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1화. 죽음을 불사하다
“뉘시오?”
금시대붕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여인의 경지는 진선 초기였고, 기초가 탄탄하여 앞길이 촉망되었다. 하지만 더욱 신경 쓰이는 것은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보타산의 기운이었다.
이미 그녀를 알아본 심협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보타산의 제자 섭채주입니다. 사문의 명을 따라 방촌산을 지원하러 왔습니다.”
그녀는 심협 쪽을 힐끗 보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방촌산 제자들은 기뻐했고, 금시대붕 등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그들은 주위를 둘러봤지만, 한참이 지나도 뒤를 이어 아무도 오지 않았다.
“지원군이라더니 혼자 왔소?”
육아상왕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의 물음이 끝나기가 무섭게 검광이 쏜살같이 날아왔다. 그 위는 한 청년이 올라서 있었는데, 술을 한 모금 들이켜더니 호탕하게 웃었다.
“대당 관부의 육화명이 지원하러 왔소이다. 하하하!”
뒤이어 또 몇 개의 둔광이 날아오더니 하얀 옷을 입은 두 명의 청년이 연달아 도착했다.
두 사람은 구름 위에 서서 숨을 헐떡였다.
“휴우, 너무 늦지는 않았군.”
화십낭 등은 표정이 점점 굳어졌고, 육아상왕은 또 참지 못하고 물었다.
“네놈들은 또 누구냐?”
두 사람은 외모가 매우 비슷했고, 모두 호탕한 분위기에 범상치 않아 보였다.
그중 한 명이 부채를 착 펴더니 웃으며 말했다.
“화생사 제자 백소천, 백소운. 사문의 명에 따라 방촌산을 지원하러 왔소.”
그러더니 부채질을 하며 심협에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이를 본 심협은 혀를 차며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때, 귀를 즐겁게 해주는 은방울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또 한 명의 아름다운 여인이 도착했다.
“미안해요, 심 오라버니. 제가 좀 늦었죠?”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웃으며 사과했다.
“아니야. 딱 맞춰 왔어.”
심협이 웃으며 말했다.
두 사람이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자 섭채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넌 또 누구냐?”
화십낭이 눈살을 찌푸렸다.
“신목림의 제자 무만아, 족장님의 명령을 받아 방촌산을 지원하러 왔다.”
“신목림이라니……. 세상과 등진 종문이 어째서……?”
“그러니 거짓 아니겠소?”
육아상왕의 의구심에 지영이 단언했다.
“거짓? 무지렁이 같은 놈이 말을 함부로 하는구나!”
무만아가 정색하더니 손목을 흔들자 은방울 소리가 딸랑거리며 울려 퍼졌다. 그러자 순식간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더니 수만 마리의 검은색 고충들이 빼곡하게 그녀 주위를 맴돌았다.
“못 믿겠다면 신목림의 고충 맛을 보여주랴?”
“이, 이게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 지원을 온 거지? 양전이 벌써……?”
“불가능해요. 양전은 중상을 입어서 그렇게 빨리 가지 못했을 거예요.”
육아상왕과 화십낭의 대화를 듣고 있던 금시대붕이 심협을 돌아보더니 말했다.
“저 심협이란 놈과 관련이 있는 자들 같소.”
“또 저놈이란 말인가……?”
“어쩌지? 이렇게 많은 종문이 연합해온다면 우리가 당해낼 수 없을 거요.”
지영이 살며시 물러날 뜻을 보였다.
“흥! 분명 저들의 종문이 몰려온다면 그렇겠지. 허나 신식을 펼쳐서 살펴보시오. 저자들 외에 영력 파동이 느껴지시오?”
금시대붕이 차갑게 웃으며 말하자 지영 등은 바로 살펴봤다. 허나 그의 말대로 정말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두 사람이라면 기운을 완전히 숨길 수 있겠지만, 여러 종문의 대군이 오고 있다면 절대로 이렇게까지 숨길 수 없다.
“심협, 함께 죽으려고 네 벗들을 부른 거냐?”
금시대붕이 소리쳤다.
심협도 궁금해하고 있던 참이었기에 바로 전음으로 모두에게 물어봤다.
“모두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왜 다들 혼자서 온 거요? 종문 사람들은……?”
“심형, 미안하게 됐네. 이번에는 어째서인지 국사께서 관부의 지원군을 허락해주지 않으셨네. 스승님께서도 끼어들지 말라 하셔서 혼자 올 수밖에 없었어.”
