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730화 (730/1,214)
  • 730화. 위험을 무릅쓰다

    그렇게 일각(*一刻: 약 15분)가량 지났을 무렵, 웅염은 눈살을 찌푸린 채,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듯 사타령의 어느 절벽 아래를 초조하게 서성이고 있었다.

    웅염은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지도 모르는 자에게 된통 당하자 분노로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는데, 한참이 지나도 상대를 찾아내지 못하자 더욱 화가 치밀었다.

    그가 분을 삭이기 위해 주먹으로 절벽을 내려치려는 순간,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웅염은 대번에 몸이 굳더니 억지로 웃었다. 다만, 눈빛이 살짝 떨리는 것이 긴장감을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다.

    “대왕님을 뵙습니다.”

    웅염은 곧장 깊게 포권했다.

    검은 도포를 뒤집어쓰고 머리에는 챙이 깊은 모자를 쓴 터라 상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절벽 바위 아래 부드러운 흙 속에 곤충의 알 같은 하얀색 쌀이 박혀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고, 수십 리 떨어진 커다란 나무 위에 두 사람이 숨어서 손바닥만 한 소라 껍데기를 귀에 대고 있음은 더더욱 예상하지 못했다.

    “거사 전에는 찾아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흑의의 사내가 굵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왕님, 그게…… 부동래가…….”

    “역시 산혼정은 신경도 쓰지 않고 현양지굴로 가서 조사를 한 겐가?”

    “그렇습니다!”

    “놓쳤나?”

    흑의의 사내는 목소리가 한껏 올라갔다. 의외라는 듯, 한편으로는 책망하는 듯.

    “손아귀에 넣었는데 그에게 조력자가 있었습니다.”

    웅염이 서둘러 해명했다.

    “조력자? 사타령에 그의 조력자가 있다고?”

    검은 옷 남자의 목소리가 한층 더 높아졌다. 웅염이 핑계를 대는 것은 아닌지 추궁하는 목소리였다.

    한편, 수십 리 밖의 거대한 나무 위에서 심협은 뭔가 껄끄러운 기색으로 부동래에게 물었다.

    “부형, 사타령에서 인맥이 이리 안 좋소?”

    “계속 남들과 다른 말만 하는데 누가 좋아하겠소? 스승님 문하의 사형제들과도 좋지 않소.”

    부동래는 쓰게 웃었다.

    심협은 그 말을 듣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부동래는 마족 중에서 특이한 성정이긴 했다.

    “허나 그렇지 않았으면 우리도 이렇게 벗이 되지는 못했을 거요.”

    심협이 웃으며 말하자 부동래도 모처럼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라에서는 웅염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인간족이었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니 이전에 삼계무도회에서 부동래와 하나로 움직였던 인간족이었는데, 이름이 심협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심협은 그 말에 내심 놀랐다. 웅염은 삼계무도회 때 현천경으로 진행 상황을 본 것이고, 심협의 정체까지 알아챈 것이다.

    “그자가? 이상한 일이로군. 부동래의 성격상 밖으로 도움을 청할 리가 없는데……. 책임을 피하고자 거짓을 하는 것은 아니렷다?”

    “대왕, 제가 어찌 감히 대왕님을 속이겠습니까! 제 말에 한 치의 거짓이라도 있다면 이 자리에서 혼이 날아가 죽을 것입니다!”

    웅염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맹세했다.

    “그래, 네게는 그럴 배짱이 없지. 그가 뭘 알아낸 것 같더냐?”

    “그게…… 저도 모르겠습니다. 허나 아무런 증거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웅염이 그래도 자신 있게 말했다.

    “흥, 산혼정이 박힌 놈 하나 못 잡은 주제에 어디서 큰소리냐? 네놈이 정말 그 자리에 어울리는지 모르겠구나.”

    흑의의 남자가 콧방귀를 뀌자 웅염이 대번에 허리를 숙였다.

    “대왕님, 제가 그 자리를 어찌 함부로 넘보겠습니까? 그저 대왕님의 충성스러운 부하로서 우리 마족의 대업을 위해 미력하나마 힘을 쓸 수 있다면 저는 족합니다.”

    “걱정하지 마라. 네게 그 자리를 주겠다고 했으니 그리 할 것이다. 다만, 사타령 삼마왕의 국면은 완전히 바뀌어 앞으로 사타령에는 오직 하나의 목소리만 존재해야 할 것임을 잊지 마라.”

    “감사합니다, 대왕님. 소신, 반드시 대왕님을 위해, 마족을 위해 이 한 몸을 바치겠습니다.”

    “됐다. 음양이기병은 잘 숨겼겠지?”

    “예, 잘 숨겨놨습니다. 분종 의식 날 분명 대왕님께 큰 즐거움이 될 것입니다.”

