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767화 (767/1,214)
  • 767화. 계략에 빠지다

    얼마나 지났을까. 전방의 허공에 갑자기 음기가 짙어졌고, 천둥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심협이 어떤 상황인지 궁금해 하고 있는데 수백 장 앞에 궁전 양식의 건물이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이 천둥 같은 소리는 바로 그 궁전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말이 궁전이지 사실 폐허나 다름없었다. 앞과 뒤의 궁전 모두 완전히 폐허가 되어 부서진 담벼락만 남아 있었다. 중간의 원형 대전이 그나마 잘 보존되어 있었는데, 그마저도 천장은 이미 날아가서 마치 돌로 쌓은 철통(鐵桶)같았다.

    두 사람은 조용히 다가갔다. 궁전 밖에는 수십 마리의 음수가 대전을 향해 포효하고 있었다.

    엉망으로 부서진 담벼락에는 수많은 박쥐 음수 떼가 있었는데, 그중 한 마리가 심협과 언무사를 감지했는지 갑자기 고개를 돌려 그들을 바라봤다.

    하지만 두 사람은 진즉 기운을 숨겼기에 들키지 않았고, 무사히 궁전 반대쪽에 도착할 수 있었다.

    궁전의 반대쪽 벽은 이미 절반이나 무너져 있었기에 그 사이로 안의 광경이 보였는데, 이를 본 순간 심협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대전 안에서는 검은 도포를 입은 커다란 존재가 황금색 종 모양의 법기를 발동하고 있었다. 법기는 허공에서 빠르게 회전했다. 이 종은 금빛으로 반짝이며 출렁였고, 수천 개의 금색 부문이 궁전 안의 허공을 가득 메워서 금색 부문의 대진을 이루었다.

    심협은 멀리서 바라봤지만, 부문 대진에서 들려오는 수천의 중들이 읊조리는 듯한 소리를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 소리는 마치 불국(佛國)의 경문 같았다.

    금색 부문 대진 중앙에는 황금 갑옷을 걸치고 등에 보광을 두른 청년 장수가 서 있었다. 온몸에 금색과 붉은색의 불꽃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머리에는 날개가 달린 금색 투구를 쓰고 있었다. 이 투구에 박힌 적홍색 정석은 위풍당당하여 자태가 범상치 않았다.

    만약 심협이 이 존재를 본 적이 없었다면 어떤 선가(仙家)의 장수라고 오해했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수라(修羅) 꼭두각시라니, 왜 저런 게 여기에……?”

    옆의 언무사도 그것을 알아보고는 중얼거렸다.

    “평범한 수라 꼭두각시가 아니오. 경지가 벌써 진선 중기에 도달했소.”

    심협의 시선은 수라 꼭두각시의 이마와 얼굴의 문신 같은 문로에 집중되었다. 하지만 이전에 봤던 청흑색이 아니라 암홍색의 문로였다. 게다가 두 눈은 붉게 빛났지만, 흉악하고 사악한 기운은 드러나지 않았다. 몇 년 전에 만났을 때와는 천지 차이였다.

    “저 사람도 선한 자는 아닌 것 같소. 저자가 발동한 법기가 불경 같은 양식을 이루고 있다고는 해도 위압감만 강력할 뿐, 조금의 인자함이 느껴지지 않으니 말이오. 한데 경지는 수라 꼭두각시보다 위인 듯하군요.”

    심협은 언무사의 말을 듣고는 있었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는 그의 집중력이 온통 궁전의 한쪽 구석으로 향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는 사람 절반 크기의 검은색 비석이 우뚝 세워져 있었는데, 겉은 마치 거울처럼 매끈했고, 검은 빛이 흐르고 있었다.

    “언 형, 여기서 잠시 기다려줄 수 있소? 한 가지 살펴볼 게 있소.”

    “심 형, 저들은 쉽게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오. 게다가 주위를 저리 많은 음수가 지키고 있으니 위험한 일은 하지 않는 게 좋지 않겠소?”

    언무사는 심협의 눈빛에 담긴 탐욕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렸다.

    그러나 심협의 모든 생각은 저 비석의 신비함에 꽂혀 있었으니 언무사의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괜찮소. 모든 기운을 숨겨서 땅속으로 갈 테니 저들에게 들킬 일은 없을 게요. 언 도우도 여기서 조용히 숨어 있으면 문제없을 것이오. 혹시라도 발각되더라도 저들은 서로 대치 중이니 절대로 우리를 쫓아오지 못할 게요.”

