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2화. 핏빛 뼈
분노의 포효가 전방에서 울리더니 핏빛의 존재가 하늘에서부터 거대 코끼리 음수 옆으로 떨어졌다. 바로 혈고선조였다.
‘저 강력한 혈고선조를 날려버리다니, 대체 누구인가!’
허공에는 마심과 황사문의 원명, 후토종의 뚱뚱한 남자, 어수종의 젊은 부인 등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었다.
원명의 손에는 반쯤 열린 검은 상자가 검은 빛을 반짝이고 있었는데, 어떤 보물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마심의 손에는 길이가 몇 장으로 길어진 혈마도가 들려 있었는데, 피와 같은 사기(邪氣)가 하늘을 찔렀고, 피비린내 나는 기운이 반경 수십 장을 뒤덮었다.
“혈마도! 네놈이었나!”
혈고선조가 벌떡 일어나며 고함을 질렀다. 마심을 알고 있는 듯했다.
혈고선조의 핏빛 해골 몸에는 보라색 반점이 구더기처럼 붙어 있었고, 기운은 크게 흐트러진 데다 많이 약해져 있었다.
심협은 진중한 얼굴로 상황을 살폈다.
‘혈고선조는 해골의 몸이라 피와 살이 없으니 음수보다 맹독에 강할 텐데, 그럼에도 중독됐다니!’
어쨌든 이 상황은 그에게 호재였고, 이곳에서 빠져나가기가 더 쉬워진 것이었다.
그들을 피해 밖으로 나가려던 순간, 옆에 있던 소부자가 그를 만류했다.
“심 도우, 잠시만 기다려주게. 마심과 저 혈고선조는 뭔가 관련이 있는 모양인데, 무은사해를 혼란에 빠트리고 우리 천기성을 노린 자들의 목적을 알아내야만 할 것 같네.”
소부자가 전음으로 말했다.
“남아 있어서 좋을 게 없습니다. 귀언이 인형의 성을 완전히 장악하기라도 하면……?”
“그건 걱정하지 말게. 아까 인형의 비석을 제련하면서 약간의 수를 써놨으니 시간을 끌 수 있을 걸세.”
그제야 심협은 약간 안도했다. 사실 그도 저들의 목적이 매우 궁금했기에 조용히 지켜보기로 했다.
“혈고, 오랫동안 이곳을 차지하며 그 보물로 경지를 정진시켰으니 이제 충분하지 않은가. 지금이라도 순순히 내놓게. 그러지 않으면 내 칼이 얼마나 무자비한지 알게 될 거야.”
“흥! 이리 많은 인간족이 왜 갑자기 흑연미굴에 들어왔나 했더니, 모두 네놈의 소행이었구나.”
혈고선조의 말에 심협 등의 안색이 변했다.
천기성 사람들과 황사문, 후토종 등이 흑연미굴에 모여든 것이 수상쩍었기에 누군가 배후에서 꾸민 일이 아닐까 의심한 적이 있는데, 마심의 소행이었단 말인가?
마심은 냉소하며 말없이 혈마도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혈마도와 그의 모습이 함께 사라졌다가 곧바로 혈고선조의 머리 위에 나타났다.
그가 팔을 휘두르자 순식간에 수십 장 길이의 거대한 도의 허상으로 변한 혈마도의 혈광이 맹렬한 기세로 혈고선조를 반으로 쪼개려 들었다.
마심의 곁에 있던 자들도 일제히 달려들며 두 개의 노란색 단과 방패, 오색의 독무로 혈고선조를 공격했다.
혈고선조는 포효하더니 오른손에서 거대한 혈광을 뿜어내 혈마도를 막았다. 동시에 혈광으로 보라색 반점을 억누른 뒤, 붉은 해골 허상을 뿜어내어 마심과 원명 등에게 맞섰다.
마심 등은 핏빛 해골 허상의 무서움을 진즉 보았기에 곧장 옆으로 피했다.
혈고선조는 뼈 날개를 펄럭이며 혈광으로 변해 그들의 포위를 벗어나 음굴 깊은 곳으로 날아갔다.
“저자가 보물을 발동하게 둬서는 안 된다! 어서 쫓아라!”
마심이 외치며 뒤쫓았고, 원명 등이 서둘러 뒤를 따랐다.
“저희도 쫓아갑니까?”
심협이 전음으로 소부자에게 의견을 물었다.
소부자는 심협의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음굴을 잠시 둘러봤다.
막망 장로가 이끄는 천기성 제자들과 목효는 매 장로, 복 장로 등과 합류해 벽을 등진 채 유명서생, 야나찰, 수라 꼭두각시, 세 진선기 귀물과 밀물 같은 음수들과 대전을 벌이고 있었다.
