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8화. 기회
심협은 하늘 가득한 귀무를 보고는 망설임 없이 노란 빛에 둘러싸여 땅속으로 도망쳤다.
심협의 몸이 사라지는 찰나, 하늘에 가득했던 귀무가 땅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허탕을 치자 곧장 방향을 바꿔 언무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음살귀무는 땅에 붙어서도 속도가 전혀 줄어들지 않았고, 마치 밀물처럼 몰려왔다.
한편, 언무사는 심협이 혼자 땅속으로 사라지자 속으로 욕을 퍼붓고는 곧장 둔술로 날아서 도망치려 했다.
한데 그의 몸이 하늘에 떠오르자마자 수라 꼭두각시가 귀신처럼 그의 머리 위에 불쑥 나타나더니 커다란 주먹을 휘둘렀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언무사는 피할 틈도, 언갑을 발동할 겨를도 없었기에 팔에 차고 있던 갑옷의 위능을 간신히 발동하여 주먹을 막았다.
펑!
굉음과 함께 팔에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고, 그의 몸은 운석처럼 떨어졌다.
일찌감치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음살귀무에 갑자기 10여 개의 귀왕 머리가 솟아나더니 언무사의 육체와 신혼을 갈기갈기 찢으려는 듯 입을 크게 벌렸다.
언무사는 눈살을 찌푸리고는 금색과 붉은색 두 개의 구슬을 꺼냈다.
한데 그가 언갑을 발동하려는 순간, 귀무에서 갑자기 붉은 빛이 번쩍이더니 불꽃이 화산처럼 폭발하며 솟아올라 거대한 연꽃이 피어났다.
불꽃으로 이루어진 연꽃이 피어난 곳에 있던 음살귀무는 순식간에 녹아들었고, 10여 개의 귀왕 머리도 버티지 못했다.
언무사의 눈에는 붉은 연꽃의 중심에서 누군가 나타나 소리를 지르며 자신에게 손짓을 하는 것이 보였다.
“어서 내려오지 않고 뭘 멍하니 있는 거요?”
언무사는 상대가 심협임을 깨닫자마자 바로 아래로 내려갔다.
그렇게 땅에 내려선 순간, 불꽃의 연꽃이 사방에서 다시 오그라들어 커다란 꽃봉오리가 되어 두 사람을 뒤덮었다.
수라 꼭두각시는 이를 보고는 곧장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허공에 있던 항마저가 빠르게 회전하면서 홍련업화로 만들어진 꽃봉오리로 떨어졌다.
콰쾅!
굉음과 함께 꽃봉오리는 사방으로 흩어졌고, 땅에도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그러나 두 사람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크아아아!”
수라 꼭두각시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사방으로 손을 휘둘러댔다. 항마저는 반경 백여 장의 땅을 완전히 헤집어 엉망으로 만든 후에야 멈췄다.
꼭두각시는 가까스로 분노를 가라앉힌 뒤, 검은색 나반을 꺼내더니 결인했다.나반이 번득이더니 검은 빛과 함께 혈무가 피어올라 핏빛 해골의 모습으로 변했다.
“대왕님, 제가 실책을 범하여 물건을 빼앗겼습니다.”
* * *
흑연미굴 깊은 곳의 어두운 공간. 수라 꼭두각시의 보고를 들은 핏빛 해골의 눈에서 불꽃이 번쩍였고, 온몸에서 강력한 기운이 폭발했다.
주위의 모든 음수와 귀물들은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가라! 모든 음수를 동원하여 음굴(陰窟)을 지켜라! 한 놈도 들여보내서는 안 된다!”
핏빛 해골이 소리쳤다.
“대왕님, 상황이 너무 좋지 않습니다. 바깥의 파진마기(破陣魔器)를 벌써 몇 개나 빼앗겼습니다. 만약 저들이 마기를 가지고 음굴로 들어온다면 그곳의 성물(聖物)도 지키지 못할 겁니다.”
칠흑 같은 갑옷을 입은 진선기 음수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대왕님. 천기성 놈들도 만만치 않아서 저들이 여기까지 오면 저희로서는 지키기 어렵습니다.”
다른 수하들도 동의를 표했다.
핏빛 해골은 보좌에서 벌떡 일어났고 당황한 것처럼 눈의 귀화를 몇 번 깜빡이며 이리저리 움직인 뒤에야 간신히 담담함을 되찾았다.
“당황할 것 없다. 다섯 개의 파진 마기를 모으기란 쉽지 않다. 내가 알기로는 그중 한 가지는 이미 백여 년 전에 사라졌으니 당장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놈들이 마기를 찾는다 서로 해도 힘을 합칠 관계는 아니지. 오히려 마기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우고 죽일 수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다섯 개의 파진 마기를 모아서 천마대진(天魔大陣)을 파훼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의 말에 수하들도 안도했고, 핏빛 해골의 분부대로 바깥에 흩어진 음수들을 불러들이러 갔다.
