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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792화 (792/1,214)
  • 792화. 부탁

    두 사람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앉았다. 이들 앞에 차가 놓여 있었다.

    “자네의 몸은 순양지기가 왕성한데 치우 마기도 똑같이 기승을 부리는군. 평형을 제법 괜찮게 유지하고 있는데, 무슨 비법을 쓴 건가?”

    보리선조가 묻자 심협은 고개만 끄덕일 뿐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았다.

    “어떤 방법이든 오래 유지할 방법은 아니네. 그런 현양(玄陽)을 함께 쓰는 비법은 절대 남용해서는 안 돼. 안 그러면 돌이킬 수 없는 화근이 될 것이네.”

    심협은 그의 말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

    현양화마 비술을 시전하지 않았을 때는 몰랐는데, 사용할 때마다 적지 않은 대가를 치렀다. 양기를 잃고 음기가 강해져 마기를 더욱 침범하게 했으니 마기가 계속 주도권을 가지게 된다면 그의 몸은 언젠가 완벽하게 마화될 터였다.

    심협의 추측대로라면, 그렇게 되는 순간 자신은 치우의 마혼 분신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은 보리선조의 말처럼 다시는 돌이킬 수 없게 되리라.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의 현양비술은 귀문의 <황정경> 공법과 치우 마기가 제 몸속에서 서로 싸우는 것을 음양이기로 중화시킨 것입니다.”

    그는 망설이다가 말했다.

    “어쩐지, 순양의 힘과 치우 마기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데 음양이기가 끼어들어 그런 기발하고 미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로군.”

    심협은 조용히 듣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부가 보기에 자네는 방촌산과 인연이 깊어 보이는군. 어느 문파의 재전(再傳) 제자인가?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우리 종문의 전승 공법인 <황정경>을 익힌 거지?”

    보리선조의 거듭된 물음에 심협은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할지 몰랐다.

    “규칙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지키지 않는 원숭이에게 배운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황정경을 전수해준 거라면 대강까지 함께 가르치지는 않았을 터. 그 말고도 누가 감히 이리 큰 배짱을 부렸는지 알고 싶군.”

    보리선조가 혼잣말처럼 건넨 말에 심협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선배님께서는 마환이 이미 사라졌다고 보십니까?”

    보리선조는 그의 말에 의아한 듯했지만 이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인, 선, 마라는 구분이 있는 한 마환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걸세.”

    심협에게 이 대답은 다소 의외였다.

    “왜? 자네는 믿는가?”

    보리선조가 웃으며 묻자 심협 역시 고개를 저었다.

    “사실 자네와 나뿐만 아니라 삼계 각 종족 중 그 말을 믿지 않는 사람은 꽤 된다네. 그중 적지 않은 자들이 마족 전체를 전멸시켜야 마환이 완전히 사라진다고 주장하기도 하지.”

    “선조님, 후배의 직언을 용서하십시오. 지금의 삼계는 겉으로는 평화롭지만 사실 내부에서는 음모가 끊이지 않아 절대 태평하지 않습니다. 마환이 설령 모두 사라진다 한들, 인, 선 종족의 내부에서 수많은 모순이 나타나면 마환이 인환(人患)이 되고 선환(仙患)이 될 것입니다.”

    “자네의 그 말은…… 신선하군.”

    “마환이 사라졌다는 지금, 인간족과 선족의 동맹에는 균열이 생기고 암암리에 서로 싸우고 죽이고 있습니다. 지금도 이런데 만약 마족이 완전히 사라진다면 인간족과 선족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럼 자네는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전 겨우 진선 초기 수사인데 어찌 함부로 해결을 말하겠습니까? 천존의 경지에 오른다 해도 제가 삼계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심협은 꿈속에서 치우와 싸웠던 광경을 떠올리며 자기도 모르게 한탄했다.

    “그럼 자네 생각에 삼계 모든 종족이 함께 살고 종족의 구분을 짓지 않으며 공통된 믿음을 기초로 하고 공통된 감정 고리로 연결되어 마족 중에 인간족이 있고 인간족 중에 선족이 있고 선족 중에 마족이 있다면 어찌 될 것 같은가?”

    보리선조는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그 말씀은 천하가 평등하고 서로 화합하며 살아간다는 뜻입니까? 정말 그렇게 되어 삼계의 화근이 온전히 사라진다면 선배님의 말씀처럼 삼계의 모든 중생이 종족의 구분 없이 배우고 함께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말을 마친 그는 혼자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렇게 되기란 너무도 어렵겠죠.”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시작해야 하고 높은 탑도 기초부터 쌓아야 하는 법. 과거 옥황대제께서 수련하여 3만6천5백의 겁(劫)을 겪으셨고, 부처께서 도를 전할 때도 천만 리를 고행하지 않으셨던가. 한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만약 모두가 함께한다면 불가능한 것은 아닐세.”

