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732화 (732/1,214)
  • 732화. 증거

    “스승님, 이 일은 매우 중요하여 더는 기다릴 수 없으니 제발 제 말을…….”

    “부형.”

    심협이 부동래의 말을 끊었다. 이에 부동래는 사태의 급박함을 아는 심협이 만류하자 의아해 상대를 돌아보았다. 심협은 눈짓으로 부동래를 만류하고는 살짝 웃으며 눈을 찡긋거렸다.

    부동래는 어리둥절했으나 심협에 대한 믿음으로 일단 말을 멈췄다.

    “대왕님들! 부동래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고 대왕님들 사이를 이간질한 진범이 누군지 알고 싶지 않으십니까?”

    심협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부동래의 말을 이어받았다.

    “네가 뭘 안다고 끼어드는 것이냐?”

    청모사왕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건방진 인간족, 헛소리는 적당히 해라!”

    육아상왕 역시 그렇게 외쳤지만, 오직 금시대붕만은 표정이 조금 변하더니 말없이 심협을 바라봤다.

    심협은 그 짧은 순간에 여러 사람의 반응을 간파하고는 망설임 없이 외쳤다.

    “바로 저자, 웅염입니다!”

    그의 외침에 청모사왕 등은 일순 멍해졌다. 심지어 부동래마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부동래는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변고가 일어나기도 전에 자신이 충동적으로 나서는 바람에 육아상왕과 청모사왕이 손을 잡고 금시대붕을 적대했다는 증거를 얻을 기회가 사라졌다. 그러니 지금은 오로지 웅염 한 사람만 지목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부동래는 일단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스승님을 구하고 자신의 혐의를 벗은 뒤, 일의 진상을 금시대붕에게 차차 알릴 생각이었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은 아니겠지?”

    청모사왕은 자신의 부하가 지목되자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제가 증거를 제시한다면 부동래의 누명이 벗겨지는 겁니까? 진짜 범인을 엄벌하실 겁니까?”

    “네가 믿을 만한 증거를 제시하면 당연히 그리 할 것이다. 허나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형님, 인간족의 말은 믿을 수 없습니다.”

    육아상왕의 말에 청모사왕은 웅염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는 망설임이 담겨 있었다.

    “스승님, 이건 이간책입니다. 제자는 결백합니다!”

    “아직도 결백하다 하는가! 그럼 음양이기병에 네 저물반지 안에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 일갈에 웅염의 표정이 급변했지만, 그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음양이기병은 부동래가 훔쳤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한데 너희는 적반하장으로 내게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것이냐?”

    “훔친 물건을 내놓는 것이 가장 확실한 증거일 터. 네 저물반지를 빼서 모두 앞에서 살펴보게 하면 되지 않겠느냐!”

    심협은 이런 웅염의 반응을 진즉 예상하고는 미리 생각해둔 대로 말했다.

    웅염이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심협이 그에게로 다가가 손에서 저물반지를 뺐다.

    육아상왕이 이를 보고 나서려 했지만, 금시대붕을 힐끗 보고는 우뚝 멈췄다.

    “가지고 와라. 본 왕이 직접 살펴보겠다.”

    청모사왕이 싸늘하게 말하자 심협이 고개를 저었다.

    “감히 의심하는 바는 아니오나, 선배님은 이자와 사이가 남다르시니 믿지 못하는 자가 있을까 우려되는군요.”

    그 대답에 청모사왕은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렸으나, 딱히 반박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내게 넘겨라.”

    이번에는 금시대붕이 나섰다.

    “선배님은 부동래의 스승이시니 마찬가지로 공정성이 의심받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본 왕이 적임자로군.”

    육아상왕은 웃음기를 띠고는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심협은 그저 웃기만 할 뿐, 반지를 내놓을 뜻을 보이지 않았다.

    “애송이! 우리를 놀리는 게냐?”

    육아상왕이 갑자기 화를 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심협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이었다.

    “심 소우, 저물반지를 누구에게도 넘기지 않겠다면 어떻게 살펴본다는 건가?”

    금시대붕이 참지 못하고 말했다.

    “선배님, 차라리 제가 살펴보게 해주시죠.”

    “네가? 교활한 인간족, 몰래 수작을 부릴 셈 아니더냐!”

    “고작 대승기인 이 후배가 수작을 부려봐야 고명하신 선배님들 눈을 속일 수나 있겠습니까?”

    심협은 씩 웃으며 대꾸하자 육아상왕은 말문이 턱 막혔다.

