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750화 (750/1,214)
  • 750화. 소부자

    진시천리의 속도는 엄청났기에 눈 깜짝할 사이에 천기성 외곽에 도달했고, 곧이어 거대한 백색 광막이 눈앞에 보였다.

    심협은 멈춰 서서 우선 금제를 파훼하려 했다.

    한데 전방 허공에서 검은 빛이 반짝이더니 검은 목조가 다시 나타났다. 몸은 열 배 이상 커져 있었고, 두 눈에서는 차가운 빛을 뿜어냈다. 검은 목조는 진시천리를 어렵지 않게 쫓아온 것이다.

    말 그대로 기겁한 심협이 다른 수를 쓰려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검은 목조가 심협을 향해 날개를 강하게 펄럭이자 검은 광풍이 뿜어져 나왔고, 순식간에 백여 장 크기의 소용돌이로 변하여 휘몰아쳤다.

    진시천리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한번 날기 시작하면 방향을 바꾸기가 쉽지 않았다. 이에 심협은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소용돌이 안으로 파고들게 됐다.

    이 바람은 기이할 정도로 맹렬하여 심협은 이리저리 휘날리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두 팔의 영광은 검은 소용돌이에 갈가리 찢겨나갔으며, 몸을 보호하던 영광도 빠르게 줄어들어 거의 사라질 듯했다.

    그는 서둘러 풍뢰쌍익을 거두고는 황정경을 운공하여 몸을 가누려 했다.

    한데 그때였다.

    휙!

    이전보다 열 배는 빠른 속도로 검은 발톱이 내려와 심협의 어깨 위에 나타났다.

    심협도 이번에는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붙잡혔다.

    강렬한 금제가 성난 파도처럼 그의 몸으로 파고들어와 법력을 완벽히 봉인했다. 심지어 경맥 안의 마기도 완전히 봉인되어 아무런 힘을 쓸 수 없었다.

    검은 목조는 두 날개를 펄럭여 소용돌이에서 빠져나가더니 검은 빛이 되어 천기성 금제를 향해 돌진했다.

    엄청난 충격이 전해질 거라는 예상과 달리 검은 목조는 물속으로 들어가듯 가볍게 금제를 통과하여 바깥의 무은사해로 향했다.

    검은 목조는 어느 언덕에 멈춰서 심협을 휙 내던졌다.

    심협은 법력이 봉인되었지만, 육체의 힘은 그대로 남아 있었기에 몸을 가눌 수 있었다.

    똑바로 일어서서 앞을 바라보자 멀지 않은 곳에 백발의 인영이 등진 채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뭔가를 찾는 듯했다.

    검은 목조는 허공을 한 바퀴 돌더니 백발의 인영 옆에 멈췄고, 커다란 몸이 빠르게 원래대로 줄어들었다.

    목조가 머리로 비비자 백발의 인영은 그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목조는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기분 좋게 울어댔다.

    “이 검은 목조를 다룬 것이 선배님이셨군요. 절 이리로 데리고 오신 것은 제게 시키실 일이 있기 때문입니까?”

    심협은 이 광경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공수하며 말했다.

    현재 법력은 봉인되었지만 신식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기에 바로 상대를 살폈다. 백발 인영의 기운은 있는 듯 없는 듯했고, 신식이 접근해도 무형의 힘에 막힌 것처럼 경지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이런 신통은 대승기 수사라면 절대 가질 수 없으니 진선기 이상의 존재가 분명했다.

    “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백발의 인영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는데, 검은 목조와 똑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를 죽이실 생각이셨다면 이미 죽였지 굳이 여기로 데려오지는 않았겠지요.”

    심협은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경지가 낮아도 머리는 꽤 돌아가는구나. 하긴 그런 배짱이 없었으면 감히 천기성 제자에게 미혼술을 사용하지 않았겠지. 그 영민함을 봐서 이번에는 용서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백발의 인영이 손뼉을 치며 칭찬했다.

    “선배님께서 제가 한 짓을 이미 알고 계시니 제가 귀성의 제자에게 한 질문도 모두 알고 계실 겁니다. 전 그저 스스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함이었지 천기성에 해를 끼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부디 양해해 주십시오,”

    “내가 그걸 몰랐으면 넌 이미 죽었을 것이다.”

    “후배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이 무례함을 용서받을 수 있을지를 알려주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백발 인영의 차가운 목소리에 심협은 서둘러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심협의 말을 받아들인 것처럼 백발의 인영은 차갑게 비웃으며 돌아섰다.