육화명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우리 스승님도 마찬가지네. 본래 혼자 오려고 했는데 소운 이놈이 몰래 따라왔지 뭔가.”
“오라버니, 저희 사문도…… 마찬가지예요.”
“심 오라버니, 저도 스승님께 말씀 안 드리고 몰래 나왔어요.”
심협은 돌아온 답변에 착잡했고 실망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감동했다. 대종문들이 이번 일을 묵인한 것에 실망했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벗들이 호랑이 굴인 걸 알면서도 자신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와줬다는 사실에 감동한 것이다.
한편, 상황을 파악한 요족들은 표정이 한결 가벼워졌다.
“너희에게 기회를 주마. 이번 일은 너희와 상관없으니 당장 떠나라. 안 그러면…….”
금시대붕이 협박의 의미를 담아 말했다.
“안 그러며 뭐? 우리를 죽이겠다고?”
백소천이 부채를 접으며 따지듯 물었다.
“이 후배는 비록 혼자서 왔지만, 종문의 어른들께서는 제가 어디로 갔는지 아시지요. 우리 대당 관부는 잘못된 일이 있으면 반드시 처벌한다는 것을 여러분도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육화명이 나섰다.
“저희 보타산도 줄곧 세상일에 관심을 두지 않지만, 직계 제자가 위험에 빠진다면 제세(濟世) 보살께서 가만히 있지 않으실 겁니다. 당신들은 그 분노를 감당할 수 있습니까?”
무만아도 오랫동안 생각했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기에 그저 손목을 흔들어서 수천 마리의 고충을 부채꼴 모양으로 퍼지게 했다.
심협은 이들의 말에 속으로 한탄하고는 전음을 보냈다.
“이렇게 와준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허나 지금 상황에서 사문을 내세운 위협으로는 저들의 악념을 억누를 수 없습니다. 그러니 돌아가서 적어도 이번 일의 실상을 사문에 알려주세요.”
“아닐세. 우리가 있으면 조금이라도 망설이겠지만, 우리가 가버리면 저들은 더욱 거리낌이 없을 걸세.”
육화명이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섭채주는 어느새 심협 옆으로 다가와 말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다른 사람들도 심협에게로 다가왔다.
그들의 태도는 확실했다. 심협과, 방촌산과 함께 싸운다.
“이미 기회를 주었건만……. 나를 원망하지 마라!”
금시대붕이 차갑게 웃으며 한 걸음 내딛자 비경 전체가 흔들렸다.
“잘 생각해보게. 이렇게 많은 종문을 적으로 삼을 수는 없어.”
지영이 망설이며 권했다.
“맞소. 그러니 일을 더욱 깔끔하게 처리해야 하지 않겠소? 오늘 일을 우리 외에는 아무도 몰라야 하오.”
금시대붕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공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을 따라 금빛이 하늘 높이 날아갔다.
모두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허공에 반투명한 황금 종처럼 생긴 수정막이 나타났다. 그 위에는 아홉 마리의 금룡이 서로 엉켜서 도사렸는데, 정말로 살아 있는 것만 같았다.
“떨어져라!”
그의 외침과 함께 반투명한 수정막에서 용의 울음소리가 울리더니 아홉 마리 금룡이 일제히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며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날아갔다.
바람을 타고 날아간 금룡들이 백 장 길이의 거대한 용으로 변하자 수정막도 함께 빠르게 커져 거대한 반투명한 금제가 되어 비경 전체를 뒤덮었다.
방촌산 사람들은 자신들을 모두 죽여 살인멸구하려는 것임을 눈치채고는 더욱 분노하며 한편으로는 긴장했다.
심협도 속으로 한탄했고, 지원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낸 것을 후회했다.
그때, 섭채주와 맞잡은 손에서 갑자기 힘이 흘러들어왔다. 섭채주가 보타산의 비술로 그의 부상을 치료해준 것이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모두가 함께 싸우면 문제없을 거예요.”
섭채주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심형, 내 이번에 폐관수련의 성과인 불문금강(佛門金剛)을 보여주지.”
백소천의 눈빛은 진지했지만, 그는 웃고 있었다.
“형님, 저도 수련 성과를 보여드릴게요. 아마 시간만 충분했으면 제가 소천 형님을 뛰어넘었을 걸요?”
백소운도 웃으며 말했다.
육화명은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누군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무만아는 심협과 섭채주를 몰래 훔쳐보며 감탄했다.
‘저 언니는 정말 선녀처럼 아름답구나.’
그때, 부동래가 벽혈간척부를 꽉 움켜쥐고는 금시대붕을 응시하며 외쳤다.
