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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729화 (729/1,214)
  • 729화. 장기말

    “보병을 훔친 게 네놈이었나?”

    부동래는 차가운 표정으로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증명할 건데? 저런 젖비린내 나는 꼬마 증언으로?”

    웅염은 차갑게 웃으며 반문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냐?”

    “넌 알 것 없으니 목숨을 건질 생각이나 해라. 끼어들지 않아도 되는 일에 굳이 그렇게 끼어들다니, 정말 구제 불능이구나.”

    “굳이 끼어들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이냐?”

    “멍청한 건지 똑똑한 건지 모르겠군. 그렇게 캐낼수록 더더욱 죽음으로 목을 들이미는 것임을 아직도 모르겠나?”

    “내 추측이 맞나 보군. 네가 지금 사타령을 이간질하고 수작 부리는 게 모두 우리 스승님을 노린 것이렷다?”

    웅염은 그저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웅염, 내가 충고 하나 하는데, 무슨 꿍꿍이든 지금 접는 게 좋을 거다.”

    “역시 네놈은 진부하고 융통성이 없단 말이지. 뭐, 됐다. 여기에 영원히 잠들게 해주마. 산혼정에 죽는 것보다는 평안한 죽음일 것이다.”

    웅염은 고개를 젓고는 천천히 뇌까리더니 화염장창을 꺼내 천천히 부동래를 압박해갔다.

    한데 그 순간, 웅염은 갑자기 뒤에서 한기가 덮쳐오는 것을 느끼고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양손으로 장창을 뒤로 돌리며 허리를 비틀어 찔렀다.

    심협은 기운을 완전히 숨기고 기습했음에도 순간적으로 살기가 드러나는 바람에 들키자 일순 당황했다.

    화염장창이 불쑥 튀어나오자 붉은 불꽃이 치솟아 수사자로 변하여 심협을 향해 달려들었다.

    심협은 황정경공법을 운공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팔이 금빛으로 일렁이자 금룡 허상이 팔을 타고 날아가 불꽃 사자와 충돌했다.

    콰쾅!

    금빛과 불꽃은 동시에 폭발했고,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불꽃 사자의 몸뚱이와 금룡의 허상이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불꽃과 금빛이 뒤섞인 곳에서 한 줄기 나선형 소용돌이가 화염장창의 창끝에서 튀어나와 심협의 미간을 향해 찔러왔다.

    창끝이 미간에 박히려는 순간, 붉은 빛이 아래에서 쏜살같이 날아와 창끝을 막았다. 그 강력한 힘에 화염장창은 기세가 꺾이며 방향이 틀어졌다.

    심협은 그 틈에 뒤로 물러나기는커녕 오히려 한 걸음 성큼 내딛었다.

    몸에서 용상의 힘이 다시 폭발했고, 붕권(崩拳)이 허리춤에서 그대로 날아가 웅염의 명치를 가격했다.

    콰직!

    그의 주먹이 꽂히면서 웅염의 몸에서 금빛 비늘 갑옷이 나타나 번득였다. 그러나 웅염은 입에서 한 줄기 피를 토해내며 멀리 튕겨나갔다. 가슴이 뚫리지는 않았으나 금빛 갑옷은 움푹 파여 있었고, 부서진 갑옷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웅염은 산의 한쪽 벽에 처박혔다가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왔다. 벽에는 핏자국이 길게 드리워졌다.

    “조력자가 있었나……?”

    간신히 일어선 웅염의 얼굴에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팔백 리 사타령에 인간족 수사가 부동래를 돕기 위해 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만약 진즉 알았다면 산혼정이 박혀 있는 부동래를 굳이 성급하게 쫓아와 직접 죽이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동래는 어린 요물을 보호하며 심협 곁으로 다가왔다.

    “이제 솔직하게 말해라. 도대체 무슨 꿍꿍이냐?”

    “알고 싶으냐? 허나 넌 그저 작은 장기말에 불과한데 네가 안다고 뭐가 달라지지? 하하핫!”

    웅염은 가슴을 움켜쥐고는 비릿하게 비웃었다.

    “부형이 장기말에 불과하면 넌 뭐지?”

    웅염이 그 말을 듣고는 잠시 주춤하더니 바로 씩 웃으며 답했다.

    “그래, 나도 장기말에 불과하지. 조금 더 중요한 장기말. 나도 버려지겠지. 허나 너는…… 곧 죽은 장기말이 될 것이다.”

    말을 끝낸 그는 부동래를 빤히 쳐다봤고, 심협은 눈살을 찌푸렸다.

    ‘부형에 대한 열등감으로 성급히 굴긴 했으나 입이 무겁고 신중한 자로구나. 심문해봐야 별다른 소득이 없겠어.’

