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몽주-694화 (694/1,214)
  • 694화. 천기성 성주

    무만아는 내심 긴장을 풀고 심협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두 손으로 술법을 시전했다.

    백옥 조롱박 안의 마독은 더욱 강렬하게 요동쳤고, 그 안의 마기는 순식간에 절반이나 흘러나왔다.

    무만아가 기뻐하며 이어서 술법을 시전하려고 하는데, 단전 안의 법력이 바닥을 보였다. 동시에 두 손에서 빛나던 초록빛이 빠르게 어두워졌다.

    “안 돼!”

    그녀의 표정이 급변했다.

    한데 그때 강신천이 나타나 그녀의 등에 손을 대고는 법력을 주입했다. 덕분에 거의 바닥났던 무만아의 법력이 다시 채워졌다.

    “고마워요, 강 도우.”

    무만아는 감사 인사를 한 뒤 다시 마기를 분리해냈다.

    반 각 뒤, 마독 안의 모든 마기가 분리되어 유령주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제 백옥 조롱박에는 회백색 기체만 남았는데, 맑으면서도 탁한 기운이 더욱 강하게 느껴졌다.

    “이게 뭐지?”

    강신천도 놀란 표정이었다.

    심협 역시 현실에서든 꿈속 세계에서든 이런 힘은 본 적이 없었다.

    무만아는 굳은 얼굴로 계속해서 결인했다.

    회백색 기체가 천천히 분리되어 일부가 위로 떠올랐고, 나머지 기체는 아래로 가라앉으면서 둘로 나뉘었다. 위의 기체는 구름처럼 떠다녔고 아래의 기운은 흙처럼 무거웠다.

    “이건 음양이기(陰陽二氣)요!”

    접인도인이 기겁한 목소리로 외쳤다.

    “음양이기? 천지가 개벽할 때 혼돈 속에서 태어나서 온 천지를 변화시킨 그 음양본원의 힘? 그게 아직도 존재한단 말입니까?”

    심협이 놀란 표정으로 접인도인을 돌아봤다.

    “분명 세계는 이미 대성하여 순수한 음양의 힘이 모두 사라졌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오. 내가 알기로는 이 세상에 오직 두 가지 보물에만 이렇게 순수한 음양이기가 담겨 있는 것으로 알고 있소.”

    “그게 어떤 보물입니까?”

    “하나는 태청성인(太淸聖人)의 성도(成道)를 도와주는 지보, 태극도(太極圖)요.”

    “다른 하나는 무엇입니까?”

    심협 역시 태극도에 대해서는 당연히 들어본 적이 있었다. 이 보물은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위력을 평정하여 음양의 힘으로 바꿀 수 있고, 천도현기(天道玄機)의 공을 나눌 수 있으며, 대천만상(大千萬象)의 위능도 가지고 있다.

    이 세계에서 태청상인 외에 태극도를 이용에 음양의 힘으로 인삼과 나무를 해할 수 있는 존재도, 그에게서 태극도를 훔쳐낼 수 있는 사람도 없다. 만약 그가 인삼과 나무를 노린 것이라면 이런 수법을 쓸 필요도 없을 터. 그러니 이 음양의 힘과 태극도는 상관이 없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타령의 삼대왕 금시대붕(金翅大鵬)의 음양이기병(陰陽二氣甁)이오.”

    접인도인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사타령!”

    순간 심협의 머릿속에 부동래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타령은 서우하주에 있는데, 오장관에서 멀지 않으니 혐의가 매우 컸다.

    이런 생각이 들자 심협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대당 관부를 위해 변명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자신이 눈치챈 일을 접인도인이 못 알아챌 리가 없으리라.

    접인도인은 역시 음양이기와 사타령을 연관시켰다. 그러나 사타령과 오장관은 서우하주의 대문파이니 증거 없이 함부로 나설 수는 없었다.

    “세 분 도우의 도움으로 이 마독의 비밀을 파헤칠 수 있었소.”

    접인도인은 세 사람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했다.

    “사소한 일이었습니다. 일의 자초지종을 알아낼 수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심협이 말했다.

    “이 일은 정말 심 도우와 무관했구려. 누군가 음해하려는 속셈인 듯하오. 심 도우, 부디 용서해주시오.”

    접인도인이 심협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범인은 실로 교활한 놈이니 접인 선배께서 저를 의심하신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진실이 밝혀져서 다행입니다.”

    심협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태산과 이학도 접인도인의 지시에 따라 심협에게 사과의 뜻을 전했다. 그 와중에도 태산의 표정은 좋지 않았지만, 심협은 신경 쓰지 않았다.

    “심 오라버니, 지모의 근원이 남았네요. 받으세요. 이건 오라버니 거예요.”

    무만아는 병을 건네며 말했다.

    심협이 신식으로 살펴보니 아직 절반이나 남아 있었다.

    “무 소저는 괜찮소?”

