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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810화 (810/1,214)
  • 810화. 구출

    심협은 비검을 거둔 뒤 등의 상처에 홍련업화를 일으켜 오장육부 사이를 오가는 음살의 기운을 전부 태워버렸다.

    “인간족 애송아, 화마(化魔)의 술법을 내놓으면 살려는 주마. 허나 네가 스스로 떠나게 할 수는 없다. 나와 함께 마왕채로 간 뒤, 백 년이 지나 이곳의 모든 것이 먼지로 돌아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때쯤이면 자유를 줄 수도 있다.”

    지영은 심협을 죽이기 전에 현양화마 비술을 얻어낼 작정이었다.

    “그것 참 반가운 소리군. 살수만 벌이지 않았으면 좋게 의논할 수 있었잖아. 이 비법이 탐나나? 자, 여기 있으니까 직접 가져가 봐.”

    그의 말을 들은 심협은 웃으며 답하고는 갑자기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검은색 상자를 꺼내 내밀었다.

    ‘무슨 짓이지? 알량한 속임수인가?’

    지영은 의심이 들어 곧장 달려들지 않고 검은색 상자를 자세히 살폈다.

    상자의 외관에는 특별한 점이 없었으나, 자세히 살펴보니 은은한 마기가 감돌고 있었다. 안에 화마의 비술이 들어 있을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싫으면 다시 가져간다?”

    “열어봐라.”

    심협이 시큰둥한 얼굴로 상자를 거두려 하자 지영이 서둘러 말했다.

    심협은 머뭇거리며 물었다.

    “왜? 날 못 믿겠나? 위대한 태을 수사가 겁도 많군?”

    지영은 그의 자극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열어!”

    심협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고는 바로 상자를 열어서 보여줬다.

    그 안에는 검은색 옥간뿐이었다.

    “이제 넘겨라.”

    “그럼 잘 받으시오.”

    심협이 웃으며 답하고는 검은색 상자를 지영에게로 던졌다.

    지영이 막 받으려는 순간, 검은색 상자 안에 있던 옥간이 천천히 날아올라 그의 앞에 도착했고 검은색 상자는 그대로 버려져 산 밑으로 떨어졌다.

    지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옥간을 잡았다.

    그 순간, 지영은 번개에 닿은 것처럼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의 손바닥은 이미 보라색으로 변해 있었다.

    허공의 검은색 옥간이 팍 소리와 함께 부서지더니 검은색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그것은 현양화마 비술이 적힌 옥간이 아닌 평범한 하얀색 옥간이었고, 겉의 칠흑 같은 검은색은 온독에 침식되어 부패한 것이었다.

    “이놈! 감히 독을 써!”

    지영이 노발대발했다.

    성난 외침과 함께 지영의 손에 혈기가 모여들었는데, 색깔은 온통 자흑색이었다. 뒤이어 혈독을 검은색 골검에 떨어트리자 담금질한 것처럼 검에서 치익 하며 연기가 피어올랐다.

    “허나 내게 이런 독은 아무 소용없다! 네가 그렇게 죽고 싶다면 내 직접 저승으로 보내주마.”

    지영이 싸늘하게 비웃고는 손을 휘두르자 흑백의 골검이 손으로 날아와 하나로 합쳐져 반은 검은색이고 반은 하얀색인 기이한 장검으로 변했다.

    지영이 한 손으로 결인하자 수중의 장검이 심협을 향해 날아갔다.

    우렁찬 소리와 함께 설백의 검기가 쏟아져 나와 허공을 휩쓸자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상황에 심협이 피하려는 순간, 숨겨져 있던 한기가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발아래의 허공을 얼렸다. 심협은 급히 곤봉을 들어 아래의 빙벽을 내리쳤다.

    콰쾅!

    굉음과 함께 빙벽은 부서졌으나, 그 틈에 한기와 얼음 조각이 다시 날아와 심협을 뒤덮고 얼어붙기 시작했다.

    사방이 음산한 한기에 에워싸인 심협은 뼈가 얼어붙는 것 같았고, 마치 귀신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는 듯했다. 점점 어지러웠고, 눈앞의 광경이 흐릿해져 갔다.

    그는 곧장 부주진신법을 운공하여 신혼을 보호했다.

    이 무렵, 구덩이 중간의 금빛 기둥은 완전히 어두워져 마치 녹이 슨 것 같았고, 곳곳에 검붉은 핏자국이 무성했다.

    화십낭은 옆에 서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제 거의 다 됐다. 마지막 노래를 불러라.”

    그녀는 가볍게 탄성을 지르고는 주위의 요괴들에게 명령했다.

    “네!”

    모든 요괴가 일제히 대답했다.