* * *
탁 트인 넓은 공간. 허공에서 갑자기 노란 빛이 반짝이더니 소용돌이처럼 천천히 회전하면서 점점 커졌다.
누군가 노란 빛으로 만들어진 소용돌이에서 비틀거리며 땅으로 내려왔다. 바로 검은 도포의 남자였다.
그는 제자리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다가 시선을 멀리 돌려 좀 전까지 있었던 궁전 쪽을 살폈다. 이미 그곳으로부터 상당히 멀어진 상태였다.
검은 도포의 사내는 환하게 웃으며 수중의 율척을 바라봤다.
“과연 축지척(縮地尺)의 위력은 놀랍군.”
말은 마친 그는 입을 벌려 율척을 뱃속으로 삼켰다.
그 순간, 그의 눈빛이 갑자기 반짝이더니 멀지 않은 곳의 허공을 바라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라, 목효(木梟). 내 눈을 속일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면 자신을 터무니없이 높게 평가한 것이로군. 아니면 날 우습게 본 것인가?”
“하하하! 대단해, 역시 대단해!”
쉰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더니 초록빛 그림자가 길가에 떠올랐다.
그는 땅에서 3척 정도 떠 있었다. 몸에는 커다란 녹색 도포를 감싸고 있었지만, 얼굴은 매우 야위어서 고령의 노인 같았다.
팔짱을 낀 채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은 매우 선량해 보였지만, 온몸에서 발산하는 기운과 영압은 검은 도포의 사내에게 전혀 뒤처지지 않았다.
“그때 그렇게 떠나더니 다시 돌아올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군.”
“흥! 난 이제 마족의 피와 완전히 융합했다. 돌아오지 못할 이유가 있나?”
녹색 도포의 사내, 목효가 웃으며 말하자 검은 도포의 사내는 차갑게 대꾸하더니 축지척을 꺼내 목효를 향해 흔들었다.
축지척에서 노란 빛이 순식간에 번득이더니 강렬한 마기의 파동이 일어났다.
“봤느냐! 내 순수한 마족의 피가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축지척을 발동시켰다.”
그러자 여유롭게 웃고 있던 목효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지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의 말에는 경악과 질투가 가득했다.
“그때 네놈은 겁에 질려서 나와 함께 가지 않았지. 어떠냐? 다시 한번 기회를 줄 테니 날 따르겠느냐?”
검은 도포의 사내가 웃으며 말했다.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돌아온 거지?”
“내가 할 일은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나? 안심해라. 내가 그 일을 성사시키도록 돕는다면 너도 마족의 피와 융합되게 해줌은 물론 이곳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해주마. 어떻게 하겠느냐?”
검은 도포의 사내가 물었다.
목효는 혼란에 빠진 듯 머뭇거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잠시 후, 그는 찌푸려진 눈살을 폈고, 결단을 내린 듯했다.
“정말로 내가 마족의 피와 융합하도록 도울 수 있는 건가?”
목효는 신중한 말투로 물었다.
“물론이다. 내가 해냈으니 너도 할 수 있겠지.”
검은 도포의 사내는 자신 있게 말하는 동시에 손에 마기를 모았다. 짙은 마기는 거의 실체에 가까웠다.
사내의 손에 맺힌 마기를 본 목효는 가볍게 탄식하고는 결단을 내렸다.
“좋다. 영원히 이곳에 갇혀 있느니 차라리 한판 싸워보는 게 낫겠지.”
“좋소, 목효 도우의 도움이 있다면 성공할 가능성이 더 커질 것이오.”
검은 도포의 사내가 말투까지 바꾸더니 목효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너무 기뻐하지 마시오. 만약 나를 속인 거라면 내 목숨을 걸고 당신을 죽일 것이오.”
목효는 눈을 가늘게 뜨며 경고했다.
“하하! 좋은 새는 나무를 가린다 하지 않소? 목 도우는 안심하시오. 그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천군만마를 얻은 셈인데 내 어찌 배신하겠소? 후한 보상을 약속할 테니 걱정 마시오.”
검은 도포의 사내가 크게 웃고는 말했다.
“말과 행동이 같기를 바랄 뿐이오.”
“자, 동맹도 맺었으니 이제 말해주시오. 영굴(靈窟) 안은 지금 어떤 상황이오?”
“영굴? 그곳은 지금 성처럼 거대한 언갑이 차지해서 형체를 갖춘 요물이 다가가기만 하면 곧장 공격을 퍼붓고 있소. 손발이 느리거나 자신감에 눈이 먼 놈들은 거의 다 붙잡혔고, 소수만이 운 좋게 도망쳤소”
“그럼…… 자죽(紫竹)은?”
