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793화 (793/1,214)
  • 793화. 지도(指導)

    저녁 무렵, 방촌산의 어느 광장.

    수백 명의 문중 제자가 부채꼴 대형으로 가부좌를 하고 있었고, 가운데에는 3척 높이의 간이 강연대가 세워져 있었다.

    심협과 부동래도 강연대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 앉아 있었다.

    석양이 저물고 달이 떠오르자 푸른 하늘에는 장경성(長庚星)이 반짝거리며 나타났다. 이때, 빛이 뭉쳐지더니 가부좌를 튼 보리선조가 강연대에 나타났다.

    방촌산 제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공손하게 인사했다.

    “선조님의 강연에 감사드립니다.”

    보리선조 옆에 두 사람이 나타났는데, 모두 푸른 도포를 입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산문 밖에서 심협을 막아섰던 각명이었다.

    다른 한 명은 얼굴이 둥근 도인이었는데, 도동에게서 들은 바로는 그는 보리선조의 다른 친전제자 각안(覺岸)이었다. 그는 사형 각명과 함께 종문의 복잡한 사무를 관리하고 있었다.

    보리선조는 모든 제자에게 고개를 끄덕인 후, 심협에게서 시선이 잠시 멈췄다가 입을 열었다.

    “오늘 강연은 천지의 기묘도, 공덕조화(功德造化)도 아닌 <황정경> 공법 수련 중 겪을 수 있는 그릇됨과 잘못된 생각이니, 오늘 강연으로 앞으로의 수련에서 잘못된 길로 가지 않길 바란다.”

    강연대 아래의 제자들이 술렁였고, 적잖은 사람들이 흥분한 기색이었다.

    심협과 부동래가 그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제자 한 명이 말해줬다.

    “자네들은 신입이라 모르겠지만, 선조님은 강연에서 구체적인 공법을 거의 다루시지 않고 고묘(高妙)한 도의(道義) 같은 말씀을 자주 하신다네. 물론 자질이 뛰어난 자라면 얻는 게 많겠지만, 나 같은 평범한 제자들은 들어도 뜬구름 같은 소리였지. 한데 오늘 모처럼 공법에 대해 강연하신다 하니 잘 들어두게나.”

    그 제자는 처음 보는 두 사람을 보고도 크게 상관하지 않고 설명해줬다.

    심협은 그 말을 듣고서야 보리선조의 이번 강연이 자신을 위한 것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는 바로 심호흡하여 마음을 가다듬고 경청할 준비를 했다.

    “만물지도, 궁극지변, 만물지법, 대행재연, 동출이명, 위지위현, 현지우현, 중묘지문.(萬物之道, 窮極之變, 萬物之法, 大行在衍, 同出異名, 謂之爲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보리선조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심협은 어리둥절했다.

    ‘이건 황정경 대강의 내용인데?’

    보리선조 뒤에 서 있던 각명과 각안은 듣자마자 안색이 달라졌다.

    황정경의 대강 내용은 친전제자가 아니면 절대 알려주지 않는데, 오늘 보리선조는 어째서인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말했다.

    하지만 이내 그들은 의심을 내려놓았다.

    보리선조는 가장 처음 구절만 언급했을 뿐, 뒤의 내용은 전부 말하지 않았다.

    대다수의 내문 제자는 황정경 공법 수련에 있어서 정진이 빠르지 않았기에 당연히 전체 공법에 대하여 깊은 깨달음을 얻지 못한 상태였으니 한 구절의 대강 내용을 듣는 것만으로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심협은 이 순간 깊은 뜻을 알 수 없었다.

    “우리는 황정경 공법을 수련할 때 차근차근 나아가고 단계대로 정진하지만, 그중의 변(變)이라는 글자를 깊이 헤아리지는 않는다.”

    보리선조가 이어서 말했다.

    대부분에게는 아직도 뜬구름 같은 소리처럼 들렸지만, 심협의 눈빛은 반짝거렸다.