    곧이어 정갈한 노랫소리가 구덩이 주위에서 울려 퍼지자 구덩이 중앙에 있는 금빛 기둥이 다시 번득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빛은 금빛 기둥의 것이 아니라 겉에 묻은 핏자국에서 나오는 빛이었다.

    혈광이 점점 짙어지면서 부패한 기운이 흘러나왔고, 금빛 기둥은 마치 수천 마리의 개미에 갉아 먹힌 것처럼 무너져 내리고 분해되었다.

    마침내 방촌산의 패잔병들을 지켜주던 마지막 금제가 뚫렸다.

    “죽여라!”

    화십낭의 명령이 내려오기도 전에 살기등등한 함성이 구덩이 깊은 곳에서 울려 퍼졌다.

    곧이어 성궁과 능파성의 남은 제자들이 가장 먼저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약속했던 것처럼 방촌산 제자들보다 먼저 죽기로 했다.

    하지만 그들은 위로 올라온 순간, 일순 멍하니 멈춰 섰다. 주위에는 수천 마리의 요마족들이 어지럽게 쓰러져 있었다. 누군가는 코와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고, 누군가는 경련을 일으켰으며, 경지가 낮은 자들은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 광경에 어리둥절한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화십낭 자신도 어안이 벙벙했다.

    그때, 그녀는 갑자기 자신의 손바닥에 검은 선이 하나 떠오른 것을 보았다. 이미 독에 당한 것이다!

    “언제…… 누가……?”

    깜짝 놀란 화십낭은 도저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두 손을 깍지 끼고는 조용히 비법을 운공했다. 양손의 검지에서 동시에 두 줄기의 피가 뿜어져 나왔는데, 검은색에 썩은 내가 진동했다.

    이와 동시에 허공에서 폭발이 일어났고, 수많은 얼음 결정이 붕괴되어 우박처럼 쏟아졌다. 다만 무너져 쏟아지던 우박들은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얼음에서 벗어난 심협의 눈에 이미 부서진 금제와 속속히 튀어나오는 방촌산 제자들이 보였다.

    그는 황급히 땅으로 내려가서 곳곳을 돌아다녔고, 땅에서 검은색 상자를 집어 뚜껑을 닫은 뒤 다시 집어넣었다.

    이 검은색 상자는 다른 게 아닌 바로 마기(魔器) 발온갑이었다. 그 안에 비술이 있는 척 상자를 열어 지영에게 보여줬던 것은 자연스럽게 발온갑을 발동하기 위함이었다. 덕분에 적들의 주의를 끌지 않았던 것이다.

    결과는 그가 예상했던 대로였다. 누구도 그가 떨어트린 검은 상자를 신경 쓰지 않았고, 지면에서는 온독이 퍼져 나가 요마 제자들을 중독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온독을 워낙 광범위하게 풀어놓느라 속도와 효과는 크게 줄어들었고, 구덩이 금제를 공격하기 전에 요마들을 쓰러트리지 못했다.

    “또 네놈 짓이더냐?”

    화십낭은 심협의 움직임을 보고는 반신반의했다.

    심협은 대답 없이 피식 웃었다.

    그는 보리선조가 사람들과 함께 밖으로 나오자 맞이하러 다가갔다.

    방촌산 사람들은 부끄러움과 미안함에 그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선조님, 괜찮으십니까?”

    심협은 황급히 다가가 물었다.

    보리선조는 심협을 보자 감개무량했지만, 고개를 저을 뿐 아무 말도 못 했다.

    “선조님은 각명과 각안의 독에 당했는데 또 갑작스러운 공격에 더 심각해지셨소. 상처가 가볍지 않은데 또 우리를 엄호하기 위해 금시대붕과 싸우시느라…… 지금 바로 상처를 치료하지 않으면 더 악화될 것 같소.”

    계 장로가 한숨을 쉬며 답했다.

    심협은 그 말에 표정이 굳어졌다. 그들의 현재 상황으로는 도망치기란 어려울 것 같았다.

    “심 도우, 미안하오. 일전에 우리가 어리석어서 각오 그놈의 거짓말에 도우를 내쳤소. 그래도 무사하니 다행이오. 책망하겠다면 기꺼이 받겠소.”

    오진 장로가 다가오더니 포권했다.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닙니다. 요족 졸개들은 중독시켰지만, 고수들에게는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모두가 흩어져 도망친다면 살아남을 기회가 있을 겁니다.”

    “흩어지다니, 그건 안 되오!”

    오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 된다면 요마들은 분명히 조사님을 쫓을 것이오. 그럼 우리가 무사히 도망친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소?”

    계 장로도 고개를 저으며 덧붙였다.

    “싸우지들 마시오. 그대들은 보리선조님을 모시고 떠나시오. 내가 추격병을 막겠소.”

    성궁 장로는 이전의 과오를 떠올리며 필사의 마음으로 말했다.

    한데 그때였다.

    콰쾅!

