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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728화 (728/1,214)
  • 728화. 동굴 잠행

    심협은 한참을 생각하더니 조용히 말했다.

    “세상에 마환이 이미 사라지고 삼계가 평안해졌다고들 하는데, 삼계무도회나 오장관, 신목림의 사건을 보면 지금의 태평성세는 모두 허상이고, 상상도 하기 힘든 일들이 잔잔한 호수에 잠겨 있는 듯하오.”

    부동래는 그 말에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만약 이전 같았다면 그는 심협의 말을 흘려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타령에 돌아온 후로 그는 이미 금지되었던 평범한 사람을 해치고 잡아먹는 일이 이곳에는 여전히 남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 마족을 향한 인간족과 선족의 경멸과 차별 역시 여전히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종족 간의 차별과 편견은 오랜 세월 쌓이고 여전히 각인처럼 모두의 가슴에 새겨져 있었다. 결코 쉽게 넘을 수 없는 산이었다.

    “그래서…… 정말 안 갈 거요?”

    부동래가 진중한 눈으로 심협을 바라보며 물었다.

    “같은 말 두 번 하게 하지 말고, 어디까지 조사했는지나 말해보시오.”

    심협은 의자에 기대앉으며 묻자 부동래도 그제야 긴장을 풀며 말했다.

    “음양이기병은 음양지기를 축적해야만 위능이 계속해서 강해지기 때문에 평소에 현양지굴에 보관하는데, 그곳은 경비가 매우 삼엄하오. 게다가 음양이기를 담은 보병(寶甁)은 꽤나 무거워서 보통 사람은 절대 옮길 수 없고 대승 후기 이상의 수사라야 훔칠 수 있소. 그러니 먼저 현양지굴로 가서 보병이 분실된 과정부터 알아보고 싶소.”

    “그것도 좋겠구려. 부형의 오명을 풀어야 저들이 산혼정을 빼주지 않겠소? 그건 머리에 매달린 예리한 검처럼 부형의 목을 점점 죄어올 게요.”

    부동래는 심협이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주자 내심 감동했다.

    그와 심협은 서로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뜻이 잘 맞아 금세 돈독해진 바 있다.

    “지체할 시간이 없으니 어서 출발합시다.”

    “아, 우선 상처 좀 치료하고 갑시다.”

    부동래가 쓰게 웃으며 답했다. 그는 저물법기를 빼앗긴 터라 법보 하나를 제외하고는 치료 단약 하나 들고 다니지 못했다.

    심협은 그의 궁핍한 처지를 보고는 품에서 저물반지를 꺼내 건넸다.

    “여기에 단약이 있소. 치료야 되겠지만 산혼정에는 소용이 없을 것이오.”

    “고맙소.”

    부동래는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

    심협은 부동래가 단약을 먹고 상처를 치료하는 모습을 보며 옆에서 묵묵히 호법을 섰다.

    * * *

    다음 날 새벽.

    심협과 상처가 거의 회복된 부동래는 지하 동굴에서 나와 현양지굴이 있는 사왕동 쪽으로 향했다. 심협은 비주를 몰았고, 부동래는 가능한 한 법력을 운공하지 않고 길 안내만 했다.

    정오 무렵, 두 사람은 마침내 사왕동 부근에 도착했다. 그러나 바로 들어가지 않고 먼저 숨을 만한 곳을 찾아 내려간 뒤, 걸어서 현양지굴로 향했다.

    조심 또 조심하고 법력 파동을 봉인한 채 현양지굴 근처까지 다가간 두 사람은 의외의 상황에 내심 당황했다.

    경비가 삼엄해야 할 이곳의 방비가 너무도 허술했던 것이다.

    현양지굴 밖에는 대전이 하나 세워져 있었고, 입구에는 몇 명의 약한 요물들이 허술하게 서 있는 것이 절대로 중요한 물건이 있는 곳 같지 않았다.

    “여기가 정말 종문의 중요한 곳이오?”

    “음양이기병을 지키고 있으니 실로 중요한 곳인데…… 어떻게 된 거지?”

    부동래마저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음…… 설마, 속임수?”

    “현양지굴 안은 음양의 기운이 뒤섞여 있어 신식으로도 살펴볼 수가 없소. 그러니 이리 합시다. 내가 들어가볼 테니 심형이 밖에서 망을 보시오. 그래야 매복이 있어도 둘 다 잡히지는 않을 것이오.”

