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7화. 누명
길을 따라 걷는 심협은 간혹 땅에 드러난 백골과 대기 가득한 죽음의 기운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얼마나 많은 세월 동안 쌓인 것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현재의 평화로운 삼계의 모습이 거짓이 아니길 기원했다.
허나 여러 경험과 직감은 그에게 마환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고 삼계에는 진정한 평화가 도래한 것이 아니라고 끊임없이 말했다.
심협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는데, 앞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바위가 튀어나온 곳에서 일고여덟 명의 요물이 걸어 나왔는데, 각양각색의 요물들은 하나같이 무기를 들고 있었고, 험상궂은 표정이었다.
선두에는 본모습이 어떤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인간족과 흡사하지만, 코에 검은색 단단한 뼈가 있고 몸에는 허름한 갑옷을 걸친 존재가 흑색의 세모 깃발을 들고 있었다.
깃발에는 ‘사타령’이라고 적혀 있었다.
“누구냐?”
선두의 요물이 심협을 보자마자 바로 소리쳤다.
심협도 상대방을 살펴보고는 대답했다.
“사타령의 제자들이신지요?”
“그렇다면 어쩔 테냐?”
검은 코 요물은 흠칫하더니 불확실한 말투로 답했다. 그들은 산을 순찰하는 사타령의 잡부들이지 제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저는 사람을 찾으러 왔습니다. 그의 이름은…….”
심협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검은색 코 요물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사타령으로 사람을 찾으러 오다니, 죽고 싶은 게로구나? 누군지 모르겠지만 여기는 살아 있는 사람이 없다.”
“아, 제가 찾아온 건 사람이 아니라 호랑이 머리 요괴인데, 이름은 부동래라고 합니다.”
심협은 길게 실랑이하기 싫어서 바로 말했다.
한데 부동래의 이름을 듣자 요물들의 표정이 급변했다.
“허허, 진작 말하지 그랬소. 부동래를 찾으러 온 거였군요. 자, 저희가 안내하리다.”
검은 코 요물이 친절해 보이려는 듯 활짝 웃으며 말했는데, 심협은 내색하지 않았으나 내심 이상하다고 여겼다.
‘부동래에게 무슨 일이 생겼구나.’
그의 직감이 또다시 발동됐다.
“그럼 안내를 부탁드립니다.”
심협이 공수하자 검은 코 요물의 눈이 번뜩였다. 다른 요물들도 그 뜻을 이해했는지 옆으로 비켜섰다.
검은 코 요물은 다시 선두에 서서 심협을 안내했다.
심협은 어떤 상황에든 대비할 수 있도록 경계하면서도 시치미를 뚝 떼고 따라나섰다.
다른 요물들은 자연스럽게 뒤를 따라오면서 그의 퇴로를 막았다.
“그나저나 도우의 이름이 어떻게 되시오? 부동래와는 무슨 관계요?”
심협이 웃으며 대답했다.
“대당 관부에서 함께 일한 동료입니다. 이번에 사타령을 지날 일이 생겨서 부형과 옛이야기나 나눌까 타고 찾아왔습니다.”
“그렇군요. 잘하셨소.”
“그나저나 부형은 잘 지내십니까? 사타령으로 돌아간 후로 오랫동안 연락이 없었습니다.”
“부 도우는 삼대왕의 애제자이니 당연히 잘 지내고 있소.”
검은 코 요물이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그래? 한데 왜 거짓말 같지?”
뒤에 선 요물들의 거동을 눈치챈 심협이 차갑게 대꾸했다.
“쳐라!”
검은 코 요물이 외치자 뒤에 있던 요물들이 커다란 그물을 펼쳐서 심협을 뒤덮었다.
그물에서 시기(尸氣)가 뿜어져 나오면서 그의 몸이 부식되기 시작했다.
“무슨 짓이냐?”
심협은 당황하지 않고 물었다.
“배신자 부동래를 찾아왔으니 한패가 맞으렷다! 저놈을 대대왕과 이대왕께 넘기면 이제 이 고생도 끝이다!”
검은 코 요괴는 흥분한 듯 외쳤다.
‘배신자?’
이쯤 되자 심협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나와 부형이 한패라니, 우리가 뭘 했다고 한패라는 것이냐? 나는 대당 관부 사람이다! 괜히 애먼 사람 잡지 마라!”
심협은 대당 관부를 내세워 상황을 피하려 했다.
“대당 관부? 흥! 웃기는군. 사타령에 들어오면 옥황상제라도 관여할 수 없다. 네놈이 부동래와 함께 음양이기병을 훔쳤으니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심협은 더더욱 당황스러웠다. 부동래가 사타령으로 돌아간 것은 마허지룡에 대해 조사하기 위함인데 음양이기병은 또 무어란 말인가?
“음양이기병? 그게 도둑맞았다고? 어떻게”
“내가 그걸 어떻게…… 흠! 아무튼, 두 분 대왕 앞에서도 이렇게 당당하게 굴 수 있나 보자!”
심협은 이들에게서 더 알아낼 게 없음을 알게 됐으니 그 무슨 대왕이니 뭐니 하는 자를 만날 생각은 없었다.
