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1화. 약액
눈 깜짝할 사리에 한 시진 지났고, 그제야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지금쯤이면 운몽택 대부분이 영조의 수색 범위 안에 들어갔을 것이니 이제 심협을 찾아내 끝장을 볼 때였다.
구두충의 현청고경(玄靑古鏡)은 파사 등이 일전에 청시조를 발동했을 때 사용한 거울과 비슷하게 생겼으나 그보다 두 배 이상 컸고, 겉에는 영광이 더 짙었으며, 거울에는 더 많은 핏빛 반점이 있었다.
구두충이 고경을 향해 결인하자 그 위의 핏빛 반점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운몽택 곳곳에서 온화한 편이었던 핏빛 벌새들이 무슨 자극을 받은 듯 눈동자가 핏빛으로 번뜩이며 사방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입가에서는 혈홍색 촉수 하나가 웅웅거리더니 핏빛 파문을 사방으로 터트렸다.
구두충은 다시 두 눈을 감고 조용히 기다렸다.
잠시 후, 갑자기 눈을 번쩍 뜬 그는 서북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운몽택 서북쪽으로 날아간 혈문 벌새가 심협의 흔적을 발견한 것이다.
“드디어 찾았다! 이제는 도망가지 못한다!”
그가 외친 순간, 혈운이 피어올라 그의 몸을 감쌌다.
한편, 심협은 운몽택 서북쪽 어디선가 어검을 타고 붉은 무지개가 되어 하늘을 날고 있었다.
을목선둔을 시전하는 게 은폐에는 편하겠지만, 속도는 어검비행이 월등했다. 게다가 을목선둔은 법력 소모도 컸다. 지금은 주도권이 자기 손에 있으니 행적이 조금 노출돼도 큰 상관이 없었다.
그는 머릿속으로 조용히 시간을 계산했는데, 대략 두 시진 정도 지났으니 이제 네 시진만 더 버티면 될 터였다.
그는 힘껏 순양검을 발동했고, 수시로 방향을 틀며 완전히 불규칙적으로 날아가 구두충에게 최대한 혼란을 주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래 숲속에서 일정한 거리마다 핏빛 벌새가 날고 있음을 심협은 알지 못했다. 어검이 아무리 빨라도 혈문 벌새가 그의 행적을 모두 파악했던 것이다.
혈문 벌새들은 요기가 없고 크기도 작아서 외형이 조금 특별한 것 외에는 평범한 새와 다를 게 없어서 전혀 시선을 끌지 않았다.
반 시진 정도 더 날아가자 앞에 거대한 호수가 나타났다. 디 호수는 끝이 안 보일 정도로 컸고, 자욱한 안개가 장관을 이루었다.
심협은 옥간을 꺼냈다. 그 안에는 운몽택의 지도가 들어 있었는데, 이는 파사가 준 것으로 상당히 상세했다.
그는 계속 날아가면서 주변 환경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때, 파사의 놀란 목소리가 심협의 귀에 들려왔다.
“이런! 구두충이 전방에서 우리 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어요!”
“뭐!”
심협은 안색이 돌변했고 바로 영과와 건곤대를 공옥 옥갑에 넣은 뒤 방향을 바꿔 뒤로 달아났다.
순양검이 검광을 강하게 뿜어냈고, 두 팔에도 금색과 푸른색 영광이 떠올라 그의 속도는 몇 배나 더 빨라졌다. 그는 그대로 질풍처럼 날아갔다.
두 팔의 풍뢰영문은 진시천리를 시전하지 않아도 가속 효과가 있었고, 법력의 소모도 심한 편이 아니었다.
“안 돼요! 구두충의 혈운둔이 더 빨라요!”
“그렇소?”
심협이 눈살을 찌푸리며 순양검을 거두고는 두 팔에서 금색과 푸른색 영광을 폭증시켰다. 그러자 순식간에 두 개의 거대한 날개가 생겼다.
풍뢰쌍익이 날갯짓을 한 번 하자 그는 순식간에 환영처럼 변했고, 열 배나 더 빠른 속도로 순식간에 먼 하늘로 사라졌다.
심협의 모습이 사라진 장소에서 수백 리 떨어진 곳. 구두충은 혈문 벌새를 통해 심협이 풍뢰쌍익을 시전하는 모습을 보고는 경악했다.
“이건 무슨 둔술이지? 꼭 붕마왕의 진시천리 같은데?”
이런 절세의 둔술은 그가 요체로 변한다 해도 따라잡을 수 없다.
하지만 구두충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이 정도로 속도를 폭증시키는 둔술은 법력 소모가 크다. 저놈은 이제 겨우 대승 후기이니 곧 법력이 떨어질 것이다.’
