”

    각오가 두 팔을 흔들며 발악하고 살려달라고 소리쳤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들은 척도 않고 차가운 눈으로 바라봤다.

    심지어 보리선조의 눈빛에도 불쌍히 여기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심협이 손을 천천히 움켜쥐자 검은 마염이 갑자기 강력해져 각오의 몸을 감쌌다.

    각오의 살은 마치 모든 피를 빨린 것처럼 천천히 말라갔다. 계속해서 움직이는 말라버린 양손과 해골 같은 얼굴에 커다란 눈은 흡사 악귀 같았다.

    하지만 곧이어 그 움직임은 영원히 멈췄고, 온몸이 검게 그을렸다. 신혼마저 모두 불타버린 것이다.

    구유를 거둔 심협이 각오의 검게 그을린 바짝 마른 시체를 향해 소매를 흔들자 재가 되어 사라졌다.

    이 광경은 매우 참혹했지만, 누구도 각오를 동정하지 않았다. 저 배신자의 살을 베고 뼈를 씹어 버리지 못하는 것이 한이었으니, 이렇게 참혹하게 죽어가는 것을 보며 오히려 조금이나마 한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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