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808화 (808/1,214)
  • 808화. 결사의 각오

    “우리 방촌산이 적아(敵我)조차 구분하지 못한 것이니 오늘 여기서 죽어도 할 말이 없다. 그나저나 심 소우는 어찌 됐을꼬? 우리가 그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워 요마들의 협공을 받게 해버렸어. 무사히 도망쳤어야 할 텐데…….”

    보리선조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손오공에게 전한 서찰에 심협은 떠나도 좋다고 분명히 적어놓았었는데 함께 돌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런 상황이라면 그뿐만 아니라 아무리 저라고 해도…… 무사히 도망치지 못했을 겁니다.”

    계 장로가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저는 천궁과 대당 관부 같은 종문들이 원망스럽습니다. 과거 우리와 그렇게 가까웠는데 이번에 아무도 지원하러 오지 않다니요. 우리 방촌산이 멸망하면 그다음은 자신들임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고양이 요괴 장로가 차갑게 말했다.

    “현재 삼계는 겉으로는 평안하지만 안으로는 곪아 썩어 있네. 산문을 열고 여러 종족의 수사를 받아들이면 분쟁이 줄어들 줄 알았건만 오히려 이런 결과를 낳았구나. 사타령, 반사동, 마왕채는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을 터. 그들이 신마의 우물을 열면 실력이 크게 정진할 테니 이제 삼계는 다시 큰 혼란에 빠질 것이야.”

    고양이 요괴 장로와 계 장로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제 방촌산이 무사히 살아남기란 어렵게 됐네. 하지만 도통만은 절대 여기서 끊어져서는 안 된다. 저들이 노리는 것은 나 한 명이니, 금제가 부서지면 계 장로와 오진(悟塵) 장로는 산하사직도를 이용해 저들을 데리고 바로 도망치게. 산하사직도의 힘이면 무사히 도망칠 확률은 5할은 될 게야. 방촌산이 다시 일어날 수 있냐 없느냐는 자네들에게 달렸네.”

    보리선조는 산하사직도를 꺼내 계 장로와 오진 장로에게 넘겼다.

    “조사님, 아직 그리 절망적인 상황은 아닙니다. 조사님의 경지면 상처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육아상왕 등도 절대 조사님의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계 장로가 벌떡 일어나더니 산하사직도를 받지 않고 외쳤다.

    “각명과 각안이 기습했을 때 치우의 혈독을 썼네. 이미 내 도행 근간에 침식하기 시작했어. 보리성수까지 부서진 지금, 혈독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네. 그러니 이제 모든 건 자네들에게 달린 게야.”

    “조사님, 그리 낙심하지 마십시오. 이전에 제가 심 도우에게 들었는데, 양전도 이미 사타령과 반사동의 진짜 목적을 알고는 제천대성과 함께 연합하여 싸우고 있다 했습니다. 두 분의 실력이면 밖에 있는 요마들도 당해내지 못할 겁니다.”

    옆에서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는 어느새 정신을 차린 나은의 목소리였다. 그는 각오와 함께 이곳으로 왔고, 육아상왕 등의 의도대로 금제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각오가 갑자기 배신했고, 나은은 중상을 입은 채 정신을 잃었다가 이제야 깨어난 것이었다.

    “그게 사실인가?”

    보리선조는 물론 오진 장로와 계 장로도 표정이 밝아졌다.

    “진군께서 이미 요마들의 진짜 목적을 알았다 그 말인가?”

    능파성의 금빛 눈썹 남자가 불쑥 나타나더니 양손으로 나은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

    “사실입니다. 심 도우가 직접 말해줬습니다.”

    나은은 깜짝 놀랐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행이군. 능파성이 헛된 짓을 벌인 오늘, 진군께서 진상을 명백히 알았으니 나 성궁은 이제 여기서 죽어도 여한이 없다.”

    금빛 눈썹 남자는 나은을 놓고는 중얼거렸다.

    그는 일부 능파성 제자들을 이끌고 육아상왕 등과 보리비경을 공격했다. 한데 보리비경에 들어온 순간, 사타령과 마왕채가 진짜 목적을 드러내면서 갑자기 능파성 제자들을 기습했다. 보리선조가 산하사직도로 제때 구하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쯤 요마의 손에 죽었을 것이다.

    금빛 눈썹 남자는 심성이 강직하여 방촌산의 모두에게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쪽의 빚은 아직 따질 때가 아니니 지금은 무슨 방도가 없는지나 잘 생각해보시오!”

    오진 장로는 성궁을 노려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성궁이 잘못을 이미 인정했지만, 오진 장로는 여전히 능파성이 한 짓에 화가 나 있었던 것이다.

    “성궁 도우는 너무 그리 자책하지 마시오. 그대들의 본래 목적은 그저 우리 방촌산과의 불화를 해결하려던 것뿐임을 내 알고 있소. 지금은 서둘러 상처부터 회복하시오. 양전 도우가 우리를 돕기로 했다고 하니 정말 살아날 기회가 올지도 모르지 않소.”

    보리선조가 오진 장로를 제지하고는 천천히 말했다.

