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769화 (769/1,214)
  • 769화. 자죽

    언무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으나, 이내 대나무 캐는 일에 가담했다. 이윽고 검은 대나무가 그들의 발아래에 무더기로 쌓였고, 대나무 숲에는 이제 자옥 같은 영죽 하나만 남게 됐다.

    “심 형, 이 영죽은 법기와 언갑 제조에 쓸모가 크니 심 형이 한 번만 양보해주면 앞으로 발견하는 모든 보물을 심 형께 넘기겠소. 어떻소?”

    언무사는 이 영천 영죽을 정말로 갖고 싶었는지 그렇게 제안했다.

    “언 형, 우리 사이에 그게 무슨 소리요? 언 형이 전부 가지시오. 나는 딱 한 그루만 가져가겠소.”

    심협은 손을 크게 휘두르며 대인배처럼 말했으나, 언무사는 그 말을 알아들었다. 심협이 원하는 것은 가장 좋은 유천자옥(幽泉紫玉) 영죽인 것이다. 그러나 먼저 발견한 것이 그이니 언무사로서는 강요할 처지가 아니었기에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끝내 삼켜야만 했다.

    심협은 그의 반응을 무시한 채 자연스레 유천자옥 영죽으로 손을 뻗었다. 귀장도 그를 도와 서둘러 영죽을 캐려 했다.

    한데 그때, 귀장이 눈을 번쩍 뜨더니 짧게 외쳤다.

    “밑에 뭔가 있습니다!”

    그의 외침에 심협과 언무사 모두 화들짝 놀라 서둘러 신식을 펼쳐 땅 밑을 살폈다. 그러나 한참 뒤, 두 사람 모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귀장을 돌아봤다.

    귀장은 말없이 바로 형흉신광 신통을 시전했다. 그의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땅으로 3척 정도 파고들어 영죽 뿌리 부근에 닿았다.

    다음 순간, 다시 올라온 신광에서 초록색 덩어리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발버둥 치고 있었다.

    심협과 언무사는 그제야 이 빛 덩어리에서 흘러나오는 신혼의 기운을 느끼고는 크게 놀랐다. 특히 언무사는 귀장 조비극의 신통에도 놀랐다.

    두 사람은 곧 정신을 차리고는 초록 빛을 자세히 살폈다.

    빛 덩어리에는 뜻밖에도 가녀린 여자의 모습이 비쳐 보였는데, 매우 작은 것이 마치 꽃의 정매 같았다.

    “놔! 놓으라고!”

    빛 안에서 여자의 신혼이 소리 지르며 발버둥 쳤다.

    하지만 형흉신광의 압박에 그녀의 반항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속박에서도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다.

    “주인님, 이 강력한 신혼을 흡수하면 얼마 걸리지 않아 경지를 더 정진할 수 있으니 흑연미굴에서도 주인님께 더 많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겁니다.”

    조비극은 초록색 신혼을 보며 군침을 삼켰다.

    심협은 신혼에게 궁금한 것이 많아 거절하려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찾은 것이니 네 전리품이지. 알아서 하거라.”

    그 말에 조비극은 신이 나서 바로 여자 신혼을 입에 넣으려 했다.

    신혼은 기겁하더니 갑자기 초록 빛을 강하게 뿜어냈다. 그러자 순식간에 떠오른 초록빛 태양과 같은 강한 빛과 함께 강렬한 신혼 파동이 뿜어져 나왔다.

    초록 빛의 폭발에 조비극의 형흉신통 신광도 잠시 흔들렸다.

    “흥! 어린애 장난이로군.”

    조비극의 일갈과 함께 기세가 줄어든 형흉신광이 갑자기 폭발해 아무런 저항 없이 초록 빛의 태양을 제압했다.

    신혼은 그제야 상대의 신통이 자신과 상극임을 알아채고는 서둘러 용서를 빌었다.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흑흑…… 살려만 주시면…… 뭐든 도와드릴게요. 정말 큰 도움이 될 거예요. 내 도움 없이는 흑연미굴에서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을 거예요.”

    신혼이 미친 듯이 소리치자 조비극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심협을 돌아봤다.

    심협이 고개를 끄덕이자 귀장은 그에게 신혼을 가져갔다.

    “넌 흑연미굴을 잘 아는 모양이지?”

    심협이 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 물론이죠!”

    신혼은 약간 당황한 듯이 말했다.

    “흑연미굴에서 네 도움이 없으면 우리가 살아남을 수 없다?”

    “그게…… 조금 과장이긴 한데…… 어쨌든 무작정 들어가면 정말 죽을 걸요?”

    신혼이 황급히 덧붙였다.

    “지금부터 내가 몇 가지 질문을 할 생각이다. 사실대로 답한다면 살 기회가 열리겠지만, 숨기거나 속이려 든다면 바로 한 끼 식사가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절대로, 절대로 속이지 않겠습니다. 절대로요!”

    신혼은 심협의 덤덤한 목소리에 오히려 소름이 쫙 끼쳐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넌 누구지? 왜 여기에 있는 것인가?”