    그는 당연히 황정경 공법과 대강을 완전히 조합하여 수련하면 칠십이변 신통을 익힐 수 있음을, 무궁한 변화뿐만 아니라 강력한 힘까지 얻을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꿈속 세계에서 황정경 대강을 얻었고, 스스로 칠십이변을 깨달아 수련했다. 다만 스승의 지도를 받은 적이 없었기에 황정경 변화의 도에 대한 깨달음이 다소 부족했다. 그렇기에 보리선조의 말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모든 변화의 관건은 활(活)이다. 변화의 도를 깨닫게 된다면…….”

    보리선조는 황정경 변화 신통의 중요한 부분을 이어서 설명했지만, 제자들은 대부분이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반면 심협은 들을수록 마음의 꽃이 활짝 폈고,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칠십이변에 관한 깨달음이 깊어져갔다.

    “무엇이 영(靈)이고, 무엇이 마(魔)이며, 무엇이 선(仙)이고, 무엇이 법(法)인가?”

    보리선조는 변화의 도에 관한 설명을 마치자 갑자기 화제를 돌렸고, 질문이라도 하듯이 모두를 바라봤다.

    이 점에 관해서는 그곳에 있는 모든 제자가 알고 있었다. 다만 왜 선조가 지금 이런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만물의 근본은 도가 아니다. 만물의 근본은 모두 법에서 나온다. 선, 마의 변화도 이 이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 말이 나오자 아직 칠십이변에 빠져 있던 심협은 갑자기 심금이 울린 듯이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이는 분명 심협을 깨우치기 위함이었다. 이전에 그는 치우 마기와 순양의 힘의 정적인 균형을 계속 유지해왔지만, 현양마화를 사용할 때마다 치우 마기가 조금씩 강해졌다. 이런 정적인 균형은 언제가 깨지게 될 것이고, 보리선조는 이를 대번에 눈치챈 바 있다.

    허나 만약 정(靜)을 알고 동(動)으로 지킨다면, 즉, 음양이기를 교량으로 삼고 정적인 균형을 동적인 균형으로 바꾼다면 현양마화로 인한 부작용을 제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 음양이기를 움직이고 정을 동으로 바꾸지?’

    심협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체내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데 그것을 뜻대로 움직이면서 균형과 제어를 잃지 않기란 더욱 어려웠다.

    이때, 보리선조의 화제는 황정경 공법의 삼성멸마 신통으로 바뀌어 있었다.

    “태양은 양이고, 태음은 달이며, 별은 그 가운에 있으니 음양의 힘을 받치는 것 역시 대단한 위능이로다. 삼성의 힘을 이끌어 마를 제압하는 것이 실은 음양의 힘을 융합하는 것이다.”

    그 순간, 심협의 머릿속이 환해졌다. 보리선조는 이미 강연으로 자신을 점화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직설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공법 운공을 시도했다.

    이때, 그이 머릿속에서 갑자기 보리선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약 자네가 깨닫지 못할 거라면 노부도 이렇게 알려주지 않았을 걸세. 자네가 들을 강연은 여기까지이니 이제 가서 과감하게 시도해보게.”

    그 말을 끝으로 심협은 마치 구름에 탄 것처럼 몸이 갑자기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고 가볍게 떠올랐다가 갑자기 다시 천천히 내려왔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방촌산 정상의 초가집 앞이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심협은 광장을 향해 절을 올렸다. 보리선조라면 당연히 들었을 것이다.

    그는 결인하는 동시에 단전 안의 치우 마기와 순양의 힘을 운공했고, 또 동시에 황정경 공법을 운공했다. 몸 주위에서 바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광장에 있던 모두는 심협의 모습이 사라진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집중하여 보리선조의 강연을 듣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오직 선조 뒤에 선 각명과 각안만이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어딘가를 바라봤다가 이내 다시 본래의 자세로 돌아왔다.

    강연은 달이 중턱에 오를 무렵 끝났고, 광장의 모든 제자는 흩어졌다.

    부동래는 보리선조의 전언을 듣고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

    광장에는 이제 두 사람만 남았는데, 아직 떠나지는 않았다.

    “스승님의 오늘 강연은 저번과는 확실히 달랐지.”

    각명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외부의 수사를 염두에 두신 것 같았습니다.”

