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0화. 핏빛 허상
무규호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이자 무만아는 바로 가부좌를 하고는 무언가를 조용히 읊조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널리 울려 퍼져서 밀실 전체를 가득 메웠다.
사방 벽에 붙어 있던 덩굴이 마치 그녀의 목소리에 호응하는 것처럼 그 목소리에 맞춰 푸른 빛으로 반짝거렸다.
땅에서는 실낱같은 어두운 빛이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이리저리 움직이며 그녀의 아래로 모여들어 1장 크기의 푸른 법진으로 변했다.
휭!
가벼운 바람이 무만아의 몸에서 일어나자 그녀의 몸에 달린 은장식이 딸랑 하며 울렸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고, 눈동자는 어느새 비취색 같은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두 손이 몸 앞에서 가볍게 춤을 추자 푸른 빛이 천천히 땅에서 올라오더니 점점 그녀 앞에 3척 크기의 푸른 나무 허상을 이루었다.
나무의 허상은 천천히 흔들렸다. 허상이지만 마치 무만아와 서로 융합된 것처럼 둘 사이에는 형용할 수 없는 조화로운 느낌이 들었다.
주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짙은 초목의 영기는 그녀와 나무의 허상과는 대조되어 마치 사람 모습의 잘 다듬어진 초목의 정령 같았다.
무만아가 천천히 두 눈을 감고 두 손을 흔들자 나무 허상이 빛나기 시작했다. 둘이서 교류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잠시 후, 무만아는 천천히 눈을 떴고, 비취 같은 초록색도 천천히 사라졌다. 동시에 나무 허상도 점점 사라져갔다.
모두가 바라보는 동안 무만아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무슨 일이냐?”
무규호가 먼저 물었다.
“심 오라버니가…… 신수의 영력을 흡수하고 있는 거 같아요.”
무만아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뭐라?”
운중정의 안색이 돌변했다.
“어쩐지 불안하더니 역시나 그랬어!”
운중월도 바로 소리쳤다.
눈살을 찌푸린 무규호는 망설이는 듯한 눈빛이었다.
“모두 경거망동하지 마세요. 비록…… 비록 심 오라버니가 신수의 영력을 흡수하고는 있지만, 신수는 그것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 영력을 보내주고 있어요. 심 오라버니에게서 악의를 느끼지 못한 거죠.”
무만아가 말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제 생각에는 심 도우가 기연을 만나 돌파하게 된 듯합니다.”
강신천의 추측이 일리가 있었지만, 여전히 의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게 꼭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가 이렇게 신수의 영력을 흡수했다가는 아래층의 영력에 변화가 생겨 다시 한번 마기가 폭주할지도 모릅니다. 그랬다가는 허마나 마물들이 다시 1층으로 진공해올 겁니다.”
“그럴 리가! 저번의 폭주가 얼마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것들도 적지 않은 원기를 소모했을 터인데 이렇게 빨리 공격해오겠습니까?”
운중정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운중월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답했다.
“마물의 성정을 어찌 상식대로 생각할 수 있겠는가?”
“어찌됐든 준비는 해놓는 게 좋겠소. 일이 심상치 않으면 바로 분적대진(焚寂大陣)을 펼칠 것이오. 무슨 일이 있어도 마물들이 1층을 점령하게 둬서는 안 되오. 그랬다가는 조상들의 유지를 지키지 못하고 무신단을 잃게 될 게요.”
무규호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강신천은 분적대진이 뭔지 몰랐지만, 일이 다급하게 돌아가는 듯하자 서둘러 물었다.
“그럼 심 도우는 어찌 합니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는 이미 마물에게 갈기갈기 찢긴 후일 게요.”
운중정이 차갑게 답했다.
“스승님,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심 오라버니는 반드시 마기를 제거하고 무사히 돌아올 거예요.”
“만아야, 지금은 감정적으로 처리할 때가 아니구나.”
무규호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무만아는 애원해도 소용없음을 알고는 그저 마음속으로 심협을 위해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무신단 지하 1층.
가부좌를 한 심협의 온몸은 푸르게 빛났다. 그의 몸은 유리처럼 투명했고, 주위에는 반원 모양의 푸른 광막이 한 겹 덮여 있어 모든 마기가 3척 안으로 다가오지 못했다. 또한 그의 머리 위에는 청령목인이 떠올라 있었는데, 거기에 새겨진 나무가 빛을 번득였다. 심협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신목의 영력은 남김없이 그것에 빨려 들어갔다.