    심협은 부동래에게 조용히 말했다.

    “입이 무거운 자이니 그냥 단숨에 죽여 버리는 게 낫겠소.”

    그의 목소리와 함께 웅염의 화염장창을 날려버렸던 순양비검이 허공에서 그의 머리를 향해 곧장 떨어졌다.

    웅염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고는 사자후를 토해냈다. 그러자 몸이 갑자기 부풀어 오르더니 머리 셋 달린 화사자 본래의 모습으로 변했다.

    몸에서는 불길이 하늘까지 활활 타오르면서 형용할 수 없는 기세가 흘러나왔다.

    순양비검은 마치 보이지 않은 기세에 막힌 것처럼 기세가 줄어들었다.

    “방금은 기습이라 당했다만 이제 호락호락 당하…….”

    웅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산처럼 거대한 금상의 허상이 돌진해왔다.

    쾅!

    굉음과 함께 웅염은 거대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벽에 처박혔다.

    몸을 뒤덮고 있던 기세가 무너지자 순양비검은 막힘없이 그대로 찔러 내려갔다.

    푹!

    핏빛이 튀면서 웅염이 허공을 향해 길게 포효하자 산 전체가 떨려왔다.

    하지만 몸에서 선혈이 튀는 순간, 불길이 튀어나와 휙 하고 타올랐다. 동시에 커다란 불꽃이 번지면서 기온이 급상승하며 심협을 덮쳐왔다.

    심협은 곧장 비검을 타고 뒤로 물러났다.

    다음 순간, 불꽃이 하늘 높이 타올라 반경 100여 장을 뒤덮었다.

    심협과 부동래는 어린 요물을 데리고 황급히 물러났는데, 한쪽에서 다른 요물들이 몰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심형, 싸움에 연연하지 말고 물러납시다.”

    부동래가 어린 요물을 안고는 소리쳤다.

    심협은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은 둔광으로 변하여 쏜살같이 날아갔다.

    웅염의 상처가 가볍지 않으니 바로 쫓아오지는 못할 터였다.

    * * *

    심협과 부동래는 어린 요물과 함께 다시 지하 동굴로 돌아왔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이오?”

    심협이 어린 요물을 힐끗 보며 물었다.

    “이 아이는 소선풍(小旋風)이라고, 본래 현양지굴을 지키던 대요의 아이요. 한데 그 아비와 음양이기병을 지키던 요물들은 보물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죄로 모두 죽임을 당했소. 이 아이만 무사히 도망쳐 계속 지굴에 숨어 있었지.”

    “그렇다면 저들은 아이를 죽여서 입막음을 하려 한 것이오?”

    “그렇소. 한데 이 아이가 웅염이 음양이기병을 훔치는 걸 봤다 하오.”

    “역시 모함이었군!”

    “이제 됐소. 소선풍이 증언하면 내 억울함을 풀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심협은 그 말을 듣고도 굳은 얼굴로 대답이 없었다.

    “왜 그러시오? 뭐가 잘못됐소?”

    “그리 간단하게 끝날 것 같지 않소. 웅염이 음양이기병으로 부형을 모함한 거야 그렇다 쳐도 보병을 어떻게 부형의 저물반지에 넣었단 말이오?”

    “그건…… 나도 모르겠소. 저물반지를 잃어버린 적도 없는데…….”

    부동래가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심협은 다시 한참을 생각하다가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부형, 그날 저물반지를 검사한 자가 누구요?”

    “이대왕 육아상왕이오.”

    부동래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왜 그러시오?”

    부동래가 놀란 표정으로 심협을 바라봤다.

    “음, 반지를 검사할 때 육아상왕이라는 자가 수를 쓴 게 아닐까 싶군요.”

    부동래는 안색이 변하여 한참을 생각했지만,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은 듯이 물었다.

    “이대왕이 의도적으로 내게 누명을 씌웠다? 어째서?”

    “그야 나도 모르오. 다만, 부형의 스승님께서 사타령을 떠나 자립한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측할 뿐.”

    부동래는 다시 침묵에 잠겼다.

    그는 심협의 말이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그 일로 두 대왕은 자신의 스승을 압박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목적은 우리 스승님이겠군.”

    “웅염이란 자는 청모사왕 휘하라 했으니 음양이기병의 일은 육아상왕과 청모사왕이 함께 공모한 일일 가능성이 높소. 만약 정말로 두 대왕이 힘을 합친 것이라면 이번 일은 시작일 뿐, 반드시 다른 움직임이 있을 것이오.”

