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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몽주-695화 (695/1,214)
  • 695화. 나뭇잎 정매(精魅)

    “심 오라버니, 혹시 급한 일이라도 있으세요? 중요한 볼일이 있으면 저는 혼자 가도 괜찮아요.”

    무만아는 심협이 머뭇거리는 모습에 미안한 듯이 말했다.

    심협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특별히 중요한 일은 없으니 함께 갑시다. 이번에 책에서 봤는데 운몽택에 대해 ‘구름이 피어오르고 노을이 자욱하니 날씨가 기상천외하다’라더군요. 마침 직접 보고 싶었소.”

    “그래도…….”

    “소저가 인삼과 나무를 구해준 덕에 내 누명도 벗겨졌고 대당 관부와 오장관의 충돌도 막게 됐으니 나도 빚을 갚아야 하지 않겠소?”

    “저…… 인삼과 나무를 구한 건 제 사심 때문인데…….”

    무만아가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그야 아무래도 상관없소. 어쨌든 나는 반드시 갚아야겠소. 물론 소저가 원치 않는다면 내 억지로 함께 가지는 않겠소.”

    심협은 무만아가 어떻게 반응할지 뻔히 알면서 그렇게 말했고, 역시 그녀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당연히 원하죠.”

    “그럼 좋소. 바로 출발하겠소?”

    “좋아요.”

    무만아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심협은 다른 생각은 접어두고 비주를 꺼냈다.

    * * *

    몇 개월 뒤, 운몽택 밖.

    늪지 근처에 작은 성이 우뚝 세워져 있었다. 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안팎으로 10여 명의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문을 지키고 있었으나 경계는 매우 느슨해 보였다.

    성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시끌벅적한 거리가 나왔다.

    새벽 시장이 열려서 길 양쪽에는 간단하게 깐 멍석이 늘어져 있었고, 멍석마다 온갖 과일과 채소가 놓여 있었다. 멍석 뒤에서는 행상인들이 목청을 돋우어 열심히 호객 행위를 했다.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상점과 주점이 세워져 있었는데, 일찍 장사하려는 몇 군데만 열려 있었다. 그럼에도 거리에는 일찍 시장에 나온 사람들로 붐볐다.

    한가롭게 거니는 사람들 사이로 푸른 도포를 입은 건장한 남자와 푸른 치마를 입은 아름다운 여자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두 사람의 복장은 성 주민들과 다소 차이가 있어서 사람들 사이에서도 유독 눈에 띄었다. 특히 여자가 걸을 때마다 옷에 달린 은장식이 울리는 아름다운 소리와 그녀의 미모가 적지 않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이들은 심협과 무만아였다.

    무만아는 행인들의 호기심 어린 눈길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끊임없이 지나가는 사람들과 거리에 진열된 물건들 구경에 정신이 팔려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어릴 때부터 신목림에서 자란 그녀는 바깥 세상에 대해서는 모친과 스승의 입을 통해 들은 것이 거의 전부였다.

    이번에 몰래 빠져나와서는 곧장 하늘을 날아 오장관으로 가느라 산과 숲 또는 인적이 드문 곳만 본 터라 이토록 많은 인파와 성은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사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심협 역시 이를 눈치채고는 그녀를 데리고 성 몇 군데를 들러 잠깐씩이라도 머물렀다.

    무만아는 새로운 성에 도착할 때마다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다만 두 사람이 오늘 이 성에 들어온 것은 무만아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운몽택으로 가기 전에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은 거리를 따라 시내로 들어갔는데, 깊이 들어갈수록 거리는 한산해졌다.

    “심 오라버니, 이 작은 성에서 정말 안내등을 살 수 있을까요?”

    “작은 성이라고 우습게봐서는 안돼. 속담에 산을 낀 곳에서는 산을 이용해서 먹는다고 했다. 이곳은 운몽택과 가까우니 천 년 동안 이어져온 것도 모두 그런 지리적 이점 덕분일 거야. 운몽택에서 기연을 얻으려는 산수나 이곳에서 경험을 쌓고 수련하려는 수사 모두 이곳에서 쉬고 가지. 안내등은 운몽택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품이니 당연히 파는 곳이 많을 거야.”

    그간 무만아와 가까워진 심협은 이제 정말로 동생을 대하듯 편하게 말하기로 했다.

    심협과 무만아가 대화하는 사이 갈림길이 나왔는데, 그 안쪽으로 그리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상점이 보였다.

    “저기, 도착했다.”

    심협은 고갯짓으로 작은 상점을 가리키고는 성큼 걸음을 옮겼다.

    무만아가 바로 뒤를 따랐다.

