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6화. 깨우침
“구두충의 마기는 어디서 생긴 것인지 모르겠군요. 일전에 선배님께 당한 부상이 그리 쉽게 회복된 것을 보면 거처에 무언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서 한번 살펴보시겠습니까?”
방금 구두충이 떠날 때 생겼던 불안감이 떠오른 심협이 권하자,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던 소백룡도 일리가 있다고 여겨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하는 게 좋겠소.”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구두충의 궁전 쪽으로 날아갔다.
심협은 조비극에게 이곳을 지키게 하고는 붉은 빛으로 변하여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은 금세 구두충의 궁전에 도착했다. 그곳을 지키던 요물들도 거의 다 달아나 경지가 약한 요물들뿐이었는데, 두 사람이 나타나자 곧장 도망쳤다.
심협과 소백룡은 그 요물들은 내버려둔 채 신식을 펼쳐 궁전 안팎을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의심스러운 점은 없었다.
“구두충이 마화한 원인은 이곳에 없는 것 같소. 아무래도 다른 곳에서 마기에 감염된 듯하구려.”
“그런 것 같군요.”
심협은 실망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것도 찾지 못한 두 사람은 더 머물지 않고 바로 떠나갔다.
이때, 궁전 아래의 혈지는 100장 정도 가라앉아 있었다. 혈지 주위는 하얀 광막으로 뒤덮여 있었고, 그 위에는 별 같은 수많은 부문이 반짝이고 있었는데, 매우 현묘한 금제라 심협과 소백룡의 신식으로도 발견할 수 없었다.
연산과 귀장 그리고 다른 두 명의 대승기 요족은 혈지 주위의 하얀 광막 안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두 명 모두 간 것 같은데 성숙신금대진(星宿神禁大陣)을 멈춰도 되겠습니까?”
연산은 옆에 있는 누군가에게 물었다. 그녀는 바로 만성공주였다. 소백룡에게 무릎 꿇고 호소할 때의 애절하고 연약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안 돼! 저 두 놈의 신식은 강력하니 아직도 살펴보고 있을지 모른다. 법진을 유지하는 데 조금의 소홀함도 있어서는 안 된다.”
“네!”
차갑고 도도한 만성공주의 목소리에 연산은 몸을 떨더니 전력을 다해 법진을 유지했다. 물론 다른 요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앞의 혈지에는 거대한 존재가 담겨 있었는데, 바로 구두충이었다.
혈지 주위의 법진이 번득이며 핏빛이 주입되었지만, 구두충은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내가 심혈을 기울여 귀차 혈통의 마구(魔軀)를 만들어 줬건만, 이렇게 쓸모없다니.”
만성공주가 한껏 짜증을 냈다.
그때, 낯선 목소리가 갑자기 만성공주의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이미 단전이 부서져 쓸모도 없어졌는데 어찌하여 굳이 마기를 부어서 살리시려는 겁니까?”
“단전을 뚫을 때 사용한 것은 마령인(魔靈刃)이다. 상처가 심해 보이지만 구두충 단전에는 짙은 마기가 담겨 있어서 마령인에 찔려도 큰 영향을 받지 않지. 그러니 영마대진(靈魔大陣)으로도 충분히 치료할 수 있다. 게다가 구두충은 귀차 일족의 유일한 혈통이니 쉽게 포기할 수는 없다.”
“그랬군요. 오열 앞에서 마령인을 쓰시다니, 대단하십니다. 마기가 발각되면 어쩌려고 그러셨습니까?”
“소백룡은 겉보기에는 똑똑해 보이지만 실은 아주 멍청하다. 내가 불쌍한 척하니까 자기 아비의 원수도 잊지 않더냐? 제아무리 강해봐야 걱정할 게 못 된다. 다만, 그 심협이란 자가 더 위험했다. 소백룡이 없었다면 온전하게 빠져나오지 못했을 거야.”
“심협이라…… 그 이름은 저도 들어봤습니다. 요풍의 계략이 몇 번이나 그자 때문에 물거품이 됐죠. 허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누군가 그에게 수를 써놨으니 안심하고 남은 일에 집중하시면 됩니다.”
“오, 그자에게 마기가 있다는 말인가? 대인께서 이미 대비를 하셨다니, 내가 걱정할 필요가 없겠군.”
만성공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몸에서 검은 빛을 뿜어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요염한 여자는 사라졌고, 온몸에 검은색 부문이 새겨진 갑옷을 입은 아리따운 여자 마장이 나타났다. 검은색 광환(光環)이 그녀 주위를 맴돌자 육신의 마기가 더욱 강해지면서 응축되었다. 마기를 조종하는 수단이 구두충보다 훨씬 뛰어난 모습이었다.