그가 몸을 세우고는 홍련업화를 뿜어내자 초록색 그물에서 나오던 시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이어서 어깨를 떨자 초록색 그물은 잿더미가 되어 땅으로 떨어졌다.
요물들은 화들짝 놀라 달려들었다. 그러나 경지가 가장 높은 검은 코 요괴도 고작 응혼 초기에 불과했다.
갑자기 회오리가 불어오더니 순식간에 모든 요물이 밀려났고, 이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심협은 사라진 뒤였다.
요물들은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바로 사왕동(獅王洞)으로 달려가 이 일을 보고했다.
* * *
10리 밖의 한적한 산속. 회오리가 휘몰아쳤고, 심협과 부동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오?”
심협은 부동래를 알아보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부동래는 두 눈에 핏발이 가득 서 있었고, 기운도 매우 엉망이었으며, 몸에는 10여 개의 상처가 보였다.
“심형, 어찌 사타령까지 온 것이오?”
부동래는 대답 대신 물었다.
“천기성으로 가던 중인데 지나는 길에 부형이나 만나볼까 해서 왔소. 한데 사타령의 배신자라니, 도대체 무슨 일이오?”
“그게…… 말하자면 길다오. 우선 안전한 곳으로 갑시다.”
“알겠소.”
두 사람은 바로 사라졌고, 산속으로 벗어나 은밀한 지하 동굴에 도착했다.
동굴 안에는 삶의 흔적이 묻어나는 탁자와 의자가 있었다.
“내가 이전에 수련하던 곳이라 아는 자가 많지 않소.”
부동래는 심협에게 앉으라고 권하고는 웃으며 말했다. 이럴 때 심협을 만난 것은 그에게 기분 좋은 일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오? 어찌 이 지경이 된 게요?”
“일이 조금 복잡하오.”
부동래는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럼 장안을 떠나 사타령에 돌아온 때부터 말해보시오.”
“좋소. 삼계무도회 이후로 마허지룡에 관한 일을 알아보고자 돌아왔소. 한데 돌아오자마자 종문에 큰일이 일어난 거요.”
부동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치우가 봉인되고 삼족 회맹이 강화되자 사타령도 폐쇄적이었던 태도를 바꾸어 요족들을 받아들이고 인, 선 두 종족까지 확장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이에 따라 사타령은 매우 빠르게 발전했고, 거느린 요물이 10만 명을 넘게 되면서 갑작스러운 변화에 종문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부동래의 스승이자 사타령 삼마 중 하나인 금시대붕은 사타령을 나와서 따로 종문을 세워 육아상왕(六牙象王), 청모사왕(靑毛獅王)에게서 독립하기로 했다.
“스승님의 큰형님이자 사타령의 창시자인 청모사왕은 형제들끼리 싸우는 걸 원치 않았기에 스승님의 결심이 확고한 것을 알고는 내키지 않음에도 결국은 동의하셨소. 허나 이대왕 육아상왕은 크게 불만을 드러냈고, 스승님과 인연을 끊을 정도로 결사반대했지.”
“그게 부형이 배신자가 된 것과 무슨 상관이 있소?”
“참으로 절묘하게도 내가 사타령에서 나온 그때, 종문의 지보가 사라졌소.”
부동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게 음양이기병이오?”
심협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렇소. 스승님의 결정에 나는 반대도, 관여도 할 생각 없이 그저 마허지룡에 대해 조사하고 있었는데, 그 일이 음양이기병과 관련이 있었던 게요! 그래서 사왕동 옆의 현양지굴(玄陽地窟)로 향했소. 그곳은 평소 음양이기병을 보관하는 곳인데…… 내가 떠난 직후 음양이기병이 도둑맞았다는 소식이 돌았고, 내가 그 범인으로 몰린 것이오.”
“종문의 지보라면서 세 명의 대왕이 가지고 있지 않고 다른 곳에 둔 게요? 그건 훔쳐가시오 하고 놔두는 것과 다름이 없지 않소?”
심협은 의문함을 감추지 못했다.
“음양이기병은 평소 음양의 기운이 교차하는 곳에서 음양이기를 흡수하여 위능을 높여야 하오. 그래서 평소에는 현양지굴에 보관하는 것이지.”
“그렇구려. 그럼 혐의만으로 배신자로 몰린 것이오?”
“그때, 청모사왕 휘하의 친전제자 웅염(雄染)이 세 대왕 앞에서 내가 아무도 없을 때 음양이기병을 꺼내는 걸 봤다고 증언하였소.”
“그자와 원한이 깊었소?”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그자는 머리 세 개의 화사자(火獅子)인데, 성격이 포악하고 잔인하여 평범한 사람에게도 가차 없이 폭력을 휘두른다오. 이를 말리다 그를 다치게 한 적이 있소.”
“한데 그자가 정말 바보가 아닌 이상 아무런 증거도 없이 누명을 씌울 리는 없지 않소? 혹시…… 정마로 음양이기병을 훔친 건 아니오?”
