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699화 (699/1,214)
  • 699화. 백의의 남자

    심협이 굳은 눈으로 나무 꼭대기에 붙은 불꽃을 돌아보니 그림자들이 날아올라서 장우를 뚫고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멀리 벗어나기도 전에 주변에서 번개가 흐르는 커다란 그물이 날아와 그들의 앞을 막고 포위했다.

    번개 그물이 줄어들자 찢어질 듯한 비명이 나무 위에서 끊임없이 들려왔다.

    연연은 그 소리에 표정이 돌변하더니 잔뜩 얼어버렸다.

    심협이 자세히 들어보니 비명 가운데 담소를 나누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하하, 또 하나 잡았다!”

    “헤, 미질화(迷迭花) 정매도 있는데? 이거 값이 꽤 나가겠어!”

    “나뭇잎 정령도 있어.”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이 미질화 정매는 노부에게 주시면 안 되나요?”

    그 목소리를 들은 심협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너희는 여기서 기다려라. 내가 먼저 가보마.”

    심협은 당부의 말을 남기고는 기운을 숨긴 채 불꽃이 타오르는 거대한 나무 위로 날아갔다.

    평범한 불꽃이 아니었지만, 지금의 심협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예닐곱 명이 모여 있었고, 그들 중앙에는 십여 개의 줄어든 번개 그물이 있었고, 그물마다 모습이 다른 정매들이 들어 있었다.

    정매들은 발악했지만, 딱히 대단한 실력자가 없기에 누구 하나 빠져나가지 못했다.

    심협은 예닐곱 명의 사람 중 낯익은 네 명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았다. 바로 이전에 천기성 상점에서 만났던 대머리 남자와 마른 남자, 운몽택 근처에서 그들과 마찰이 있었던 푸른 옷의 남자와 수행원이었다.

    청년은 부채로 손을 톡톡 치며 수행원의 청을 받아줄지 말지 재고 있었다.

    “원사(袁師), 이 미질화 정매가 어떤 능력이 있는지 모두가 알고 있는데, 자네의 뼈가 그것을 버틸 수 있겠나?”

    옆에 선 등이 굽은 남자가 놀리듯 말했다. 미질화 정매는 꿈, 특히 남녀가 정을 나누는 특별한 꿈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마타자(馬駝子), 그 입 다물지 못하겠나! 내가 네 등을 쫙 펴서 고쳐주랴?”

    원사는 뜨끔했는지 노발대발하며 화를 냈다.

    “원사, 이건 자네에게 못 줄 듯싶네. 아무래도 그녀를 위해 남겨놔야겠어.”

    결국 청년은 부채를 접으며 말했다.

    “도련님, 그 이상한 복장의 여자에게 아직도 미련이 남으신 겁니까?”

    수행원인 원사가 물었다.

    “내 많은 여자를 품어봤지만 그렇게 청초하고 때 묻지 않은 여자는 처음이었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그 상쾌한 기운은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일품이었지. 아쉽구나, 아쉬워.”

    이어서 무만아를 떠올리던 청년은 불현듯 심협의 모습이 같이 떠올라 가늘게 떨었다. 흥이 다 떨어져버렸다. 그는 지금까지 그 고충이 심협의 짓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 여자가 좋기는 좋은데 옆에 따라다니는 대승기의 호위가 문제죠. 그놈만 아니었으면 지금쯤 그 여자가 도련님 품에 안겨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원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런 쓸모없는 놈. 그렇게 도련님의 흥을 깨버려야 속이 시원한가? 그때 내가 있었으면 그놈의 뼈를 분질러서 늪지에 던져버렸을 텐데 말이지.”

    쉰 목소리가 나무 아래에서 들려왔다.

    나뭇가지 사이로 바라보니 짧은 옷차림에 꾀죄죄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용모도 추레했고 얼굴은 수염투성이였다. 만약 길가에서 만났다면 하는 일 없이 떠도는 백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허리가 굽은 남자에게는 날카롭게 대했던 원사가 이 꾀죄죄한 남자 앞에서는 콧방귀도 뀌지 않는 걸 보니 실력이 꽤나 강한 듯했다.

    하지만 여기에 도착한 이후 심협의 신경은 이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하얀 옷의 남자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자는 신체가 호리호리하고 용모가 준수했으나, 두 눈이 가늘고 입술은 얇아서 조금 음산해 보였다. 그의 몸에서는 미약한 요기가 느껴져서 저 인간들과 동료처럼 보이지 않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이들이 한참 시끄럽게 떠들고 있을 때, 그는 관심 없는 듯 가끔 고개를 들어 타오르고 있는 나무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들은 심협이 나무 위에 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갈수록 저질스러운 말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마른 남자가 번개 그물에서 나뭇잎 정매를 꺼냈다.