    누군가 허공에서 떨어져 그들 앞에 나타났고 땅에는 커다란 구덩이가 생겼다.

    심협이 위를 바라보자 금시대붕이 허공에서 금색의 장극(長戟)을 쥐고 모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희가 도망칠 곳은 없다. 이제 포기해라.”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구덩이에서 욕이 들려왔다.

    “대머리독수리야, 작작 날뛰고 노손과 더 싸우자.”

    “이미 아무 힘도 없는 주제에 무슨 억지를 부리는 것이냐? 얌전히 사타령에 항복해라. 같은 요족이니 목숨만은 살려주마. 내게 잘 보이면 나중에 동굴 하나는 차지하게 해줄지 누가 알겠느냐?”

    금시대붕의 조롱에 손오공이 구덩이에서 기어 올라왔는데 이미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고 곳곳에서 피와 살이 썩는 냄새가 고약한 사타령에 노손은 아무런 관심 없다. 헛소리는 그만하고 싸울 거면 계속 싸우자!”

    그는 간신히 일어나 씩씩거렸는데, 누가 봐도 간신히 버티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를 본 심협은 서둘러 언갑 시왕을 다시 불러들여 모두의 앞을 막게 했다.

    화십낭, 지영 장로, 육아상왕 그리고 금시대붕도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이어서 경지가 높아 발온갑의 독에서 살아남은 각 문파의 장로들까지 모여들자 그 압박감은 두려울 정도였다.

    “궁지에 몰린 짐승이 발악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나요? 지금 투항하면 목숨만은 살려주죠. 허나 계속 버티시겠다면 우리도 어쩔 수 없습니다.”

    화십낭이 겁박했다.

    “얌전히 비켜라. 보리선조와 손오공의 머리만 넘기면 신마의 우물을 연 후 나머지는 살려주겠다.”

    지영이 덧붙였다.

    “아니, 저 인간족 놈의 머리도 추가해야 하오.”

    육아상왕이 심협을 가리키며 험악하게 말했다. 심협을 향한 그의 분노는 가볍지 않았기에 당연히 그를 놔줄 리가 없었다.

    “뭘 지들끼리 더하고 빼고 있는 거냐? 덤벼라! 붙어보면 죽는 쪽이 우리인지 네놈들인지 알 수 있겠지!”

    성궁 장로가 호통을 쳤다.

    “경지도 높지 않은 놈이 입만 살았구나. 너희가 무슨 재주로 우리를 이길 거라 생각하는 게냐? 하하하!”

    금시대붕이 여유롭게 웃으며 손바닥만 한 네모난 상자를 꺼내더니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그 안에서 쌀알만 한 검은색 소인(小人)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땅에 내려오기가 무섭게 사타령의 요족으로 변했다.

    순식간에 수천 마리의 요족이 생겨나더니 요족 장로들의 명령에 따라 백여 명을 중심으로 주위를 에워쌌다. 이로써 강약의 구분이 더욱 확실해졌다.

    “머릿수가 전부인 줄 아느냐? 그런 잡놈들에게는 당하지 않는다!”

    오진 장로가 물러나지 않고 외쳤다.

    “해보면 알겠지. 죽여라.”

    금시대붕이 명령을 내린 그 순간!

    “멈추십시오!”

    어디선가 외침이 들려오더니 세 사람이 빠르게 포위를 넘어 날아왔다.

    심협은 세 사람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였다.

    세 사람 중 한 명은 바로 심협과 헤어졌던 부동래였다. 그는 오는 길에 거미줄에 묶인 두 명의 원숭이 요괴 맹장을 발견하고는 구출해 함께 달려왔다.

    “스승님, 삼계가 간신히 평화를 되찾았거늘 어찌하여 이러십니까? 전쟁이 다시 일어난다면 삼계는 또 수많은 생명이 목숨을 잃을 것이고 평화는 다시 사라지게 됩니다!”

    부동래는 자신을 키워준 스승의 만행에 가슴이 아팠다.

    그를 본 금시대붕의 손은 일순 허공에 우뚝 멈춰 내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망설임은 잠시뿐이었다.

    “죽여라!”

    금시대붕은 부동래를 애써 외면하며 나지막하게 명했다.

    모든 요족이 일제히 무기를 들고 공격을 시작했다.

    한데 그때였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촌산에는 원군이 없다는 헛소릴 하는 자가 있다던데, 사실입니까?”

    말이 끝나자마자 분홍빛 연화대가 나타났다. 보광을 반짝이는 연화대에는 하늘색 복장의 여인이 서 있었다. 까만 눈동자 외에는 얇은 천으로 가려져 있어서 외모가 보이지 않았으나, 희미하게 보이는 이목구비만으로도 인간세계에서 보기 드문 미모였다. 속세를 벗어난 분위기는 마치 선녀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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