    “보리 선배님, 안심하십시오. 요마들이 정말 이곳으로 공격해온다면, 저 성궁이 반드시 목숨을 걸고 여러분을 지키겠습니다.”

    성궁이 더없이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데 그때, 금빛 기둥이 갑자기 격렬하게 흔들렸다.

    이들이 서둘러 위를 올려다보니 하늘에는 무엇에 이끌려 왔는지 모를 혈운으로 가득했고, 짙은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그들 앞에 우뚝 솟은 금빛 기둥도 혈운에 둘러싸여 있었고, 기둥 겉에는 가느다란 핏빛 무늬가 거미줄처럼 번지고 있었다.

    “조사님…….”

    “상황이 좋지 않구나. 시간이 얼마 없다. 서둘러 정양하게.”

    보리선조가 눈을 감으며 말하자 모두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최후의 생사를 건 싸움을 벌여 살아남거나 혹은 죽을 것이다.

    서둘러 단상 위의 모두가 조용히 눈을 감고 가부좌 자세로 서둘러 상처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 * *

    구덩이 밖. 피비린내 나는 살육은 여전히 계속됐고, 혈제파금대진의 빛은 점점 더 밝아지고 있었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는 심협은 몹시 초조했다. 그러나 요마들이 모두 모여 있으니 자신의 실력으로는 목숨을 걸고 달려들어봐야 승산이 없었기에 절대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이 때려 죽여도 시원찮을 놈들아!”

    “제, 제발 살려주시오!”

    도륙당하는 자들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자 심협도 더는 듣고만 있기 힘들었다.

    ‘이러다가는 진짜 금제가 부서지겠어. 이제 정말 어쩔 수 없는 건가?’

    더는 참기 힘들었던 심협이 막 천살시왕을 꺼내려던 순간이었다.

    쿠르릉!

    천지의 영기가 요동쳤고, 멀리서 갑자기 밀물처럼 연달아 몰려왔다. 뒤이어 금빛 존재가 멀리서 날아왔다.

    그 아래는 검은 빛이 바짝 쫓아오면서 허공에서 격렬하게 싸웠다. 금빛과 검은 빛의 곤봉이 하늘을 가렸고, 곤봉 부딪치는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구덩이 쪽의 요마들도 이쪽의 움직임을 눈치채고는 일제히 위를 올려다봤다.

    “손오공!”

    육아상왕이 혼잣말처럼 외치더니 두 눈에 갑자기 분노의 불길이 치솟았고, 커다란 금빛 창을 꺼내 들며 하늘로 날아가려고 했다.

    “둘째 형님,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되오!”

    금시대붕이 서둘러 말렸다.

    “내 저 원숭이를 먼저 죽여야겠다!”

    육아상왕은 듣지 않고 하늘로 날아갔다.

    그때, 격렬한 충격 파동이 일어나면서 금빛과 흑빛의 두 존재는 각자 뒤로 물러났다.

    “누구든 이 싸움에 끼어들면 그놈부터 죽인다!”

    육이미후의 말에 허공으로 날아오르던 육아상왕의 몸이 굳었다.

    “육이미후,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냐? 서둘러 저 원숭이를 죽여서 큰일을 그르치지 않아야 한다!”

    육아상왕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가 서둘러 손오공을 죽이려 하는 것은 원한 때문이 아니라 심협에 이어 이제는 손오공까지 보리비경에 들어오면서 상황이 점점 자신들의 계획과 어긋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네 호의는 잘 받아두마. 허나 누구도 이 싸움에 끼어들 수 없다. 손오공의 머리는 나 혼자만의 것이다. 절대 누구도 더럽힐 수 없어!”

    육이미후가 다시 소리쳤다.

    육아상왕은 표정이 어두워졌지만, 육이미후는 껄끄러운 상대였기에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다시 내려가야 했다.

    금시대붕도 상황의 변화를 눈치채고는 눈살을 찌푸린 채 육아상왕과 눈을 마주쳤다.

    한편, 화십낭은 아무도 모르게 웃었는데 마치 이런 결과를 이미 예측이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육이미후가 정말 손오공을 이길 수 있으려나? 그래도 전대의 요왕이었는데…….”

    지영이 의심하며 말했다.

    “지영 도우, 손오공의 상처를 못 보셨습니까? 앞선 싸움에서 그는 많은 법력을 소모했고, 큰 부상까지 입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진짜로…… 호호호!”

    화십낭은 뒤의 말을 생략하고는 혼자서 웃기 시작했다.

    “양전은? 손오공과 함께 산 중턱에 가로막혔다고 하지 않았나?”

    이때 금시대붕이 갑자기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의 말에 모두가 경각심을 가졌다.

    “육이미후, 양전은 어딨죠?”

    화십낭이 바로 소리쳤다.

    “도망쳤다.”

    육이미후는 현재 손오공과 한창 싸우는 중이었기에 짧게 답했다.

    한편, 그의 말에 금시대붕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양전도 육이미후의 기습에 중상을 입었으니 어쩌면……”

    “닥치시오!”

    화십낭의 말이 끝나기 전에 금시대붕이 소리쳐서 막았다. 그는 어두운 눈빛으로 화십낭을 노려보고 있었다.