    각안은 산 정상을 올려다봤지만 구름이 가려져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스승님께서 문을 닫고 제자를 받지 않겠다는 생각이 변하신 걸까?”

    “그렇다고 하면 어떻고 또 아니라고 해도 어떻습니까?”

    각안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 * *

    다음 날 아침, 부동래는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문을 여니 심협이 웃으며 문밖에 서 있었다.

    “심형, 아침 일찍부터 무슨 일이오?”

    부동래는 하품을 하며 물었다.

    어젯밤의 강연을 그는 매우 진지하게 듣느라 심협이 사라진 것도 몰랐지만, 황정경 공법을 수련한 적이 없는 그에게는 당연히 뜬구름 같은 말이었다.

    돌아온 뒤, 그는 또 혼자서 명상을 했고 날이 밝아서야 겨우 잠이 들었었다.

    “갑시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이오.”

    보리선조가 부탁한 일은 특별히 비밀로 해달라고 하지 않았지만, 심협은 당분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했다.

    “간다니? 여기 온 목적은…….”

    부동래는 의아해하며 말했지만, 이내 심협의 전음에 말을 그쳤다.

    “부형, 아무래도 방촌산을 떠나야 할 것 같소. 같이 동해로 갑시다.”

    “알겠소.”

    두 사람이 떠날 때, 올 때와 마찬가지로 도동이 길 안내를 해줬기에 별다른 시선을 끌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날아서 떠날 때쯤, 방촌산에서는 엄숙한 표정의 각명이 천천히 시선을 거두고 있었다.

    몇 개월 후, 동승신주에 근접한 동해의 어느 항구.

    푸른 도포의 인간족 남자와 호랑이 머리 요괴가 나란히 서 있었고, 그들 앞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무릎을 꿇은 자들은 거친 베옷을 입었고, 얼굴과 손은 모두 햇볕에 빨갛게 그을렸으며, 오랜 시간 거친 해풍을 맞아오면서 피부가 거칠고 주름이 가득해진 어민들이었다.

    고기잡이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방금 심협과 부동래가 바닷속에서 튀어나온 항구의 요괴를 퇴치해주자 이들을 생명의 은인으로 여겨 절을 한 것이었다.

    그중 얼굴에 아직 핏자국이 남아 있는 중년 남자는 요괴가 습격해왔을 때 가장 먼저 노를 휘두르며 적을 맞이했는데, 심협과 부동래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요물의 뱃속에 있었을 것이다.

    “두 선사님, 부디 은혜를 베푸셔서 저희의 살길 좀 찾아주십시오.”

    중년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말해보시오. 무슨 일이오?”

    부동래를 본 중년 남자는 조금 무서웠지만, 용기 내서 말했다.

    “선사님, 저희는 동해의 항구에서 본래 평안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달 전부터 갑자기 요괴들이 바다 밑에서 튀어나와 항구와 어촌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짐승은 말할 것도 없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요괴가 나오는데 왜 관에 신고하지 않은 것이오?”

    “오래국은 나라가 적고 세력이 약하여 이쪽 관아는…… 무뢰배라면 모를까, 요괴가 나타나면 감히 올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도와주면 좋겠소?”

    “동해의 요괴들은 줄곧 동해 용궁이 통괄했습니다. 가끔은 요괴들이 해안에 올라오긴 했지만, 그럴 때마다 동해 용궁이 제때 와서 처리해줬는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오랫동안 용궁에서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혹시나 소식을 못 들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선사님들은 하늘을 날고 바다에서도 자유롭게 다니시니 저희 대신 동해 용궁으로 가서 말씀 좀 전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중년 남자는 기대 어린 눈빛으로 심협을 바라봤다.

    “좋습니다. 우선 그전에 법진을 설치해드릴 테니 한동안은 물가에 가까이 가지 마십시오.”

    “감사합니다, 선사님.”

    어민들이 또다시 일제히 절을 올렸다.

    심협은 부적으로 항구 근처에 법진을 설치한 뒤 부동래와 함께 길을 나섰다.

    화과산의 위치는 이미 알고 있었기에 길을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이전에 꿈속에서 봤던 화과산과 지형이 다르고 그때만큼 부유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평온해 보였고, 허물어진 벽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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