    이 나뭇잎 정매를 본 심협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정매는 연연의 동족이 틀림없는 듯 외모가 거의 비슷했다. 다만 체격이 조금 더 크고 연연보다는 나이가 더 있어 보였다.

    “헤헤, 도련님, 이 정매는 저희 형제에게 포상으로 주실 거죠?”

    마른 사내가 입맛을 다시고는 음흉하게 웃으며 푸른 옷의 청년에게 말했다. 청년은 그를 흘끗 보고는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가져라.”

    마른 남자는 허락을 받자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어 나뭇잎 정령의 옷을 벗기려 했다.

    나뭇잎 정매로서는 도무지 벗어날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싸늘한 목소리가 울렸다.

    “멈춰!”

    이어서 초록 빛이 허공으로 날아오르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른 남자가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갑자기 눈앞에 초록색 빛이 나타났다. 이어서 나뭇가지가 그의 눈을 찌르면서 피가 튀었다.

    “끄아아!”

    마른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나뭇잎 정매를 손에서 놓쳤다.

    연연이 허공에서 나타나 정매의 손을 잡고 도망치려 했다.

    한데 그때, 하늘에서 번개가 떨어지면서 번개 그물이 떠올라 아직 피하지 못한 두 나뭇잎 정령을 모두 뒤덮었다.

    “하하! 스스로 그물에 뛰어들었구나.”

    등이 굽은 남자가 이를 보고는 기쁜 듯이 크게 웃었다.

    한데 신이 나서 달려온 원사는 연연을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도련님, 이 나뭇잎 정매는 어디서 많이 본 거 같은데요?”

    그가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청의의 청년이 그 소리를 듣고는 다가와서 보더니 바로 말했다.

    “그 여인의 어깨에 있던 정매가 아니더냐!”

    대머리 남자와 마른 남자도 바로 기억이 나 황급히 주변을 경계했다. 그러나 아무도 없는 듯하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놈들 손에서 도망친 모양입니다.”

    원사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나무 아래 기대고 있던 꾀죄죄한 남자가 일어나더니 소리쳤다.

    “뭘 걱정하는 것이오, 그들이 정말로 온다면 내가 어떻게 해서든 도련님의 소원을 이루어드리겠소.”

    가까이 다가온 그는 번개 그물에서 연연을 잡아 꺼내려 했다.

    그의 손이 연연의 몸에 닿으려는 순간, 좁쌀만 한,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작은 벌레가 그의 손등에 앉았다.

    꾀죄죄한 남자는 개의치 않고 손으로 내리쳤고, 작은 벌레는 빨간 점으로 변해버렸다.

    그는 그물을 열어 연연을 꺼내더니 모두에게 보여줬다.

    “흥, 이런 작은 정매 따위가 뭐가 무섭다고.”

    꾀죄죄한 남자는 차갑게 비웃으며 그녀를 죽이려는 듯 손에 힘을 주었다.

    한데 그 순간, 그의 낯빛이 어둡게 변하더니 아까 벌레가 앉았던 곳을 긁기 시작했다.

    이어서 꾀죄죄한 남자는 멈추지 못하고 긁어댔는데, 그제야 손등의 붉은 점이 현재 이상한 모양의 반점이 되었음을 알아챘다.

    그가 긁어댈수록 붉은 반점은 빠르게 번지기 시작했고 손등에서 타고 올라가 팔뚝과 어깨 그리고 가슴까지 번졌다.

    “가, 간지러워! 간지럽다고!”

    꾀죄죄한 남자가 미친 듯이 긁어대면서 붉은 반점은 점점 더 빨리 퍼졌고, 이내 목과 얼굴까지 얼룩지면서 온몸이 부어올랐다. 그가 손톱으로 긁은 곳은 살점이 뜯어졌지만, 그는 멈출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야?”

    허리 굽은 남자가 손을 내밀어 그를 살펴보려는데, 뒤에서 조롱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자처럼 되고 싶으면 손을 뻗어 보던가.”

    등이 굽은 남자는 그 말에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돌아보니 아까부터 쭉 나무 아래 앉아 있던 백의의 남자가 보였다. 백의의 사내는 이들 무리가 이곳에 오기 전에 이미 도착해 있었는데, 앞서 심협에게 호되게 당해 신중해진 청의의 청년은 수하들을 단속하여 정체 모를 자를 함부로 건드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자가 갑자기 뭔가 아는 듯한 의미로 말을 하자 모두가 의외였다.

    “저…… 도우, 저자가 왜 그런지 아시오?”

    원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 보이는 건가? 혈고(血蠱)에 걸린 것이다.”

    백의의 남자는 그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에 청년과 원사도 금세 알아챘다.

    “두 선배님, 이번에는 저희가 의도적으로 도발한 게 아닙니다. 저 나뭇잎 정매가 알아서 쳐들어온 거지 저희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호되게 당한 바 있던 원사가 재빨리 외쳤다.