    “선배님 말씀이 옳습니다. 한 사람의 힘에는 한계가 있지만 천만 명의 힘은 무궁무진하죠. 선배님의 말씀에 감복했습니다. 하지만…… 삼계의 중생에게는 그렇게 긴 시간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보리선조는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듯 들었던 찻잔을 다시 탁자에 내려놨다.

    “그게 무슨 뜻인가?”

    그는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심협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선배님, 지금부터 제가 할 말이 듣기에 이상하고 어쩌면 무슨 헛소리인가 싶겠지만, 부디 끝까지 들어주십시오.”

    “어디 한번 들어보세.”

    보리 선조가 눈을 치켜뜨고는 웃으며 말했다.

    “선배님, 이 일은 제가 이상한 옥침을 발견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심협은 천천히 입을 열었고, 자신이 꿈속에서 천 년 뒤, 마겁을 겪은 세계에 대해 상세하게 이야기했다.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보리선조의 얼굴에서는 웃음 대신 깊은 신중함이 엿보였다.

    하지만 그는 중간에 심협의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들었다.

    “천 년 뒤, 우리 방촌산은 이미 멸망했고, 자네는 그 유적에서 황정경 공법을 발견하여 익혔다?”

    심협의 얘기가 끝이 나자 보리선조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때의 꿈속에서 저는 장수촌으로 들어가 온갖 고생 끝에 방촌산에 도착했는데 종문이 무너진 지 벌써 몇 년은 된 것 같았습니다. 아무래도 치우가 부활한 초기에 멸망했던 것 같습니다.”

    끝까지 들은 보리선조는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부서진 옥침을 노부가 볼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심협은 이미 부서진 옥침을 꺼냈다.

    이를 받아 든 보리선조는 손으로 가볍게 황옥의 옥침 문로를 쓰다듬으며 옥침의 독특한 따뜻한 기운을 느꼈다. 살짝 감은 눈은 눈꺼풀 아래에서 이리저리 움직였는데 마치 몽마(夢魔)와 격렬하게 싸우고 있는 듯했다.

    한참 뒤, 그는 눈을 번쩍 떴고 얼굴에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이건 어디서 얻었나?”

    보리선조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심협에게 물었다.

    “선배님, 뭐가 잘못됐습니까?”

    심협도 덩달아 놀라 황급히 물었다.

    “이 물건의 기운은 너무나 현묘해서 나도서는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었네. 다만, 수많은 인과가 연결된 상고 시기 조화의 보물이라는 것만 알겠더군. 심 시주가 이 보물을 몸에 지녔던 동안 음양(陰陽)에 손상을 입지 않고 무사히 살아남은 것만 해도 노부는 실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네.”

    보리선조는 그제야 자신의 추태를 알아채고는 천천히 다시 앉으며 말했다.

    “이 보물은 제가 춘추관 뒷산의 어느 산벼락에서 우연히 찾은 겁니다. 훗날 뜻하지 않게 옥침이 저를 꿈속으로 데려갔고, 매번 기이한 일을 겪고 현실로 돌아오면 수명이 소진되는 상황에 놓였었습니다.”

    심협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랬었군. 그랬을 것이야.”

    보리선조는 알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님, 마지막 꿈속에서 돌아왔을 때, 세상에는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나 마치 거짓된 평화에 빠진 듯했습니다. 하지만 진짜 마환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은밀하고 험악하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제가 여기 오는 동안 이미 몇 번이고 마족의 음모를 겪었는데, 그들의 행동이 너무 은밀하여 확실한 증거를 얻지 못했습니다.”

    심협은 깊게 탄식했다.

    “앞서 말했듯이 사실 마환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믿는 사람이 많지만 삼계의 종족들 각자의 꿍꿍이가 있으니 이전처럼 힘을 합치기는 힘들지. 함께 마족을 토벌하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어려울 걸세.”

    “그보다 저는 꿈속의 장안 전쟁 결과가 더 신경 쓰입니다. 왜 천 년 전의 세계에 변화가 생긴 것인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음, 과거의 변화가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건 어려운 게 아니나 미래의 변화가 과거에 영향을 주는 건 이치에 맞지 않지. 아마 자네가 꿈속에서 죽은 뒤로 어떤 변고가 일어난 게 아닐까 싶군.”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이번에 방촌산에 온 것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심협이 일어나며 말했다.