잠시 후, 번쩍 뜬 두 눈에서는 빛이 번득였고,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생각지도 못한 기연으로 대승 후기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심협은 탁한 숨을 내뱉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위를 뒤덮고 있던 푸른 광막이 저절로 사라졌고, 청령목인도 그의 손으로 돌아왔다.
주위의 마기가 천천히 다가오려 했지만,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빛에 가로막혔다. 조금씩 그의 피부로 파고들긴 했지만, 대수롭지 않은 정도였다.
대승 중기에 비교하면 체내의 법력이 거의 배로 늘었기에 온몸에서 짙은 생기가 넘쳤다.
그는 서둘러 자신의 법맥과 단전을 살폈다. 그리고는 다소 실망했다. 몸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치우 마기는 여전히 그에게 달라붙어 있어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것이다.
그때, 다시 이변이 일어났다.
그의 주위에 도사리고 있던 마기들이 갑자기 수축하더니 바닥의 붉은 부분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정신을 가다듬고 바라보니 방금 전까지 끊임없이 마기를 뿜어내던 부문이 지금은 끊임없이 마기를 흡수하고 있었다. 다만 흡수한 마기는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빠르게 뭉쳐 검게 변해갔다.
검은 공이 끊임없이 수축하여 수박만 해지더니 더 수축해 주먹만 해졌다.
끊임없이 수축한 마기에 주위가 조금씩 밝아져 이제는 용안만 한, 칠흑처럼 새까만 단환이 되어 허공에 떠 있었다.
그 단환에는 나선 모양의 마문이 새겨져 있어 심협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달빛을 뿜어내며 순식간에 달려들어 홍련업화로 둘러싼 손으로 단환을 잡으려 했다.
단환을 막 움켜쥐려는 순간, 땅에 있던 붉은 부문이 갑자기 번득이더니 핏빛이 위로 솟구치면서 심협을 베었다.
심협은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몸을 뒤로 젖혀 피했다.
한데 발목에서 시큰한 통증이 느껴졌다. 반투명한 혈홍색 손이 땅에서 튀어나와 그의 발목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 손에는 강렬한 부식의 힘이 담겨 있어 그의 옷은 발목 부분이 부식됐고, 그 아래 피부에서는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심협이 순양비검을 움직이자 검광이 허공을 가로질러 땅에서 튀어나온 손을 베었다.
위험에서 벗어난 심협은 바로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발목에는 선명한 손자국이 나 있었다.
잘린 핏빛 손이 피로 변하더니 다시 붉은 부문으로 흘러들어갔다. 그러자 부문이 점점 녹아들면서 그 부근에는 기이한 핏빛 물 얼룩이 생겨났다.
심협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손을 휘둘렀다.
순양비검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날아가 그대로 물 얼룩을 찔렀다.
그러나 물 얼룩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고, 오히려 붉은 빛을 번쩍이며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사람처럼 생긴 혈홍색 그림자가 바닥에서 흐물거리며 올라오더니 마치 심협을 도발하듯 목을 풀었다.
얼굴은 이목구비가 흐릿해 눈과 코가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으나, 오른쪽 뺨부터 왼쪽 뺨까지 길게 갈라진 커다란 입은 섬뜩해 보였다.
심협은 눈살을 찌푸리고는 순양비검을 다시 쏘아 보내 핏빛 허상을 뚫었지만, 이번에도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핏빛 인영은 길게 갈라진 입을 더욱 크게 벌리며 심협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한데 그때, 순양비검이 뚫고 지나간 곳에서 갑자기 불꽃이 타올랐고, 핏빛 허상은 마치 중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얼굴이 일그러졌다.
핏빛 인영은 황급히 손을 내밀어 허공에 떠 있는, 마기가 뭉쳐진 검은색 마환을 집더니 단숨에 삼켰다.
다음 순간, 마기가 체내에서 빠르게 팽창하자 마른 몸이 점점 커지면서 그대로 홍련업화마저 삼켜버렸다.
홍련업화가 꺼지자 핏빛의 허상은 크기가 10여 장까지 커졌고, 온몸은 순식간에 검은색으로 변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의 몸은 빠르게 줄어들더니 보통 사람만 해졌다.
온몸이 새까만 대머리 남자가 발가벗은 채로 서 있었다. 눈과 코는 평범했고, 눈썹은 없었다. 입은 여전히 컸고, 두 귀는 길게 늘어져 어깨에 닿았다.
대머리 남자는 심협을 노려보더니 입을 크게 벌렸다. 그러자 뾰족한 이빨들이 드러났다. 그는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피를 내놓으라고 외쳐댔다.
“저게 무 선배가 말했던 허마인가?”
상대를 담담히 바라보던 심협이 그런 의문을 가질 무렵,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더니 대머리 마물이 갑자기 사라졌다.