    “맞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저희가 한 게 아닙니다.”

    청의의 청년도 황급히 소리쳤다.

    마치 방금 전까지 심협 일행에 대해 거리낌 없이 험담한 것을 잊은 것처럼.

    그때, 무만아가 장우와 안개를 뚫고 천천히 나타나 그들과 멀지 않은 곳에서 멈췄다.

    “그들을 놔줘.”

    그녀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윽!”

    청의의 청년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빗속을 살폈다. 그러나 한참을 둘러봐도 심협의 모습은 보이지 않자 표정이 점점 변했다.

    “소저, 그건 좀…… 부당한 것 같소만.”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용기를 내 말했다.

    무만아는 그와 말도 섞지 않고 손목을 가볍게 흔들었다.

    허공에서 약한 바람이 불어오자 청년은 가슴이 철렁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공기와 먼지 속에는 몇 마리의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작고 하얀 벌레들이 떠다니다가 점점 그의 눈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손을 내밀어서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한데 그때, 붉은 빛이 갑자기 그의 눈앞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청년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을 때, 이 작은 벌레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무만아는 그 광경에 눈을 가늘게 뜨고는 새하얀 팔을 흔들기 시작했다.

    딸랑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벌레들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당신도 한 패였나?

    그는 백의의 남자를 보며 차갑게 물었다.

    백의의 남자는 황급히 두 손을 들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소저께서 오해하셨소. 난 저런 쓰레기들과 한패가 아니오.”

    “뭐라고?”

    허리가 굽은 남자가 버럭 소리쳤고, 원사도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쓰레기 같은 놈들, 너희 때문에 소저께서 내가 너희와 한패인 줄 오해하신 게 아니냐! 에잇 죽일 놈들!”

    백의의 남자가 짜증스럽게 욕을 퍼부었다.

    다음 순간, 붉은 빛이 나타나 허공에서 여러 번 방향을 바꾸며 지나갔다. 그러자 꾀죄죄한 남자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머리에 구멍이 뚫렸다.

    그들은 아무런 반응도 못 한 채 두 눈을 뜨고 자신과 다른 사람의 머리가 잘 익은 수박처럼 터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멀지 않은 나무 위. 심협은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의 머리를 뚫은 것은 어떤 법보가 아니라 백의의 남자 입에서 뻗어 나온 새빨간 혀였다.

    백의의 남자는 혀를 거두고는 맛을 보듯이 입술을 훔쳤다. 입가로 피가 흘렀다.

    그는 황급히 하얀 손수건으로 피를 닦은 뒤, 웃으며 무만아를 바라봤다.

    “보아하니 소저의 기운은 저 쓰레기들과는 전혀 다르군요. 그대를 데리고 가면 대왕께서 적지 않은 법력을 보충하실 수 있겠어요. 물론, 나무 위의 당신도 같이 가면 더 좋고요.”

    백의의 남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나무에 숨어 있는 심협을 힐끗 바라봤다.

    이 남자의 말에 심협도 더는 숨어 있을 필요가 없었기에 나무에서 내려왔다.

    “괜찮아?”

    심협의 물음에 연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그녀는 지금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저 남자가 왜 갑자기 저들을 죽인 걸까?’

    하지만 심협과 무만아가 옆에 있으니 안도감이 들어 곧장 동족인 나뭇잎 정매에게 다가갔다.

    한데 이 정매는 차갑게 굳은 채 겁에 질린 얼굴로 백의의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홍(飛虹) 언니, 무슨 일이야?”

    “그, 그자야. 물구렁이…… 그자라고!”

    비홍의 겁에 질린 목소리에 연연은 퍼뜩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황급히 도망치던 중 멀리서 본 사람이 지금 눈앞의 저자였다!

    “당신이……!”

    그녀의 가슴에서는 분노가 치솟았으나, 몸은 본능적으로 굳어버렸다. 이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공포였다.

    “그때 도망친 생존자였나요? 잘됐군요. 오늘 일족의 곁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물구렁이는 연연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연연은 마치 얼음 창고에 들어간 것처럼 몸이 떨려왔다.

    그때, 심협이 그녀와 물구렁이 사이를 막아 서며 말했다.

    “나뭇잎 정매 일족 중 더 살아남은 자들이 있나?”

    “저 둘을 놓친 것만 해도 이미 큰 실수를 저지른 건데 어떻게 살아 있는 자가 있겠습니까? 지금 저와 농담하는 건가요?”

    “아니, 충분하다.”

    심협의 목소리가 차갑게 변했다.

    “뭐가 충분하다는 거죠?”

    “네가 죽을 이유.”

    심협은 차갑게 말하며 숨겨 왔던 기운을 폭발시켰다. 그러자 백의의 남자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럴 수가, 대승 후기였습니까?”

    심협은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