역시나 심협은 천여 리를 날아간 후 속도가 떨어졌다.
구두충은 그제야 씩 웃더니 혈운을 움직여 다시 추격을 이어갔다.
한편, 심협은 양팔의 영광이 사라졌고, 안색은 창백해졌다. 그는 서둘러 단약을 복용하고는 다시 방향을 바꿔 어검을 타고 날았다.
“심 도우, 괜찮은가요?”
“괜찮소. 법력을 소모해서 그런 것뿐이오. 지금도 구두충이 느껴지시오?”
“제가 비술로 감지할 수 있는 범위에는 없어요. 게다가 구두충의 신식 범위도 그리 넓은 편이 아니니 쫓아오지 못할 거예요. 다만, 지금은 원래의 동굴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니 심 도우도 이제 저와 영과를 꺼내지 않는 게 좋겠어요.”
심협은 좀 전에 구두충이 접근해온 사실에 크게 놀란 상태라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속해서 날아가면서도 단약을 연화하여 법력을 보충했다.
한데 반각 정도 지나자 파사는 다시 구두충의 기척을 느꼈다.
“구두충이 다시 쫓아왔어요! 바로 뒤예요!”
“어찌 된 일이지?”
파사와 영과를 공옥 옥갑에 넣었는데도 구두충이 쫓아왔다는 사실에 심협은 심장이 덜컥했다.
‘설마, 구두충에게 공옥 옥갑을 꿰뚫을 정도로 절묘한 술법이 있는 것인가!’
그는 깜짝 놀라 법력을 아낄 틈도 없이 곧장 양팔에 영문을 떠올렸다. 그러자 그의 둔광이 다시 배로 불어났다. 구두충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지는 속도가 크게 줄어들었다.
“그의 감지술이 공옥 옥갑을 꿰뚫을 수 있다면 이제야 우리를 쫓아왔을 리가 없어요. 제 생각에는 그가 다른 수단을 사용한 것 같아요.”
“뭔가 아는 바가 있소?”
“구두충은 영조와 영충을 기르는 데 능하고 특이한 비법으로 그들의 시야를 공유할 수 있어요. 그것들을 운몽택 곳곳에 풀어서 적을 쫓고 제거하기도 하죠. 저도 전에 비슷한 수단을 써본 적이 있으니 확실해요.”
“그런 비술이 있었단 말이오? 그대가 써본 적이 있다면 벗어날 방법도 알고 있소?”
심협은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구두충이 부리는 영조와 영충은 종류도 다양하고 제거하는 법도 제각각이라 우선 어떤 것이 쫓아오고 있는지 알아내야 해요. 심 도우, 절 옥갑에서 내보내 주세요. 제가 신식으로 찾아볼게요.”
어차피 영조나 영충 때문이라면 굳이 파사를 숨겨두는 것도 의미가 없어지기에 심협은 바로 옥갑을 열었다.
파사의 미간에 푸른 빛이 반짝이더니 강력한 신식이 펼쳐졌다. 심지어 심협의 신식보다 훨씬 더 강해서 아래쪽까지 훑어볼 수 있었다.
심협은 눈이 반짝였다.
‘파사가 무슨 분열 신통을 시전해서 경지가 약해졌다고 했는데 신식은 아무런 영향이 없나 보군.’
그는 계속 날아가는 동시에 자신도 신식을 펼쳐서 아래의 모든 것을 샅샅이 살펴봤다.
“찾았어요! 혈문 벌새였군요!”
“혈문 벌새?”
파사는 흥분한 듯 외쳤지만, 심협은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바로 저거예요.”
파사가 건곤대에서 머리를 내밀더니 가느다란 푸른색 뇌전을 아래의 풀숲을 향해 뿜어냈다.
파직!
작고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풀숲에 큰불이 나자 혈문 벌새가 날아올랐는데, 그 속도가 매우 빨라서 출규기 수사의 둔광과 비슷했다.
“저 영조였군. 분명 기이하게 생겼소. 그럼 대응법도 알고 있소?”
그의 신식에도 구두충의 혈운이 뒤에서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게 느껴졌다.
“혈문 벌새는 눈으로 감지할 뿐만 아니라 영파(靈派)로도 수색하는데 눈보다 영파 탐색이 더 예민해요. 구두충의 수단 중 가장 예민한 탐색 영조거든요. 그러니 저들의 감지에서 벗어나는 건 쉽지 않죠. 그래도 당신은 운이 좋은 편이에요. 저는 구두충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랜 시간 준비를 해놓았으니까요. 내 연구한 결과, 혈문 벌새의 영파 감지를 차단할 수 있는 약액을 개발해냈어요. 심 도우, 다시 한번 구두충을 최대한 멀리 따돌려 주세요!”