    “그렇다면 사타령의 분가(分家)가 코앞에 있으니 곧 일이 생기겠구려. 서둘러 사타성으로 돌아가 이 일을 스승님께 말씀드려야겠소.”

    “서두르지 마시오. 추측일 뿐, 증거도 없지 않소? 이 어린 요물의 말을 부형의 스승님은 믿을지 몰라도 다른 자들은 어떻겠소? 오히려 부형과 이 아이만 목숨을 잃게 될 공산이 크오.”

    심협의 말에 막 대꾸를 하려던 부동래는 갑자기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두 눈은 붉게 물들었다. 법력의 운공이 산혼정의 발작을 자극한 것이다.

    심협은 서둘러 그를 앉힌 뒤 어깨를 누르고 볍력을 주입하여 산혼정의 여파를 잠재웠다.

    한참 후에야 부동래 눈의 핏기는 점점 사라졌고, 파동도 같이 잦아들었다.

    그제야 냉철함을 되찾은 부동래가 입을 열었다.

    “심형 말이 옳소. 무작정 사타성으로 갔다가는 아직 배신자 신세인 나와 죄도 없는 이 아이만 죽임을 당할 것이오.”

    심협은 부동래가 고집을 부리지 않자 내심 안도했다.

    “대신 몰래 성으로 잠입하여 스승님께만이라도 이 일을 알려야겠소. 스승님께서 믿든 안 믿든 최소한의 대비는 해두실 터이니 그 정도면 충분하오.”

    “부형…… 부형은 참 총명한데 가끔은 정말 근심거리구려. 쓸모가 있는 증거를 가져가야지, 안 그러면 부형의 스승님도 부형을 믿지 않을 것이오.”

    부동래는 그 말에 일리가 있다 싶었는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물었다.

    “그럼 심형에게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소?”

    “방법이 있긴 한데…… 그전에 우선 이 아이부터 대피시켜야 할 것 같소.”

    “음. 그건 그렇소”

    부동래도 찬성했다.

    이 어린 요물에게는 사타령에 아무런 연고가 없었기에 사타령 외곽의 인적이 드문 산속으로 보내기로 했다. 이들이 원해서가 아니라 어린 요물의 요구였다.

    소선풍이라는 이 어린 요물은 보기에는 나약하고 어리나 심지가 굳건했다. 부친의 죽음을 목격하고도 현양지굴에서 지금껏 홀로 살아남은 것만 봐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소선풍의 생각은 간단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살아온 곳을 떠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타령 영내는 너무 위험하니 우선 사타령 팔백 리 밖에 두기로 한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부동래가 참지 못하고 심협에게 물었다.

    “이제 말해보시오. 도대체 무슨 방법이오?”

    심협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더니 소매에서 정교한 옥병을 꺼냈다. 이어서 옥병을 열자 향긋한 냄새가 풍기더니 뒤이어 쌀알만 한, 하얀색 작은 벌레가 한 마리 날아올랐다.

    심협은 소매에서 붉은 실을 꺼내서 벌레 앞에서 흔들었다. 벌레는 바로 실 위아래를 수차례 오르락내리락했다.

    이어서 심협이 주문을 읊었는데, 그 목소리는 평범한 주문과는 사뭇 달랐다.

    부동래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 주문에 작은 벌레는 환호하듯 몸을 떨더니 빛으로 변하여 두 사람 앞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심형, 이건……?”

    “신목림에서 얻어온 추적 고충이오. 방금 그에게 웅염의 냄새를 맡게 했으니 이제 그가 우리를 대신해 웅염을 찾아줄 것이오.”

    “웅염을 찾다니, 왜 그를 찾는 것이오?”

    “아직도 모르겠소? 그자는 온갖 궁리를 꾸며 현양지굴 속에 숨어 있었음에도 결국 부형을 죽이지 못했소. 게다가 이제 부형에게 조력자가 있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으니 그자가 어떻게 할 것 같소?”

    “음, 그의 배후에 있는 자들에게 보고하려고 하겠지.”

    “그렇소. 내가 원하는 게 바로 그것이오.”

    심협이 씩 웃는 모습을 보며 부동래는 일말의 자신감이 생겨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어서 벌레를 쫓아갑시다. 너무 멀어지면 비술을 사용할 수 없소.”

    말을 마친 그는 둔광으로 변하여 날아갔다.

    웅염은 성격이 포악하지만 사실 매우 신중한 성격이니 곧장 따라갔다면 경계심 때문에라도 벌레가 쫓아오는 것을 금방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부상을 치료할 시간도 벌었고, 추격자가 있는지를 살펴볼 시간도 주었다. 그러니 지금 쫓아간다면 그도 눈치채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두 사람은 점점 속도를 높여서 숲속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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