    심협은 얼굴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상대는 열서너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준수한 소년의 모습이었고, 오른쪽 눈에는 비스듬하게 안대가 있었는데 눈이 있어야 할 곳에는 하얀색 정석이 박혀 있었다. 이 정석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반짝거렸다.

    백발 소년의 손에는 사슬이 들려 있었는데, 바로 검은 목조가 뺏어간 구전빈철이었다.

    예사롭지 않은 언변과 높은 경지 그리고 백발까지, 덕망 높은 노인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어린 소년의 모습이었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으나, 수선계에는 딱히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이 소년도 겉모습과 달리 수백, 수천 년을 살아온 괴물일 가능성이 컸다.

    심협은 서둘러 놀란 표정을 거두고는 고개를 숙인 채 그의 말을 기다렸다.

    “너는 이번 삼계무도회의 우승자인 심협이 아니더냐?”

    “맞습니다.”

    심협은 태연하게 대답했지만, 머릿속으로는 생각이 많아졌다.

    소년이 그의 신분을 물어본다는 것은 언무사 일행에게서 자신의 정보를 얻지 못했다는 뜻이고, 외부의 수사가 가득한 천기성에서 그가 주명에게 미혼술을 시전한 것을 알아챘다면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자신이 천기성에 들어서는 순간이나 그전부터 어떤 이유로든 상대의 눈에 띄었거나, 저 백발 소년에게 엄청난 관찰력이 있어서 천기성의 어떤 사소한 일까지도 알아챌 수 있거나.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심협에게는 좋은 일이 아니었다.

    “너는 주명에게 육비천룡에 대해 언급했다. 이 언갑의 이름은 밖으로 전해진 적이 없지. 이는 네가 천기성에 오는 도중에 이 언갑을 본 적이 있다는 의미렷다. 맞느냐?”

    백발의 소년이 심협의 눈을 노려보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어디서 본 것이냐?”

    “무은사해의 어느 기이한 지하성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혼자 온 것이 아니라 동료와 함께 오는 길이었는데 예상치 못하게 그 지하성에 들어가게 되었고, 거기서 육비천룡 언갑을 사용하는 자를 만났습니다. 저는 운 좋게 도망쳤지만 제 동료는 아직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기이한 지하성? 무엇이 기이하다는 것이냐?”

    심협은 마음을 다잡고 지하성에서의 일에 대해 설명했지만,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그래도 백발의 소년은 이해할 수 있을 터였다.

    “역시 인형의 성이로구나. 그 여시들은 천시진경(天尸眞經)과 귀언의 술법으로 만든 것이겠지.”

    백발의 소년은 혼자서 중얼거렸다.

    심협은 그의 말에 귀가 솔깃했지만, 감히 질문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가 바로 소부자다. 내가 누군지는 주명에게 들었겠지. 그 지하성은 우리 천기성에게 매우 중요한 곳이다. 네가 우리를 그곳으로 데려다준다면 네 죄는 없던 일로 해주겠다. 네 보물도 기꺼이 수리해주마.”

    백발의 소년은 네 개의 구전빈철 사슬을 심협에게 던지며 말했다.

    “정말입니까?”

    심협은 놀라면서도 크게 기뻤다.

    “내가 거짓이나 할 자로 보이더냐? 너는 우리를 그 지하성으로 안내하기만 하면 된다. 허나 미리 알려주는데, 그 성은 우리 천기성의 전설 속 언갑인 인형의 성이다. 언제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지.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렇게 오랫동안 찾지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도망쳐 나올 때 다시 동료를 찾기 위해 그 성에 특수한 법진 표식을 남겨놨습니다. 어디로 가도 제가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로군. 그럼 우선 천기성으로 갔다가 바로 인형의 성을 찾으러 가자꾸나.”

    소부자는 고개를 끄덕였고, 소매를 휘둘러 하얀 빛으로 심협의 몸을 감싼 뒤 검은 목조 위로 올라섰다.

    심협 체내의 금제가 모두 눈 녹듯이 사라졌고 법력 운공도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검은 목조는 다시 날아올라 천기성 주위의 금제를 뚫고 들어가더니 곧장 상성(上城)을 향해 날아갔다.

    심협은 상성을 받치고 있는 거인을 올려다봤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거인의 웅장함이 절절히 느껴져 심협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허!”

    거인의 팔에는 수많은 영문이 새겨져 있었고, 은은하게 영광이 반짝였다.

    “이 거인은 경천지계(擎天之械)다. 거원, 즉 천기성의 초대 성주께서 만드신 언갑이지. 천만 년간 줄곧 천기성을 보호하고 있다.”

    소부자는 동경하는 눈으로 경천(擎天)의 거인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설명했다.

    “거원 선배님은 경천동지할 만한 분이셨군요. 놀랍습니다.”