    “좋다! 그럼 네가 직접 살펴봐라! 허나 명심해라! 무슨 수작이라도 부렸다가 나한테 들키면 차라리 죽여 달라고 빌게 해주겠다!”

    청모사왕이 콧방귀를 뀌며 그렇게 말하자, 심협은 협박에도 개의치 않고 씩 웃었다. 그리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웅염의 저물반지를 연화하기 시작했다.

    부동래에게 붙잡힌 웅염은 죽일 듯한 눈빛으로 심협을 노려봤다. 그의 눈에서는 분노의 불꽃이 타올랐지만, 무력함에 조마조마했다. 그는 자신의 배후자를 신식으로 계속해서 불러보았지만, 상대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심협은 구구연보결을 운공하여 웅염의 저물반지를 금세 연화했고, 안에서 물건들을 하나둘 꺼내기 시작했다.

    백옥 자기병, 비술 공법, 법보 무기 등…….

    심협은 물건을 꺼내면서 혀를 찼다.

    “웅염 도우는 가지고 있는 것도 참 많소. 이건 춘궁밀권(春宮密卷)? 하, 이 좌소장골환(左掃壯骨丸)은 어디다 쓰는 거야? 오, 이 자오원앙월(子午鴛鴦鉞)은 꽤 좋은데? 어허, 너무 서두르지 마시오. 거의 다 끝났소. 자, 이제 나온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는 마치 죽음을 재촉하는 부적처럼 끊임없이 웅염의 목을 죄어왔고, 웅염은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찾았다!”

    심협의 외침에 모두의 눈빛이 돌변했다.

    다음 순간, 초록 빛이 번득이더니 길이 2척에 두 개의 손잡이가 달린 비취병이 모두의 눈앞에 나타났다.

    웅염의 안색은 새하얗게 질려 완전히 절망에 빠지고야 말았다.

    얼굴이 시뻘게져 웅염과 음양이기병을 번갈아보는 청모사왕의 눈에는 점점 살기가 드러났다.

    반면 육아상왕은 묵묵부답이었다.

    “아무래도 이전에는 내 제자가 억울한 누명을 쓴 게 맞는 모양이군. 부동래가 보병을 훔쳤다더니, 웅염이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그를 모함한 것이었어!”

    금시대붕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웅염, 네놈이 마음이 좁고 옹졸한 것이야 알고 있었다만, 감히 이런 짓까지 벌였단 말이더냐! 이런 행위는 파렴치한 인간족과 무어가 다르단 말이냐?”

    청모사왕의 호통에 심협은 기분이 묘했다. 생각해보면 인간족은 상대를 욕할 때 ‘짐승과 다를 바 없다’ 하지 않던가?

    한편으로는 슬슬 자신의 추측이 맞아 들어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스승님, 제자가 잘못했습니다! 제자 잠시 정신이 나갔었나 봅니다.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제자에게 기회를 한 번만 더 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웅염이 황급히 빌었다.

    이 광경을 본 부동래는 사제(師弟) 둘이서 정말 연기를 잘한다고 생각했다. 하마터면 진짜라고 생각할 뻔했다.

    “만약 처음이었다면 모를까, 벌써 두 번째가 아니더냐! 동문을 해하고도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으니 죽어 마땅하다! 용서란 없다.”

    예상과 달리 청모사왕이 버럭 화를 내자 웅염은 청천벽력 같은 말에 정신을 놔버렸다.

    “제, 제가…… 아닙니다! 제가 아니라…….”

    그는 얼굴이 창백해져 미친 듯이 소리쳤다.

    “닥쳐라! 동문을 해한 죄, 죽어 마땅하다!”

    그렇게 외치며 웅염의 머리를 단숨에 깨부수려는 듯 날아든 자는 다름 아닌 육아상왕이었다. 그 일 장(掌)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빠르고 정확했다.

    꽈르릉!

    장풍이 몰아치고 천둥이 울려 퍼지자 산이 무너지고 천지가 흔들리는 듯했다.

    그의 공격은 종문의 명예를 위함이 아닌 웅염과 부동래를 함께 죽이려는 의도였다.

    부동래는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고 피하려 했지만, 사방의 허공이 멈춰버려서 움직일 수 없게 되자 당황했다.

    심협 역시 이 위압에 밀려 감히 도우러 나설 수 없었다. 진선 절정의 강자 앞에서 그의 경지로는 어림도 없었던 것이다.

    그때, 짧은 호통이 울렸다.

    “이게 무슨 짓이오!”