심협은 한번 떠보기 위해 짐짓 노려보며 물었으나, 부동래는 그를 힐끗 보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상한 점이 없으니 일이 이 지경까지 된 게 아니겠소? 그놈은 내가 음양이기병을 훔쳤다고 확신했고, 심지어 음양이기병이 내 저물반지 안에 있다는 것에 목숨까지 걸었소.”
여기까지 듣고 난 심협은 이어진 일을 예상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부동래가 말했다.
“그가 그렇게까지 나오자 다른 두 대왕이 날 압박하여 저물반지를 내놓으라 했고, 스승님께서 온 힘을 다해 말리셨지만 소용없었소. 그리고 진짜로 내 저물반지 안에 음양이기병이 있었소.”
“저물반지를 잃어버리거나 부형에게서 떠났던 적은?”
“잃어버린 적은 없소. 그리고 만약 잃어버려서 남이 안에 물건을 넣으려면 다시 연화해야 하는데, 내 저물반지는 나와 연결이 끊어져 있지 않았소. 다른 사람이 연화했던 흔적도 없었지.”
“그거 참 이상하군요.”
부동래도 정말 이해가 안 되는지 뒤통수를 긁적였다.
“다음은 어떻게 됐소?”
한참을 생각하던 심협은 무언가 생각나긴 했으나 바로 말하는 대신 다시 물었다.
“내 저물반지에서 음양이기병이 나오자 다른 두 명의 대왕이 엄벌을 요구했고, 웅염은 더욱 날뛰었소. 내가 대당 관부에 투항하기 위해 중보를 바치려 했다던가?”
“속이 시커먼 자로군요. 어떻게 해서든 부형을 죽이려는 심산인가 보오.”
“내 인간족과 가깝게 지내고 삼계의 모든 일족이 화목하게 지내야 한다 했을 때 적잖은 자들이 불만을 드러냈소. 육아상왕도 삼계무도회 이후로 내게 원한을 가졌지. 그래서 모두가 나를 처형하길 원했고, 결국 스승님의 간청 덕에 목숨만은 살려두기로 한 게요.”
“그렇다고 죄가 모두 사라진 건 아니었겠구려.”
요족과 마족은 배신자에게 절대로 정을 베풀지 않음을 심협은 잘 알고 있었다. 부동래는 아마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겨우 살아남았을 것이다.
부동래가 앞섶을 풀자 드러난 가슴팍의 심장 주위로는 일곱 개의 붉은 반점이 있었는데, 그 형태가 북두칠성을 이루었다.
부동래가 법력을 잠깐 운공하자 일곱 개의 붉은 반점이 일제히 번득이면서 혈홍색 부문이 떠오르더니 기이한 법력 파동이 사방으로 번졌다.
부동래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법력의 운동을 멈췄다.
이를 본 심협의 눈빛이 한층 신중해졌다.
“저들이 몸에 산혼정(散魂釘)을 박은 게요?”
“그렇소. 3년 안에 뽑지 못한다면 법력을 운공할 때마다 발동해서 서서히 신혼을 소멸시킬 거요.”
“이런 악독한 수단을 당했으면서 왜 도망치지 않은 것이오? 대당 관부로 돌아간다면 정국공이나 국사께서 도와줄 방법이 있지 않겠소?”
“내가 도망친다면 배신자라는 오명을 인정하는 꼴이 되오. 그러니 난 남아서 진상을 밝혀야 하오.”
“그러다 진상을 밝혀내기도 전에 목숨이 먼저 끊어지겠소.”
“이곳 상황이 생각보다 복잡해서 나로서는 방법이 없소. 사실 며칠 전에 단서를 찾으러 다니다가 다시 추격을 받게 되었지. 어찌 된 일인 것 같소?”
부동래는 웃으며 물었고, 심협은 그의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보고는 설마 하며 말했다.
“설마…… 음양이기병이 또 사라졌소? 부형이 또 의심을 받게 됐고?”
부동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형도 참 딱하오. 같은 일로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의심을 받다니.”
심협이 씁쓸한 눈으로 부동래를 바라봤다.
“심형의 분석을 들으니 여러 가지 일이 수면 위로 드러난 느낌이오. 아무래도 사타령에 큰 문제가 있는 듯하니 심형은 서둘러 떠나는 게 좋겠소.”
“이대로 가라니? 부형이 죽도록 내버려두란 말이오?”
“그 짧은 인연으로 어찌 심형을 수렁으로 끌어들일 수 있겠소? 또한, 나는 그리 쉽게 죽지 않소.”
부동래가 웃으며 말했다.
“허세는 적당히 하시오. 산혼정이 박혀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울 거라는 것을 알고 있소. 부상이라도 봐주겠소. 어쩌면 산혼정의 속도를 늦출 수 있을지도 모르잖소.”
부동래는 다시 떠나라고 권하려 했지만, 심협의 말이 이어졌다.
“게다가 나도 마침 여기서 조사를 좀 할 게 있소.”
“사타령과 연관된 일이오?”
“음양이기병과 연관이 있소.”
심협이 심각한 표정으로 오장관에서의 일을 설명했다.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오?”
부동래는 깜짝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