“오늘, 이 자리에서 죽어도 후회는 없다!”
일순간 젊은 수사들이 기운을 한 번에 폭발시켜서 주위에 있는 요족들을 압박하자 대요들은 이들을 이번에 죽여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이들을 오늘 제거하지 않으면 훗날 요마에 큰 화근이 될 것임을 직감한 것이다.
“하하하! 젊은이들이 이렇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다니, 이 늙은이도 피가 뜨거워지는군. 허나 어찌 젊은이들을 먼저 죽게 하겠는가?”
보리선조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모두가 돌아봤다. 선조의 기운은 웅장해져서 몸의 핏자국은 모두 사라졌고 원기가 왕성해 보였다. 모습은 마치 전혀 다치지 않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선조님!”
방촌산 제자들이 이를 보자 기뻐서 소리쳤다.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화십낭은 깜짝 놀랐고 배신자 각오는 가슴이 섬뜩해졌다.
그들이 감히 방촌산을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은 각명과 각안이 독을 사용한 후 기습하여 보리선조에게 큰 부상을 입혔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만약 보리선조의 부상이 가벼운 정도였다면 그들은 절대로 이런 일을 벌이지 못했을 터였다.
“대붕, 잠시 의논 좀 하겠나?”
“뭘 말인가?”
“노부는 본래 삼계를 위해 신마의 우물을 지키고 있었네. 허나 이제 그들이 모두 신경 쓰지 않으니 노부가 이를 모두 감당할 필요가 있겠나? 이제 더는 지키지 않겠네. 자네들이 그렇게 신마의 우물을 열어야겠다면 마지막 금제를 푸는 걸 내가 도와주지.”
“선조님!”
계 장로가 화들짝 놀라 말리려 했지만, 보리선조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그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노부도 알고 있네. 허나 더는 말하지 말게. 난 이미 결심했네. 어떤가? 이들을 안전하게 보내준다면 신마의 우물을 열도록 노부가 돕지. 자네들은 모든 죄를 이 노부에게 씌우면 되는 걸세. 내가 죽기 전에 이 모든 일이 달갑지 않아 신마의 우물을 열었다고 말일세. 이런 일을 꾸미는 건 자네들이 노부보다 더 잘하니 더는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저들을 놔주면 그대는 가지 않겠다는 건가?”
“노부가 가면 천하의 눈을 속이는 일은 누가 감당하겠는가? 그리고, 날 놔줄 생각은 있긴 한겐가?”
보리선조가 눈을 치켜뜨며 되물었다.
“이렇게 많은 입과 귀들이 도망치면 그대가 감당한다고 한들 아무 소용이 없지 않겠나. 그러니 여기서 모두가 함께 사라져줘야겠어!”
금시대붕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럼 더는 말할 게 없겠군. 너희 짐승들에게 노부가 친히 가르침을 주마.”
보리선조가 말을 끝내는 동시에 양손을 휘두르자 풍뢰소리가 크게 울렸다. 동시에 갑자기 비경 전체에 광풍이 몰아쳤고, 땅과 산이 흔들렸으며, 두 발 사이에는 큰 균열이 생기면서 끊임없이 양쪽으로 무너져 내려가 금시대붕의 발밑까지 뻗어갔다.
요족들이 이를 보고는 깜짝 놀라 하나같이 두려움에 빠졌다.
반면 금시대붕은 차갑게 웃더니 한 발을 강하게 내디뎌 앞의 땅을 무너트렸다. 그러자 뻗어오던 균열이 멈췄다.
“보리선조, 부상을 숨기는 게 힘들어 보이는데 굳이 버틸 필요가 있겠는가?”
“노부가 목숨을 던져 널 죽이기는…… 아무래도 힘들겠지. 허나 다른 몇 명은 어떨까? 너도 저들의 목숨이 신경 쓰이는 것 같으니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해보는 게 어떻겠나?”
보리선조는 마치 엄청난 장사를 앞두고 흥정하는 장사꾼 같았다.
그의 말에 금시대붕은 표정이 조금 굳어졌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좋다. 다른 자들은 보내주겠다. 하지만 그전에 산하사직도를 내놓아라.”
금시대붕의 말에 심협은 눈살이 찌푸려졌고 손오공은 보리선조를 바라봤다.
“하하하! 너희들의 진짜 목적은 신마의 우물이더냐 아니면 산하사직도더냐? 안 됐지만, 그 물건은 죽어도 줄 수 없다!”
보리선조가 웃는 얼굴로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