    심협의 칭찬에도 소부자는 대꾸 없이 검은 목조를 조종하여 웅장한 대전 앞으로 내려갔다.

    목조에서 내린 그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가자 심협은 머뭇거리다가 바로 따라갔다.

    대전은 공무를 논의하는 곳인지 안쪽은 매우 넓었고, 좌우로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소부자는 상석에 앉았고, 심협을 왼쪽에 앉게 한 뒤 조용히 기다렸다.

    반각도 되지 않아 대전 밖에서 휙휙 소리가 들려오더니 세 사람이 나란히 대전 안으로 들어왔다.

    가장 먼저 온 자는 윤의를 타고 있었는데, 바로 언무사가 이전에 임무 보고를 했던 백발의 청년이었다. 그 청년의 옆에는 키가 작은 노인으로, 머리는 하얗게 세었지만 원기 왕성해 보였고, 혈색이 좋았으며, 부리부리한 두 눈은 매우 호탕하고 생기가 넘쳐 보였다.

    노인 옆에서는 묘령의 여인이 서 있었다. 하얀 옷에 폭포 같은 긴 머리와 우아한 자태가 묘하게 상상력을 자극했지만, 아쉽게도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성주님, 이번에는 빨리 돌아오셨군요? 오자마자 저희를 부르시다니,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윤의의 백발 청년이 옆에 있는 심협을 흘끗 보고는 먼저 말했다.

    “어째서 그대들 셋뿐인가? 매와 만벽은?”

    “만벽은 백련당에서 동해 용궁이 얼마 전 보내온 주문을 만들고 있어서 당분간 못 나올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매는 지금도 향료 정원을 가꾸고 있습니다.”

    백발 청년이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만벽이야 일이 있으니까 그렇다 쳐도 매는 갈수록 제멋대로군. 이리 제멋대로 굴고 장로회 사무를 신경 쓰지 않는다면 제명하고 다른 장로에게 위임하게!”

    “알겠습니다. 제가 나중에 성주님의 뜻을 전하겠습니다.”

    백발 청년은 매라는 자 때문에 골치가 아팠는지 머리를 두드리며 답했다.

    한데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허, 이번에는 정말 억울합니다! 본인들이 날 못 찾아놓고는 왜 저를 탓하시는 겁니까?”

    이 목소리에 심협을 포함한 대전 안의 모두가 깜짝 놀랐다.

    소리가 들려오는 대전 왼쪽 창턱을 돌아보니 어느새 보라색 옷을 입은 자가 서 있었다.

    곧은 몸에 넓은 어깨는 남자 같아 보였지만, 백옥처럼 하얀 얼굴에 봉황의 눈, 높이 솟은 코, 불그스름한 양 볼, 여기에 여성 특유의 분(粉) 냄새 때문에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그자의 주위는 특이한 옅은 검은 안개가 둘러싸고 있었는데, 마치 그림자처럼 그곳만 어둡고 눈에 띄지 않아 대전 안 모두의 영각을 완전히 차단했다.

    “은종향(隱踪香)? 마침내 배합에 성공했군.”

    소부자는 그를 살펴보더니 눈을 치켜뜨며 말했고, 그 말에 백발의 청년과 키가 작은 노인, 얼굴을 가린 여인까지 모두 눈이 반짝거렸다.

    ‘은종향?’

    심협은 속으로 그 이름을 되새기며 신식을 뻗었지만, 보라색 옷의 인영을 전혀 감지할 수 없었다. 그곳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몸을 숨기는 저 수단은 그의 잿빛 두건보다 한 수 위였다. 소부자 등의 말대로라면 어떤 향료의 효과 같았다.

    “당연하죠! 십수 년 세월이 헛된 게 아니었습니다! 히히힛!”

    그자는 깔깔대며 웃었는데, 웃음소리로도 남녀를 구분할 수 없었다.

    “매 장로, 정말 대단하오! 하하하! 향료 잔방(殘方)만으로 오래전에 사라진 은종향을 만들어 내다니! 그 향료가 있으면 우리 천기성 제자들이 밖에 나가 임무를 수행할 때 큰 도움이 될 게요. 정말 감탄했소! 하하하!”

    키 작은 노인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연신 크게 웃었다.

    “성주님, 제가 이 은종향을 만들었으니 천기성에 공을 세운 걸 인정하십니까? 이 정도 공이면 계속 장로회에 남아 있어도 될는지요?”

    그자는 소부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뿐이오. 다음에도 장로회의 명을 따르지 않으면 아무리 큰 공을 세운다 해도 소용없을 게요!”

    소부자가 차갑게 비웃고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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