    “음양이기병을 발동하는 법결을 잘 기억해둬라. 우리 삼형제 중 만만한 자는 없다. 만약 문제가 생겨서 실패한다면, 그 결과는 잘 알고 있겠지?”

    “네, 잘 알겠습니다!”

    웅염이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흑의의 남자는 그와 은밀히 몇 마디 더 주고받고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수십 리 밖, 심협과 부동래는 나무 위에서 방금 들은 내용을 떠올렸다.

    “저들이 분종 의식 때 움직이려는 것 같소. 스승님이 위험하오.”

    “어쩌려고 그러시오?”

    “사타성으로 가서 스승님께 말씀드려야겠소.”

    “웅염을 쫓아가서 음양이기병을 찾는 게 낫지 않겠소?”

    “이미 늦었소. 분종 의식은 내일이니 하루 만에 찾아내긴 힘들 거요.”

    부동래의 말에 심협은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심형, 차라리 따로 움직입시다. 심형은 웅염을 뒤쫓아 음양이기병의 위치를 파악하시오. 나는 사타성으로 가서 스승님을 만나야겠소.”

    “좋소.”

    심협은 더 생각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동래는 곧장 사타성으로 향했는데, 다급한 나머지 자신의 등에 하얀색 쌀알 같은 무언가가 붙어 있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 * *

    저녁 무렵, 부동래는 울창한 숲을 벗어나 검은색 성 앞에 도착했다.

    100장 높이까지 치솟은 성은 얼마 남지 않은 석양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점점 사라져가는 석양에 비춘 성벽의 그림자는 마치 야수의 이빨 같았다.

    부동래는 성 위로 고작 100여 장 높이에 떠 있는, 1년 내내 흩어지지 않는 먹구름을 바라봤다.

    먹구름은 일정한 규칙 없이 흘러 다녔고, 그 안에서는 마치 수많은 원혼과 악귀들이 가득한 것처럼 소리 없는 울부짖음이 울렸다.

    깊게 심호흡을 한 후, 부동래는 당당하게 성문으로 향했다.

    성문을 지키던 요물들은 한눈에 마족의 배신자를 알아보고는 곧장 그를 포위했다.

    부동래는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붙잡혔다.

    “대왕님을 뵙고 싶다.”

    요물들은 그를 압송하여 성주부로 향했다.

    큰곰 요괴가 성주부에서 서둘러 나오더니 부동래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눈 위의 세 줄기 상처는 그가 눈을 가늘게 뜨자 흐릿해졌다.

    “부동래, 네가 감히 다시 돌아오다니!”

    큰곰 요괴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웅충(雄衝), 대왕님을 뵙게 해다오.”

    부동래는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네가 아직도 스승님께서 가장 아끼는 제자인 줄 아느냐? 배신자가 어딜 감히 스승님을 뵙겠다고 하는 것이냐!”

    “스승님이 위험하시다.”

    부동래는 여전히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하하하! 대단하군! 배신자의 말을 내가 믿을 것 같은가!”

    웅충은 크게 비웃더니 뒤이어 벌컥 화를 냈다.

    부동래는 말이 통하지 않자 한숨을 내쉬더니 법력 파동을 뿜어내며 외쳤다.

    “스승님! 제자 부동래가 왔습니다!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의 외침은 호랑이의 울부짖음 같았다. 그 목소리에는 중후한 법력이 담겨 있어 주위의 약한 요물들은 심신이 떨리고 어지러워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었다.

    웅충도 자기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몸에 산혼정이 박힌 게 아니었나?’

    그의 경지는 부동래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그저 부동래의 몸에 산혼정이 박혀 있으니 이리 당당하게 몰아붙인 것뿐, 평소라면 감히 말싸움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부동래의 외침은 한참이나 울려 퍼진 뒤에야 차츰 진정되었다.

    그러나 사타성 전체에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음에도 한참을 기다리는 동안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괜히 힘 빼지 마라. 스승님은 오후에 사타령으로 떠나셨다.”

    웅충은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말했다.

    “뭐라고?”

    부동래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러자 이 모습을 본 웅충은 의구심이 들었다.

    ‘정말로 스승님이 위험하신 건 아니겠지?’

    허나 아무리 생각해도 어불성설이었다. 팔백 리 사타령이 그의 기반이요, 이곳을 나가도 삼계이거늘 누가 감히 스승님을 해한단 말인가?

    한편, 부동래는 초조함에 더는 지체할 틈 없이 바로 돌아서 떠나가려 했다.

    “부동래, 사타성을 뭐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네가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갈 수 있을 줄 알았느냐? 여봐라, 어서 저놈을 잡아라.”