천기성 사람들이 열세였지만, 한동안은 버텨낼 수 있을 터였다.
“가보세!”
소부자가 전음을 보낸 후 먼저 쫓아갔고, 심협도 뒤따라 음굴 깊은 곳으로 향했다.
“성주님은 혈고선조의 몸에 있던 보라색 반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맹독인 것 같은데…….”
“내가 알고 있는 게 맞는다면, 저들은 마독(魔毒)에 중독된 것일세.”
“마독이라니! 그렇다면 마심의 소행일까요?”
“내 마심을 잘 알고 있는데, 그자는 독을 사용하지 않는다네. 마왕채도 마찬가지지.”
심협은 마심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인지 궁금해 머릿속으로 후토종의 뚱뚱한 남자와 어수종의 젊은 부인 그리고 원명 등을 차례로 떠올렸다.
대승 후기인 뚱뚱한 남자와 젊은 부인은 저토록 강력한 마독을 사용할 수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원명이다.
문득, 심협은 원명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은색 상자가 생각났다. 아마도 마독과 관련된 물건이리라.
“누가 됐든 앞으로 조심하게. 저 강력한 혈고선조도 무사하지 못했으니 우리에게는 더없이 위험한 독일 게야.”
심협은 신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는 만독혼원주가 있어 어지간한 독은 안중에도 두지 않았지만, 이 마독은 어쩌면 그 구슬로도 해독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음으로 대화하면서도 두 사람은 마심 등을 바짝 쫓았고, 눈 깜짝할 사이에 음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마진과 돌기둥에 도착했다.
혈고선조는 현재 마진 옆에 서서 주문을 읊조리고 있었는데, 검홍색 혈광으로 빛나는 오른손은 마진을 찌르려는 듯했다.
“마진을 발동하려고 한다! 막아라!”
마심이 소리치며 양손을 결인했다.
혈마도는 번개처럼 순식간에 수십 장을 넘어 혈고선조를 향해 날아갔고, 원명 등도 다급하게 각종 법보를 꺼내 공격했다.
혈마도는 매우 빨랐지만 혈고선조가 한발 앞섰다.
파지직!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혈고선조의 오른팔이 마진을 뚫고 들어갔다.
그 순간,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함께 혈고선조의 몸은 혈광으로 번득였고, 손상됐던 원기가 순식간에 보충되면서 몸에있던 보라색 반점도 사라졌다.
그는 흥분한 기색으로 휙 돌아섰다. 동시에 그의 왼손에서 뿜어져 나온 혈광이 몇 배로 커지면서 혈마도와 다른 이들의 법보를 허공에서 움켜쥐었다.
쿠쿵!
거대한 소리와 함께 전방 허공에 나타난 작은 산만 한 핏빛 손이 엄청난 기세로 날아오는 혈마도 등을 막아냈다.
충돌이 일어난 곳은 갑자기 어두워졌다가 눈부신 빛의 파동을 뿜어냈고, 혈마도를 비롯해 원명 등의 법보는 추풍낙엽처럼 전부 뒤로 날아갔다.
이를 본 심협과 소부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혈고선조의 이번 일격은 앞서 보였던 실력을 월등히 뛰어넘었던 것이다.
원명 등은 핏빛 손의 반탄력에 그대로 튕겨나갔고, 원명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은색 상자도 날아갔다.
심협은 그 상자를 보며 눈을 빛냈다. 저 상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의 파동은 매우 순수해 결코 서원봉보다 약하지 않았다.
‘저 검은 상자가 정말 마독과 관련이 있는 것인가?’
그는 재빨리 신식을 펼쳐서 살폈지만,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두 눈에서 푸른 빛을 뿜어내며 유명귀안을 발동했다.
이번에 경지가 크게 정진하여 진선기로 돌파하면서 모든 신통이 한 단계 정진했는데, 이는 유명귀안도 마찬가지였다.
이 귀안은 본래 음속성이지만, 천뢰의 단련 과정을 거치면서 뜻밖에도 양속성로 변해갔고, 덩달아 안력도 훨씬 강해졌다. 덕분에 발동하자마자 검은 상자를 간파할 수 있었다.
매우 짙은 보라색 연기가 검은 상자 안에서 흘러나와 소리 없이 주위로 퍼지고 있었다.
‘역시 저 상자의 소행이었구나!’
심협은 전음으로 이 상황을 소부자에게 알렸다. 저 연기에 다가가지 말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 말을 들은 소부자는 순간 흠칫했다. 그도 방금 원명과 저 검은 상자를 살펴봤지만 아무런 이상도 발견하지 못했다. 한데 그걸 심협이 간파한 것이다!
