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9화. 비석
심협은 아예 건곤대에서 유천자옥 영죽으로 만든 지팡이를 꺼냈다. 그러자 자죽의 신혼이 지팡이에서 쑥 나왔다.
“저기예요!”
그녀는 머리를 내밀고 허공을 둘러보더니 앞의 대전 쪽을 가리키며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심협은 그녀가 말하는 곳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눈에 띄지 않는 푸른 기와의 대전이 있었다.
심협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이내 자죽을 데리고 대전 앞으로 향했다.
“이런 금제라니, 재밌군. 거리가 멀었다면 아무런 단서도 발견하지 못했겠어.”
심협은 문 위에 붙은 은닉 부적을 보며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귀언은 강력한 힘의 금제에서 파동이 일어나 사람들의 주의를 끌까 봐 대전에 방어 법진이 아닌 간단한 고급 은닉 부적을 붙여 놓은 것이었다.
부적의 원리를 알아낼 수 없는 것으로 봐서는 평범한 물건은 아닐 터였다. 만약 자죽이 본체와의 연결을 느끼지 못했다면 심협은 가까이 다가왔어도 이 건물에는 주의도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부적을 제거하자 안에서 짙은 영기의 파동이 느껴졌고, 심협은 바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선 심협은 일순 당황했다. 눈앞의 진열대에는 온갖 병과 목갑이 가득했는데, 그 안에서는 전혀 다른 영력 파동과 기이한 향이 흘러나왔다.
심협은 가까이 다가가 귀언이 영굴에서 긁어모은 각종의 천재지보를 발견했다. 그중에는 그가 이전에 영안에서 찾아낸 선정도 두 개나 있었다.
그가 자세히 살펴보기도 전에 지팡이의 자죽이 극도로 흥분해 튀어나오려 안간힘을 썼다.
심협은 자죽의 시선을 따라간 끝에 한쪽 벽에 기대어 선 보라색 선죽(仙竹)을 보게 됐다. 전체가 영롱한 보라색 빛이었고, 보라색 잎이 빼곡하게 달려 있었다. 하나같이 영롱한 것이 유천자옥보다도 품질이 높아 보였다.
“심 도우, 음…….”
자죽의 신혼은 초조한 눈빛으로 심협을 힐끔거리며 은근히 재촉했다.
“걱정 마라. 약속은 지킬 테니까.”
심협은 웃으면서 말하고는 지팡이의 금제를 해제했다. 그러자 자죽의 신혼은 기다렸다는 듯 날아가 보라색 선죽을 향해 머리를 들이밀었다.
파지직!
자죽이 가까이 다가가자 검은 번개가 보라색 선죽에서 뿜어져 나왔다. 이에 자죽은 그대로 뒤로 튕겨 나갔다.
다급해진 그녀는 곧바로 다시 선죽을 향해 날아갔다.
이를 본 심협이 서둘러 손을 내밀어 그녀를 만류했다.
“선죽에 누군가 금제를 걸어놓은 것 같다. 내가 한번 살펴보마.”
자죽은 그 말에 흠칫하더니 초조한 얼굴로 심협을 올려다봤다.
“표식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귀언이 남긴 모양이다. 아마 본체를 연화하려다가 신혼이 아직 살아 있고 본체와 연결이 남아 있으니 실패했겠지. 그래서 홧김에 본체에 금뇌(禁雷)를 남겼을 게다. 방금 억지로 들어가려 했다면 신혼이 소멸됐을지도 모른다.”
심협이 한참을 살펴보더니 말했다.
“심 도우, 제발 금뇌를 없애주세요.”
“이 금뇌를 설치한 수법은 특이하니 아무래도 천기성이 연기할 때 사용하는 비술 같구나. 억지로 제거하면 네 본체가 다치게 될 게야.”
자죽은 그 말에 곧 죽을 것 같은 얼굴로 시무룩해졌다.
“한데 보아하니 이 금제에는 시간에 제한이 있는 것 같다. 표식과 위능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으니 아마 오래지 않아 효력이 완전히 사라질 게다.”
“정말요?”
“내가 얻을 게 뭐가 있다고 거짓말을 하겠느냐? 만약 석 달 안에 저절로 사라지지 않으면 내 반드시 방법을 찾아서 제거해주마. 너무 걱정하지 마라.”
심협이 호언장담하자 자죽은 감격한 듯 큰절을 올렸다.
“고맙습니다, 심 도우. 이 은혜는 나중에 반드시 갚겠습니다.”
“그때까지는 힘들더라도 유천자옥 영죽에 들어가 있거라.”
자죽은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하고는 영죽 안으로 돌아갔다.
심협은 유천자옥 영죽을 건곤대에 넣고는 돌아서서 수많은 천재지보를 바라봤다.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그는 바로 손을 휘둘러 하나도 남김없이 보물을 챙기고도 혹시나 하고 다시 확인했다. 그렇게 대전 구석까지 살펴서 빠뜨린 것이 없음을 확인한 뒤에야 그는 대전을 나왔다.
그가 향한 곳은 싸움 소리가 들리는 곳이었다.