    웅충의 외침에 사방에서 8백여 명의 요물이 쏟아져 나와 부동래에게로 달려들었다.

    부동래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거칠게 휘둘러 강력한 바람의 칼날을 일으켜 이들을 모두 날려버렸다.

    뒤이어 그가 몸을 크게 돌리자 주위로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보아하니 무지개가 되어 날아가려는 것 같았다.

    이때, 포효와 함께 웅충의 거대한 몸이 날아올라 그를 떨어트리려 했다.

    부동래는 어쩔 수 없이 도망치기보다는 우선 웅충과 맞부딪혔다.

    콰쾅!

    굉음과 함께 강력한 힘이 두 사람 사이에서 폭발했고, 강력한 충격파에 주위의 요물들이 날아갔다.

    웅충과의 충돌로 수십 장이나 밀려난 부동래는 겨우 몸을 가눌 수 있었다.

    “하하하! 역시 실력이 많이 떨어졌구나! 이제 넌 내 적수가 아니다!”

    웅충은 부동래 발아래로 길게 파인 발자국을 보고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를 보고 피식 웃으며 다시 술법을 펼치려던 부동래는 갑자기 가슴으로 몰려든 극심한 통증에 굳어버렸다. 자흑색 기운이 가슴에서 흘러나오면서 산혼정이 다시 발작하기 시작했다.

    이를 본 웅충은 더욱 기뻐하며 법력을 거두고 멀리서 지켜보았다.

    “지금의 너는 이빨 빠진 호랑이에 불과하니 내가 나설 필요도 없구나. 여봐라, 대왕님께서 돌아오시면 처리할 테니 저놈을 잡아서 옥에 가두어라!”

    “네!”

    잔뜩 주눅이 들어 있던 요물들은 부동래의 기운이 빠르게 사라지는 것을 보고는 기뻐하며 앞다투어 달려들었다.

    한데 그들이 부동래를 덮치려는 순간, 하늘에서 빛이 수직으로 떨어지더니 누군가 그대로 내려와 주먹으로 땅을 내리쳤다.

    콰쾅!

    폭음과 함께 한 겹의 금빛 파동이 마치 물보라처럼 땅에서부터 몰아쳤고, 주위에 서 있던 수백 명의 요물은 바닥을 나뒹굴었다.

    “누구냐!”

    웅충은 불청객을 바라보며 긴장한 목소리로 외쳤다.

    부동래 또한 의아했지만, 자신의 앞에 선 익숙한 뒷모습을 보고는 놀라면서도 기뻤다.

    “심형, 어떻게 여기에 온 것이오?”

    심협은 부동래를 흘끗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말려봐야 소용없을 것 같아서 몰래 따라왔소. 한데 보아하니 시기도 절묘하게 맞춰서 온 모양이오.”

    웅충은 심협의 정체를 알아보고는 더욱 의구심이 깊어졌다.

    ‘인간족이 이렇게 깊은 사타령까지 와서 마족인 부동래를 구한다고?’

    그러는 동안 심협은 부동래를 부축했다.

    “괜찮소?”

    “산혼정이 발작했을 뿐, 아무렇지 않소.”

    부동래는 가슴의 통증을 참아내며 말했다.

    “우선 여기서 빠져나갑시다.”

    심협은 그가 간신히 버티고 있음을 알아보고는 서둘렀다.

    한편, 웅충은 심협이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하자 화가 치밀었고, 허공으로 손을 들어 참월도(斬月刀)를 움켜쥐더니 크게 휘덜렀다.

    심협은 한 걸음 옆으로 발을 내딛으며 현황일기곤을 꺼내 휘둘렀다.

    꽈꽝!

    도와 곤봉이 충돌하면서 강렬한 파동이 폭발했다.

    웅충이 대번에 수십 장이나 날아간 반면, 심협은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심협은 현황일기곤을 거두고는 부동래와 함께 사타성을 벗어났다.

    두 사람은 백여 리 정도 날아가 바로 산속으로 내려간 뒤 기운을 숨겼다.

    “심형, 스승님께서…….”

    부동래가 말하기도 전에 심협이 끊었다.

    “알고 있소. 사타령으로 가자는 거 아니오?”

    “그렇소.”

    “그건 안 되오. 산혼정이 회복되기 전까지는 얌전히 여기서 회복해야 하오.”

    심협이 단호히 거절했다.

    “하지만…….”

    “하지만이 아니오. 서둘러 산혼정을 안정시키지 않으면 신혼에 해가 될 것이오. 걱정하지 마시오. 반드시 제때 도착할 수 있을 거요.”

    심협은 이번에도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고, 부동래는 그 심각한 표정을 보고서야 상대가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임을 알고는 가부좌를 한 채 정양을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