    금시대붕이 번개처럼 부동래 옆에 나타나더니 옷깃을 당겨 한쪽으로 던졌다.

    부동래는 웅염과 함께 옆으로 날아갔고, 그사이 금시대붕은 다른 손에 은색 전광(電光)을 모아 육아상왕의 일격을 막았다.

    꽈르릉!

    은색 번개가 뿜어져 나오자 허공에 칠흑 같은 구멍이 갈라졌고 그의 손이 그곳으로 뚫고 들어가자 육아상왕의 손과 맞부딪쳤다.

    콰앙!

    폭음과 함께 은색 번개가 폭발하면서 강력한 풍압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고, 풍압의 충격에 제단 뒤에 있던 요장들이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심협도 버티지 못하고 뒤로 밀려났다.

    이때, 그의 눈에 웅염이 어느새 음양이기병으로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말릴 틈도 없이 혼란을 틈타 양손으로 음양이기병의 양쪽 손잡이를 쥔 웅염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심협을 노려보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좋지 않은 예감에 심협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순간, 웅염의 짧은 외침과 함께 음양이기병의 병에서 초록 빛이 반짝였다. 이어서 뚜껑의 봉인이 저절로 풀리면서 흑백의 빛이 서로 교차하며 밖으로 휘몰아쳤다.

    심협은 머뭇거리지 않고 진시천리술을 시전하여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흑백의 기류는 그에게 둔술을 펼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순식간에 휘감더니 음양이기병 안으로 빨아들였다.

    심협은 몸이 가벼워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됐다.

    병 입구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 그는 웅염의 득의양양한 표정이 점점 굳어지더니 몸에 이상한 홍조가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것을 끝으로, 심협은 병 안으로 완전히 빨려 들어갔다.

    한편, 웅염은 온몸이 녹아내리면서 분홍색 안개가 피어올랐다. 이 안개 역시 음양이기병에 삼켜졌다.

    금시대붕과 육아상왕의 일격이 충돌한 여파가 사라지고 나서야 사람들은 심협과 웅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챘다.

    “심형?”

    부동래가 의아한 듯 불러봤지만,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영력 파동이 요동치는 음양이기병을 본 부동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곧장 음양이기병으로 다가가 병 입구를 잡고는 봉인을 열려고 했다.

    허나 손이 병 입구에 닿는 순간 혈기가 솟구쳤고, 어느새 흘러나온 흑백의 기류가 혈기를 타고 그의 손가락을 휘감았다.

    그때, 누군가 부동래에게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고는 강력한 법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혈기와 흑백의 기류가 한순간에 흩어졌다.

    “죽고 싶은 것이냐?”

    금시대붕이 부동래를 끌어당기며 꾸짖었다.

    “스승님, 심 도우가…….”

    부동래가 초조하게 말했다.

    “웅염이 발동한 혈금술(血禁術)이 그를 음양이기병으로 끌어갔으니 이미 사지에 빠졌다. 아마 살아날 가망이 없을 게다.”

    금시대붕도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스승님, 음양이기병을 열어서 그를 꺼내주십시오! 그는 분명히 살아 있을 겁니다!”

    “소용없다. 웅염이 피와 살을 바쳐 보병을 발동했으니 병 입구를 봉인하고 49일 동안은 절대 열 수 없다. 네 벗은…… 아마 살아날 가망이 없을 것이다.”

    “분명히 방법이 있을 겁니다! 스승님, 봉인을 열 수 없다면…… 음양이기병을 부수겠습니다! 반드시 심 도우를 구해야 합니다! 어떻게든 좋습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스승님…….”

    부동래가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흥! 말이야 쉽지. 음양이기병은 우리 사타령에 전승되는 중보다. 겨우 인간족을 위해 그걸 부수겠다는 거냐?”

    육아상왕이 차갑게 콧방귀를 뀌자 부동래는 분노가 치솟았으나,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는 어째서 자신이 진상을 말하지 못하도록 막고 심협이 웅염 혼자서 음양이기병을 훔쳤다고 말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심협을 믿었기에 육아상왕이 청모사왕과 결탁한 일에 대해서는 발설하지 않기로 했다.

    “겨우 인간족을 위해 종문의 중보를 부수려 하다니, 잘도 그런 생각을 하는군.”

    “저놈이야 본래 두 마음을 가진 반골(反骨)이 아닌가. 역시 마음이 인간족에게 향해 있었어.”

    “음양이기병을 훔치지 않았어도 저런 놈은 반드시 쳐내야 하는 건데…….”

    한동안 비난과 욕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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