한참을 날아가자 광장이 나타났다. 광장 앞의 거대한 금색 대전에서는 격렬한 법력 충돌음이 끊임없이 울렸다.
인형의 성에서는 신식을 펼칠 수 없었기에 심협은 대전 밖 어느 은폐된 곳에 숨어서 안을 조용히 살폈다.
대전에는 여덟 지살시왕과 소부자의 천기검, 검은 나무새가 허공을 오가며 맞붙었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지살시왕은 양손을 흔들며 수많은 시기를 뿜어냈고, 천기검과 검은 나무새는 밀리는 기색 없이 흑백의 검기와 검은 빛을 뿜어내 맞섰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충돌음이 교차하면서 대전 내부는 크게 흔들렸고, 노란 빛과 검은 빛의 충돌이 저 멀리까지 퍼져 나갔다.
소부자와 귀언은 대전 중앙에 서 있었다. 소부자가 입은 금갑선의(金甲仙衣)는 한눈에 봐도 선가의 지보답게 매우 견고해 보였다. 반면 귀언의 머리 위에서는 검은색 양산이 펼쳐진 채 빙글빙글 돌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수많은 검은 빛이 아래로 내려와 귀언은 주위로 검은 보호막을 형성했다.
두 사람은 제자리에 선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퍽 매우 이상한 광경이었다.
‘저 둘은 뭘 하는 거지?’
심협은 의아해하며 두 걸음을 다가가 대전 안을 자세히 들여본 후에야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소부자와 귀언 앞에는 크기가 4장에 이르는 암금색 비석이 서 있었는데, 표면이 윤택하여 작은 흠집조차 없었다. 비석 겉면에는 복잡하기 짝이 없는 언문이 가득했고, 중앙에는 고전(古篆)으로 두 글자가 쓰여 있었다. 심협도 아는 그 글자는 ‘인형’이었다.
소부자는 입에서 뿜어낸 하얀 빛으로 인형 비석 끝을 뒤덮어 빠르게 비석의 언문을 연화했다. 하얀 빛은 언문을 타고 천천히 비석으로 스며들었다.
귀언은 검은 기운을 내뿜어 인형 비석의 아래서부터 연화했다. 이 검은 빛은 빠르게 위로 이동했다.
소부자가 먼저 들어왔기 때문인지 비석에는 하얀 빛으로 연화된 부분이 더 많았다.
‘저 둘은 비석을 연화하려는 모양이군. 그렇다면 저 비석이 이 성의 금제를 제어하는 중요한 장치인가?’
심협의 추측은 정확했다. 이 비석이 바로 인형의 성의 금제를 제어하는 핵심 장치였다. 귀언이 진즉 연화했지만, 성이 대량의 영동을 흡수하면서 진화된 언갑으로 탈바꿈했고, 이에 따라 인형의 성안 금제도 한층 더 진화했기 때문에 다시 제련해야만 했다. 소부자는 이 점을 노리고 인형의 성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두 사람이 제련하면서 생겨난 흑백의 빛은 아직 충돌하지 않았지만, 충돌하는 순간이 두 사람의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될 터였다.
두 사람은 귀살시왕과 천기검, 검은 나무새를 이용해 서로를 공격하는 동시에 전력으로 상대를 교란함으로써 상대방의 제련을 끊으려 했다.
그러나 둘 모두 강력한 법보로 몸을 보호하고 있었기에 쉽지 않았다.
귀언은 제련 속도에서 밀리자 법결을 바꾸더니 양손에서 매혹적인 보라색 빛을 뿜어냈다.
그 순간, 여덟 지살시왕의 시기는 전부 사라졌다. 대신 일제히 보라색 빛이 떠오르면서 다시 한번 천마반사무를 추기 시작했다.
대량의 자무가 떠올라 소부자를 향해 다가갔고, 강력한 매혹의 힘이 금갑선의를 뚫고 몸속으로 침투해갔다. 그러자 소부자의 금빛이 일순 흐트러졌고, 인형 비석을 제련하는 속도도 현저히 느려졌다.
천마반사무가 그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지만, 누가 뭐래도 소부자는 천기성 성주였고, 경지도 귀언보다 높았다. 그가 낮게 일갈하자 미간에서 빛이 번득였고, 손가락만 한 복잡한 표식이 떠올랐다.
이 표식이 어떤 신통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량의 빛을 뿜어냈고, 소부자의 금빛은 금세 평온을 되찾았다.
이어서 그는 바로 옆에 있던 천기검과 검은 나무새를 향해 결인했다. 그러자 강렬한 빛과 함께 수많은 검기와 검은 빛이 여덟 지살시왕의 몸을 뒤덮었다.
여덟 지살시왕은 여전히 천마반사무를 시전했지만, 아직 반사 법진을 이루지 못한 터라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폭발하여 산산조각이 났다.
하지만 진즉 불사불멸의 몸이 된 이들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원상태로 복구되었고, 주위의 보라색 안개도 흩어지지 않았다.
“천마반사무를 버티다니……. 소부자, 역시 대단하구나! 허나 네 공격은 그들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러니 얌전히 반사무에 먹혀버려라. 하하!”