    “양전이 도망갔다 하지만 어쩌면 곧 지원군이 올 수도 있소. 서둘러 금제를 부수고 우리의 일을 마쳐야 하오. 만약 지원군이 도착하면 우리 사타령은 유혹에 못이겨 협력했으나 잘못을 뉘우친 자들이 될 것이고, 모든 결과는 반사동이 혼자 짊어지게 될 것이오.”

    그의 말은 의미심장했지만, 화십낭은 바로 간파할 수 있었다. 만약 신마의 우물을 열지 못하고 이곳의 일이 발각된다면 사타령은 바로 칼끝을 그들 반사동으로 돌려서 모두 죽이고 자신들은 화십낭 등의 유혹에 넘어갔던 것뿐이라고 덮어씌울 것이다. 화십낭은 이미 죽어서 없을 테니 반사동을 위해 변명할 기회조차 없지 않겠는가.

    화십낭은 분노가 치솟았지만 조용히 구덩이 곁으로 돌아가 소리쳤다.

    “더 죽여라!”

    그들이 허공의 전투를 지켜보고 있을 때, 심협도 바위 뒤에 숨어서 똑같이 허공의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에 육이미후가 손오공과 혼자 싸우겠다고 했을 때, 그는 기뻐했다. 하지만 정세를 지켜보자 다시 걱정이 몰려왔다.

    손오공의 부상은 너무 심각했다. 만약 평범한 태을 선인이었다면 지금까지 버티지도 못하고 육이미후의 손에 진즉 몇 번은 죽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완강히 버티며 싸우고 있었지만, 온몸은 피투성이였고, 기운은 이미 모두 엉망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대성이 못 버티겠는데……?’

    심협은 다시 초조해졌다.

    쾅!

    천지를 뒤흔드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육이미후는 양손으로 곤봉을 잡고 강하게 휘둘렀다. 마기로 만들어진 거대한 주먹의 허상이 손오공의 몸에 떨어졌다.

    이어 손오공이 입에서 피를 뿜어내며 그대로 땅에 처박혔다.

    쿠르릉!

    산이 흔들리면서 커다란 균열이 생겨났다.

    육이미후는 바짝 뒤쫓아가며 곤봉에 힘을 모아 균열 안에 있는 손오공을 향해 다시 일격을 날렸다.

    검은색 곤봉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자 번개가 사방으로 몰아쳤고, 강력하기 그지없는 영압이 갈라진 균열을 파고들어 손오공에게 곧장 떨어졌다.

    “드디어 끝인가……?”

    이를 본 육아상왕이 중얼거렸다.

    한데 그때, 갑자기 이변이 일어났다.

    누군가 순식간에 산의 균열에서 나타나더니 황금색 곤봉을 빠르게 휘두르며 잔상을 만들어내 하늘에서 퍼부은 공격을 맞받아친 것이다.

    굉음과 함께 하늘이 뒤흔들렸고, 두 곤봉이 맞닿은 곳에서 광포한 힘이 쏟아져 나와 거대한 풍랑을 만들며 사방으로 쏟아졌다.

    검은 번개가 거미줄처럼 번져나갔다.

    금시대붕 등은 일제히 팔을 휘둘러서 술법으로 강력한 파동을 막아냈다. 본래 갈라졌던 땅과 균열은 다시 커져서 더욱 움푹 파였다.

    육이미후는 갑작스러운 반격에 한참을 튕겨나간 후에야 간신히 몸을 가누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산 정상 구덩이에 손오공은 바위에 기대어 누워 있었고, 그의 앞에는 옷이 찢어지고 온몸이 피투성이인 누군가가 서 있었다. 물론 심협이었다.

    “대성, 괜찮으십니까?”

    “녀석, 조용히 숨어 있을 것이지 왜 나와서 같이 죽으려는 게냐?”

    손오공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조금만 더 버텨주십시오. 원군이 올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심협은 손오공에게 금단 하나를 먹이고 자신도 먹은 후 빠르게 대개박술로 상처를 치료했다.

    좀 전의 일격으로 인한 부상은 대부분 외상이었지만, 오장육부가 너무 크게 흔들려 한동안 가라앉지 않았다. 가슴이 답답하고 피가 목구멍에서 넘어올 것만 같았다.

    “양전은 상처가 심해서 아까 도망쳤다. 원군이 온다 해도 아마 늦겠지.”

    손오공은 고개를 젓고는 다시 슬며시 웃었다.

    “효천견과 같이 갔으니 더 빨리 달릴 수는 있겠구나.”

    “원군이 오든 안 오든 우선 한바탕 신나게 싸워보죠.”

    “하하하! 좋다, 아주 마음에 드는구나. 스승님을 구하지 못하고 죽는 것이 한이지만, 그래도…….”

    손오공이 격양된 표정으로 말하던 때였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심협의 전음이 들려왔다. 그 짧은 몇 마디에 손오공의 표정은 점점 변했다.

    “너 정말 결사의 각오를 한 거구나?”

    심협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좋다.”

    손오공도 더는 묻지 않고 일어섰다.

    두 사람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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