곧이어 숨이 막힐 정도의 강력한 기운이 머리 위에서 느껴졌다.
“진선기!”
심협은 강력한 기운의 파동에 기겁해 사월보를 시전하여 피하려 했지만, 기습을 막기에는 늦은 상태였다.
그 순간, 심협은 청령목인을 소환하여 법력으로 막는 수밖에 없었다.
대머리 마물이 살기를 뿜어내며 어느새 붉고 검은 칼날이 된 손을 심협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죽어라!”
마물의 커다란 입에서 새빨간 혀가 튀어나와 입가를 핥았다.
대승기와 진선기는 경지 하나 차이지만, 실상은 하늘과 땅 차이와 같았다.
이를 잘 아는 심협은 이내 절망에 빠졌다.
그런데 그때,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휙!
푸른 빛이 심협과 마물의 위에서 빛나더니 빛의 기둥으로 변해 마물의 위로 떨어졌다. 그러자 뛰어올랐던 마물은 그 빛에 눌려 그대로 땅에 곤두박질쳤다.
쾅!
지면이 강하게 흔들렸고, 마물은 끊임없이 떨어지는 푸른 빛에 눌려 도저히 일어날 수도 없었다.
빛의 기둥이 떨어지는 위쪽을 바라보자 어둠에 가려졌던 천장에 거대한 부문 법진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바로 무신단 1층의 제압 법진이었다.
수련 경지가 강력한 마물이 1층으로 올라오면 법진이 저절로 발동하여 강력한 위능으로 상대를 제압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푸른 빛의 기둥에 제압당한 마물은 포효하며 발버둥 쳤지만, 진선기의 힘을 아무리 폭발시켜도 법진의 강력함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심협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순양비검으로 대머리 인영을 죽이려는 순간, 마물의 기운이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고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데, 마물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마기가 푸른 빛으로 인해 소멸되어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기운은 점점 줄어들어 진선 경지에서 대승 경지로 떨어졌고, 제압 법진에서 떨어지는 빛의 기둥도 점점 줄어들어 이내 사라졌다.
“어떻게 된 거지?”
심협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땅바닥에 엎드린 마물의 등에는 빛의 기둥에 짓눌려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는데, 지렁이 같은 검붉은 살점들이 끊임없이 꾸물거리면서 빠르게 상처를 회복해갔다.
잠시 후, 마물은 등이 완전히 회복되자 벌떡 일어나 그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저 대진은 진선기 이상의 마물만 제압하는 건가?’
만약 정말 그렇다면 자신이 기뻐해야 하는지 아니면 슬퍼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한데 그때, 허공에서 파문이 일면서 마물은 또다시 사라졌다.
허나 심협 또한 이번에는 미리 대비하고 있었다. 또한 경지가 떨어진 마물은 아까와 달리 완벽하게 사라지지 못했기에 그는 바로 마물의 움직임을 알아챘다.
심협은 돌아서지 않았고, 순양비검이 그의 손에서 벗어나 겨드랑이 아래로 쏜살같이 날아가더니 위쪽을 비스듬히 찔렀다.
마물은 아까와 같은 방법으로 한 손을 검붉은 칼날로 바꿔 심협의 뒤 위쪽에서 내려와 심협의 뒤를 노리는 중이었다.
그러나 순양비검이 자신에게 날아오자 마물은 칼의 방향을 바꿔 비검을 막아야만 했다.
채챙!
양쪽이 충돌하자 굉음이 울려 퍼졌고, 사방으로 불똥이 튀었다.
강렬하게 돌진하던 순양비검은 칼날에 막혀서 방향이 조금 틀어졌지만, 여전히 강렬한 기세로 날아가 마물의 목덜미를 스쳐 지나갔다.
마물의 팔이 변한 칼은 방향을 바꿀 수 없었으나, 그 역시 기세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심지어 마물의 다른 손이 순식간에 검은색 창으로 변하여 심협의 뒤를 찔러 들어왔다.
허나 이 잠깐의 틈이 심협에게는 자세를 바꿀 수 있는 기회였다. 그는 순식간에 몸을 돌렸고, 이미 들고 있던 현황일기곤으로 일격을 가했다.
황정경 공법을 운공하여 금색으로 빛나는 현황일기곤으로 마물의 장창을 강하게 내리쳐 공격을 막아내자 상대는 그대로 튕겨 날아가 버렸다.
물론 강한 충격을 받은 심협도 두 팔이 저렸다.
다행히 잠시 떨리던 현황일기곤은 떨림이 멈추자 다시 절반의 힘을 회복했다.