지살시왕에게 법력을 더욱 주입하자 보라색 안개는 한층 짙어져 소부자의 몸을 파묻었다.
그는 천기성 출신이었기에 천기성 언갑의 장단점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언젠가는 천기성과 싸울 것을 알았기에 이에 대비해 천성이 음맥(陰脈)인 아홉 명의 여자를 찾아내 고생 끝에 지살시왕으로 키우고 천마반사무를 연마하였다. 한데 오늘 직접 보니 그 효과가 탁월했다. 다만 본래 아홉 명이었던 지살시왕 중 한 명이 심협에게 당하면서 반사무의 위력이 상당히 줄어든 것이 아쉬웠다. 그렇지 않았다면 진즉 소부자를 처리했을 것이다.
한편, 소부자는 금빛을 뿜어내며 이마의 각인을 발동했지만, 어떻게 해도 반사무를 완전히 차단할 수는 없었다.
그때, 대전 너머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심협이 쏜살같이 여덟 지살시왕에게 돌진했고, 동시에 그의 팔에서 풍뢰영문이 발동됐다.
쿠르릉!
천둥소리가 들려오더니 매우 선명한 금색 번개가 뿜어져 나와 거대한 금색 번개 그물을 이루어 여덟 지살시왕을 뒤덮었다. 이 번개 폭풍우에는 강력한 뇌겁의 기운이 담겨 있었다.
파지직!
번개의 충격에 보라색 안개는 검은 연기로 변하여 전부 사라졌다. 이어서 금색 번개는 이내 지살시왕들을 공격했다.
여덟 시왕은 금색 번개에 저항조차 하지 못했고, 몸이 전부 터져나가면서 무수한 조각으로 변했다. 동시에 천마반사무의 진법도 사라졌다.
풍뢰영문은 뇌겁의 힘을 흡수하면서 위력이 크게 강해졌다. 더욱이 뇌겁의 기운은 연시, 귀물 같은 음속성 존재에게는 살상력이 곱절은 강했다.
시체 조각들은 꿈틀거리면서 다시 합쳐져 회복됐지만, 뇌겁의 파괴력이 여전히 흐르고 있었기에 합쳐지자마자 다시 부서졌다.
심협이 소요경을 꺼내자 붉은 빛이 뿜어져 나와 사우흔의 시체 조각을 거울 속 공간으로 흡수했다.
* * *
거울 공간 안. 눈을 감고 정양 중이던 부동래는 영감이 민감해진 상태였기에 시신 조각이 나타나자 바로 감지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체 조각은 꿈틀거리며 다시 형체를 갖췄다. 그 무렵, 조각 안에 남아 있던 뇌겁의 힘은 거의 다 사라져서 금방 사우흔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내 청사료아(靑獅獠牙)를 받아라!”
법력이 절반 정도 회복된 부동래가 입을 쩍 벌리자 금빛 송곳니가 쏜살같이 날아가 시체의 몸을 관통했다.
퍽!
사우흔의 몸에는 커다란 구멍이 생겨났다.
청사료아는 금빛 선을 그리며 날아다녔고, 차갑고 날카로운 공격은 시체를 갈기갈기 찢었다.
이빨에는 뇌겁의 기운이 없었기에 시체 조각은 바로 다시 하나로 합쳐졌지만, 기운은 절반이나 약해졌고, 몸의 노란 빛도 상당히 어두워진 상태였다.
사우흔도 기운의 변화를 감지했는지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부동래는 이 틈에 다시 결인했고, 금색 송곳니가 번개같이 날아가 다시 한번 사우흔의 몸을 관통하고 갈기갈기 찢었다.
사우흔은 금방 다시 회복되었지만, 기운은 또 약해졌다.
“봉인류 법보인가?”
그녀는 연시의 몸이 되었지만, 정신은 완전히 상실하지 않은 듯 금색 이빨을 보며 소리쳤다.
“그래도 보는 눈이 있구나! 허나 여긴 네가 함부로 날뛸 곳이 아니다. 얌전히 있어라.”
부동래는 담담하게 웃으며 청사료아를 결인했다.
금색 이빨에서 금빛이 환하게 비추자 주위에 똑같이 생긴 여덟 개의 이빨 허상이 나타났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아홉 개의 금빛 무지개가 되어 사우흔을 향해 쏟아졌다.
사우흔은 안색이 크게 변해 서둘러 피하려 했지만, 주위에서 갑자기 붉은 정광이 반짝거리며 그녀의 몸을 비췄다. 이에 사우흔은 그대로 굳어서 아홉 개의 금빛 무지개에 몸이 다시 한번 터져 나갔다.
이번에도 몸은 다시 뭉쳐졌지만, 기운은 또다시 크게 줄어들어 출규기 수사보다도 약해졌다.
부동래는 벽혈간척부를 꺼내 사우흔을 향해 휙 던졌다. 검은 빛이 뿜어져 나와 거대한 검은색 산이 되어 사우흔을 짓눌렀다. 그 속에서 귀왕의 허상이 은연중에 보였다.
사우흔은 짓눌려 꿈쩍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소요경에 들어가 부동래에게 제압당하기까지는 겨우 몇 호흡밖에 소요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