한편, 튕겨나간 혈마도와 함께 몸이 크게 흔들린 마심은 창백한 안색으로 몇 걸음이나 물러났다. 그러나 입가에는 흥분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는 입을 쩍 벌려 법보를 뱉어냈다. 바로 심협과 언무사를 기습했던 영광 보갑이었다.
이어서 그는 또다시 핏빛 뼈처럼 생긴 물건을 꺼내 영광 보갑 안에 넣었다.
한 줄기 어둡고 깊은 마기가 핏빛 뼈에서 요동치며 흘러나왔다.
‘저건……?’
이를 본 심협의 눈이 움츠러들었다.
저 핏빛 뼈에서 나오는 기운은 분명 치우 마기였다.
영광 보갑에서 뿜어져 나온 오색 영광이 감싼 순간, 핏빛 보갑과 뼈는 동시에 사라졌다.
다음 순간, 마진과 이를 뚫고 들어간 혈고선조 팔 사이에 만들어진 작은 공간으로 오색 영광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혈고선조의 오른팔에서 혈광이 폭증하면서 마진의 빈 곳을 채우려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혈진 안의 돌기둥 옆 허공에서 파동이 일어나더니 핏빛 뼈가 나타나 돌기둥을 부수고는 끈적한 혈광으로 변하여 돌기둥을 파고들었다.
돌기둥의 혈문이 갑자기 강렬히 번쩍이더니 마진이 급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강한 바람 소리와 함께 마진 안의 검은 기운이 더욱 들끓기 시작했다.
혈고선조는 이 광경을 보고는 서둘러 팔을 빼내고는 마진에서 떨어졌다.
그는 오랫동안 음굴에서 살아오면서 이 마진을 연구해 힘을 이용할 수 있었다. 덕분에 그는 마진의 무서움을, 조금만 방심하면 완전히 빨려 들어갈 수도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마진 근처에도 변고가 일어나 다섯 개의 검은 빛기둥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 검은 빛기둥 안에서는 수많은 검은색 마문이 각자 작은 마진을 만들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섯 개의 검은 빛기둥이 나타나자 원명이 어느새 챙긴 검은색 마갑(魔匣)에서 시커먼 마광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꽝!
강력한 폭발과 함께 원명은 튕겨나갔고, 검은 상자는 마진을 향해 날아가 빛기둥 안의 작은 마진으로 들어갔다.
그때, 심협의 임랑환 안에 있던 마봉(魔棒) 서원봉과 검은색 마환도 영향을 받아 마광을 뿜어내며 빠르게 검은 빛기둥으로 날아갔다.
그 순간, 서원봉과 검은 마환의 마기에 충격을 받아 은신부와 연연나금의의 은닉 신통이 사라져버렸다!
‘서원봉과 검은 마환은 역시 저 거대한 마진과 연관이 있었구나. 진안을 지키는 마보인가?’
심협은 모습이 드러났음에도 신경 쓰지도, 날아가는 두 마보를 막으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옆에서는 소부자도 하얀 빛과 함께 나타났다.
“구유(九幽)! 저 보물은 백여 년 전에 사라졌는데 어떻게 저놈의 손에 있었던 거지?”
혈고선조는 검은색 마환을 보고는 표정이 변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심협을 보며 소리쳤다.
심협은 혈고선조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편, 뭔가를 꺼내려는지 오른손을 품속에 넣고 있던 마심은 날아가는 마환을 보자 놀란 표정으로 일순 멈칫했다.
“구유! 잘됐다! 내가 만든 모조품은 이제 필요 없겠어!”
마심은 심협의 마환과 똑같이 생겼지만 기운은 상당히 약한 마환을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서원봉과 검은색 마환은 두 개의 검은 빛기둥으로 들어갔고, 비어 있는 빛기둥은 이제 두 개뿐이었다.
“오는 길에 마주쳤던 그자가 빼앗아간 검은색 율척과 그가 들고 있던 마령(魔鈴)…… 설마……?”
심협의 머릿속에서 문득 어떤 생각이 스쳐갔다.
이때,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매 장로의 몸에서 두 개의 검은 빛이 날아갔다. 바로 검은색 율척과 검은색 방울이었다. 그것들은 마진을 향해 날아가 마지막 남은 두 개의 빛기둥 안으로 들어갔다.
“매 장로!”
심협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심 도우, 방금 상황이 위급하여 말을 못 했는데, 천기성의 매 장로라는 자가 바로 과거 영굴을 떠났던 꽃 요물이에요.”
자죽의 목소리가 심협의 머릿속에서 들려왔다.
심협은 대답 대신 매서운 눈빛으로 매 장로를 노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