    상점 입구는 크지 않아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통 민가인 줄 알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문 한쪽에는 ‘천기’라는 두 글자가 고전(古篆) 문자로 쓰여 있었다.

    두 사람은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야 비로소 내부는 꽤 넓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맞은편 계산대에서 검은 옷을 입은 점원이 두 명의 손님에게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그 점원의 소매에는 하얀 실로 ‘천기’라고 수놓아져 있을 뿐, 위에는 아무런 무늬도 없는 것으로 보아 그의 신분은 천기성에서 가장 낮은 백정일 터였다.

    두 사람이 들어서자 백정 점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님, 제가 억지로 팔려는 게 아니라 운몽택으로 들어가려면 이 안내등은 필수입니다.”

    “어째서 그렇지?”

    두 명의 손님 중 몸집이 큰 대머리 남자가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운몽택의 날씨는 바깥과는 확연히 달라서 들어가면 아무리 대승기의 고급 수사라 해도 환무(幻霧)를 마주쳐 길을 잃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안내등이 바로 유일하게 정확한 방향을 알려주는 물건이죠.”

    대머리 남자는 천기성 점원의 설명을 자세히 들었으나, 옆에 있는 추레한 남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계산대에 기대어 서서 위에 놓여 있는 영객송(迎客松)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심협이 가서 보니 영객송에는 손바닥만 한, 온몸이 초록색인 사람이 있었다. 생김새는 인간 여자와 거의 흡사했고, 외모는 매우 정교하고 아름다웠으며, 뾰족한 귀와 등에는 매미 날개 같은 반투명한 날개가 달려 있었다.

    “나뭇잎 정매(精魅)예요.”

    무만아가 눈살을 찌푸리고는 조용히 말했다.

    백정 점원은 두 사람의 목소리에 웃으며 살짝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다시 대머리 남자에게 설명을 이어갔다.

    나뭇잎 정매의 가느다란 발에는 머리카락 굵기의 은색 사슬이 묶여 있었고, 다른 쪽은 영객송에 연결되어 있었다. 이 사슬에서는 은은한 법력 파동이 흘렀다.

    추레한 남자는 계속해서 정매를 가지고 놀았지만, 정매는 무기력하게 나무줄기에 앉아 두 팔에 머리를 파묻고 고개를 전혀 들지 않았다.

    “어이, 거의 다 죽어가는 건가? 재미없군.”

    추레한 남자는 재미가 없다는 듯 오히려 화를 내며 손가락으로 나뭇잎 정매를 튕기려 했다.

    “손님, 그러면 안 됩니다. 망가트리면 두 배로 물어주셔야 합니다.”

    백정 점원이 이를 보고는 황급히 말렸다.

    “이런 조그만 게 얼마나 한다고? 내가 죽이고 세 배로 갚아주면 되잖아?”

    추레한 남자는 내민 손을 멈추고는 팽팽해진 손가락에 힘을 더 쥐었다.

    정매를 튕기려는 순간, 손 하나가 불쑥 나타나 그의 손목을 잡았다.

    “어떤 망할 놈이…… 아야야!”

    추레한 남자는 욕설을 끝나기도 전에 새된 비명을 질러댔다.

    “그 정매는 내가 사겠소.”

    사내의 손목을 꺽은 심협이 담담하게 말했다.

    “돈만 있으면 다야? 그럼 나는 두 배로…… 끄아악!”

    추레한 남자의 말은 끝나기도 전에 다시 비명으로 바뀌었다.

    이를 본 대머리 남자가 옆에서 황토색 빛을 뿜어내며 커다란 손으로 심협을 잡으려 했다.

    심협은 덤덤한 얼굴로 대승 후기 경지의 기운을 숨기지 않고 방출했다. 그러자 강렬한 압박감에 대머리 남자는 우뚝 굳더니 겁에 질린 표정으로 변했다.

    “소, 소인이 태산을 몰라 뵙고…… 선배님께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부디 너그럽게 용서해주십시오.”

    그의 다른 쪽 손이 황급히 튀어나와 포권하며 사죄의 뜻을 비쳤다.

    “꺼져라.”

    심협의 목소리가 나오자 대머리 남자는 그대로 기어서 상점에서 도망쳤고, 심지어 심협의 손에 잡힌 동료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심협도 그들에게 손을 쓸 마음은 없었기에 팔을 휘둘러 추레한 남자를 문밖으로 패대기쳤다.

    추레한 남자는 데굴데굴 굴렀고, 엉덩이도 들지 못한 채 기어서 도망쳤다.

    “장사를 방해했군. 미안하오.”

    심협은 손을 털며 점원에게 사과했다.