    심협은 애써 기쁜 내색을 숨기며 병을 챙기고는 물었다. 그녀의 안색은 아까보다도 더 창백했던 것이다.

    “괜찮아요. 법력 소모가 컸을 뿐이에요.”

    무만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무 도우, 고생 많으셨소. 이건 오장관의 회춘단(回春丹)이오. 원기 회복에 탁월한 효과가 있으니 사양하지 말고 받아주시오.”

    접인도인이 작은 백옥 병을 건네자 무만아도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

    “무 도우, 잠시 쉬고 계시면 인삼과 나무의 원액을 뽑아서 가져다드리겠소.”

    접인도인이 이어서 말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무만아는 무척 지쳤기에 짧은 감사 인사만을 남기고는 청풍과 명월의 부축을 받아 떠나갔다.

    “심 도우와 강 도우도 고생 많으셨소.”

    접인도인의 말에 역시 무척 지쳐 있던 심협과 강신천도 인사를 남긴 후 쉬러 갔다.

    심협은 이전에 쉬던 곳으로 돌아가 다시 금제를 설치한 뒤 밀실에서 가부좌를 하고 눈을 감은 채 운공했다.

    그는 일원진수로 수련하지 않고 무명공법을 운공하여 경지를 안정시켰다. 최근 연이어 경지가 올라갔기에 근간이 허술해진 상황이라 진선기로 돌파하려면 기초를 철저히 다질 필요가 있었다.

    본래 가까운 시일 안에 풍뢰선조를 먹고 경지와 육체의 경지를 올리려 했으나, 지금 상황에서는 기초를 다지는 것이 먼저였다.

    다음 날, 눈을 뜬 심협이 막 일어나려던 중 그는 고개를 홱 돌리며 외쳤다.

    “누구시오?”

    “허허, 심 소우의 영각은 매우 예민하구려.”

    가벼운 웃음과 함께 들어온 사람은 바로 진원자, 그것도 부적으로 만든 분신이 아니라 진짜 진원자였다.

    “진원자 선배님, 돌아오셨군요.”

    심협은 의아한 와중에도 급히 일어났다. 자신이 설치한 금제를 뚫은 것은 전혀 의아하지 않았다. 이미 천존의 경지인 그에게는 너무도 쉬운 일일 테니까. 다만 진원자가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가 의문이었다.

    “방금 천정에서 돌아와 인삼과 나무에 관한 일을 들었소. 심 소우의 도움에 감사하오.”

    진원자가 살짝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심협은 천존의 대능이 이렇게 정중하게 나오자 감당하지 못하고 서둘러 같이 허리를 숙였다.

    “사소한 일에 불과하니 선배님의 인사를 받기에는 가당치 않습니다.”

    “오장관 측이 오해하여 혐의를 뒤집어썼음에도 고생을 아끼지 않고 인삼과 나무를 되살렸으니 오장관의 주인으로서 마땅히 찾아와 인사를 해야 하지 않겠소.”

    이 말에 심협은 진원자에게 큰 호감이 생겼다. 자신은 대승기의 애송이에 불과한데 진원자는 실로 도리를 다하지 않는가. 이것이 바로 진정 득도한 선인의 풍모라는 생각에 진심으로 감복할 수밖에 없었다.

    “과찬이십니다. 제가 한 일은 저 자신의 혐의를 벗기 위함이기도 했습니다. 아, 혹시 마독과 음양이기의 출처는 밝혀졌습니까?”

    심협은 이 일에 관해 더 논하고 싶지 않았기에 화제를 돌렸다.

    “내 살펴봤소. 음양이기는 분명 사타령의 음양이기병의 것이더군.”

    “역시 사타령의 짓이었군요!”

    심협은 안색이 돌변했다. 순간적으로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 일은 나중에 이야기하고…… 심 소우가 그간 오장관을 위해 애써줬으니 감사의 표시를 하지 않으면 빈도의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소. 소우는 혹시 원하는 것이 있으시오? 빈도와 오장관이 전력을 다해 돕겠소.”

    심협은 생각에 잠겼다. 현재 그가 가장 원하는 일은 당연히 옥침의 복구였지만, 진원자는 이미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한 터였다.

    “선배님께서 이렇게 신경 써주시니 그럼 염치 불고하고 말하겠습니다. 현재 제 몸에 마기가 침투해 있어서 순양법보로 심신을 보호하고자 합니다.”

    “순양법보라면 마침 잘됐소. 빈도에게 반룡벽(盤龍壁)이 있지. 일찍이 얻은 순양의 보물인데, 옥양신룡(玉陽神龍)의 뼈로 만든 것이니 심신을 보호하는 효능도 있소.”

    진원자는 암홍색 옥패를 꺼내서 건넸다.

    붉은 용이 도사린 형태로, 용의 몸에는 기이한 무늬가 조각되어 있었다. 보기에는 매우 거칠어 보였지만 생기가 뿜어져 나와 마치 살아 있는 듯했다.