    언무사는 심협의 설명에도 잠시 머뭇거렸지만, 앞으로의 여정에서 심협이 꼭 필요했기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기다리면 금방 다녀오겠소.”

    심협은 바로 둔지술을 시전하여 땅속으로 들어갔고, 언무사는 다시 궁전을 주시했다.

    현재 검은 도포의 사내와 수라 꼭두각시는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검은 도포를 입은 사람은 흑옥으로 깎아서 만든 듯한 칠흑 같은 항마저(降魔杵)를 들고 있었는데, 항마저 끝에는 신비한 부문이 새겨져 있어 휘두를 때마다 퍼져 나오는 격렬한 파문이 끊임없이 금색 부문으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검은 도포의 사내는 조급해하지 않고 여유 있게 금색 종을 제어하여 금색 부문 대진으로 수라 꼭두각시를 끊임없이 압박했다.

    한편, 심협은 땅속으로 들어가는 동시에 연연나금의를 이용해 자신의 기운을 덮었고, 빠르게 궁전의 한쪽으로 이동했다.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심협은 체내에서 마기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속으로 기뻐하며 빠르게 검은색 비석 아래로 다가갔고, 손을 내밀어 묻혀 있는 비석을 쥐었다. 그러자 마기가 빠르게 비석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역시나 이 비석도 앞서 접했던 비석처럼 빠르게 그의 치우 마기를 빨아들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석은 한계치까지 마기를 흡수했고, 이내 멈췄다.

    심협은 때가 왔음을 감지하고는 바로 양손으로 비석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콰르릉!

    둔탁한 소리와 함께 검은 비석이 내려앉는 동시에 주위의 흙들이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한창 싸우고 있던 검은 도포의 사내와 수라 꼭두각시는 심협의 움직임을 눈치채자 서로를 강하게 밀어내고는, 심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언무사는 눈을 홉뜨더니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뭐? 그냥 가서 살펴만 본다고? 이게 어딜 봐서 살펴보는 거냐? 그냥 시비를 거는 거지!’

    하지만 원망은 원망이고 이제 그도 지켜만 볼 수만은 없었다. 어쨌든 심협을 도와줘야만 했다.

    그를 둘러싸고 있던 음수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앞길을 막았다.

    땅속의 심협은 지상에서 일어난 혼란을 무시한 채 빠르게 비석에 떠오른 글자들을 훑어봤다. 그리고 이것이 위력이 상당한 마화(魔火) 공격을 시전할 수 있는 마왕채의 신통 염폭결(炎爆訣)임을 알게 됐다.

    그러나 열석보처럼 심협에게는 사용에 제한이 있었기에 그저 외우기만 할 뿐 딱히 마음에 두지는 않았다. 그가 더욱 신경 쓴 것은 저번 비석처럼 이번에도 서원봉 같은 보물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였다.

    그때, 머리 위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폐허 같은 궁전과 함께 주위의 땅이 허공에 나타난 거대한 손에 뿌리째 뽑혀 저 멀리 날아가 떨어졌다.

    땅에는 커다란 구멍이 생겼고, 심협 주위는 마치 뚜껑이 사라진 냄비처럼 그 아래가 훤히 드러났다.

    주위를 살펴본 심협은 이내 다시 시선을 거두어야만 했다. 그의 앞에 있는 검은 비석이 퍼석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재가 되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검고 노란 정교한 율척(律尺)이 툭 떨어졌다.

    이 율척은 길이가 서원봉과 비슷했고, 위에는 금색의 짧은 선으로 조각된 눈금이 새겨져 있었으며, 강렬한 영력 파동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심협은 누가 봐도 보물이 분명한 이 율척을 챙겨서 도망치려 했다.

    한데 그의 손이 율척이 닿으려는 순간, 강력한 영압이 그의 몸을 덮쳐왔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손바닥만 한 검은색 방울 하나가 머리 위에서 딸랑거리며 울리고 있었다.

    그 소리는 우렁차지 않았지만, 그 안에 마력이라도 담겨 있는 것처럼 곧장 육신을 뚫고 들어와 식해에 울려 퍼졌다.

    심협은 일순 심신이 격렬하게 요동쳤고, 식해에서 거대한 파도가 일렁여 신혼 소인(小人)이 버티지 못하고 파도에 크게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다. 동시에 눈앞에서는 마치 빛이 내려와 환한 빛 무리를 발하는 듯했다.