대진을 유지하던 연산과 귀장 등은 그 광경을 보자 경외심에 차마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만성공주가 난해한 주문을 읊조리자 미간에서 핏빛이 반짝이더니 갑자기 혈홍색 마문이 떠올라 두 줄기의 핏빛이 구두충 배의 상처로 떨어졌다. 그러자 구두충의 단전에 벌어져 있던 상처가 천천히 아물기 시작하면서 어두운 핏빛이 그의 체내에서 천천히 흘러나왔다.
* * *
심협과 소백룡은 은행나무 신수로 돌아왔지만, 무만아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두 사람이 반 시진 정도를 더 기다리자 은행나무 신수가 초록 빛으로 번득이더니 무만아가 환한 얼굴로 안에서 튀어나왔다.
“오래 기다리셨죠? 은행나무 신수 원액을 얻었어요.”
무만아가 두 개의 옥병을 꺼내더니 소백룡과 심협에게 건넸다.
“세 병이나 채취한 거야? 은행나무 신수는 운몽택의 신물인데 이렇게 많이 가져가도 괜찮을까?”
심협은 옥병을 받지 않고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은행나무 신수는 원기가 충만한 데다 저도 조심스럽게 채취했으니 큰 영향은 없을 거예요.”
심협은 그제야 안심하고 옥병을 받았다.
“내게는 필요가 없으니 무 도우가 가지시오. 일이 끝났으니 이만 가봐야겠소. 운몽택에는 구두충 외에도 많은 위험이 있으니 두 분도 오래 머물지 않는 게 좋을 것이오. 그럼…….”
소백룡은 옥병을 받지 않고 당부한 뒤 금빛으로 변하여 날아갔다.
“선배님 말씀대로 저희도 빨리 여기서 나가요.”
조비극은 검은 빛이 되어 건곤대 안으로 들어갔고, 심협도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이들이 출발하려는 순간, 푸른 빛이 건곤대에서 나왔다. 바로 파사였다.
무만아는 파사를 바로 알아보고 속으로는 의아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심 도우, 운몽택을 떠날 건가요?”
“당연한 것 아니오?”
“심 도우의 통령지술은 공간을 넘어서 영수를 소환할 수 있죠? 그렇다면 저는 여기 남아서 수련하고 싶군요. 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통령지술로 부르세요.”
“여기 남을 생각이오? 도우가 구두충을 배반한 사실을 잊은 게요? 그의 경지가 폐했다고는 하나 만성공주 등은 아직 건재하니 발각되면 위험할 수도 있소.”
“조심히 숨어 있으면 되죠. 그때 그 산골짜기의 영천 기억하시죠? 거기서 조용히 수련하면 저를 찾지 못할 거예요.”
“그렇지. 그곳이라면 안심이오. 어쨌든 부디 조심하시오.”
“그동안 감사했어요.”
파사는 웃으며 심협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떠나려 했다.
“잠깐! 부탁이 있소. 여기 남기로 했으니 만성공주 등을 지켜보다가 수상한 움직임이 보이면 바로 알려주시오.”
“만성공주요? 알겠어요.”
파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푸른 빛으로 변하여 땅속으로 사라졌다.
“저 파사까지 영총으로 삼았을 줄은 몰랐어요. 오라버니는 역시 대단해요. 그런데 왜 만성공주를 지켜보라고 한 거예요? 그녀가 무슨 짓을 벌일까 봐요?”
“나도 모른다. 허나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두 사람도 더는 머물지 않고 둔광으로 변하여 날아갔다.
성으로 돌아온 심협 등은 귀장 조비극의 안내를 따라가 여몽, 비홍과 합류했다.
일행은 객잔으로 향했고, 방 두 개를 잡아 이틀간 쉰 다음에 움직였다.
무만아는 세 정매와 함께 신목림으로 돌아갔고, 심협은 혼자서 원래의 여정대로 옥침을 고칠 방법을 찾기 위해 천기성으로 향했다.
* * *
사타성(獅駝城).
먹구름이 성을 뒤엎었고 하늘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웅대한 관문 안은 살기가 하늘까지 치솟았고, 성안의 요물들은 모두 격분해 있었다.
성주부 안의 명당 대전에는 검은 외투를 입은 중년 남자가 화려한 금색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얼굴은 근심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준수했는데, 유독 매부리코가 눈에 띄었다.