    “저는 자죽(紫竹)이라 합니다. 영굴 안에서 살던 화형(化形)된 요물인데 본체를 빼앗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신혼만 도망쳐 나와 유천자옥 영죽 안으로 숨었습니다.”

    “그렇다면 네 본체도 영죽이란 말인가? 그래서 영죽 안에서 기운이 완벽하게 섞인 덕에 우리가 찾지 못했던 거고?”

    옆에 있던 언무사가 끼어들었다.

    “맞습니다. 하지만 이…… 선배님의 신통이 워낙 뛰어나 결국 벗어나지 못했죠.”

    자죽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조비극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화형한 후 여기로 온 것이냐, 아니면 본래 여기서 태어나 수련해서 화형이 된 것이냐?”

    “저는 원래 여기서 태어나 자랐고, 훗날 수련을 통해 화형한 다음 줄곧 흑연미굴에서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너처럼 미굴에서 스스로 화형이 된 요물들은 얼마나 있지?”

    이 질문에 자죽은 잠시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 혼자…….”

    “잘 생각하고 대답하는 게 좋을 것이다.”

    심협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는 자죽을 바라봤다.

    “그게…… 사실 얼마나 많은 요물이 있는지 저도 잘 모릅니다. 영굴 안의 천지영기는 워낙 순수한 데다 양도 많아서 수백 년마다 정매와 요물이 화형되는데 어떤 자들은 일찍이 죽어 없어졌고 어떤 것들은 몰래 숨어들지요. 그러니 얼마나 있는지 저도 정말 모릅니다.”

    자죽은 가슴이 철렁해 재빨리 설명했다.

    “영굴?”

    “선배님은 모르십니까? 이곳은 흑연미굴 끝이라 할 수 있고, 더 가다 보면 가장 깊은 곳인 음양쌍굴(陰陽雙窟)이 있습니다.”

    “음양쌍굴이라…… 하나는 네가 말한 영굴일 터. 그렇다면 다른 하나는 뭐지?”

    “다른 것은 음굴(陰窟)이라 합니다. 영굴에는 천지영기가 자욱하여 수많은 천재지보가 탄생하는 반면, 음굴에는 지음(至陰)의 기운이 가득합니다.”

    “같은 땅에 있는 굴인데도 그리 다르다니, 흑연미굴 가장 깊은 곳에는 도대체 뭐가 있기에 그렇게 된 거지?”

    언무사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흑연미굴 깊은 곳에는 아주 거대한 공간의 균열이 있습니다. 삼계가 창조될 때 만들어진 혼돈의 균열로, 거기에서 항상 대량의 천지영기가 뿜어져 나오지요. 삼계의 규칙의 영향을 받아서 혼재된 천지영기와 지음의 기운이 저절로 나뉘었고, 훗날 지금의 음양쌍굴이 되었다고 합니다.”

    자죽은 이제 긴장이 좀 풀렸는지 막힘없이 설명했다.

    “그렇군. 세계의 조화는 역시 신비로워.”

    언무사가 감탄하며 말했다.

    “영굴 안의 화형 요물 중 강력한 자들은 얼마나 있지?”

    심협의 질문에 자죽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겨우 화제를 돌렸는데 또 그걸 물어보냐? 악마 같은 놈!’

    하지만 내색하지는 않고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영굴에는 본래 세 명의 진선 후기 요물이 있어 줄곧 영굴을 지키면서 음굴의 음수들과 맞서왔습니다. 한데 나중에 꽃 요물이 영굴을 떠나면서 지금은 두 명만 남았죠.”

    자죽이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꽃 요물? 그가 어떤 신통을 사용하지?”

    “음…… 제가 기억하기로는 정신 공격에 능하고 식물을 소환하여 공격할 수 있었던 걸로 압니다.”

    그녀의 말을 듣자 심협은 확신이 들었다. 자죽이 말한 꽃 요물은 이전에 그에게서 서원봉을 빼앗으려 했던 그 검은 옷의 사내가 분명했다.

    “좋아, 그럼 음수들은 어떻게 된 거지?”

    심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물었다.

    “꽃 요괴 등이 영굴에서 사는 것처럼 음수들은 음굴의 산물이죠. 그것들은 피를 좋아하고 흉악한데, 모두가 태을 경지에 근접한 흡혈귀(吸血鬼) 선조의 명령을 따르고, 평소에도 영굴을 침략하여 살육을 일삼았습니다.”

    그 말을 하는 자죽의 얼굴에는 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태을에 근접했다?”

    심협은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자는 매우 신중하여 쉽게 음굴을 벗어나지 않고 항상 수하들에게 지시를 내려 음수 떼만 출동시킵니다. 그러니 당신들도 음굴에만 가지 않으면 그자를 만날 가능성은 없을 거예요.”

    “그럼 네 신혼만 도망쳐 나온 것도 그 흡혈귀 선조 때문인가?”