    “차라리 내가 갈 테니 부형이 망을 보시오.”

    “현양지굴 안의 상황을 알고 있소?”

    부동래가 웃으며 되묻자 심협은 말문이 막혔다.

    “나는 현양지굴에 들어가본 적이 있소. 내부가 비교적 복잡하니 내가 가는 게 낫겠소. 게다가 정말로 매복이 있다면 그때 그대가 뒤를 막아줘야 나도 안심할 수 있을 거요.”

    “음, 알겠소. 부디 조심하시오.”

    “걱정하지 마시오.”

    “그럼 내 저들을 유인하겠소.”

    심협은 그렇게 말하고는 두 눈을 감고 양손을 결인했다.

    100여 장 떨어진 연못에서 물줄기가 하늘로 치솟더니 거대한 사람 형상으로 변하여 손을 휘저으며 울창한 숲으로 달려왔다.

    대전 입구를 지키던 요물들은 이 소동을 감지하고는 아연실색했다.

    그중 주둥이가 뾰족한 원숭이 요물이 두꺼비 요물에게 말했다.

    “네, 네가 가봐라.”

    “시, 싫소! 이틀 전에도 저기서 형님 무리가 죽지 않았소? 나는 죽어도 안 갈 거요!”

    “감히 내 말을 안 들어? 어?”

    원숭이 요물이 노려보며 화를 내자 두꺼비 요물이 목을 움츠리고는 잔뜩 움츠러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혼자는 못 가오. 저 두 명이라도 붙여 주시오.”

    그에게 호명된 두 요물은 순간 화가 치밀어 두꺼비 요물을 노려봤다.

    “너희도 같이 가라!”

    원숭이 요물이 두 사람을 가리키며 명했다.

    “망할 원숭이, 발령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아직 대장도 정해지지 않았는데 어디서 대장 노릇이야? 함부로 명령하지 마!”

    푸른 피부의 요물은 만만치 않았다.

    “그래, 우리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지? 정식 명령은 이틀 후에나 내려올 텐데 말이야!”

    외뿔 요물도 맞장구쳤다.

    “됐어, 그럼 가지 마라. 그러다 일이 생겨서 위에서 책임을 물으면 다 같이 죽는 거지, 뭐. 그때 가서 날 원망하지 마라.”

    그때, 두꺼비 요물이 끼어들었다.

    “아니면 이리 하는 게 어떻겠소? 다 같이 가는 거요. 무슨 일이 있다 해도 넷이라면 하나는 살 수 있지 않겠소?”

    “그건 안 돼. 여기를 비우라고? 그것도 죽을죄란 말이다!”

    “난 동의하오. 다 같이 갑시다. 게다가 여기에 음양이기병도 없는데 누가 안으로 가겠어? 음양지기를 흡수하면 그건 죽음을 자초하는 일 아닌가?”

    “그건 그러네.”

    푸른 피부의 요물이 두꺼비 요물을 의견을 따르고 외뿔의 요물마저 동의하자 원숭이는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한데 그때, 숲 쪽에서 또 소리가 들려왔다.

    “좋아, 그럼 빨리 갔다가 빨리 오자고. 이 일은 절대 비밀이다!”

    원숭이 요물이 마침내 동의했다.

    요물 무리가 조심스럽게 현양지굴 입구의 대전에서 나와 숲을 향해 달렸다.

    심협은 이를 보고는 안도했다.

    “저들이 조금만 더 지체했다면 내가 참지 못하고 다 쓸어버릴 뻔했소.”

    “그랬으면 재밌는 구경이 될 뻔했소. 하하하! 자, 그럼 여기를 부탁하오.”

    부동래가 웃으며 답하고는 회오리로 변하여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심협은 오래된 나무 위에 몸을 숨기고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요물들은 다시 동굴 입구로 돌아왔지만, 부동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초조해진 심협이 동굴로 들어가 볼까 고민하던 중, 대전 너머에서 갑자기 폭발음이 들려왔다. 뒤이어 불꽃이 하늘로 치솟았고, 순식간에 현양지굴 밖의 건물이 무너졌다.

    뿌옇게 피어오른 먼지 사이로 부동래가 나타났지만, 입구를 지키던 요물들은 감히 함부로 나서지 못했다.

    밖으로 나온 부동래는 망설임 없이 날아올라 숲 쪽으로 내달렸다.