    점원이 어디 감히 심협에게 따질 수 있겠는가.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이고, 아닙니다. 돈도 없는 불량배들이 종일 가격을 깎으려고 어찌나 귀찮게 하던지. 손님께서 쫓아내주시지 않았으면 제가 나가 달라고 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운몽택에 들어가려면 안내등을 먼저 사야 한다고 듣기는 했는데, 안내등이라는 게 정확히 뭐하는 데 쓰는 것이오?”

    “안내등이 있으면 운몽택에서 정확한 방향을 알 수 있습니다. 환무에 빠져도 방향을 찾지 못해서 갇혀 죽을 일이 없습죠.”

    “환무?”

    “모르셨습니까? 운몽택은 매우 넓고 독기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각종 독 외에도 때때로 사람을 환각에 빠지게 하는 장기(瘴氣)가 올라오는데, 이 장기가 바로 환무입니다. 일단 환무에 빠지면 신식이나 법기로도 정확한 방향을 찾을 수 없는데, 이때 안내등이 가장 좋은 안내 도구가 되는 거죠.”

    두 사람이 대화하고 있을 때 무만아의 정신은 온통 매력적인 나뭇잎 정매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녀가 슬쩍 쓰다듬자 지금껏 어떤 것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던 이 조그만 녀석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무만아를 보는 순간, 어둡던 눈동자가 환하게 반짝거렸다.

    “어라? 이 정매는 여기로 팔려온 뒤로 넋이 나간 것처럼 있었는데, 이런 반응을 보인 건 처음입니다!”

    점원은 그 광경에 신기해했다.

    “우리와 인연이 있는 모양이군. 얼마요?”

    무만아의 눈에서 나뭇잎 정매를 향한 동정심을 어렵지 않게 발견했기에 심협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한데 점원은 낯빛이 어두워졌고, 왠지 머뭇거렸다.

    “왜 그러시오? 무슨 문제라도 있소?”

    “휴우……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 정매는 잡혀 온 이후로 쌀 한 톨,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습니다. 관사(官事)께서 어제 보시고는 아마 사흘도 살지 못할 것 같다고 하셨죠. 정말 필요하시다면 조금만 기다렸다가 조금 더 생생한 놈으로 드리겠습니다.”

    “그런 이유라면 괜찮소. 인연이 닿았으니 알아서 잘 보살피겠소. 안내등도 하나 주시오.”

    “제가 너무 많이 참견한다고 나무라지 마십시오. 손님, 운몽택으로 가서 기연을 찾으실 생각입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소.”

    “그럼 제가 조언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안내등이 있어도 외곽으로만 움직이시고, 절대로 분홍색 갈대 늪을 지나 운몽택 안쪽으로 가시면 안 됩니다.”

    점원은 신신당부를 했다.

    “음, 이유가 무엇이오?”

    두 사람의 목적은 은행나무 신목을 찾기 위함이었기에 당연히 운몽택 깊은 곳까지 가야 했다.

    “운몽택 외곽은 기연을 찾으러 이곳으로 모여든 수사님들 덕분에 평안해져 큰 위험이 없습니다. 그러나 분홍색 갈대 늪 안쪽은 매우 위험해 들어가기는 쉬워도 나오기가 어렵습니다. 외곽에서는 안내등으로 방향을 알 수 있지만 안에서는 그마저도 운에 달려 있죠.”

    “알려줘서 고맙소. 참고하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점원은 안내등을 가지고 왔다.

    안내등은 등롱처럼 생겼는데, 평범한 등롱과는 달리 아래쪽에 기다란 붉은 실이 이어져 있었다.

    점원은 안내등 사용 방법을 알려준 뒤 자물쇠가 달린 상자에서 손바닥만 한 오목패(烏木牌)를 꺼냈다.

    오목패를 영객송 화분 앞에 대자 나뭇잎 정매를 묶고 있던 가느다란 사슬이 화분의 흙속에서 저절로 빠져 나왔다.

    점원은 사슬 끝에 달린 고리를 무만아의 검지에 걸어주며 당부했다.

    “절대 이 정매를 쉽게 봐서는 안 됩니다. 이들은 사실 약하지 않습니다. 특히 비행 속도가 매우 빠르고 몸까지 숨길 수 있죠. 그러니 손님께서는 절대로 이 고리를 놓치지 마십시오. 안 그러면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가서 못 찾게 될 겁니다. 가게를 나가서 잃어버리면 저희는 일절 책임지지 않습니다.”

    “알겠어요.”

    기분이 좋지 않았는지 무만아의 목소리는 다소 가라앉아 있었다.

    심협은 돈을 내고는 무만아와 함께 상점을 나와 곧바로 성을 벗어나 운몽택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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