    더욱이 닿자마자 뜨거운 순양의 힘이 그대로 심협의 체내로 들어와 심신을 안정시켰다.

    “실로 놀라운 물건이군요!”

    심협의 눈이 반짝였다.

    반룡벽에 담긴 순양의 힘은 남달라서 순양비검보다도 약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 물건은 심신을 보호하는 데 탁월하니 앞으로 마기에 대항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감사합니다. 저에게 정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는 반룡벽을 챙겨 넣으며 진심으로 감사했다.

    “별거 아니오. 반룡벽으로는 소우의 은공에 다소 부족한 듯하구려. 아, 이번에 천정에서 소우의 옥침을 고칠 방법을 좀 알아봤는데 단서를 얻을 수 있었소.”

    “저, 정말입니까?”

    “소우의 옥침에 담긴 금제는 시공 법칙과 연관이 있어 평범한 연기사는 고칠 수 없소. 지금 온 천하에 옥침을 고칠 수 있는 자는 오직 한 명뿐이지.”

    “그게 누구입니까? 부디 가르침을 주십시오.”

    “바로 천기성의 성주요. 그곳에 가면 기회가 있을 것이오.”

    “천기성의 성주! 정말 감사합니다.”

    심협은 내심 놀라면서도 다시 감사의 인사를 했다.

    이어서 진원자는 신목림에 대해 간단한 대화를 나눴고, 심협의 수련에 대해 짧게 지도해준 뒤 떠나갔다.

    심협은 한동안 가만히 서 있다가 다시 밀실로 들어가 수련했다.

    이후 며칠 동안 그는 오장관에서 폭증한 경지와 불안정한 경지를 다듬는 데 주력했다.

    오장관의 태도는 매우 우호적으로 바뀌어 거의 매일 연회를 베풀었다.

    이렇게 8일이 지나자 심협의 경지는 차츰 안정되었고, 그는 그제야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 * *

    오장관 밖. 심협은 하늘을 날지 않고 산바람을 마음껏 느끼며 구불구불한 작은 돌계단을 따라 천천히 하산했다.

    머릿속으로는 이번 오장관에서 얻은 득실을 정리했다. 본래 인삼과 나무를 구하면 끝일 줄 알았건만, 사타령이 연관되어 있으니 안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천기성으로 가기 전에 먼저 사타령에 들러볼 생각이었다. 첫째로는 음양이기병에 대해 알아보고 싶었고, 둘째로는 부동래를 만나보고 싶어서였다.

    삼계무도회 이후 부동래는 사타령으로 돌아가 상처를 치유하면서 비경에 나타났던 마허지룡에 대해 알아보겠다고 했는데, 그 이후로는 소식이 끊겼다. 그의 조사 결과가 어떤지 매우 궁금했다. 일련의 사건들은 그냥 보기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해도 사실 보이지 않는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 오라버니…….”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그를 불렀다. 목소리와 함께 듣기 좋은 은방울 소리도 들려왔다.

    “만아 소저, 며칠 더 머물 계획이 아니었소?”

    심협이 의아해하면서도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생각이 바뀌었어요. 우선 운몽택(雲夢澤)으로 가보려고요.”

    무만아가 쫓아와 웃으며 말했다.

    “운몽택?”

    “네. 오라버니가 함께 가줬으면 좋겠어요.”

    무만아의 솔직함에 심협은 조금 당황했으나 바로 거절할 생각이었다. 현재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천기성으로 가서 옥침을 고칠 방법을 찾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타령은 지나가는 길에 있으니 들러볼 생각이었다.

    한데 생각해보니 운몽택은 그의 계획과도 완전히 무관하지 않았다.

    “운몽택에 가는 게 위험한 일이오?”

    “저도 몰라요.”

    무만아는 멋쩍은 듯 고개를 젓고는 곧바로 이어서 말했다.

    “저도 가본 적은 없어요. 다만 스승님이 얘기해주셨는데, 그곳에 바다처럼 엄청나게 큰 늪이 있데요.”

    “한데 왜 가려는 것이오?”

    “심 오라버니, 제가 오장관에 온 게 무엇 때문인지 기억하세요?”

    무만아가 눈을 깜빡거리며 묻자 심협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인삼과 나무의 본원 원액을 구하기 위해서 아닌가.

    “운몽택 깊은 곳에 은행나무 신수가 있는데, 나이가 수만 년이나 됐어요. 거기에도 영액이 있는데 그것도 좀 가지고 가서 신목림의 금제를 강화하고 싶어요. 그럼 마혼의 폭주가 줄어들어 일족의 피해도 줄일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무만아가 눈을 반짝이며 말하자 심협은 내심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가 인삼과 나무를 살린 것은 자신에게 큰 은혜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녀의 청을 거절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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