그는 다름 아닌 사타성의 주인 금시대붕이었다.
대전에는 몇 사람이 더 있었는데, 하나같이 기골이 장대하고 얼굴은 험상궂었다. 이들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의자에 앉은 금시대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 표범 머리에 몸은 사람이고 갑옷을 걸친 커다란 남자가 떠보듯 물었다.
“대왕, 이대왕께서 또 사람을 보내왔는데, 어서 부동래를 내놓으라고 재촉하고 있습니다. 이를……?”
그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매부리코 남자가 눈을 떴고, 이에 표범 머리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둘째 형님은 그렇다 치고, 큰형님은 뭐라고 하시던가?”
“대대왕께서도…… 깔끔하게 처리하라 하셨습니다. 허나 꼭 그대로 따를 필요가 있겠습니까?”
외눈박이 청랑(靑狼) 요물이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흥! 다들 부동래가 음양이기병을 훔친 도둑이라 생각하는 건가?”
금시대붕은 화가 난 듯이 차갑게 비웃었다.
“대왕, 저희도 부동래의 소행이라 생각지는 않습니다. 허나 때가 너무 절묘합니다. 대왕께서 그…… 그자를 사타성에서 추방하자마자 음양이기병이 도둑을 맞았습니다. 두 분 대왕께서 의심을 품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외눈박이 청랑이 변명하듯 답했다.
“헛소리! 너희는 부동래와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하고도 그를 모르더냐! 이번에 그를 사문에서 쫓아낸 것은 정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한데 어찌 또 이런 일이!”
“대왕님, 그럼 두 분 대왕께는 뭐라고 할까요?”
금색 표범 요물이 물어봤다.
“뭐가 있어야 내놓던가 하지.”
금시대붕은 불만을 토하고는 바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두 부대를 보내서 그를 찾아라. 명심해라. 그에게 음양이기병이 있든 없든 반드시 생포해야 한다.”
“네!”
대전 안의 요물들이 포권하며 답했다.
고개를 떨군 그들의 눈에는 질투가 가득했다.
그들은 줄곧 인간족 문명에 눈이 돌아간 호랑이 요물을 대왕이 저리 편애하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자신들이 그 입장이었다면 대왕은 고민 없이 자신들을 체포하거나 죽여서 사타령의 두 대왕에게 넘겼으리라.
모든 요물이 일제히 물러나고 대전에 홀로 남은 금시대붕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용이 새겨진 커다란 금색 의자를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 * *
사타령에서 7백 리 떨어진, 장기가 가득한 숲속.
푸른 도포에 삿갓을 쓴 청년이 천천히 숲속을 거닐고 있다. 바로 심협이었다.
운몽택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지체한 그는 사타령에서 오장관 인삼과의 일을 조사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지나는 길에 사타령이 가까워질수록 결국 참지 못하고 부동래라도 만나보고자 했다.
산들은 굽이굽이 이어져 있었고, 아직 사타령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멀리 특이하게 생긴 고개가 보였다. 마치 시신 한 구가 누워 있는 듯한 모습으로, 고개가 8백 리나 이어져 있었다.
사타령의 종문은 그 ‘시신’의 머리 쪽에 있다.
사타령 영역에 들어선 심협은 주위의 환경과 분위기가 바뀐 것을 알 수 있었다. 본래 적지 않게 눈에 띄던 짐승들이 이제는 거의 보이지 않았고, 한여름의 풀벌레 소리마저 사라졌다.
지금은 한낮인데도 심협이 걷고 있는 숲길은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서늘했다.
사실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사타령에는 피투성이 시신이 곳곳에 널려 있다는 소문도 적잖이 들었는데, 대부분이 대당 관부의 지리지(地理志)에 적힌 내용이었다.
마환이 아직 사라지기 전, 이곳은 인간족과 선족들에게 절대로 접근해서는 안 되는 죽음의 땅이었다. 사타성만 해도 처음에는 요물들이 모여 있는 곳이 아니라 요마가 강제로 점령하면서 수십만 백성들이 그 부하로 전락해버린 곳으로, 지금은 요성(妖城)으로 변해 있었다.
각종 여행기에는 사타령에 대한 내용이 많았는데, 대부분 요마들이 껍질을 벗기고 뼈를 발라 먹는다는 참혹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삼계가 창칼을 내려놓고 평화를 되찾으면서 사타령은 압박에 부딪혔고, 그런 연옥 같은 광경은 사라져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하지만 인간족은 여전히 이곳에 대한 두려움이 커서 감히 접근조차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