    “자네는 내게 이 옥침을 고쳐서 다시 꿈속 미래로 보내 달라는 건가? 그런 거라면 실망시켜서 미안하군. 노부는 그쪽에 능하지 않아서 그건 불가능하다네.”

    보리선조가 고개를 젓고는 쓰게 웃었다.

    “선배님, 오해입니다. 이미 천기성에서 고치는 방법을 들었는데, 현재 도움을 줄 보물이 부족하여 이곳에 온 것입니다.”

    “그럼 우리 방촌산에 자네에게 필요한 물건이 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제가 이번에 온 것은 산하사직도를 빌리기 위함입니다. 복구가 완료되는 대로 바로 돌려드리겠습니다.”

    심협이 포권하며 공손하게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보리선조의 표정은 확연히 달라졌고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눈빛은 심협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떨어질 줄을 몰랐다.

    심협은 또다시 완전히 꿰뚫어보는 듯한 느낌에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노부가 자네를 믿지 못하는 게 아니라, 사실 이 물건이 정말 중대한 일과 관련되어 있어 자네에게 주지 못할 것 같네. 잘못하면 자네가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일세.”

    “혹시 산 아래에 모여든 수상한 수사들이 이 물건을 탐내고 있는 겁니까?”

    심협의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자네도 그들을 발견했는가?”

    보리선조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방촌산을 봉산(封山)한 것도 그것 때문입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네. 이 일은 꽤나 복잡해서 한두 마디로 설명할 수가 없지.”

    “선배님, 제가 도와드릴 일은 없습니까?”

    방촌산을 향한 심협의 감정은 매우 특별했기에 그는 진심으로 말했다.

    “자네는 지금 방촌산을 노리는 게 누구라고 생각하나?”

    보리선조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물었다.

    “인원이 많아 얼핏 보기만 했을 뿐, 그들의 신분을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마족이 관여되어 있지 않을까 싶군요.”

    “마족…… 맞았네. 지금 삼계 소동의 배후에는 대부분 마족의 그림자가 끼어있지. 다만, 이번에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네. 그러니 자네까지 말려들게 할 수는 없네.”

    보리선조가 탄식하자 심협은 침묵했다.

    현재 그는 진선 초기에 달했지만, 보리선조 같은 존재와 맞서 싸우는 적을 상대하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인사드리겠습니다. 더는 선배님께 폐를 끼칠 수 없지요.”

    “노부는 자네가 방촌산과 함께 싸워줄 거라 생각했는데……?”

    보리선조는 다소 의외였는지 물어봤다.

    “저도 반쯤은 방촌산 사람이니 당연히 선배님과 종문을 깊게 존경합니다. 허나 제 어깨에 걸린 사명이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심협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자네 성격은 참으로 마음에 드는군. 노부를 대신해 한 가지 일을 해줄 수 있겠나?”

    “말씀하십시오.”

    “동승신주 바다 밖의 선산, 화과산 수렴동으로 가서 내 제자 손오공에게 서찰을 대신 전해주게.”

    꿈속에서 한 번 가본 적이 있었기에 화과산은 심협에게 낯설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동해 용궁에 갈 일이 있었는데 가는 길에 전달하겠습니다.”

    “그저 서찰을 전해달라는 거지, 대가로 산하사직도를 주지는 못한다네.”

    보리선조는 다소 미안한 듯 말했다.

    “그런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저도 가는 길에 전해주는 것뿐입니다.”

    “그럼 부탁하네.”

    “더는 제가 도울 것이 없다면 바로 화과산으로 가보겠습니다.”

    “급하긴 하나 지금은 때가 아니네. 오늘은 여기서 쉬도록 하게. 마침 오늘 밤 제자들에게 강연할 생각이니 괜찮다면 자네와 동료도 함께 듣게나.”

    보리선조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저희는 방촌산 제자가 아닌데 들어도 괜찮겠습니까?”

    “오늘 밤은 노부가 강연하니 내가 허락하면 상관없네.”

    “감사합니다, 선배님.”

    “아직 시간이 좀 남았으니 도동에게 쉴 곳으로 안내하라 전해두겠네.”

    심협은 다시 한번 허리를 숙여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그가 몸을 일으켰을 때, 하얀 빛이 반짝이면서 허공에 빛의 문이 나타났다.

    그가 한 걸음 내딛자 다시 그 초가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집 밖에는 부동래가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그는 좋은 술에는 별로 관심이 없지만 차는 매우 좋아했다.

    “두 분, 절 따라오십시오.”

    도동은 이미 보리선조의 지시를 들었는지 곧바로 두 사람을 산 중턱의 별원으로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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