    심협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바로 부주진신법을 운공하여 식해를 안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식해의 거대한 파도는 잠깐 멈추었을 뿐, 이내 다시 강하게 요동쳤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와 바로 눈앞에 있는 흑황색(黑黃色) 율척조차 잡을 수 없었다.

    사실, 신혼을 뒤흔드는 방울에 통제된 것은 심협뿐만 아니었다. 수라 꼭두각시도, 언갑을 사용하려던 언무사도 꿈쩍도 하지 못했다. 음수들 상당수는 이미 머리가 터져 거의 붕괴된 상태였다.

    반면 검은 도포의 사내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은 듯 천천히 다가와 몸을 숙여 심협을 바라보더니 그 앞에 놓인 흑황색 율척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제야 심협은 자신이 상대의 계략에 당했음을 알게 됐다.

    상대는 일찌감치 그와 언무사가 몰래 숨어들었음을 눈치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수라 꼭두각시와 싸우느라 보물을 꺼낼 겨를이 없었기에 심협을 이용하여 대신 이 율척을 꺼내게 한 것이었다.

    심협은 크게 후회했지만, 곧바로 정신을 다잡았다.

    ‘저 방울을 시전할 수 있는 시간에는 제한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진즉 저 방울을 사용하여 꼭두각시를 멈춰두고 비석의 봉인을 풀었겠지.’

    그렇다면 다시 움직임을 되찾게 되는 순간이 이 빚을 갚아줄 기회이리라.

    심협은 그렇게 생각하며 몰래 법력을 운공하고 힘을 모으려 했다.

    그러나 저 검은 방울이 신혼에 미치는 영향은 예상보다 강력하여 생각을 가다듬고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법력을 운공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했다.

    “도와줘서 고맙구나. 하하하!”

    검은 도포의 사내는 크게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허공에 있던 금종과 검은 방울이 다시 그의 손으로 돌아왔고, 그제야 모두가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됐다.

    심협은 사월보를 시전하여 순식간에 상대 앞으로 다가가 그를 잡아채려 했다.

    검은 도포의 사내는 깜짝 놀랐다. 검은 방울의 영향이 사라지자마자 잠시의 틈도 없이 공격할 수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신혼에 가해진 충격이 컸던 탓인지 상대는 그저 살짝 몸을 틀었을 뿐인데도 심협은 그를 놓쳤다.

    검은 도포의 사내는 씩 웃더니 율척을 들어 심협을 향해 흔들었다.

    율척에서 노란 빛이 반짝이더니 주위 공간이 일그러졌고, 심협이 다시 공격해오기도 전에 그 뒤틀린 공간에서 반투명한 소용돌이가 일어나 검은 도포의 사내를 삼켰다. 다음 순간, 그는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심협은 뒤쫓으려 했지만, 손은 허공을 내저었을 뿐이었다.

    “제기랄! 이용만 당하고 놓쳐 버리다니.”

    심협은 일순 그답지 않게 흥분해 욕설을 내뱉었으나, 이내 부주진신법의 도움으로 식해를 안정시켰다. 다만 여전히 분한 눈빛으로 허공에서 흩어지는 공간의 파동을 바라봤다.

    그 순간!

    “크아아아!”

    갑자기 울려 퍼진 짐승의 포효에 심협은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수라 꼭두각시는 자신과 싸우던 검은 도포의 사내가 갑자기 사라진 것을 보고는 분노가 극에 달하여 미친 듯이 포효했다.

    목표를 잃은 수라 꼭두각시의 분노는 심협에게로 향했다. 꼭두각시가 다가오는 것을 본 심협은 속으로 아차 싶었다.

    보물을 빼앗으러 왔는데 보물은 얻지도 못하고 괜히 번거로운 일에 엮이게 생겼으니 당연히 더 이상 머물 생각이 없었다.

    “언 형, 어서 도망칩시다!”

    그는 곧바로 언무사에게 달려오며 황급히 외쳤다.

    언무사는 천기성 출신이니 신혼의 단련이 심오하여 이미 몸의 제어를 회복하고는 음수들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심협의 외침이 들려오자 곧바로 달아나려 했다.

    수라 꼭두각시는 검은 방울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았는지 아직까지도 움직임이 어색했다. 다만 녀석은 심협이 싸울 뜻이 없음을 보였음에도 절대로 그냥 놔주지 않겠다는 듯 달려들었다. 손에 쥐고 있던 항마저가 혈광을 번득이며 허공으로 날아가더니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항마저에서 갑자기 검은 빛이 번득이더니 짙은 검은 안개의 음살귀무(陰煞鬼霧)로 변해 사방에서 심협을 덮쳐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