    “그건 아닙니다. 그자가 강하긴 해도 함부로 영굴로 쳐들어오지는 못해요. 그와 그의 음수들은 영기가 왕성한 곳을 혐오하거든요. 그들이 우리를 공격하는 것은 그저 살육의 쾌감을 충족시키고 싶어서죠.”

    자죽이 고개를 저으며 설명했다.

    “그자가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그랬단 말이냐?”

    “사실 영굴은 지금 거대한 언갑에 점령당했어요. 저도 처음에는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결국 한 수 차이로 본체를 빼앗기고 어쩔 수 없이 신혼만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언갑은 어떻게 생겼지?”

    언무사가 듣고 있다가 바로 물어봤다.

    “음, 엄청나게 컸고 모습은…….”

    자죽이 기억을 되짚어 언갑에 대해 묘사하자, 모두 듣고 난 심협과 언무사는 말없이 서로를 마주봤다. 그리고 서로의 눈에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거대 언갑은 다른 것이 아니라 천기성이 고생하며 찾고 있던 인형의 성이었다.

    “우리를 그 언갑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줘.”

    심협의 말에 자죽은 머뭇거렸다.

    “그럼 우리가 네 본체를 찾는 걸 도와주겠다.”

    언무사가 그렇게 말하자 자죽은 크게 기뻐하며 막 대답을 하려 했다. 한데 그때, 심협이 또다시 차분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기억해라. 작은 수작이라도 부린다면…… 어찌 될지는 너도 잘 알 것이다.”

    자죽은 기겁해 몸을 가늘게 떨며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네 본체가 영죽이라 했으니 우선 여기 숨어 있도록.”

    심협은 완전히 파낸 영죽을 꺼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심협의 명에 따라 조비극이 속박을 풀어주자 자죽의 신혼은 바로 영죽 안으로 들어갔다.

    신혼이 들어가자 유천자옥 영죽에서는 약간의 변화가 생겼는데, 수염이 저절로 녹아서 정화로 변하더니 대나무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길이는 5척 정도로 줄어들었고, 광택이 번득여 마치 여러 해 사용한 지팡이 같았다.

    심협은 소매에서 금제 부적을 꺼내 원래는 뿌리였지만 지금은 지팡이의 머리가 된 곳을 휘감았다. 영광이 반짝거리자 부적은 대나무 지팡이 안으로 흘러 들어가 사라졌다.

    그는 대나무 지팡이를 귀장에게 건네 들고 있게 했다. 물론 이는 일종의 협박이었다.

    지팡이에 모습을 숨긴 자죽은 우울해졌다. 기회를 봐 도망치려던 생각은 완전히 접고 얌전히 그들을 영굴로 안내하기로 했다.

    이때, 그녀처럼 우울해진 사람이 또 있었으니, 바로 언무사였다.

    그는 유천자옥 영죽이 완전히 심협의 수중으로 넘어가 달라고 떼를 쓸 수도 없게 되자 그저 묵묵히 평범한 유천죽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것들 역시 꽤나 쓸모 있는 연기 재료였다.

    일행은 자죽의 안내를 받아 금방 흑연미굴 깊은 곳에 도착했는데, 거기에는 커다란 동굴이 있었다.

    동굴 입구는 족히 백여 장에 이르렀고, 그 안에서는 구유음풍이 마치 귀신의 울음소리처럼 붙어닥쳐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사람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 음풍에는 또한 짙은 천지영기가 섞여 있어서 실로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동굴 입구 양쪽으로는 산의 벽이 우뚝 솟아 있었는데, 사방으로 퍼지는 균열과 불규칙한 구멍들이 가득했다. 한눈에 봐도 수많은 세월 동안 불어온 음풍에 풍식된 흔적임을 알 수 있었다.

    혼란스럽고 시끄러운 바람 소리에 덮여 다른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기에 신식을 통해 전음으로 소통할 수밖에 없었다.

    심협은 들고 있는 흑옥반에서 반짝이는 빛을 자세히 바라보며 전음으로 귀장과 언무사에게 말했다.

    “그래도 자죽이 우리를 속이지는 않은 모양이오. 그 검은 도포의 사내와 법력 표식이 모두 이 동굴 부근에 있는데 그리 멀지 않은 느낌이오.”

    “그렇다면 어서 들어가지 뭘 기다리는 것이오?”

    언무사가는 고생고생하며 수년을 찾던 인형의 성이 저 안에 있다는 생각에 더는 참기 힘들었는지 당장이라도 달려 들어가려 했다.

    “언 형, 서두르지 마시오. 귀언과 인형의 성이 얼마나 강력한지는 나보다 언 형이 더 잘 알 것 아니오? 우리 두 사람으로는 역부족이오.”

    심협이 황급히 말리자 언무사도 곧 냉정을 되찾았다.

    심협은 다시 흑옥반을 가리키며 전음으로 언무사에게 전했다.

    “보시오. 소 성주 등이 이쪽으로 오고 있소. 그들과 함께 움직이는 편이 나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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