검은 도포의 사내가 눈을 반짝이며 다시 물었다.
“흥! 운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지. 본체는 이미 거대 언갑의 손에 죽었고 신혼만 겨우 살아서 빠져나갔소.”
목효가 차갑게 웃으며 말하자 검은 도포의 사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길 안내를 청했다.
* * *
어느 허물어진 담벼락의 폐허. 땅에서 노란 빛이 반짝이더니 두 사람이 땅을 뚫고 불쑥 튀어나왔다. 땅속으로 여기까지 이동해 온 심협과 언무사였다.
“심 형, 아까는 정말 죽는 줄 알았소.”
언무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쨌든 무사히 도망치지 않았소. 하하하!”
심협이 멋쩍은 듯 웃어넘기고는 흑옥반을 꺼내 손으로 가볍게 문질렀다. 그러자 옥반에서 하얀 빛이 떠올랐다. 이 빛은 소부자의 위치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뒤이어 조금 더 작고 어두운 빛도 덩달아 떠올랐다.
불평하던 언무사도 흑옥반에 나타난 빛에 흥미가 생겨 바짝 다가왔다.
“이건 뭐요? 왜 하나 더 생긴 것이오?”
“아까 율척을 빼앗겼을 때 그 위에 표식을 남겨두었소. 그자가 율척을 가지고 있다면 수시로 위치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오.”
“그렇다면 일부러 빼앗긴 것이란 말이오? 심 형의 심계는 실로 놀랍구려!”
언무사가 감탄한 듯 외쳤다.
심협은 코를 긁적이고 언무사의 눈길을 피했다. 좋게 해석해주니 고맙지만, 사실 그냥 뺏긴 것 아니던가.
“움직였소!”
언무사의 말에 심협은 정신이 돌아와 흑옥반의 빛이 빠르게 이동하는 것을 보았다. 자신들이 가려던 곳과 방향이 거의 일치했다.
“우리도 어서 출발합시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앞에 검은 대나무 숲이 나타났다. 사방에는 영기가 자욱했고, 옅은 안개가 가득해 한눈에 봐도 심상치 않아 보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검은 숲에서 자란 대나무들은 전부 팔뚝 굵기에 불과했고, 매우 곧게 뻗어 있었다. 다만 기이하게도 줄기만 있을 뿐 가지와 잎은 없었다.
“이건…… 유천죽(幽泉竹) 같소.”
“유천죽?”
“음속성의 매우 질긴 영죽(靈竹)으로, 수많은 법기와 언갑의 필수적인 영재요. 다만 그렇게 드문 것은 아니라, 음기가 강하지만 살기는 없는 곳에서 많이 자라고 있소.”
언무사의 설명을 듣던 심협은 뭔가를 발견했는지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그는 서둘러 대나무 숲으로 들어가 곧장 한가운데에 멈춰 섰다.
앞에는 길이 1장 정도에 굵기는 엄지손가락만 한 검은 대나무가 우뚝 솟아 있었다.
이 대나무는 주위의 조금 더 굵은 대나무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보랏빛에 옥석 같은 광택이 흘렀으며, 가느다란 금색 문로가 희미하게 보였다. 더욱이 이 대나무에서 흘러나오는 영력 파동은 주위의 다른 대나무보다 열 배나 짙었다.
뒤따라 온 언무사도 이 대나무를 보고는 눈이 뜨였다.
“보랏빛에 금문이 흐르다니, 이건 영죽 중에서도 최상품인 진정한 영천의 영죽이오! 심 형, 이걸 찾아내다니, 운이 정말 좋았소.”
심협도 당연히 그 가치를 알아봤기에 두말없이 흙을 파헤치려고 했다.
“아니, 그러면 안 되오!”
언무사가 황급히 말렸다.
“왜 안 된다는 것이오?”
“이 영천죽림의 자옥(紫玉) 같은 영죽은 대나무 숲의 영기가 모이고 대지에 자양을 나눠주는 존재라 다른 영천죽에게 영력을 제공하고 있다고 볼 수 있소. 그러니 이것을 파헤치면 다른 영죽은 영기의 근원을 잃어 품질이 크게 떨어질 것이오.”
“그럼 어찌 해야 하오? 이 영죽은 못 가져가는 것이오?”
“물론 아니오. 자옥 영죽을 파내기 전에 먼저 다른 영죽을 파내서 그 영죽의 상태를 온전히 보존한 다음,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가장 좋은 것을 파내서 흩어진 영기를 전부 이 자옥 영죽 안에 모으면 되오. 그게 최선의 방법이오.”
“그렇군요. 알려주어 고맙소.”
심협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리춤의 건곤대에서 귀장을 불러 함께 숲을 돌아다니며 대나무를 파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