    이를 지켜보던 심협은 그의 오른쪽 허리춤에서 일고여덟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아이를 발견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심협이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부서진 대전에서 일고여덟 명의 요물이 뛰쳐나와 부동래를 추격했다. 모두가 대승기 이상이었지만, 대부분 초기 중기였다.

    대승기 후기는 불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의 야성미 넘치는 남자뿐이었다. 몸집은 크고 우람했는데 훤히 드러난 상반신 아래로는 호피 무늬 바지를 입고 있었다. 마치 칼로 조각한 것처럼 탄탄한 근육에서 역동적인 힘이 느껴졌다.

    부동래는 손풍(巽風)으로 변하여 빠르게 숲을 누비고 다녔다.

    추격하는 요물들 중 유일하게 붉은 머리 남자만이 부동래를 쫓을 수 있었고, 나머는 점점 멀어져 간신히 대열만 유지하며 쫓아오고 있었다.

    심협은 곧장 쫓아가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아서 잠시 상황을 살폈다. 누군가 숨어 있다가 나오는 자가 있는지 지켜본 것이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그제야 심협은 사월보를 시전하여 숲속을 빠르게 지나 그들을 추격했다.

    그렇게 한참을 뒤쫓던 심협은 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동래의 속도는 예상보다 훨씬 빨라서 뒤쫓는 요물들이 전혀 따라잡지 못하고 하나둘 뒤처지기 시작한 것이다.

    심협은 그중 하나인 멧돼지 요물을 바라보며 이 기회에 낙오된 요물을 제거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부동래는 내가 근처에 있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든 나와 힘을 합쳐 저들을 상대하려 들겠지. 한데 어찌하여 저토록 필사적으로 도망을 가는가? 적들이 도저히 상대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자들도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붉은 머리의 요물 외에는 그리 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부동래가 저렇게 도망친 것은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면, 부동래가 허리에 끼고 갔던 그 어린아이처럼 말이지.’

    그런 생각이 들자 심협은 낙오된 요물을 제거하기보다는 최대한 빨리 부동래를 따라잡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심협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을목선둔을 시전하여 부동래가 날아간 방향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머지않아 산골짜기 상공에 도착했다.

    그는 기운을 거두고 허공에 뜬 채 아래를 내려다봤다. 하나하나가 10여 장에 이르는 머리통 세 개가 달린 화사자가 온몸에 불을 두른 채 기세등등하게 골짜기 안쪽으로 부동래를 몰아넣고는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저자였구나!”

    심협은 머리 세 개의 화사자를 알아봤다. 바로 부동래에게 음양이기병을 훔쳤다는 오명을 씌운 웅염이었다.

    그가 서둘러 내려가 도우려는 순간 갑자기 부동래의 전음이 들려왔다.

    “심형, 잠시만! 이놈에게 물어볼 것이 있소.”

    전음을 들은 심협은 조용히 산골짜기 구석으로 내려가 몸을 숨겼다.

    심협이 내려온 것을 알아챈 부동래는 그제야 마음이 좀 편해졌다.

    그는 검은 피부에 코에는 딱딱한 뼈가 자란 어린 요물을 뒤에 두고는 웅염을 노려봤다.

    “웅염, 왜 날 모함한 거지?”

    화사자 웅염은 부동래의 몸에 산혼정이 박혀 있으니 별다른 저항을 못 할 거라 여긴 탓인지 바로 죽이지 않았다. 더욱이 그가 부동래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쯤이야 사타령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만이라도 부동래를 발아래 두고 마음대로 희롱할 수 있는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던 것이다.

    “모함? 누가 모함했다는 거지? 음양이기병은 네 저물반지에서 나오지 않았느냐! 세 대왕님께서 자비를 베푸셨는데 은혜도 모르고 다시 보병을 훔쳐?”

    웅염은 몸의 불꽃을 거두어서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

    사람은 기고만장할 때 방심하게 마련이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웅염은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자 부동래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설마…… 정말로 나를 모함한 게 아니었나?’

    이때, 그의 뒤에 숨어 있던 어린 요물이 갑자기 그의 옷깃을 당기며 조용히 말했다.

    “저자예요. 저자가 맞아요.”

    그 말은 밑도 끝도 없었기에 부동래는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제가 동굴에서 봤어요. 저자가 보병을 지키던 우리 아버지를 죽이고 보병을 가져갔어요!”

    어린 요물은 붉어진 눈시울로 말했고, 웅염도 그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꼬마야,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웅염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험악하게 노려보자 어린 요물은 목을 움츠리며 부동래 뒤에 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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