파사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하자 심협도 내심 놓였다. 풍뢰영광이 빛나면서 거대한 풍뢰쌍익이 나타났고, 다시 한번 진시천리 신통을 사용하자 이들은 엄청난 속도로 순식간에 하늘 끝으로 사라졌다.
구두충은 이 광경을 감지하고도 차갑게 비웃었다. 심협이 날아간 방향은 이미 혈문 벌새가 퍼진 곳이니 아무리 발악해도 도망치는 건 불가능할 터였다.
그는 혈운술로 느긋하게 쫓아갔다.
한편, 심협은 순식간에 천 리를 날아간 뒤에야 멈췄다. 날개가 갑자기 사라지면서 땅에 내려설 때는 몸이 흔들렸다. 그의 안색은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진시천리를 두 번 연속 사용하자 체내의 법력은 7할이나 고갈됐다.
“파사 도우, 그 약액이 정말로 혈문 벌새의 감지를 막아낼 수 있는 게요? 법력이 얼마 남지 않아서 약액이 효과가 없다면 큰 낭패요.”
“걱정 마세요. 나도 내 생명을 걸고 허튼 소리는 하지 않아요. 을목선둔으로 계속 나아가세요. 내가 온몸에 약액을 발라줄게요.”
파사의 자신 있는 목소리에 심협도 망설이지 않고 을목선둔을 시전하여 방향을 바꿔서 나아갔다.
그가 을목영력의 공간에 들어가자 파사가 곧바로 건곤대에서 나와 회색 옥병을 입에서 뱉어냈다.
“저물법기는 구두충에게 빼앗기지 않았소?”
“우리 파사 일족은 상고 홍황 시기부터 존재했으니 구두충 같은 귀차 혈통에 뒤처지지 않아요. 우리 일족은 성년이 되면 몸 안에 이공간이 새겨서 물건을 담을 수도, 적을 공격할 수도 있죠. 제가 저물법기를 가지고 다니는 건 눈속임이고 진짜 보물은 전부 뱃속의 공간에 들어 있어요.”
파사가 이토록 중요한 사실을 심협에게 말한 것은 그를 완전히 믿어서가 아니라 그녀 영혼 깊은 곳에 새겨진 통령 표기의 신묘함 때문이었다. 그녀의 말과 행동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지만 그녀가 거짓말을 하거나 숨기려고 하면 바로 알아챌 수 있는 것이다.
‘이자의 통령지술이 이 정도로 현묘할 줄은 몰랐네. 경지가 회복해도 강제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으니 잔꾀를 부리지 말고 그냥 편안히 영수 노릇이나 하자. 50년만 참는 거야.’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도 통령 표기에 감지될까 봐 곧장 생각을 지우고는 옥병을 열었다.
투명한 영액이 날아올라 마치 뱀처럼 심협의 몸 곳곳을 훑으면서 그의 피부 곳곳에 점액을 얇게 발랐다.
이 점액은 색깔도 냄새도 없어서 차갑다는 느낌 외에는 특별한 게 없었다.
영액을 모두 발랐을 때, 을목선둔도 슬슬 한계였다. 심협은 둔행 상태에서 벗어나 울창한 숲속에 나타났다.
“이제 된 것이오?”
심협은 몸에 발라진 무색무취의 점액을 바라봤지만, 약액에 어떤 특별한 점이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파사는 대답하지 않고 눈을 감은 채 정신을 집중하며 뭔가를 중얼거렸다. 그러자 얼마 되지 않아 심협의 몸에 발라진 약액에서 희미한 빛이 반짝이더니 그의 몸이 반투명하게 변했다.
“됐어요. 이 약액이 도우의 몸을 숨겨주고 약액에서 나오는 영광이 혈문 벌새의 탐색을 차단해줄 거예요. 다만, 영액은 너무 강한 법력 충격을 견디지 못하니까 이제 7할 정도의 법력만 써요. 법보도 쓰면 안 돼요. 안 그러면 약액이 손상을 입을 거예요.”
파사가 눈을 뜨며 조용히 말했다.
심협은 반신반의했지만, 지금은 그녀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법보를 사용할 수 없으니 어검이 아닌 을목선둔으로 나아가야 했고, 이내 그는 숲속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그가 있던 곳 부근의 숲속, 네다섯 마리의 혈문 벌새가 날아왔다. 하지만 심협이 그곳에 있었다는 것조차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한편, 구두충은 천 리쯤 떨어진 곳에서 편안한 표정으로 혈운을 타고 날아오며 손에 든 고경을 발동하여 혈문 벌새를 조종했다. 앞서 심협이 풍뢰둔술로 날아갈 수 있는 거리를 파악했기에 혈문 벌새를 조종하여 심협이 나타날 수 있을 만한 곳을 찾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